세월호 참사 원인의 역사는 41년 전 한강유람선에서
해운업 경험 없는 세모가 한강유람선 운영사로 선정
한강유람선 실적 쌓고 국내 최대 여객선 세월호 운행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2년 되는 2026년 4월 16일.
올해도 희생된 넋을 기리기 위해 진도와 목포, 서울과 경기 안산 등에서 추모 행사가 진행되었다. 성공회 옆 서울시의회의원회관 앞에서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그리스도인 기도회가 열렸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원합니다. 서울시의회는 세월호 기억공간 존치를 약속하라-
2014년 4월 16일 아침,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조도면 해상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총 304명 (사망 및 실종,172명 구조)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였다.
사고 원인은 과적, 화물 고박 불량, 무리한 증축으로 인한 복원성 저하, 선원들의 부적절한 조타와 미흡한 대응 방식으로 결론지었다.
사고 직후, 해경과 선원 측은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구조도 더디게 진행됐다. 위기에 대응하는 훈련이 전혀 되지 않은 결과이다. 충격은 배와 함께 생명을 다해야 할 세월호 선장(이준석,1945년생)이 승객들에게는 대피 지시도 없이 먼저 탈출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구조팀조차 배 안으로 진입하지 않고 선체 외부에만 머물렀다.
그리고 세월호는 꽃다운 단원고 학생들을 태우고 꽃보다 향기 나는 꿈을 꾸면서 바다 세계로 스며들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4·16 세월호 참사 12주기 기억식에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참석했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기본과 원칙을 반드시 바로 세우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렇다 세월호참사는 누구라고 지목할 필요도 없이 국가의 잘못이 명백하다.
12년 전, 그 때 그 상황이 아니라 41년 전인 1985년으로 필름을 돌려보자.
세월호의 선주 유병언은 한강종합개발사업에서 뿌리 내려
1982년 시작한 한강종합개발사업이 마무리 된 1985년 죽은 한강에서 살아있는 한강으로 탈바꿈되었다. 유람선이 다닐 수 있는 뱃길과 강변에는 유람선을 이용하는 승객이 타고 내릴 수 있는 11개소의 선착장 시설이 마련된다.
20-50톤급의 유람선과 500-1천톤의 바지선을 띄워 승객 운송과 화물운반으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바로 그 유람선 주인공이 세모 사장이며 세월호의 사주인 유병언이다.
서울시는 한강에 유람선을 띄운다는 사업계획 아래 한강유람선 운항 업체 선정을 하게 된다.
서울시는 85년 3월 언론에 사업공고를 내고 4월에는 10일 동안 참여기업들을 받았다.
입찰에 참여한 기업으로는 선박제조 및 수리사업 전문회사로 10여년 이상의 정통을 지닌 코리아 타코마(1972-1991, 총자산규모 831억1천만원,부도), 선박제조전문회사인 대선조선(1945년 설립,자산규모 202억원), 라이프주택(1975-1997년 파산, 3450억원), 글로리 레저(73억원), 전진실업(6400만원), 선문그룹(신설기업), 세모(25억 9천만원), 원광(35억 5천만원)등이 참여한다.
서울시는 1개사만을 선정한다는 사업방향을 발표한다.
심의에 붙여진 결과 원광이 1위, 세모는 2위로 심사 결과가 나오자 서울시는 서둘러 당초 1개사에서 2개사로 사업방향을 전환한다, 사업자 선정 원칙도 총자산규모가 1백억원 이상이거나 10억원 이하의 기업은 제외한다는 기상천외한 애매모호한 심사기준을 만든다. 애초에는 없던 심사규정의 변화는 결국 25억원의 자산을 지닌 세모를 위한 보호막이었다.
그 당시 한강을 책임지는 부서는 상하수국으로 이후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을 지낸바 있는 이기창씨가 실무책임을 맡았고 장인식 치수과장이 실무를 담당했었다.
이후 1991년 대전지검은 오대양 수사사건을 발표하면서 한강유람선에 대하여 ‘세모의 한강유람선 운항허가 취득은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의 특별지시에 의한 특혜선정이었다’고 발표한다.
검찰은 염보현씨에 대한 수사도 병행 했으나 수사 당시 염 시장이 미국에 채류하고 있어 직접 조사를 못하고 결국 지시배경이나 위법행위는 밝혀내지 못하고 만다.
한강유람선 사업전략을 세우고 정부에 계획서를 제출한 당초 기획자는 <코리아 타코사>였지만 결과는 세모(세월호의 전신)로 사업권이 확정되는 이상한 사업발주 과정이다. 그 뒷 배경에는 지금도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전경환 그리고 염보현과 유병언으로 이어져 오는 미심쩍은 관계가 아직도 의문점으로 남고 있지만 언론은 심도있게 다루지 않았다.
한강에 호랑이를 띄웠던 세월호의 전신 세모유람선
대상 사업자가 선정된 후 유람선 모형과 조형미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세모는 유람선 위에 한국의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 모형을 얹히자고 제시한다. 서울시는 한국의 대표적 동물에 대해 좋은 점수로 평가하여 세모유람선의 조형을 공표한다.
당시 공보관실에서 실무를 맡았던 김모씨는 이에 대해 <한강유람선에 호랑이 모형은 서울시 공무원과 언론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당시 유병언사장은 호랑이 상징물에 대해 적극적인 해설을 했다. 작은 키에 유창한 언변과 상대방을 직시하는 눈빛이며 상대를 포용하는 모습은 역시 조그만 왕국의 왕자와도 같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나 서울시 발표가 있은 후 언론과 시민들에게서 비판이 쏟아졌다.
한강에 백조나 기러기, 황새등이라면 몰라도 산에서 사는 호랑이가 어떻게 조형미를 갖출 수 있냐는 비아냥조의 비판이 거세졌다.
서울시 출입기자들에게서도 좋은 호평을 받았던 호랑이 모형은 언론으로부터 정반대의 호된 질책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서울을 중심으로 한 괴편지들과 민원이 쏟아졌다.
추정하건데 유병언씨와 관련된 기업과 종교단체등에서 의도적으로 보낸 문서라는 것이 일반론이었다. 괴편지들의 핵심은 호랑이 모형이 왜 나쁘냐는 질타성 반론들이었다. 상하수국 이기창 국장은 염시장에게 호된 질타를 받기도 했다.
서울시장을 지낸 모씨는 지인과의 회고담에서 <서울시 기술자들은 자존심이 없다. 공사비가 1백억원이 든다고 주장하고서 값을 깎으라고 지시하면 결과적으로 반값도 안되게 시공할수 있단 말이야. 도깨비방망이 같아. 얼마나 재미있어. 안되는 것은 죽어도 안되야지 말야>라고 회상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세월호의 아픔이 온 국토를 토약질 시키는 과정에서 그 전신인 세모가 한강을 유람하게 한 근본 원인이 누구의 지시로 이뤄졌는지는 명확치 않다. 결과적으로 심사기준이나 심사방식의 전환등을 통해 기업의 자산규모도 영세하고 해운업에 경험도 없는 세모를 한강물을 가르는 해운업 선주로 국가가 키웠다. 결국 인천에서 제주를 항해하는 대규모 여객선 세월호를 운항하는 대선주로 육성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는 세월호와 함께 역사속에서 슬픈 기억으로 남게 했다.
* 유병언(1941년생)은 검찰의 수사망을 피해 도주하다 전남 순천시 서면 학구삼거리 매실밭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세월호의 실 소유주이자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의 지도자이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5살때 가족들과 대구에 정착했다. 성광고등학교를 졸업 후 1962년 이후 장인이 되는 고 권신찬 목사를 만나 구원파를 만들었다.
1976년 완구 제조 및 수출 기업인 삼우무역(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하며 기업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건강식품과 선박제조 등의 계열사를 가진 세모그룹으로 성장시켰다. 특히 1986년에는 한강 유람선 사업권을 취득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다. 오대양 사건은 170억원의 사채를 빌려쓰고 사라졌던 오대양 대표와 그 가족 등 32명이 경기 용인시에서 집단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유 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나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신도들로부터 돈을 빌린뒤 갚지 않은 혐의로 1992년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세모그룹은 경영이 악화돼 1997년 결국 부도처리 됐다.
이후 해운 사업은 1999년 3월 그의 장남 대균씨와 차남 혁기씨에 의해 청해진해운으로 승계됐다. 자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아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유 전 회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 검찰 조사를 통해 과적 등 사고원인을 초래한 세월호를 운영한 청해진해운의 실질적 수장으로 지목받았다. 조직도에서 ‘회장’의 직함을 갖고 있었으며 매달 1000만원의 급여와 자문료를 받았다.
수사기관의 추적에 두달간 쫓기다가 결국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은 객사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유병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다.
*세월호 선체는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선거에서 건조한 카 페리선으로 건조 후 일본 마루에이 페리 사에서 약 17년간 'Ferry Naminoue' 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오키나와 나하간 운항하였다. 2011년 3월 15일에 청해진해운과 MOA를 맺고, 신조선이 취항할 수 있는 2012년 10월경 인도하기로 하고 10월 1일에 나하발 운항을 마지막으로 청해진해운으로 인도되었다. 중고 선박 시장 매물로 올라온 이 선박을 청해진해운이 2012년 10월에 도입하여 개조작업을 거친 후 세월호(歲月號)라는 이름으로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하였다. 운행 당시에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여객선이었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1945년생)은 20대에 선원 생활을 시작해 33세이던 1977년 외항선 선원이 됐다. 처음으로 탔던 원목선이 오키나와 부근에서 전복되어 일본 항공자위대 헬기에 구조되었다. 17년간 외항선을 탄 후 연안 여객선 선장으로 20년을 일했다. 2011년 4월 6일 오하마나 호에서 1등 항해사로 근무하던 당시에도 기관실 고장으로 배가 표류하자 세월호 사건 같이 이준석 선장은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세월호 참사의 법적 책임을 전적으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게 물을 수 있냐에 대해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박주민 변호사(현 국회의원, 서울시장 후보 경선 탈락)는 “검찰이 영장에서 유병언에게 묻는 혐의는 횡령과 배임이다. 유병언을 잡는다 해도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이 밝혀지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환경경영신문 https://ionestop.kr/ 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장, 환경경영학박사, 시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