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일본에 사신으로 와서
정몽주(鄭夢周 : 1337~1392)
섬나라에 봄빛이 이는데
하늘 끝 나그네 고향에 가지 못하였네
풀은 천 리에 이어 푸르고
저 달은 고향에서도 밝겠지
우ㅠ세 다니느라 돈은 다 써 버렸고
고향 생각에 백발만 늘었네
사내가 세상에 뜻을 펼치려는 것은
다만 공명만 위한 것 아니라네
洪武丁巳奉使日本作(홍무정사봉사일본작)
水國春光動(수국춘광동) 天涯客未行(천애객미행)
草連千里綠(초연천리록) 月共兩鄕明(월공양향명)
遊說黃金盡(유세황금진) 思歸白髮生(사귀백발생)
男兒四方志(남아사방지) 不獨爲功名(부독위공명)
[어휘풀이]
-水國(수국) : 섬나라 일본
-遊說(유세) : 사람들을 만나 자기 뜻을 말하고 다니다.
[역사 이야기]
정몽주(鄭夢周 : 1337~1392)는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이며 학자로 호는 포은(圃隱)이다. 성리학 대가로 시문돠 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圃隱集(포은집)』이 있다.
포은은 1376년(창왕 1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일본 규슈 지방의 사신으로 갔다. 포은은 1377년 9월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7월에 돌아왔는데 이 시는 그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 왜구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가 시해 조정에서는 일본에 화친을 청했다. 사신 가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포은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일본에 건너가 임무를 수행하고 왜구에 끌려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따.
1389년(창왕 1년)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이성계의 욕망이 날로 커지고 주위에서는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에 드러눕자 그때 제거하려 했으나 찾아갔다 귀가하던 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게게 격살(擊殺)을 당했다. (정몽주가 격살당한 장소가 선죽교가 아닌 태전동 그의 집 근처라는 주장도 있다.)
포은은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 진흥을 도모했다. 또한 성리학에도 밝아 주자가례에 따라 사회 윤리의 기반을 확립하려 하였다. 1376년 새로 제정된 대명률(大明律) 등을 검토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해 고려의 법률 체계를 재정비하고 나아가 외교와 군사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에 의해 최후를 맞고 말았다.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회자 되고 있다. 이 시조는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문병을 갔을 때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하여가(何如歌)를 읊자 그에 답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조의 내용이 『포은집』에 다음과 같이 한역되어 전한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歟之”
한편 역사학자 신채호(신채호(申采浩, ))는 『조선상고사』에서 『해상잡록』을 인용하여 이 시조의 작가는 정몽주가 아니라 백제 여인 한주(韓珠)라는 주장을 했다.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로 있을 때, 백제에 잠입하여 지금의 경기도고양시에 해당하는 개백현에서 정세를 살피다가 한주라는 미녀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안장왕이 임무를 마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고구려로 돌아간 뒤, 개벽현의 태수가 한주의 미모를 탐하여 취하려 하였으나 한주는 위의 시조를 읊어 안장왕에 대한 절개를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 이야기를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으며, 고양시 성석동과 일산동 일대에 구전되었다고 한다.
출처 : 한기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