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2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마르코 1,40-45
감사의 은총을 잃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오늘 복음에서 한 나병환자가 주님의 은혜로 깨끗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예수님께 이득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받은 은총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덕분에 예수님은 박해받는 신세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만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예수님은 외딴곳에 머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유된 나병환자는 다시 예수님을 만나러 올 수 있을까요?
죄송해서 예수님을 다시 만날 용기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결국엔 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을 고쳐주신 주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감사는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국엔 예수님께 피해를 줬습니다.
이렇게 되면 감사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중요한 것은 너무나 잘 압니다. 감사한 만큼 보답하고 싶고 그러면 내가 그분이 원하는 대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감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매 미사 때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하지만 감사가 잘 나오지 않고 여전히 청하기만 합니다.
문제는 오늘 나병환자처럼 감사가 지속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행동에 있습니다.
한맥 투자 증권은 1991년 진로그룹 계열사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 12월 12일, 한 직원이 작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옵션가격의 변수인 이자율을 ‘잔여일/365’로 입력해야 했는데 ‘잔여일/0’이라고 잘못 기입한 것입니다.
이에 모든 상황에 이익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프로그램이 막대한 양의 거래를 체결해버렸습니다.
물론 직원은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알아차리고 전원코드를 뽑았습니다.
하지만 143초 동안 3만 7천 900여 건의 거래가 이뤄졌고 이로 인한 손실이 462억 원이었습니다.
다음날 정규직 45명, 계약직원 100명 등 임직원 총 157명 중 120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한 한맥 투자 증권은 파산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회사에 감사하고 봉사하고 싶어도 회사에서 금지된 일을 하게 된다면 그 감사와 봉사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감사하려 해도 잘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의 시작은 교만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서 불순종이 시작되고 그것이 죄입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던 은혜를 일순간에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따라서 내가 교만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자주 살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교만한 사람은 감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치유된 나병환자는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주님께 도움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감사만으로는 교만이 발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감사헌금을 하면서 더 감사한 일이 많이 생기게 해 달라는 청을 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내 생각이 옳다며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느님께서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왕의 권위를 벗어나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까지 벌인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내치십니다.
교만은 항상 내가 더 옳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감사하면서도 불순종하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파멸로 이끕니다.
불순종하는 대상에게 감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더 높고 더 많이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겸손해지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작은 계명부터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선악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십일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나오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왜 우리는 안 해도 된다고 믿을까요?
또 안식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전쟁 때도 총을 들지 않아 몰살당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겸손해지는 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겸손해지려 하고 감사하려 한다고 될까요? 안 됩니다.
먼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없으면 겸손이 없고 그러면 은총이 끊겨 멸망만 남습니다.
솔로몬이 지었다는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파멸에 앞서 마음의 오만이 있고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다.”(잠언 18,12)
불순종은 은총이 끊기는 가장 완전한 길입니다. 먼저 십일조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에 순종합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거나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야 한다는 계명도 지키려고 합시다.
먼저 이런 것들을 지켜야 은총에 감사가 지속될 수 있고 그 감사가 나를 하느님처럼 변화하게 합니다.
불순종은 이미 교만을 선택한 것이기에 겸손에서 나오는 감사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을 넣지 않고 쌀만으로는 밥을 지일 수 없는 것처럼, 순종 없는 감사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일조 계명에 먼저 순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감사의 지속 조건은 순종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2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마르코 1,40-45
존귀하신 하느님의 손이 흉측한 인간의 피부에 직접 와닿았습니다!
한 가련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습니다.
나병 환자는 얼마나 절박했던지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당시 주변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차하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 고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관습 안에는 유유상종의 문화가 철저히 준수되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유다인들끼리,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인들끼리. 율법학자들은 율법학자들끼리, 세리들은 세리끼리, 나병 환자들은 나병 환자들끼리.
나병 환자들은 가장 하층민 격에 속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결과 나병에 걸린 대죄인 취급 받았습니다.
불경스럽고 부정탄 인간, 상종하거나 접촉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병에 걸리면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병 판명을 받으면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만, 살고 있던 주거지를 떠나 성 밖으로 나가 살아야만 했습니다.
움막을 짓고 들짐승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생사가 궁금했던 가족은 멀찌감치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던져놓고, 목이 터지도록 나병 환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운이 좋으면 겨우 챙겨갈 수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나병환자들은 즉시 목청을 높여 ‘여기 부정 탄 사람 있으니 조심하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준수하려 하셨다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나병 환자를 향해, ‘당장 내 앞에서 물러가라!’라고 외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나병 환자의 가련한 모습에 예수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프셨습니다.
자동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예수님 손이 자동으로 그의 썩어 문드러진 환부에 가 닿았습니다.
이윽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코 복음 1장 41절)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대사건인지요?
하느님께서 한 가련한 인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몸을 굽혀 그의 고통과 상처를 바라보십니다.
존귀하신 하느님의 손이 흉측한 인간의 피부에 직접 와닿았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오늘 이 아침 우리에게도 똑같이 행동하실 것입니다.
죄로 욕망으로 잔뜩 더러워진 우리네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특유의 선하고 그윽한 눈길로 우리의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손을 뻗어 꼬이고 꼬인 실타래 같은 우리네 인생길을 당신 자비의 손길로 펴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2023. 01. 12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마르코 1,40-45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내가 하고자 하니>
내가 하고자 하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티 없는 깨끗함이어라
내가 하고자 하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오롯한 곧음이어라
내가 하고자 하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한없는 낮음이어라
내가 하고자 하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아낌없는 나눔이어라
내가 하고자 하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따뜻한 품음이어라
내가 하고자 하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한결같은 사랑이어라
내가 하고자 하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늘 또 다른 나이어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