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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천리교(天理敎)
4.3. 미키 사후 천리교단의 변화
1880년대 후반부터 천리교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주목받는 신종교로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폐해도 적지 않아서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런 야유가 돌았다.
집터를 제거하고 논을 팔아주소서, 하늘의 가난뱅이님이시여.
(屋敷を払うて田売り賜え天貧乏命)
이 말은 천리교 신악가 제1절인 "악한 것을 제거하고 도와주소서, 천리왕님이시여."(悪しきを払うて助けたまえ天理王命) 하는 구절을 바꾼 것이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얼른 느껴지지 않지만, 일본어로 읽으면 신악가 1절이 "아시키오 하로오테 타스케 타마에, 텐리오노미코토."인데, 비아냥거리며 패러디한 문구는 "야시키오 하로오테 타우리 타마에, 텐빈보노미코토."라서 매우 흡사하다. 비아냥거린 문구의 첫 음절이 '아'가 아니라 '야'인 것에 주의.
신악가 제1절은 천리교도들이 근행이나 월차제를 할 적에 자주 외우는 구절이다. 이를 슬쩍 바꾸어 '집을 팔아치우고 전답을 팔아치워, 돈은 천리교에 바치고 집안은 쪽박을 찬다.'는 뜻으로 던진 야유인데, 100년이 넘은 지금도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이 천리교를 비꼬고자 자주 인용한다.
신악가 1절이 1916년, 교조 30년제 때 섭정(?)으로 있던 야마자와 타메조가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비아냥거리는 문구도 그 이후에 생겼을 것이다.
1888년, 교조 1년제를 거행하였으나 경찰이 찾아와서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고, 나카야마 집안 식구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모두 내쫓았다. 같은 해에 천리교는 신도본국(神道本局)에 등록되었다. 신도본국은 신토 관계자들이 모여 만든 기관인데, 반쯤은 정부 산하나 마찬가지였다. 천리교는 신도본국에 소속됨으로써 국가의 통제를 받는 신토 계열 종교단체로 법적 지위를 얻었다. 그 대신 본부를 도쿄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다시 텐리시로 되돌아왔다.
1889년, 메이지 헌법이 발표되었다.
1891년, 교조 5년제를 거행하였다. 이때는 경찰이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질서통제에 협조했다고 한다.
1892년, 토요다산(豊田山) 묘지로 미키의 무덤을 이장하였다.
1892년 말 - 93년 초, 부산에 처음으로 천리교 전도사가 들어가 조선에서 첫 포교를 시작하였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 95년에 끝났다.
1896년, 교조 10년제를 거행하였다. 이후로 천리교단은 서력으로 XXX6년이 되는 해마다 교조 XX년제를 거행한다.
이해 4월 6일, 내무대신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顕正)의 이름으로 내무부 비밀훈령이 경찰에 내려왔다. 그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요즘 천리교 신자들이 남녀혼음 등 풍속이 흐트러지고, 신령한 물과 부적을 주고 미신을 퍼트리며 의학을 무시하고 함부로 기부하는 등 폐해가 확산된다. 경찰은 한층 더 엄격히 시찰하여 비행을 적발하는 즉시 처분하고, 기부금에 대해서는 보고하라.
하지만 천리교에서는 이런 훈령이 내려온 진짜 이유가 청일전쟁 당시 전시협력에 시큰둥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인 친정부 정책을 취하기로 하였다. 아침/저녁 근행에서 신악가의 가사를 바꾸고, 감로대 근행을 규제하며, 신토식으로 신단에 신경(神鏡 신령한 거울)을 안치하며 신앙대상의 호칭을 천리대신(天理大神)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향후 또다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이에 적극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해 12월, 천리교 신자 수가 313만 7천 명으로 집계되었다.
1897년, 미키에게 복통을 치유받았던 이다 이와지로(飯田岩治郎 1858-1907)가 물 집터 사건(水屋敷事件)을 일으켰다.
이다 이와지로는 미키에게 병을 치유받고 물 수훈을 받은 이후 신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 처음 복통을 치유받은 이후로도 몇 번 몸이 더 아팠는데 그때마다 미키를 찾아와 다시 치유받았다고 한다. 미키가 사망한 다음날 찍은 사진에도 이다가 있고, 교회회의를 이다 집에서 하는 등 중요한 인물이었다. 1892년에 헤이안(平安) 지교회 초대회장으로 부임했다. 미키에게 받은 물 수훈은 천리교인들에게 유명해서, 다른 계통 신자들도 근처까지 오면 이다에게 들러 물을 받아가곤 했다. 1894년에 처음으로 신들림을 겪었으며, 96년에는 꿈에 미키가 나타났다고 하며 친필(오후데사키)를 썼다. 97년부터 이다는 자신이 받은 '물 수훈'이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집에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다 이와지로의 말에 따르면 미키의 쇼야시키촌은 불 집터이고 자기가 있는 곳은 물 집터라고 하였다. 이다가 쓰는 친필 역시 혼세키 이부리 이조의 '지도말씀'과 서로 충돌하였다. 고참 신자들 중에서도 이다를 편드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 천리교는 내분을 겪었다. 이다는 미키가 자기 목숨을 50세까지 늘려주었다고 하면서 50세가 되는 1907년에 죽음을 준비하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1899년부터 천리교는 국가가 관리하는 신도본국의 산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교파신토로 자립하자고 계획하였다. 국가의 호의를 받기 위해서 더욱 친정부적인 방침으로 기울었다.
1901년에 오모토의 교조 데구치 나오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천리교 멍청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정말로 나오가 천리교도였다는 뜻이 아니라, ‘천리교처럼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남다르게 행동하고 규율을 무시하는 자’라는 의미였다. 천리교도라는 말이 욕처럼 쓰였으므로, 이때까지도 일본 대중들이 천리교를 나쁘게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1902년, 영일동맹이 채결, 1923년에 효력을 상실하였다.
1903년에 메이지 교전(敎典)을 발간하였다. 천리교의 초기경전인데, 메이지 시절에 발간했다고 메이지 교전이라고 부른다. 교전은 천리교의 교리해설서에 가까운데, 여기서 천황가의 조상을 신으로 묘사함으로써 국가신토에 영합했다. 교단은 총력을 기울여 신도본국으로부터 독립하자고 방침을 세웠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천리교 본부에서는 "천리교는 천황과 천황의 선조들을 신이라고 믿는데, 교조님(미키)이 신이라고 가르치는 불량교사들이 있다." 하면서 천리교인 약 1400명을 파면했다. 미키와 오랜 인연이 있고, 또 미키에게 칭찬받은 적도 있는 유명한 사람인 이즈미다 토키치(泉田藤吉), 만다 만키치(萬田萬吉)도 포함되었다. 천리교는 신자들에게 '빚을 내어서라도 전시국채를 구입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국채 250만 엔어치를 구입하였고, 초대 신바시라 신노스케는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 훈6등 훈장을 받았다.
1906년, 천리교는 교조 20년제를 지냈다. 이때 읽은 제문(축문)에서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시며 교조님은 천황님의 자손입니다. 의사나 승려 등이 공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찰이 교조님을 체포하였지만, 교조님은 필사적으로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십니다." 하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천리교가 자기네 교리의 독자성을 고수하기를 포기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완전히 국가신토에 영합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이부리 이조가 사망했다. 혼세키 직은 우에다 나라이토가 계승하였지만, 나라이토는 이부리 이조와 같은 권위를 얻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묻혔다. 천리교단은 이부리 이조 이후로 혼세키는 없다고 주장한다. 교단의 영적인 부분을 담당한 혼세키가 사라지자 교단에 반발하여 갈라진 분파가 더욱 늘어났다. 이 무렵부터 천리교인들 사이에는 신탁이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퍼졌다. 천리교 내부에서 말하던 신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점차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1908년 일본 정부는 천리교를 합법적이고 독립적인 교파신도로 인정해주었으나, 그 대신 천리교의 교리와 의례ㆍ행정에 깊이 관여했다. (혹은 천리교 쪽에서 정부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기었다.) 포교사들이 나대지 못하게 억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통제하였다. 일본 내부에서 천리교가 통제받자 포교사들은 자기 열정만 믿고 무작정 조선으로 포교하겠다고 나가기도 하였다.
합법적인 교파신도로 인정받은 뒤에도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인식이 아주 좋지 않아, '천리교 같은 미신적 종교는 교파신토로 인정해주면 안 된다.'는 청원이 빗발쳤다.
나카야마 미키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75년이 지나면 일본 전체가 천리교에 귀의할 것이며, 그 뒤로는 세계로 퍼져나가 천리왕을 전도할 것이다."
(七十五年たてば、日本あらあらすます。それから先は、世界隅から隅まで天理王命の神名を流す)
나카야마 미키가 1838년에 입교하였으므로 여기서부터 75년 뒤라고 하면 1913년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겠지만 1912년일 가능성이 높다. 미키가 자기가 말처럼 115세를 살았다면 1912년에 사망했을 터이므로, '입교로부터 75년 뒤'라는 말은 자기가 신내림받은 해를 1년으로 삼아 75년이 되는 1912년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 천리교 포교사들은 이 말을 믿고 전도에 박차를 가했다.
현재의 천리교단은 미키가 사망한 1887년을 1년으로 삼아 75년이 되는 1961년, 2대 신바시라 나카야마 쇼젠이 해외선교를 부르짖음으로써 미키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천리교는 현재까지도 일본 안에서도 소수종교이며,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나카야마 미키는 ‘으뜸인 리’에서도 이자나미가 자식들을 75일에 걸쳐 자식들을 낳는다고 설명하는 등, 75란 숫자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일본 풍속에서 임산부가 아이를 낳으면 70일, 또는 75일간 부정하다고 간주했다고 한다. 미키가 75라는 숫자를 중시하고, 자기가 115세까지 산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1910년, 한일병탄이 이루어졌다. 천리교단이 의례를 양력으로 거행하기로 하였다.
1912년, 다이쇼 천황이 즉위하였다. 미키가 정말로 115세를 살았다면 이해에 사망했을 것이다.
1913년, 오니시 아이지로(大西愛治郎 1881-1958)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신이 내려 자신이 (미키가 말했던) 감로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오니시는 본디 나라사범학교(奈良師範学校)에서 공부 중이었으나, 1899년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이를 치유받고자 천리교에 입교하고, 후에 사범학교를 중퇴하여 열성적으로 천리교 포교활동을 하던 중 이런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천리교 본부가 오니시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천리교 교사직을 박탈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소학교 교사, 세무서 직원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요시다 신토와 천리교를 비교하는 등 종교적인 탐구를 계속하였다. 오니시는 이후 아래에서 설명할 혼미치 불경사건의 중심인물이 된다.
1916년, 교조 30년제가 있었지만 신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천리교인들이 많이 실망했으며, '더 이상의 신탁은 없다'는 생각이 더욱 힘을 얻었다.
1921년, 제1차 오모토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오모토 교단이 힘을 기울여 교토부 아야베시에 짓던 장생전(長生殿)을 파괴하였다.
1925년, 오니시 아이지로는 천리연구회(天理研究会)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천리교 신자들 중에서 오니시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해 연말에 모두 추방되었다. 쫓겨난 신자들 중 상당수는 천리연구회에 가입하였다. 천리연구회는 나중에 천리본도(天理本道 텐리혼미치)라는 이름을 쓰다가, 1950년부터 혼미치(ほんみち)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서는 혼미치로 통일하여 쓴다.
1926년, 쇼와 천황이 즉위하였다.
1928년, 혼미치에서는 '연구자료'라고 칭하며 오니시의 종교적 주장을 담은 책자를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이 책자에서 오니시는 당시 일본의 천황제적 국체를 전면에서 부정하였다. 천명이 받지 못한 인간이 (일본서기의) 신대기라는 허황된 문서를 근거로 허황되이 옥좌에 앉아 천황이라 칭하는데, 이 때문에 신이 노여워하시며, 또한 천황의 권위로 나카야마 미키가 (공권력에게) 탄압받았기 때문에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인간 감로대인 오니시 자신이 일본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오니시와 혼미치 신자 5백 명은 그 해에 불경죄로 기소되어 재판장에 섰으나 법관들은 의외의 문제와 맞닥트렸다. 오니시과 그 동료들은 재판석에서 시종일관 천황의 신성성과 현인신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맹렬히 거부했는데, 오니시가 살아있는 감로대라는 주장을 법정에서 허황되다고 단정하면 "천황이 현인신이라고 함은 허황되지 않은가?" 하는 역공을 받을 수 있었다. 국체가 일개 사이비 교주의 신성성과 같은 선에서 다툴지도 모르는 상황이이었다.
그런데 오니시가 천황제를 부정했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범법행위를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법정은 무죄, 집행유예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1차 천리연구회 사건, 혹은 1차 혼미치 불경사건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제국주의 시절의 처신에 대하여 혼미치의 이러한 소극적 저항은 천리교의 처세에 대비된다.
1935년, 2차 오모토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2차 오모토 사건이 매우 강경하였다. 일본 경찰은 오모토 교단이 총기를 감춰두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거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수준으로 본부를 수색하고, 데구치 오니사부로 등 교단의 교위 인사들을 연행하였다. 공권력은 법률을 반쯤 무시하고 오모토 교단을 탄압하여, 한때 교인수가 자칭 백만에 달했던 오모토가 거의 붕괴할 지경에 처했으며 연행된 간부들 중 사망자가 발생하고, 고문 때문에 데구치 나오히(오모토 3대 교주)의 남편 히데마루는 정신병에 걸렸다.
오모토의 개조 데구치 나오는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고생한 할머니였다. 그래서 나오가 신들림하여 쓴 경전 오모토신유(大本神喩)에는 곳곳에서 이 세상(일본)을 짐승의 나라, 어둠의 세계라고 비난하며 한바탕 뒤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난다. 일본 정부는 오모토신유의 이런 점을 두고 ‘천황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일본은 비난하다니, 천황 폐하를 비난하는 것’이라면서 교단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당시의 일본 신종교 여러 교단은 오모토가 어떻게 쳐맞는지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매우 '얌전히' 일본 정부ㆍ군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순응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천리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키가 쓴 친필과 신악가에도 일본 정부에게 책이 잡힐 만한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었다.
온시대 모든세계 인간들을 살펴보아도
신의뜻 아는자는 바이없도다
천리교 한국교단이 사용하는 신악가 번역문에서 인용함.
오모토가 핍박받았듯이 천리교도 이 구절 때문에 핍박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교단은 이 부분을 부랴부랴 감추고, 근행이나 월차제 때에도 전혀 낭송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천리교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잘 순응했지만, 오모토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서는 더욱 말을 잘 들었다. 러일전쟁, 태평양 전쟁에도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위해 헌신하라고 신자들을 독려했다. 현대의 천리교는 이 시기를 두고 흔히 응법(応法)의 길이라고 표현한다.
1938년, 혼미치는 또다시 <<우국지사에게 고함>>이라는 문서를 배포하였는데, 여기서도 대놓고 천황제를 거부하였다. 그 결과 오니시를 포함한 270여 명이 체포되었고, 1942년에 오사카 지방법원은 오니시에게 무기징역을 내렸다. 오니시는 결과에 불복하고 즉각 항소하였다. 1945년에 일본이 패전하자 오니시를 처벌할 형법적 근거인 치안유지법과 불경죄가 폐지되었다. 따라서 오니시와 일행들은 석방되었다. 이것을 2차 혼미치 불경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혼미치는 천리교 본부로부터 갈라진 천리계 종교 중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단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천리교는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일본이 패전한 1945년, 2대 신바시라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이 주도하여'국가의 통제를 받던 시기에 변형된 의례ㆍ교리 등을 미키 시절로 되돌리는 작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를 복원이라고 부른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먼저 메이지 교전을 폐지하였다. 쇼젠은 메이지 교전을 ‘외부인의 눈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제는 ‘겉과 속의 차이가 없는 교전을 만들 것’이라고 하였다. 새 교전은 1949년에 발간되었다.
야시마 히데오가 쓴 혼아즈마 등에서는 쇼젠이 "지금은 GHQ가 일본을 통치하므로 일신교와 비슷해야 교전이 허락받을 수 있다. 그 대신 10년이 지나면 교전을 바꾼다." 하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교전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리교 본부는 쇼젠이 "겉과 속의 차이가 없는 교전을 만든다." 했다고 하므로, 야시마의 주장과 충돌한다.
하지만 천리교 내부에서도 아직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황도신토에 물들어 천리교 본연의 가르침이 왜곡되었다면서 많은 단체들이 독립해 나오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복원의 일환으로 천리교단은 석제 감로대가 있던 자리에 목제 감로대를 만들어 설치하였다. 패전 이전까지는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나무 감로대도 제대로 세울 수 없었다.
1956년, 천리교단은 고본 천리교 교조전(稿本 天理敎敎祖傳)을 출간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완성본이 아니지만, 출간한 지 60년이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완성판이 나오질 않는다. 이 또한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이 비웃는 부분.
복원과 관련하여, 야시마 히데오(八島英雄 1929-2014)라는 사람이 천리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야시마 히데오는 1959년에 텐리대학을 졸업하고 1967-68년에는 수양과에서 고존 교조전을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였다. 또한 2대 신바시라 쇼젠이 복원을 주도할 당시 이를 도왔다. 1969년, 일본 천리교에서 발행하는 천리시보(天理時報)에서 차별기사가 실려 큰 문제가 생겼다. 천리시보에서는 당시에 '천리건강장수법'이라는 글을 연재하였다. 당시 천리교 교전에는 "날 때부터 온전한 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전생에 마음에 티끌이 끼어 이를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어떻게 서술했는지는 몰라도 부락민들은 이 기사가 자신들을 차별하는 내용이라고 판단, 천리교단에 극렬하게 항의했다. 부락민으로 태어남은 전생에 마음 티끌을 제대로 없애지 못한 탓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락민보다도 선천적인 장애인들이 제일 먼저 화내야 하지 않나? 사건이 커지자 천리교단은 문제 기사가 실린 천리시보를 회수하고, 표통령이 교제되고, 부락민들에게 사절단을 보내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야시마는 차별기사 문제로 시끄러운 가운데 표통령으로부터 교조의 평등사상을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의 교리공부>(私の教理勉強)라는 글을 연재했다. 이 글은 반응이 좋았지만, 당시 천리교 교회본부의 교리해석을 곳곳에서 비판하였기에 갈등이 생겼다. 그 뒤에도 야시마가 쓴 책 문제로 "우익이 무섭지 않아?" 하는 협박을 받기도 하였다.
야시마는 1974년 도쿄에 있는 천리교 혼쓰마하라 분교회(天理教本嬬原分教会)의 회장으로 취임하고, 79년에 이치노모토 분서 사적보존회(櫟本分署跡保存会)를 발족하여 대표가 되었다. 야시마는 교리해석ㆍ의례복원ㆍ역사고증의 문제로 천리교 본부와 지속적으로 충돌하였다. 1985년에 대한천리교가 감로대를 예배대상으로 삼기로 하고 천리교 본부에 통보하자, 천리교단은 그 책임을 야시마에게 물어 1986년에 혼쓰마하라 분교회장 직위를 박탈하였다. 이 일로 야시마는 천리교 본부와 독립하여 법정 공방을 벌였다. 야시마의 주장을 뭉뚱그려 야시마 교학(八島敎學)이라고 부른다.
야시마의 아버지는 한때 도쿄부 스미다구(墨田区)에 있는 혼아즈마(本吾嬬) 분교회의 교회장이었다. 그 인연으로 야시마는 이 교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혼아즈마(ほんあづま)에 자기 주장을 실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야시마 히데오를 '혼아즈마의 야시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 천리교에서는 귀에 들리는 대로 '홍아즈마'라고 쓴다. 일본의 종교법인 천리교는 야시마 히데오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신자들에게도 접촉하거나 서적을 읽지 말라고 요구한다.
야시마 히데오와 천리교단이 법정공방을 벌일 적에, 천리교 본부의 일부 인사가 법정에서 "천리교는 야시마를 이단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물론 똑같은 법정에서 이단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으므로, 교단 내부에서도 야시마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은 야시마는 이단이라는 결론으로 정리되었다.
2001년에 독립한 천리교 토요후미 교회나, 대한천리교의 토착화 작업도 이치노모토 분서 사적보존회의 자료를 많이 참고하였으며, 토요후미 교회의 경우 감로대 근행하는 법을 야시마에게서 배웠다. 또한 대한천리교 교단도 복원 문제나 야시마 교학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아, 토착화를 시도하는 이론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한천리교에서 신각 대신 감로대를 사용함도 야시마 교학을 근거로 하였다.
세계대전 이후, 천리교단은 정말로 종교의 자유를 얻었지만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금씩 교세가 위축되는 중이다. 아래 '교회조직' 항목 참조.
4.4. 입교의 날
나카야마 미키의 생애는 천리교 신자들에겐 고본 교조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고본 교조전이 미키의 삶을 사실대로 서술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고본 교조전에 따르면, 상술한 바와 같이 집안에 우환이 뒤따르자 슈겐자를 불러 1838년 음력 10월 24일부터 의례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24일, 미키가 무녀 대신 신대를 붙잡고 기도하다가 스스로를 진실의 신이라 주장하는 신격이 내려와 26일 오전 8시까지 음식도 먹지 않고 버티므로, 어쩔 수 없이 젠베에가 미키를 신령의 사당으로 삼겠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단의 다른 초기기록에는 이야기가 상당히 다르다. 미키가 1881년에 나라 경찰서에 제출했던 수속서(手續書)에 따르면 그 때의 장면은 이러하다.
24일 밤에 가슴이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튿날 25일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맡에 작을 칼을 든 사람이 있었고, 또다른 사람은 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집안 사람들은 미키가 마치 여우나 너구리의 영이 들린 것으로 생각하고 이런저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하늘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큰 바위에 눌린 듯한 느낌이 나고 이상한 목소리로 이상한 것이 다가와 "나는 쿠니노토코타치(国之常立命)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도 몸은 가볍게 되지 않고 신령들이 바꾸어가며 들어와 차례대로 열 분이 왔다.
이 열 분 신령님을 전륜왕(轉輪王)이라고 한다.
고본 교조전이 묘사하는 바와 사실관계가 다르다. 이에 따르면 미키는 24일 밤에 신내림 증상을 보여 기억을 잃었고, 그래서 25일에 미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가족들이 미키에게 들린 잡령을 내쫓는다고 주술행위를 하고 있었다. 또한 25일 밤에 미키에게 신령들이 다가와 자기를 소개하며 미키에게 말을 걸었다.
1885년에 미키가 한 말을 받아 적었다고 하는 신빙략기(神憑略記)에서는 상황묘사가 또 다르다.
내(미키) 나이 41살 되던 해 10월 24일에 처음 스스로 신대를 잡고 기원을 했다. 3일 동안 밤낮으로 꿈과 같이 지내는데, 무슨 소리카 크게 나더니 코신신(荒振神)께서 내려오셨다. 여쭈어보니 나의 신은 하늘의 장군님이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이 사람의 몸을 신령의 사당으로 삼고 싶다. 나는 '구니노토코타치'라고 하는 신이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하시며 올라가셨다.
잠시 있으니 또 말씀이 내렸다. 정말 무서운 기세인데 삼가 여쭈어보니 오모타리(面足命)이라고 하셨다. 내 모습을 보이면 무서운 신이다. 머리가 열둘 있는 뱀의 형상이라고 하셨다. 이제 이 집터와 어버이, 자식을 모두 신령의 사당으로 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셨다.
너무나 무서워서 코신신 님, 물러가주십시오 하였더니 크게 노하여, 이 집터와 어버이 자식을 받는다면 삼천세계를 도와주겠으나, 그렇지 않는다면 이 집은 대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어쩔 수 없다고 남편 젠베에도 바치겠노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인간에게는 신의 이름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 집터의 지명에 천리왕(天理王命 텐리오노미코토)이라는 이름을 주겠다. 이 집터에서 최초의 인간세계를 시작한 인연이 있어 하늘에서 내려왔다. 미키의 마음이 천리에 맞기 때문에 텐리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원래 미키의 영혼은 어버이 이자나미의 혼령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신빙략기 내용은 수속서보다는 고본 교조전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이가 있다. 특히 훗날 교단에서 유일신의 이름으로 정립한 천리왕이라는 신명이 여기서는 그저 집터를 신격화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므로 주목할 만하다.
신빙략기나 수속서에서 얼른 드러나지 않지만, 이른바 미키에게 신령들이 한 말은 전부 미키가 트랜스 상태에 빠진 채 미키의 입으로 나온 말일 가능성이 크다.
교조전과 수속서, 신빙략기가 하는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천리교에서 말하는 입교(立敎)의 날, 천리교식 표현으로는 '이 길의 으뜸하루'라고 부르는 그 날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교조전의 기록을 그냥 믿기에는 수속서나 신빙략기의 내용이 매우 걸린다.
다만 1838년 (음)10월 24일을 전후하여 어떤 일이 있어서 의례를 행하기로 했다는 점, 그 즈음에 미키가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 점, 그리고 미키에게 신령 10위가 차례대로 나타나 말을 걸었고, 결국 남편이 26일에 미키를 신령의 사당으로 인정했다는 점까지는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미키가 신내림을 처음 겪기 전에 사람의 일을 자꾸 잊어버리는 건망증 증세가 나타났고, 때때로 기절하는 등의 증상을 보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학자 임태홍은 <<다중인격의 측면에서 본 나카야마 미키의 신비체험>>(2004, 종교연구 37)이라는 논문에서 미키의 신내림 체험이 다중인격의 증상일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이 항목에서 수속서와 신빙략기의 내용 번역은 임태홍이 논문에 올려놓은 번역을 요약하여 2차 인용하였다.)
5. 교단의 지도자
5.1. 신바시라
천리교단은 교주라는 낱말을 사용하지는 않으나, 신바시라가 천리교의 교주이며 교단 전체를 대표한다. 내부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교단 내규에 따르면 '교조의 혈통을 잇는 사람들 중 천리교 본부 회의에서 인가한 사람'이 승계한다. 원래 신바시라(真柱)라는 말은 목탑을 받치는 중심기둥을 가리키는데, 이 단어를 '교단을 받치는 기둥, 중요한 인물'이란 뜻으로 비유하여 사용한 것이다. 한국인 신자들은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진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규정하기로는 신바시라는 교조의 혈통을 잇는 사람들 중 고른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자손들 중에서도 초대 신바시라 신노스케 혈통의 장남이 대대로 세습하였다. 신노스케가 미키의 외손자인데 미키의 손녀인 타마에와 결혼하였으니, 미키의 자손들 중 신노스케의 자손이 가장 혈연적으로 가까움은 분명하다. 일본의 신종교단체들은 창교주의 후손이 교주직을 세습하는 경우가 흔한데, 천리교도 그러하다. 나카야마 집안의 가몬을 천리교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나카야마 집안의 남자가 대대로 신바시라를 세습하는 것은 천리교 내부에서 나카야마 집안의 위상이 어떠한지 보여준다.
혼세키가 있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천리교는 영적인 부분은 혼세키가, 행정적인 부분은 신바시라가 맡는 양대 지도체제였지만, 혼세키가 없는 지금은 신바시라가 양쪽을 다 맡는다. 신바시라가 신자들에게는 정말로 신(천리왕)이 그 안에 머무는 사람으로 숭배받지만, 교단 내적으로는 실권이 없다는 말들이 일본 웹사이트에 돌아다닌다. 실권은 신바시라 밑에 있는 고위간부들이 쥐었다고 한다.
나카야마 집안의 장남들은 대대로 이름에 젠(善)이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관습이 있다. 예외는 훗날 개명했거나, 혹은 양자로 들어온 경우뿐이다. 미키의 장남 슈지도 초명은 젠에몬이었다. 그래서 역대 신바시라들도 외손자가 양자로 들어온 1대 신노스케, 조카가 양자로 들어온 (5대가 될) 다이스케를 제외하면 전부 이름에 젠(善)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
일제시대 무렵에는 신바시라라는 호칭은 내부적으로만 사용하고, 대외적으로는 칸쇼(管長/관장)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우리말 관장(館長)과 착각하기 쉽지만 한자가 다르다. 일본어 사전에 의하면 1872년에 일본 정부가 신토나 불교계 종교 지도자를 뜻하는 의미로 만든 낱말이라고 한다.
생몰란의 날짜는 양력.
향년은 만 나이
1대
나카야마 신노스케(中山眞之亮)
생몰: 1866.06.19-1914.12.31 (만 48세)
재임: 1882-1914
미키의 외손자. 미키의 3녀 하루가 카지모토(梶本)가에 시집 가서 낳은 3남. 천리교단에 따르면 미키는 신노스케가 태어나기 전부터 신노스케를 신바시라로 낙점하고 기다렸다고 한다.
하루가 처음 장남을 낳자 미키는 "(미키 본인의) 친정 아버지께서 환생하셨다." 하고 말하며 입양하기를 원했지만, 카지모토 집안은 "어떻게 장남을 입양 보낸단 말이냐?" 하면서 반대하였다. 이후 장남이 유아사망하고 사망하고 하루가 2남, 3남을 낳자, 미키는 3남이 역시 친정 아버지의 환생이라고 말하며 입양하길 원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였다. 천리교의 해석에 따르면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입적하면 카지모토 집안에서 타격이 크므로, 장남이 죽고 그 영혼이 3남으로 환생하여 입양된 것이라고 한다.
1868년에 나라현에서는 이름에 亮나 衛門란 글자를 쓰지 못하도록 포고하여 집안에서 이름을 신지로(新治郎)라고 개명하여 호적에 올렸고, 공적인 서류에는 평생 신지로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그 이외에는 초명인 신노스케를 사용하였다.
1880년, 신노스케가 열다섯 살 나이로 나카야마 집안에 들어왔다. 이듬해인 81년에 나카야마 집안의 호주(이자 미키의 장님인) 슈지가 사망하자 나카야마 집안으로 입적, 82년에 신노스케가 호주가 되었다. 천리교에서는 신노스케가 호주가 되면서 신바시라가 되었다고 본다. 1891년, 외사촌 동생 나카야마 타마에와 결혼하였다. 타마에는 신노스케의 외삼촌이며 미키의 외아들인 슈지의 딸로, 신노스케보다 열한 살이 어렸다. 이부리 이조가 혼세키가 되는데 동의하여, 이부리 이조가 살아있는 동안 천리교는 양대지도체제가 되었다.
교단의 행정은 신노스케가 책임지었으므로 교단 합법화도 신노스케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였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천리교를 탄압하자, 합법종교로 승인받아야만 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일본 정부는 명백히 승인을 거부하는 등 천리교가 탄압받지 않게 하려고 슈지와 마찬가지로 교단 합법화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부의 정책에 모나지 않게 천리교의 의례를 바꾸었으며, 그런 노력으로 1909년에 비로소 정부 차원으로 천리교를 공인받았다. 천리교 교전(敎典)을 정립하고 1909년에 (오늘날의) 천리 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1911년부터 건강이 나빠지다가 1914년 연말에 사망하였다.
2대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
생몰: 1905.04.23-1967.11.14 (만 62세)
재임: 1915-1967
신노스케의 장남. 도쿄대학을 졸업한 인재였다. 천리교단은 미키의 장남 슈지가 쇼젠으로 환생했다고 말한다. 1914년 12월, 아버지 신노스케가 사망하자 이듬해 1월에 10살 나이에 신바시라가 되었다. 물론 중학교도 안 들어간 열 살짜리 아이가 제대로 일할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한동안 고모부 야마자와 타메조(山澤為造 1857-1936)가 1925년 4월까지 섭정(?) 비슷하게 있었다.
그런데 야마자와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찬성하는 사람으로 "천황과 천황의 선조들은 신이며, 우리들 백성들과는 영혼이 다르다." 하고 말할 정도였다. 이 시기 천리교는 국가에 영합하여 군국주의에 협조하면서 세를 불렸으며, 쇼젠이 성장하여 더 이상 야마자와의 그늘 밑에 있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어서도 이러한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천리교 신자들 중에는 이 시기 천리교의 군국주의 협력에 대하여 야마자와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람도 있지만, 쇼젠이 어른이 되고서도 별로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그냥 천리교 전반에 걸쳐 협력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18년, 2대 혼세키 우에다 나라이토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아 혼세키로서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손상되었다. 우에다에 대한 모함이 실은 쇼젠의 어머니 타마에나 후견인들이 꾸민 짓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교단의 종교적 권위를 나카야마 집안으로 집중시키고자 혼세키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끝내는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교단은 인정하지 않는다.
패전 이후 교단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자 국가의 정책으로 변형했던 의례를 되돌리는 등 천리교 역사에 획을 그었다. 쇼젠이 한 일련의 복구작업을 '복원'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쇼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동원하여 미키의 행적과 의례를 검토하고, 이 내용을 '복원'이라고 이름지어 차례대로 여러 권 문서로 출간하였다. 하지만 이때 발표된 복원은 현재의 천리교단이 미키의 뜻을 왜곡했다고 하여 분파가 생기는 이론적 근거도 되었다.
쇼젠은 도쿄대학 물을 먹은 인텔리로서 천리교를 학문적으로 발전시키려고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스포츠 등에 관심이 많아, 천리교단의 자금으로 스포츠 선수를 육성하는 등 사회사업을 하였으며, 텐리시에 천리교 도서관을 세우고 천리교학의 체계를 잡았다. 실질적으로 세계대전 이후 종교법인 천리교의 틀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대 신바시라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다.
3대
나카야마 젠에(中山善衞)
생몰: 1932.07.07-2014.06.24 (만 81세)
재임: 1967-1998
쇼젠의 장남. 1967년에 아버지 쇼젠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날로 신바시라가 되었다. 아들 세 명이 있었지만 장남 젠지만 남기고 다른 아들들은 양자로 내보냈다. 두 차례 심장 대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문인지 1998년 4월 26일, 장남에게 직위를 물려주고 말년을 보내다가 사망하였다.
4대
나카야마 젠지(中山善司)
생몰: 1959.01.16-(현재)
재임: 1998-(현재)
젠에의 장남. 1998년 4월, 아버지 젠에가 직위를 물려주어 신바시라로 취임하였다. 자식이 없어서 조카를 양자로 들였다.
5대 예정자
나카야마 다이스케(中山大亮)
생몰: 1991.01.23-(현재)
재임: 없음
젠지의 친조카이자 양자. 칸사이 대학 졸업. 원래는 젠지의 동생 나카타 젠스케(中田善亮)의 장남이다. 친아버지 젠스케의 성이 나카야마(中山)가 아닌데, 다른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젠지가 2013년 4월 4일, 교조전에서 조카 다이스케를 양자로 입적하였으며, 천리교단은 동년 10월 24일, 다이스케를 차기 신바시라 예정자로 정하였다. 2017년 9월 1일, 다이스케가 2살 연상인 카미카와 노부에(上川布恵)와 결혼하자, 천리교 본부와 텐리시 일대에서 화려한 축하행사를 하였다.
친아버지 젠스케도 2015년 3월에 천리교의 행정/내무부 장관쯤 되는 표통령(表統領)으로 임명되는 등 족벌경영의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족벌경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천리교 초창기부터 이어진 것이다.
5.2. 혼세키
혼세키(本席)는 교조 나카야마 미키 사후로 미키의 대리인으로서 천리왕이 내리는 계시를 받는 인물을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이부리 이조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한국인 신자들은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본석이라고 부른다. 천리교는 이부리 이조 이후로 더 이상 천리왕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생몰란날 날짜 표기는 양력
향년은 만 나이
1대
이부리 이조(飯降伊蔵)
생몰: 1834.02.06-1907.06.09 (만 72세)
재임: 1887-1907
촌장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무고에 걸려 아버지가 자리에서 쫓겨났다. 14살에 고향 마을에서 목수가 되었고, 22살에 (현재의) 텐리시로 독립하였다. 이후 평생 세 번 결혼했다. 첫 아내는 몸이 약해 요절하고 아이도 유아사망하였다. 두 번째 아내는 도박을 좋아해 파경하였으며, 세 번째 아내 이부리 오사토(1834-1893)를 맞이하여 평생 같이 살았다. 1864년에 세 번째 아내가 아이를 낳은 뒤 건강이 나빠져 나카야마 미키를 찾아갔다가 추종자가 되었다. 본업이 목수였던 만큼, 미키의 명령으로 건물을 짓거나 혹은 뭔가를 만들 일이 있으면 이부리가 중심이 되어 맡았다. 1881년에는 이조를 제외한 가족들이 나카야마 집으로 이사했고, 82년에는 이부리 이조가 본래의 자기 집을 처분하고 나카야마 집에 들어갔다. 자기만이 아니라 온가족을 나카야마 집안에, 혹은 천리교에 바친 셈이다. 미키가 사망하기 전에도 미키가 경찰에 불려간다거나 하면 때때로 신들림되어 말하곤 했다고 한다.
1887년에 미키가 사망하자 공식적으로 혼세키(本席)가 되어 미키의 대리자로서 신들림되어 계시를 받아 가르침을 전했다. 이 시기 천리교는 신바시라 / 혼세키의 양대지도체제였다. 신바시라가 교단의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한다면, 혼세키는 신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영적인 업무(?)를 맡았다. 신전을 건축/증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혼세키를 통해 신령의 뜻을 물어 결정하였다.
교조 나카야마 미키의 본디 수명이 115살인데, 신자들을 돌보고자 일부러 25년을 줄여서 90살에 사망했다는 교리도 이부리 이조가 미키 사후에 천리왕의 신탁을 받아 전했다고 한다. 미키만큼은 아니어도 이부리 이조도 혼세키로서 천리교 교리 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천리교 신자들이 '지도말씀'이라고 부르는 경전에는 교조 미키가 한 말뿐만 아니라 이부리 이조가 천리왕의 계시를 받아 전했다는 말들 또한 함께 정리가 되어 전한다. 1907년 6월 6일, 우에다 나라이토라는 여신도에게 혼세키 직을 넘기고 3일 뒤에 사망했다.
손자 이부리 마사히코(飯降政彦 1942-)가 1998년부터 2009년까지 천리교 표통령을 역임하는 등, 이부리 이조의 자손들은 여전히 천리교 내부에서 위치가 높은 듯하다.
2대
우에다 나라이토(上田ナライト)
생몰: 1863.04.10-1937.01.12 (만 73세)
재임: 1907-1918(?)
1863년에 오늘날 텐리시 소노하라정(園原町)에서 아버지 우에다 가지로(上田嘉二郎)의 장녀로 태어났다. 천리교단의 기록에 따르면 1876년, 열네 살이던 해에 나라이토는 갑자기 "후루에 있는 이와가미 신(神)이 산발하고 내려왔어요. 무서워요." 하면서 신병과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딸을 치료하려고 애썼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다가 이웃을 통해 천리교 신앙을 접한 뒤 증상이 조금 가라앉자 딸을 데리고 미키를 찾아갔다. 미키는 나라이토를 보고 "기다렸다, 기다렸다. 너는 5대 전 전생에서 내 목숨을 구해준 숙모였노라." 하고 말하였으며, 나라이토는 3일 뒤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부리 이조가 죽기 전에 이른바 '100일 지도말씀'이라고 하면서 가르침을 남겼다고 하는데, 실은 100일 지도말씀도 1880년대 후반부터 대략 4년간에 걸쳐 나라이토가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부리 이조 사후로 나라이토와 나카야마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교단의 주도권을 놓고 상당한 갈등이 있었던 듯 보인다. 천리교단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가장 큰 요인은 병 치유였고, 따라서 용재들이 병을 치유하는 수훈을 남에게 줄 수 있도록 허락하는 권한(수훈의 리理)이 매우 중요했다. 원래는 미키가 이 권한을 지녔으나 미키 사후로는 이부리 이조가 지녔고, 이부리가 혼세키를 우에다에게 넘겨주자 수훈의 리 역시 우에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나카야마 집안 사람들, 특히 타마에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1918년 3월, 갑자기 우에다가 그 누구에게도 수훈의 권한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교단 내에서 난리가 났다. 당시 수양과 교육을 수료할 시기가 다가오는데, 누구에게도 허락해주지 않겠다고 하니 내부에서는 더욱 당혹스러워했다. 교단에서는 나라이토가 중병이 들어 활동을 할 수 없다고 발표하고 상층부가 서로 모여 상의하다가, 결국 타마에(당시 신바시라 쇼젠의 어머니)에게 수훈 주는 권한을 맡기기로 결정한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우에다를 유폐하고 권한을 넘기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결국 7월부터 나카야마 타마에가 수훈의 리를 받기로 확정되었다. 타마에는 일본 내 천리교회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수훈의 리가 자신에게 넘어왔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주었다.
이후 나라이토는 사실상 유폐되어 살았으며, 미쳤다는 소문까지 돌아 더욱 권위가 손상되었다. 나라이토는 1937년에 사망했으며, 타마에는 이듬해(1938) 6월 사망하였다. 타마에는 죽는 그날까지 수훈의 리를 놓지 않았고, 타마에 사후에는 아들 쇼젠이 받았다. 그 이후로 신바시라에게 수훈의 리가 있다.
현 천리교단은 우에다 나라이토가 2대 혼세키라고 인정하지 않으며, 나카야마 미키를 제외하면, 오직 이부리 이조만이 천리왕의 신탁을 받아 전했다고 가르친다. 이후 천리교에서는 영매, 혹은 신탁자라고 할 수 있는 혼세키가 사라지고 신바시라만이 남았다. 천리교단의 역사왜곡이 의심되는 부분.
6. 경전
천리교의 경전은 나카야마 미키가 직접 쓴 친필(親筆)과 신악가(神楽歌), 그리고 신자들이 미키와 이부리 이조가 계시를 받아 구두(口頭)로 가르친 내용을 모아서 정리한 '지도말씀'이 있다.
친필을 일본에서는 오후데사키(御筆先)라고 부른다. 오후데사키란 원래 붓 끝, 혹은 서예 솜씨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천리교에서는 의미를 다르게 사용했다. 미키가 친필을 1869년부터 와카로 썼는데 총 1710여 수이다. 미키 본인의 말을 빌리면, 친필의 와카를 쓰는 동안 신이 들려 자기도 모르게 글을 쓰되, 자기가 깨어나 와카를 읽고는 뜻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신령에게 물어봐서 내용을 보충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키는 친필을 한자 없이 히라가나로 썼는데, 천리교는 모든 사람이 쉽게 오후데사키를 읽을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썼다고 말한다. 미키가 쓴 원본이 현존한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오모토의 교조 데구치 나오도 1893년부터 신들림하여 글을 썼는데 이를 똑같이 '오후데사키'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게다가 데구치 나오 역시 오직 히라가나로만 글을 썼다. 차이점은 나오는 자기 의식을 잃지 않고 다만 손이 멋대로 움직여 썼다는 점, 그리고 와카가 아니라 산문 형식으로 썼다는 점이다. 오모토의 성사인 오니사부로는 이런 공통점을 의식하여 자기 스스로 두 사람을 비교, 분석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종교학계에서도 천리교와 오모토는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꽤 많이 비교한다.
신악가는 일본에서는 미카구라우타(神楽歌)라고 부르는데, 미키가 1866년부터 의례 중에 부를 노래의 가사를 적은 것이다. 천리교도에게는 노래이자 기도문이다. 미키가 쓴 원본은 훗날 경찰에게 압수되어 망실되었으며, 현전하는 신악가 본문은 교단이 복원한 것이다. 종교법인 천리교와 갈라진 단체들은 신악가의 복원된 구절 일부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신악가에는 미키의 종교적 관심사가 주로 어디에 있었는지 상당히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신악가의 전체 분량은 많지 않으나, 그중 여러 번 질병을 낫게 하겠다는 구절이 있다. 천리교에서 질병치유를 중시함은 미키 때부터 나타난 경향이다. 신악가는 질병이 생기는 근본이 마음이라고 노래하는데, 미키는 근대의학을 거부하였다. 근대 일본에서 나이든 사람들이 근대의학을 거부함은 흔한 일이었던 듯, 오모토 개조 데구치 나오도 근대의학을 거부하고 아이들에게 예방접종을 맞히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신악가에는 질병치유 말고도, 천리교의 영험으로 풍년이 되리란 구절도 들어간다. 미키 본인이 농촌사회 지역유지의 주부였으니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관심사일 것이다. 그 외에도 인근 사람들이 무시하지만 참고 견디라는 구절도 은근히 보이는데, 미키 시절의 핍박이 반영된 구절일 것이다. 의외로 있을 듯한데 없는 구절이 아기 낳음에 관한 것이다. 미키가 본인이 주변에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 것이 순산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소문이고, 당시 일본 사회에서 아들 낳기가 중요한 문제인데도 의외로 신악가에는 이에 대한 구절이 없다.
친필과 신악가는 교조 미키가 쓰던 야마토(오늘날 나라현 지방) 방언으로 쓰였기 때문에,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은 "천리왕님이 야마토 출신이신가 보지. ㅋ" 하며 비웃는다.
지도말씀을 일본에서는 오사시즈(御指図)라고 부르는데, 미키와 이부리 이조가 다른 신자들에게 받은 질문에 답한 내용, 혹은 신탁을 받아 가르친 내용을 정리한 모음집이다. 친필이나 신악가와는 달리 미키(혹은 이부리 이조)가 아니라 신자들이 정리한 것이다.
7. 교리
천리교는 천리왕을 유일신으로 모시되, 나카야마 미키를 그보다 격이 낮은 신적 대상으로 모신다. 천리왕을 어버이신, 미키를 어버이님이라고 부르면서 신자들을 자식이라고 말하며, 종교적 가족제를 매우 강조한다.
천리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창조될 무렵의 이야기는 '으뜸인 리(理)'라고 부르는데 아래와 같다.
나카야마 미키가 첫 신내림을 받기 9억 9만 9999년 전, 지금의 천리교 터전(천리교 본부 신전) 자리에서 월일(月日)이 사람들이 즐겁게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인류를 창조했다고 믿는다. 그 때에 세상은 온통 진흙 바다였고 미꾸라지들이 진흙 속을 돌아다녔는데, 그중에 인어(이자나기)와 흰 뱀(이자나미)이 있었다. 월일(천리왕)은 이들을 부부의 본으로 삼으려고 둘을 불러들여, 처음에 낳을 자녀들 숫자와 같은 해(年)가 지나면 신으로 예배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북서쪽에서 범고래, 남동쪽에서 거북이, 서쪽에서 검은 뱀, 동쪽에서 장어, 남서쪽에서 가자미, 북동쪽에서 복어를 불러들여 일일이 먹어보며 그네들의 마음씨를 살펴본 뒤 인류창조의 도구로 삼았다.
이후 천리왕은 진흙바다에 사는 모든 미꾸라지를 먹어 인간의 씨앗으로 삼았다. 달은 이자나기(인어) 몸 안에 들고, 해는 이자나미(흰 뱀) 몸 안에 들어 자식들 9억 9만 9999명을 잉태했다. 이자나미는 3년 3개월 동안 그 자리(터전)에 머물면서 75일에 걸쳐 자식들을 모두 낳았다.
처음 자식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길이가 5푼에 불과했으나, 99년이 지나자 조금 더 커진 뒤에 죽어 다시 환생하였고, 이자나기도 이때 같이 은신(몸을 숨김)하였다. 이렇게 99년 주기로 죽고 환생하기를 세 번 거듭하며 4치까지 성장하자, 이자나미(흰 뱀) 역시 "이만큼 성장했으니 언젠가는 5척 사람이 될 것이다." 하면서 은신하였고, 자식들도 죽었다.
그 뒤 이자나미의 자식들이 8008번 환생을 거듭하며 벌레, 새, 짐승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암원숭이 한 마리가 남았으니 쿠니노사쓰치 신(国狭槌尊)이다. 원숭이의 태중에서 남녀 5쌍이 태어났다.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모두들 키가 5푼에 불과했지만 나날이 조금씩 성장하였다. 8치가 되었을 때 물과 흙, 높고 낲은 곳이 생겼다. 1척 8치가 되었을 때 바다와 산이 나뉘었다. 이때까지는 한 배에 열 명씩 태어났으며, 3척까지는 한 배에 남녀 한 쌍씩 태어났다. 3척이 되었을 때부터 한 배에 한 사람씩 태어났으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3살이 되어야 말을 하고 지혜도 생기는 것이다.) 이때부터 음식을 찾아 먹게 되었는데, 가라나 천축에까지도 갔다. 사람은 5척이 될 때까지 물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5척이 되자 하늘과 땅이 모두 생겨 사람이 뭍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터전에서 벗어나 이주하여 다른 곳에서도 살게 되었다.
이렇게 9억 9만 년간은 진흙바다에서 살고, 6천 년간은 천리왕이 인간에게 지혜를 전했으며, 3999년간 문자를 가르쳤다. 그래서 총 걸린 시간은 9억 9만 9999년이며, 연수를 다 채우던 해에 나카야마 미키에게 천리왕이 내려 천리교를 입교(立敎)하였다.
'으뜸인 리'를 과거에는 니해고기(泥海古記 진흙바다의 옛 기록)라고 불렀다 한다. 아래에서 이야기할 야시마 히데오는 '으뜸인 리'가 교조 미키 본연의 가르침이 아니라 국가신토를 강요받던 시대에 만들어진 거짓 교리라고 주장하였다.
천리교단은 흰 뱀(이자나미)의 영혼이 교조 나카야마 미키로 태어났으며, 인어(이자나기)의 영혼이 미키의 남편 나카야마 젠베에로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한국 천리교는 흰 뱀-이자나미를 여자추형묘상의 리(女子雛型苗床의 理), 인어-이자나기를 남자추형종자의 리(男子雛型種子의 理)라고 (천리교의 교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매우 어렵게 표현하지만, 일본 천리교도들은 그냥 이자나미ㆍ이자나기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천리교는 위 이야기에 나오는, 인류 창조시에 협력한 물고기들에게 각각 신토에서 말하는 신들의 이름을 사용한다. 해와 달,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그리고 범고래부터 복어까지 여섯 어류들까지 전부 10위 신들의 이름으로 표현하며, 특히 고사기에서 말하는 태초에 나온 신세7대(神世七代)에 속한 신들의 이름 중 일곱 개가 포함됐다.
천리교단은 으뜸인 리에서 신령 10위가 인류창조에 관여한 것을 십전의 수호(十全の守護)라고 부른다. 유일신 천리왕이 인간을 수호하는 열 가지 섭리를 각각 신토 신들의 이름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도 그 역할이 쉽게 이해되는 신명이 아니므로 종교학자들은 천리교가 아직 천리왕 유일신 교리를 확립하기 이전, 다신교 시절의 흔적으로 본다. 특히 북쪽에 서는 쿠니노토코타치는 오모토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신명이다.
천리교 본부 신전에서만 행하는 감로대 근행(신악근행)에서도 십전의 수호를 의례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한국의 천리교에서는 십전의 수호에서 일본 신들의 이름과 연결되는 부분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XXXX의 리(理)'라고 교학적 용어로만 이야기한다. 신들의 이름이 너무 노골적으로 일본식이라 이를 피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천리교는 천리왕(天理王), 일본어로는 텐리오노미코토(天理王命)라고 부르는 신이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광경을 보고 싶어서 오늘날 일본 나라현 텐리시 천리교 본부의 감로대가 있는 자리에서 인류를 창조했다고 믿으며, 천리왕을 어버이신님(오야가미사마)이라고 부른다. 천리교는 천리왕을 죄와 벌을 주는 신이 아니라,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보살펴 주는 신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질병이나 재난 없이 즐겁게 사는 것이 바로 신이 의도한 이상세계의 실현이며, “천국이나 극락은 죽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다.”라고 믿는다.
사람에게 병이 생기는 것은 천리왕에게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본다. 병을 치유하는 수훈이 있지만, 먼저 자기 삶을 뉘우치고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환생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이승에 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후생에서 뭔가 안 좋은 상황에 처한다고 믿는다.
천리왕이 정해준 인간의 수명 또한 원래는 115세이며, 인간의 혼은 죽어서 저승으로 가지도 소멸하지도 아니하고 다시 환생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모든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태어나지는 않고 사람에 따라 환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고 하며, 살아서 덕을 쌓은 사람은 행복한 인간으로 환생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행한 인간으로, 혹은 아예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올바르지 못한 마음씨를 티끌이라고 부르며, 덕을 쌓고 수양함으로써 마음의 티끌을 없애야 비로소 천리왕의 진정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미키가 1887년에 90세에 사망했음이 그래서 문제가 되었다. 물론 90세도 충분히 장수한 것이다. 하지만 천리왕이 정한 인간의 본디 수명이 115세라고 가르쳤는데, '신령의 집'인 미키조차도 115세를 채우지 못했다면 과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추종자들은 미키가 115세까지 살리라 당연히 믿었으므로 미키가 죽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부리 이조가 신탁을 말하기를 미키가 신자들을 돌보고자 일부러 수명을 25년 줄여 은신(사망)했다고 한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천리왕에게 육신을 받고, 죽을 때에는 천리왕에게 육신을 돌려준다고 믿는다. 따라서 천리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천리왕의 입장에서는 대물(貸物: 빌려준 물건)이며, 인간의 입장에서는 차물(借物: 빌려 쓰는 물건)이다. 그래서 죽음을 기존의 육신을 반납하고 새로운 환생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여겨, '처음부터 다시 한다'라는 뜻인 데나오시(出直し)라고 부른다.
천리교는 교조 나카야마 미키가 살던 집터, 오늘날 나라현 텐리시 천리교 본부 신전(神殿)이 있는 자리를 '지바'(地場)라고 부르며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상술했듯 미키가 처음 신들렸을 때에도 "이 집 터에 인연이 있어 내려왔다." 하였다. 천리왕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인류를 창조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터전과 감로대' 항목을 볼 것.
나카야마 미키를 일본 천리교 신자들은 교조(敎祖)라고 쓰고 ‘오야사마’(어버이님)라고 부른다. 천리교의 설명에 따르면 만물을 창조한 어버이神 천리왕이 미키의 몸에 머물렀기 때문에 어버이님이고, 천리왕의 가르침으로 신자들을 보살폈고 지금도 보살피기 때문에 어버이님이며, 천리왕이 인류를 창조할 적에 미키의 영혼을 인류의 여성성, 모성의 모델(이자나미)로 삼았기 때문에 어버이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만 일본어로는 '오야가미사마'(어버이신님)와 '오야사마'(어버이님)가 소리로 꽤 구분이 되지만, 우리말로는 별로 구분이 안 되어서 그런지 한국인 신자들은 미키를 '교조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키가 신들림을 겪은 뒤 말한 종교적인 주장들은 당시 일본 풍습대로 다신교적이었던 듯하다. 이 시기 미키의 기록을 보면 천리왕 이외에도 당시 일본 민속이나 불교, 신토에서 말하는 여러 다른 신들을 언급하며, 천리왕이란 명칭도 '토지에 붙인 신명'이라고 하는 등 지금의 천리교 측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점차 천리왕이 유일한 신격이고 (미키가 언급했던) 다른 신들은 단지 천리왕을 가리키는 다른 호칭, 혹은 비유일 뿐이라고 해석하여, 천리왕 유일신교로 바뀌었다.
미키는 메이지 시기의 근대화를 나쁘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反외세 감정이 있었다. 미키가 신들림하여 쓴 친필에서 미키는 "가라가 지금까지 일본을 멋대로 다루었다."라든가 "지금까지는 가라가 훌륭하다고 했지만 앞으로는 꺾일 뿐이야."라든가 하고 말하였다. 일본어로 가라는 본디 가야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중국 당나라, (일본 입장에서) 서양을 포함하여 외국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요컨데 미키는 "지금까지는 외국인들이 일본을 쥐락펴락 했다." 하고 말한 것이다. 미키가 생각한 세상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위로는 천황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형제라고 하였으나, 대상은 일본인들만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혁명적이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했다.
콜레라가 돌 때에도 미키는 "세상은 그것을 콜레라라고 부르지만, 실은 신의 노여움."이라면서, 근대적인 의학에 거리를 두었다. 외래문화ㆍ외래지식을 거부하고 (미키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순수한 일본문화를 그리워하며, 천리왕이 이런 상황을 바꿀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현대의 천리교단은 가라라는 말을 외국으로 해석하지 않고, '천리교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라고 우회적으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