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 /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말, 구체적로 말하면 감각과 관련되는 말이 이 시의 소재다. 다른 시도 이런 언어로 이뤄진다. 시가 사랑하는 비유를 생각해 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비유는 이미지인데 이것은 대상을 감각적으로 재생(재현)한다. 방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면 이 ‘하늘’이 바로 이미지다. 내 감각과 이 세상이 힘을 합쳐서 낳은 소중한 선물이다(물론 고통의 쓰라린 맛도 빼서는 안 되지만, 코로나 사태로 우울한데 부정적인 느낌은 못 본 척하고 싶다.). 그러므로 감각이 없으면 이미지를 만들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런데 왜 시는 이미지를 좋아할까? 감각은 생물이 외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다. 이런 활동을 제대로 못하면 죽는다. 그러므로 감각은 생명 활동 그 자체다. 이 세상을 싱싱하게 느끼게 해 준다. 내가 살아 있다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그러니 시가 이 감각을 움직여서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안 좋아할 수가 없다.
저 “기분 좋은 말”을 하나씩 천천히 내 감각을 직접 쓰는 기분으로 맛보자. 이미지는 이렇게 감각을 되살리면서 추체험하지 않으면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어떻게, 좀 산다는 느낌이 나는가?
“비”에 단 느낌표는, 내게, 비가 시원하게 내리꽂치는 동작을 형상화한 것만 같다. 그 밑에 있는 점은 비가 땅에 부딪쳐 데구르르 구르는 물방울이고. 저런 비라면 “맞아보자.”
저 느낌표 다음에 나오는 말은 다 우리를 촉각으로 끌어당긴다(아, 이 말도 그렇다!). 감각의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손으로 만져야 뭘 안다(파악(把握)하다, catch, grasp는 다 손으로 잡는다는 뜻이다. 멀리 떨어져서도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그러니 ‘사랑은 만지는 거(Love is touch)’라는 존 레논의 가사가 그럴듯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시를 읽자 올해의 유난히 긴 장마와 잦은 비의 지겨움이 없었던 일만 같아진다. 가을이 와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말과 시의 힘은 이렇게 세다.
출처
https://cafe.daum.net/ihun/jIQm/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