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먼 길을 돌아와 다시 내 앞에 앉아 있다.
아침부터 심곡리 봉화마을에 있던 피아노를 장정 네명이서 끌고 왔다. 피아노는 초라하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방치 되어 있었다.
30 년이 된 그 피아노를, 그 집에서 나오면서 지금의 심곡항 집으로 옮기는 건 무리였다. 도저히 심곡항 작은 집에는 그것이 들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집에 이사 오는, 두 노인네 부부의 손녀 아이게게 줘버렸다. 중고 피아노로 팔아 될 정도로 오래되고 고급스런 것이지만, 왠지 그 피아는 그렇게 천박하게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
지독히도 음악적 재능이 없었던 두 여동생과 두 딸을 대신하여 즐겁고 열심히 그 피아노를 두드릴 아이에게 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이 되었다.
그랬던 피아노인데.......
"선배님, 우리 집에 세 들었던, 선배가 살았던, 그 집 노인네들이 돌아가시고.......아이가....고아원으로......."
며칠 전, 집 주인 후배가 헌화로를 지나다가 내게 던진 말이었다.
"그럼....피아노는...?"
"피아노, 필요 하시면 다시 가져 가세요."
뒤에 차가 밀려 더 이상 길게 이야기 하지 못했다.
나는, 그 피아노 대신에 아이를 생각했다. 피아노의 번쩍거리는 까만 표면에 천진난만했던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피아노는 아무려면 그만이었다.
그런 피아노가 내 앞에 다시 돌아 온 것이다. 북동분교 영화마을 영화 체험관이자 노래방으로....
몇 년 전, 피아노를 처리하면서 써 둔 글을 올려본다.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려는데 피아노가 말썽이다.
강릉 시내 집에서부터 필요도 없는 것을 끌고 왔다.
필요없는 다른 짐들은 다 버리면서도 피아노는 특별한 존재였다.
피아노, 아마, 십여년은 뚜껑 한번 열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30 년이 넘은 피아노. 아버지 교사 박봉으로 네 형제를 대학 보내고, 그것도 전부 서울, 춘천 외지로..그 중 둘은 또 일본 유학을 보내고...
그리고도 그 불타는 교육열로 산 피아노였다. 내 여동생 둘은 물론, 내 딸 둘도 피아노를 배웠다.
전혀 음악적 재능이 없는 네 여자들에게 피아노늘 가르친 것은, 아버지와 나의 어설픈 교육철학에 다름아니었다.
아버지나 나나 아이들 학원 보내고 학교 보충수업 하고 야자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색이었다.
아버지는 늙은 교사에 속했는데도, 전교조 선생 만큼이나 일부 교육철학은 진보적이었다.
우리 내 형제나 내 딸들에게도 항상 놀아라, 잘 놀아라가 전부였던 것이 나와 아버지였다.
화가이고 보석디자이너인 내 두 여동생 역시 미술교습 한번 받아 보지 못했다.
그러고도 화가가 되고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나와 아버지의 교육방법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피아노는 특별했다. 앞 집에 작은 놀이방을 운영하는 혼자 사는 늙은 아줌마가 있었는데, 아마 나이가 어머니 쯤 될 거 같다.
그 아줌마에게 우리 가족 네 여자가 피아노를 배웠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여동생들과 내 딸 둘의 가장 초보적인 체르니 악보였다.
네 여자 전부 음악에는 지독히도 관심이 없었던지, 집안에서 그나마 값나가는 그 물건을 그냥 사치품으로 남아 있게 만드는 불상사를 저질렀다.
그리고 항상 피아노는 우리 집 거실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피아노는, 어쩌면 나와 아버지의 실질적이고 혁신적인 교육철학의 허전함을 달래주던 사치품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 물건 본래의 효용성은 고사하고 교육적으로도 전혀 쓸모가 없었던.
그래서 이사하는데 가장 거추장 스러웠던. 그런 물건인데도 굳이 용을 쓰며 가지고 왔던 것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네 여자에 대한 교육적 사치 때문이었다.
나의 그러한 심리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유럽의 르네상스가 발전할 수 있는 그 당시 귀족들의 그것과도 닮아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상업의 발달과 동양으로 부터의 신기한 문물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신에서 인간으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유럽의 르네상스는 시작이 되었다.
그 와중에 르네상스의 예술을 발전을 한 것이다. 다분히 귀족적이고 사치품이었던 유럽의 음악은 그렇게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전혀 음악적이지 않았던 가족들이, 기여코 전혀 쓸모도 없는 피아노를 애지중지 끌고 다닌 것은, 우리들 안에 잠자고 있었던, 귀족적 사치를 요원했던, 신분상승의 흔적은 아니었는지.
르레상스가 계몽사상과 인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와 근대국가로 발전한 초석이 되었듯이, 그래서 그런 자본주의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듯이, 피아노도 나를 괴롭히나 보다.
이제, 나는 그 악연을 끊고자 한다.
어제 집 수리를 같이 하던 인부들과 이야기 하면서 피아노를 처리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시골 동네서 가장 음악이 필요한 아이에게 기부하자고 약속을 했고, 인부들은 수소문하기로 했다.
첫째 딸, 주희는,
" 아빠, 나....그거 시집 갈 때 가지고 가서 딸 낳거든 줄거야..버리지 마..."
라고 전화로 떠들었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버리기로....
내 안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교만과 사치를 훌훌 내던저 버리고 오로지 내 속에 나만 만날 것을.
" 쓸데없는 거 안고 사는 거 아니다. 그리고 너 시집 갈지 않갈 지도 모르고, 너 애 날지 안 날지도 모르잔어......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줄거다..."
"어..아빠 알앗어..아빠 맘대로 해..."
역시, 첫째 딸은 시원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