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암 합병증으로 지난달 12일(현지시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알토 색소포니스트 데이비드 샌본 부고 기사를 2일에야 뒤늦게 띄웠다. 재즈와 팝, 리듬 앤 블루스를 넘나들며 데이비드 보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에릭 클랩턴, 스티비 원더 등과도 협업했던 레전드다.
고인은 2018년 전립선암을 진단받았는데도 투어 공연을 이어가고 팟캐스트 'As We Speak'를 통해 죽음 직전까지 소니 롤린스 같은 인물을 인터뷰하고 진행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60여년 음악인생에 25장의 앨범을 발표했던 그가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보위와의 작업이었다. "벽안의 솔" 가수란 명칭이 왜 붙는지를 증명한 보위의 대표곡 '영 어메리칸스'의 하이라이트 대목을 연주했는데 앨범의 타이틀 곡이 됐다. 샌본은 나중에 돌아보길 "영 어메리칸스 투어때 보위는 이따금 자신이 무대에 오르기 전 밴드끼리 20분 연주하게 내버려뒀다. 그 앨범에서는 리드 기타도 없어서 내가 그 대목을 연주했다. 그 레코드에서 나 혼자 다했다"고 했다.
고인은 항상 사람을 일정 부류로 묶는 일(pigeonholing)에 한사코 반대했다. 그는 2017년 "재즈냐 아니냐에 대해 난 관심 없다. 대문을 지키는 이들은 매우 호전적일 수 있는데 그들이 과연 무엇을 보호하는가? 재즈는 늘 주변에 있는 것을 흡수해 변모했다. ‘차차가 사라졌을 때 음악은 죽었다’와 같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샌본은 1945년 7월 30일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이 공군으로 복무하던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근교 커크우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일년 정도 인공허파(아이언 렁)를 달고 살았다. “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익숙해 라디오를 듣는 것이 일이었다. 내겐 상상으로 가득한 극장이었다.” 치료의 일환으로 피아노를 배우다가 열한 살 때 색소폰으로 전향했다.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열심히 익혀 3년 뒤 클럽 무대에서 앨버트 킹, 리틀 밀턴 등의 유명 블루스 곡들을 연주했다.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그는 아이오와 대학으로 옮겨 정통 재즈 색소포니스트 JR 몬테로즈에게 사사했다. 그러다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캘리포니아주로 이주,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에 가입해 우드스톡 축제에 서기도 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스티비 원더와 함께 투어를 하기도 했으며 그의 1972년 앨범 '토킹 북'에 참여했다. 이렇게 세션 연주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보위와 함께 하던 1975년 샌본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앨범 '번 투 런'에도 참여했고, 자신의 첫 번째 솔로 앨범 'Taking Off'을 내놓았다.
나아가 1970년대 BB 킹, 폴 사이먼, 엘튼 존, 차카 칸, 케니 로긴스, 록그룹 이글스(The Sad Café 1979 LP The Long Run), 1980년대 아레사 프랭클린, 빌리 조엘, 로저 워터스, 클랩턴, 롤링 스톤스(1983 album Undercover) 등과 호흡을 맞췄다. 그의 솔로 앨범 Hideaway(1979)와 Voyeur(1981)는 각각 50만장 이상 팔려 재즈 앨범으로는 독보적이었다. 앞 앨범에 수록된 Seduction(조지 모로더 작곡)은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1980)에 삽입됐다. 샌본은 같은 앨범의 ' All I Need is You'로 여섯 차례 그래미상 수상 가운데 첫 번째로 최우수 R&B 연주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그는 미국 텔레비전 쇼 나이트 뮤직의 진행을 맡았는데 나는 AFKN 방송을 통해 이 쇼를 시청하며 재즈나 블루스, 록 등 미국 음악을 익혔다. 그는 또 미국 라디오 신디케이트를 통해 재즈 쇼를 기획했다. 늘 생연주를 들려주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을 매료시켰다.
유족으로는 부인이며 동료 뮤지션인 앨리스 소이어와 아들 조너선을 남겼다.
ERIC CLAPTON,SHERYL CROW & DAVID SANBORN-Little Wing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