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8월15일은 아직까지도 내 생애 영원히 잊지못할 날이다.
서울 도봉구 방학3동 신동아아파트 5단지에 처음으로 내 문패를 달던 날이였다. 온 나라가 어려웠던 그 IMF시절에.
신동아아파트 117동 1206호.
비록 25평 작은 아파트였지만 우리 세식구가 살기엔 부족함이 없는 보금자리였다.
1988년 가을, 반지하 전셋방 얻을 돈 5백만원만 달랑 쥐고 목포를 떠나 서울에 온지 10년만에 내 집을 마련한 날이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 10년동안 우리는 참으로 안먹고 안쓰고 억척스럽게 살았다.
교통비와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회사 근처에 반지하방 전세를 얻고 살았으니까.
친가와 처가의 도움없이 서울에서 10년만에 집을 마련하기란 사실 그 당시 중소기업 회사원이였던 내 봉급만으로는 어려웠던 일이고
영후엄마가 운영했던 가게 수입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부간에 누구의 수입이 많고적음을 떠나 서로의 능력껏 노력하여 모은 돈은 개인 재산이 아니고 가정공동의 재산이기에
공로는 따질 이유는 없다.
그렇게 아파트 한채를 분양받아 2년동안 아파트 공사 현장을 거의 일주일마다 일요일이면 아들 손잡고 구경갔다.
우리 집 짓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12층 1206호가 만들어지고 있을 때 아들과 나는 감격했다.
"영후야! 저기 보이는 윗층에서 부터 네번째 층 맨 끝 집이 우리 집이야."
그리하여 1998년 8월15일 입주 날.
아파트 관리실에서 1206호 열쇠를 인수받아 우리 아파트 현관에 첫 열쇠를 꽂았을 때 그 감개무량이란....
2년만에 영후엄마가 임신하여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임신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희열 못지않는 것이였다.
이제는 어떤 감동으로도 다시는 내게 올 수 없는 기쁨들.
그러나 그 집에서 산지 1년4개월만에 내 가정은 조각나고 말았다.
어느 날 부터 아내의 귀가가 조금씩 늦어졌고 나는 아들과 함께 쓸쓸한 저녁밥을 먹기 시작한 날이 늘어갔지만
아내를 나쁜 쪽으로 생각치 않했다. 가게일이 늦어지기 때문 일거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윤영후 엄마라는 인격을 믿고 싶었기에.......
그러나 결국 이혼을 했다.
아마도 그토록 어렵게 마련했던 그 집터와 우리는 연분이 없는 까닭이였을까.
이혼.
더 나쁜 일없이 이혼으로 그 집과 연분이 끝났음을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첫댓글승일님, 불러놓고 보니 할 말은 이미 내 안에 잠겨 꿈쩍도 않습니다..그건 아마 승일님께 암무말도 말라는 것 같아 그냥 삼켜 두렵니다..시간이 흐를 수록 짙어 가는 지난 날의 회한 같은 것,...할 수만 있다면 긁어 내어 버리고 싶은 것들이 그래도 때때론 삶의 버팀이 되어 줄 때도 있다는 것에 대하여,..설명할 수는 없
승일님, 그런 가슴아픈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혼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산다는 거....옳게 산다는 거....그런 거 보다 그저 마음편하게 살기로 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삶의 최고선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첫댓글 승일님, 불러놓고 보니 할 말은 이미 내 안에 잠겨 꿈쩍도 않습니다..그건 아마 승일님께 암무말도 말라는 것 같아 그냥 삼켜 두렵니다..시간이 흐를 수록 짙어 가는 지난 날의 회한 같은 것,...할 수만 있다면 긁어 내어 버리고 싶은 것들이 그래도 때때론 삶의 버팀이 되어 줄 때도 있다는 것에 대하여,..설명할 수는 없
지만,...
설명 모두..다 할수는 없지만...건강하시면 그래도 희망은 언제든 시작할수 있음이 아닐지..^^* 뎀님 승일님..건강하세요~~~
그래도 영후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으니 그대의 인생이 몽땅 실패한건 아니잖아? ㅎㅎ 오랜만에 왔더니 자판두둘기는 속도가 어눌해졌당구리...ㅎㅎ 잘 있지?
글을 읽는데 다운이 돼서...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승일님, 그런 가슴아픈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혼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산다는 거....옳게 산다는 거....그런 거 보다 그저 마음편하게 살기로 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삶의 최고선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세세히도 기억하네...아직도 그분을 원망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