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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좌담
우리 문학의 길, 문예지의 미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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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의 길, 문예지의 미래 전망
— 2023년 신년 좌담
2023년에 저희 『시와산문』은 29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니까 내년이면 만 30주년이 되는데요, 29년간 지나온 시간을 살피면서 우리 문학의 길과 문예지의 미래 전망을 논하는 신년 특집좌담을 열게 되었습니다. 저희 시와산문은 2022년 여름호부터 겨울호에 이르는 3개 호에 걸쳐 문예지의 역할과 존재 의의 및 사회적 효용 가치를 중심으로 『시와산문』의 회고와 전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첫 번째 기사는 ㈔시와산문문학회 고문 김영자 시인이 창간 시점부터 ‘『시와산문』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문예지의 내일을 살폈으며, 두 번째 기사는 중앙대 교수이신 이승하 시인이 ‘한국 문예지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문예지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고찰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 기사는 계간 『POSITION』 주간 차주일 시인이 ‘문화라는 세계에 식민이 된 예술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문예지 존립의 가치와 목표에 대한 고찰 및 미래 전망을 써 주셨고 이로써 특집 기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신년 봄호에서는 기획특집 필진과 본지의 편집위원진 그리고 저 편집장이 한자리에 모여 우리 문예지의 전환 방향, 문예지의 존립 이유, 그리고 어떻게 문예지의 사회적 효용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마지막으로 내일의 문학 독자들과의 소통 전략을 찾기 위한 좌담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일 시 2023년 1월 10일
장 소 계간 『시와산문』 편집 회의실
주 최 계간 『시와산문』
사 회 이은숙 시인·문화 칼럼니스트 (본지 편집장)
참 석 김영자 시인·(㈔시와산문문학회 고문)
황정산 시인·문학평론가 (본지 상임 편집위원장)
이승하 시인·중앙대학교 교수
이동재 시인·소설가 (본지 편집위원)
김효은 시인·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참관 및 후원 장병환 시인 (본지 발행인·㈔시와산문문학회 이사장)
참관 및 협력 김명아시인 (본지 주간)
사진 촬영 김영수 시인 (㈔시와산문문학회 동인지 〈녹색수필〉 회장)
▶ 이은숙(사회자) : 안녕하세요. 『시와산문』 편집장 이은숙입니다. 『시와산문』이 30주년을 앞두고 그동안 특집 칼럼을 써 주신 필진 분들과 또 시와산문의 발전을 위해 협력해주시는 편집위원진을 모시고 함께 우리 문예지의 미래를 전망하고, 『시와산문』의 존립을 통해 한국 문학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모색하기 위해 이렇게 좌담을 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다양한 위기에 직면한 중요한 시기에 선생님들을 모시고 좌담을 열게 되어 매우 의미 깊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흔쾌히 토론에 응해주신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독자들을 위해 먼저 오늘 함께 해주신 선생님들을 소개하고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시와산문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특집 기사를 써 주신 김영자 시인님께서는 저희 계간 『시와산문』과 ㈔시와산문문학회 고문으로서 오늘 이렇게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시와산문』의 상임 편집위원장 맡고 계시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신 황정산 교수님, 함께 하셨습니다. 22년 가을호 특집 기사 ‘문예지의 어제와 오늘’을 써 주신 이승하 교수님께서도 시인이며 평론가로서 오늘 이렇게 함께 해 주셨고요, 옆에 계신 이동재 선생님 역시 시인이자 소설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고, 저희 『시와산문』의 편집위원 맡고 계십니다. 시인이면서 문학평론가이신 김효은 선생님께서도 함께해 주셨는데요, 역시 저희 『시와산문』의 편집위원으로 협력해주고 계십니다. 오늘 이렇게 다섯 분을 모시고 좌담을 진행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자리에 함께해주신 선생님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오늘 전체적으로 세 가지 큰 틀의 주제를 가지고 좌담을 이어가고자 하는데요, 먼저 문예지 존재 의미와 역할, 그리고 한국 문학계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문화적 요인, 마지막으로 문예지의 나아갈 길과 미래 전망 이 세 가지 주제의 틀 안에서 선생님들의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듣고, 논의를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문예지 존재 의미·역할
▶ 이은숙 : 그럼 먼저 문예지의 존재 의미와 역할을 생각하기에 앞서 문예지의 과거를 돌아보면 좋겠는데요, 이승하 선생님께서 문예지의 역사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문예지라는 것이 그동안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현재도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그동안 우리 사회문화 속에서 문예지의 존재 의미와 역할, 그리고 오늘날 문예지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이승하 : 우리 문예지의 역사에 ‘최초’의 영예는 1919년 2월 1일 자로 창간된 문학동인지 『창조』가 차지합니다. 3·1 만세운동을 앞두고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작성한 2·8 독립선언서가 나오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창조』 창간호는 김동인·주요한·전영택 등이 중심이 되어 도쿄에서 편집하였고 요코하마에서 인쇄·발간했습니다. 100년이 넘는 문예지 역사에 있어서 사라진 문예지가 아주 많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역사의 변동에 따라 문예지도 함께 부침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이 문화정책을 표방한 1920년부터 동인지와 문예지가 나오기 시작했지요. 30년대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문장』과 세계문학으로의 발돋움을 꾀한 『인문평론』의 전성기였어요. 이 두 문예지가 강제로 폐간당한 이후에 이를 대신한 『국민문학』과 『삼천리』가 1940년대를 주름잡게 되었죠. 종이 사정이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 대립이 첨예했던 해방공간에서, 한국 전쟁 도중에, 그리고 전후의 폐허 속에서도 문예지가 계속 나왔습니다.
흔히 ‘문협정통파’로 일컬어지던 한국문인협회의 주요 인물들이 편집에 직접적으로 간여했던 월간 『현대문학』(1955년 창간)에 도전장을 낸 것은 계간 『창작과비평』(1966년 창간)이었어요. 한국문인협회의 기관지인 『월간문학』(1968)과 김동리가 편집인과 발행인을 겸한 『한국문학』(1973), 이어령 씨가 의욕적으로 펴낸 『문학사상』(1972)이 순수문학을 지향했다면 계간 『창작과비평』(1966)은 실천과 참여로서의 문학을 지향했습니다. 『창작과비평』의 발전은 『문학과지성』(1970)과의 경쟁에 힘입은 바 큽니다. 1970년대 말에 『세계의문학』과 『문예중앙』이, 1980년대에 『실천문학』과 『작가세계』 같은 계간지가 나타나 한국문인협회 중심의 월간지들과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문예지의 전성기가 전개되기에 이릅니다.
박정희의 제3공화국과 맞서 싸운 종합지 『사상계』가 김지하의 「오적」을 게재했다 필화를 입어 강제 폐간이 되었고 그 전에 창간된 『창작과비평』이 진보적 성향의 문인들을 위한 아지트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1980년 11월 14일에 단행된 언론 통폐합 조치는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뿌리깊은나무』 등 172개의 정기 간행물을 폐간하는 분서갱유를 단행케 하지만 1980년대는 무크지의 시대가 전개됨으로써 문예지 공백 상태를 방지하게 됩니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죠.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공산권이 붕괴한 1992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 약화가 초래한 독서인구의 축소가 문예지 구독자의 급감을 가져옵니다. 현대의 독자는 책을 읽지 않고 컴퓨터 화면을 보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봅니다. 글자를 보더라도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보지 않고 화면의 불빛이 비춰주는 글자를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문예지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발 빠르게 적응한 웹진이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발행하므로 지가 인상이나 발송 비용 발생과는 무관한 문예지입니다. 문학광장 문장웹진, 시인광장, 비유, 노블, 한반도문학, 거울 등이 선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판형과 편집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문예지들이 등장했습니다. 『시마』(이도훈)와 『상상인』(염창권), 『상징학연구소』(변의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세 문예지의 참신성이 신선하기는 하지만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지방 문예지의 성장입니다. 인천의 『학산문학』 『작가들』 『리토피아』, 전주의 『문예연구』, 대전의 『애지』 『시와 정신』, 광주의 『시와 사람』 『문학들』, 청주의 『딩아돌하』, 대구의 『시와반시』 『시인세계』, 부산의 『오늘의문예비평』 『시와사상』 『신생』, 제주의 『다층』이 거의 100호에 육박하고 있고 100호를 넘긴 것도 있습니다. 문학의 서울 집중 현상에도 불구하고 이들 잡지의 분투는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 이은숙 : 최초의 문예지 시작부터 오늘날 시대 변화에 맞춰 변모되어 온 문예지의 특징에 이르기까지 문예지가 나아온 길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문학사상사와 창작과 비평사가 각각 지향했던 방향과 더불어서 70년대 말 한때 각각의 문예지들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문예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언급해주셨는데요, 오늘날은 문예지가 문인들이나 문학 습작생 위주로 향유되는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문예지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첨언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승하 : 독재정권, 군사정권 시절에 문예지들이 상당히 어떻게 보면 응전의 역할을 해왔는데 신인상 발굴 등도 그렇고 오늘의 문예지들도 나름의 시대에 대한 소명 의식을 갖고 변화를 도모하면서 사회에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은숙 : 과거에 문예지가 여러 사회적 문제나 독재정권에 대한 도전과 응전으로써의 역할을 했다면, 현재는 문예지들이 나름의 소명 의식을 갖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 발전을 도모하면서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생각을 잘 들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한국 문학계의 여러 문제에 대한 문화요인
▶ 이은숙 : 그럼 두 번째로 현재까지 오랫동안 이어져 온 한국 문학계의 여러 문제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요인들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국내 문예지 관계자들이나 문인들, 문학을 향유 하는 이들 전반에 걸쳐 한국 문학계에 만연된,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문화적 요인들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지나치게 빠른 사회변화 속도라든지 인구 비율변화, 경제적 수준 변화, 정치적 인식의 변화, 물질만능주의적 자본주의의 폐해 등 여러 요인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여러 요인 가운데 문학이 발전하고 문학과 문학인들의 작품활동이 의미 있으려면 차세대 독자층인 중고등학생부터 문학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향유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성세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실은 미래의 독자들이라 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 문학이 한낱 국어 과목 또는 시험 중심 텍스트로 전락해 버린 것이 오늘의 현주소인 것 같습니다. 이른바 MZ세대라 부르는 차세대 아이들에게 문학의 오롯한 가치는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 가운데 기획특집 겨울호에서 차주일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뼈아프게 다가왔는데요, “문화가 일방적으로 예술을 간섭하고 그 가치와 생명력까지 결정짓는 경우를 자주 목격합니다. 순수 예술을 숭상하고 지향하는 저는 자못 슬픔에 빠집니다.”라고 말씀하신 차주일 선생님은 “순수문학과 문학 정론을 지켰으면 바라는 보수성이 새로움을 거부하는 편협과 후진성과 배타성으로 구설 되고 있다.”라며 강하게 우려를 표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학성을 지키는 일’과 ‘첨단 시대에 익숙해진(현시대가 요구하는 문화에 젖어있는) 다음세대와의 소통’이라는 두 가지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요? 먼저 대학에서 20대초의 대학생들을 가르치시는 김효은 선생님께서 이에 대한 고견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효은 : 저는 이승하 선생님께서 가을호에 써주신 특집 ‘문예지의 어제와 오늘’을 읽으면서 문예지라는 게 굉장히 우리 역사 속에서는 응전의 형식을 띠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전쟁이라든지, 식민지 상황이라든지 아니면 70년대, 80년대 억압되었던 상황 등 위기의 시대일수록 문학적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 힘이 싹튼 것 아니었나 생각해요. 1920년대에 출판 부수 1.500부를 찍었는데 매진되고 또 매진되었는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지금은 1.500부 나가기가 정말 쉽지 않잖아요. 잡지를 사는 인구수 자체가 적기 때문에 현재는 거의 사람들이 잘 안 읽는다고 봐야 하는데, 문예지 초창기에서 특히 70·80년대에는 정말 이 잡지 한 권의 가치가 지금보다 훨씬 더 존귀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즈음의 화두인 문학의 위기,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문학의 미래, 문예지의 미래 이러한 논의들이 결국엔 같은 맥락의 주제잖아요. 지금은 사람들이 결핍보다는 오히려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기에 문예지의 소중함, 문학의 가치 등이 오히려 더 떨어져 가고 정말 소수의 사람끼리 향유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어쨌거나 위기의 시대인 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위기의 시대는 또 다른 기회의 시대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러한 시기에 맞춰서 문예지라든지 문단의 등단 제도라든지 이런 것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100년 동안 별로 달라 진 게 없는 것 같은 폐쇄적인 면들 때문에 위기라면 위기의 시대에 발전보다는 지속적인 정체나 악화일로의 답보상태인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에 잡지를 하던 사람들은 지식인들이었고 혼자 시대에 앞서 나가는 진보적인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과연 잡지를 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문인들이 지식인일까, 실천하는 행동인일까, 시대를 이끄는 선두 주자일까, 생각해 볼 때 회의감도 들더라고요. 그리고 MZ세대 관련해서 질문을 주셨잖아요, 이은숙 선생님께서. 저는 문학의 순수성이라는 개념도 시대에 맞춰서 새로운 세대와 문화에 맞춰서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어떤 시대에서 어떤 장르나 예술이 탄생할 때는 이전의 알 하나를 깨고 나와야 하는 거잖아요. 그건 파격이고요. 파격이라고 했을 때, 순수성을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으로 볼 때는 순수가 아닌, 비순수잖아요. 조선 후기를 예로 든다면 한글 소설, 개화 가사가 순수문학이 아니었듯이 지금의 위기를 타파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순수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에서도 뭔가 변화가 있어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에 방탄소년단이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시에다가 노래를 붙여서 세계화가 된다면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순수성을 훼손했다’라고 저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한국 문학의 세계화라고 생각하고 어쩌면 그 세계화라는 것도 경계가 좀 무너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저도 청소년기에 문학소녀였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시를 좋아했는데, 이제 요즘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OTT, 넷플릭스나 게임, 애니메이션 등에도 많이 노출되어 있어서 사실 책하고는 많이 거리가 먼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문화와의 접목이라든지, 문학의 플랫폼 자체가 시대에 맞춰서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강렬하고 짧은 이미지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에게 거대서사와 같은 것들은 앞으로 어쩔 수 없이 소외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짧고 강렬한 이미지 중심의, 또는 스토리 중심의 그런 문학이 강세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게다가 OTT 서비스가 굉장히 보편화되고 있잖아요, 근데 문학은 딱히 그렇게 획기적인 게 없는 것 같아요. 대부분 기성 잡지 체제 그대로의 형식을 따르고 있고 웹진도 있긴 하지만 그조차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느낌은 없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많은 이들이 향유 할 수 있고, 또 중, 고등학교 학생들도 쉽고 수월하게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서 향유 할 수 있도록 할까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고 또 문예지든, 다른 플랫폼이든 어찌 됐든 경제적인 토대가 어느정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국가적인 지원이라든지 그런 게 뒷받침이 돼야 시도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이제 현실적인 문제고, 따로 떼어놓고 봐야 할 것 같고요. 그리고 겨울호에 ‘문예지 미래 전망’에서 차주일 선생님은 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둬서 예술의 순수성을 얘기하시더라고요. 근데 저는 예술의 순수성이라는 게 있을까 싶어요. 왜냐면 문화와 예술이 어떤 분명한 교집합적인 것들이 있거든요. 거기에서 ‘예술은 문화와는 달라’라고 할 수 만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쨌거나 다소 고정돼고 폐쇄적인 그런 시스템들이 이제는 좀 열려야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러려면 저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분들도 모두 조금 더 젊은 세대들의 문학 향유 방식이라든지, 목소리라든지, 표현 욕구라든지 하는 그들의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겠고 우리 기성세대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더 귀담아 들어줄 필요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 이은숙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김효은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특히 위기 또한 기회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실상 문학뿐 아니라 예술이 실용적이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예술 수업』의 저자이신 오종우 교수님은 “문학이나 예술만큼 실용적인 건 없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무수한 세기를 거치며 많은 것들이 멸종했지만 그 어떤 전쟁과 위기에도 예술만큼은 멸종되지 않은 것을 보면 실질적으로 실용적인 것들을 창출할 동력이 예술에 있다고 볼 수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예술은 충분히 실용적인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와같은 맥락에서 김효은 선생님의 ‘위기가 기회다’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위기의 시대야말로 사람들의 정서와 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문학이나 예술이 역으로 빛을 발할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문예지의 메커니즘이나 등단 제도, 또 폐쇄적으로 답습되는 문단의 구조적 문제 상황에 획기적인 변화가 시급하다는 점도 깊이 공감합니다. 오늘날 문인들의 자격과 관련해서도 언급을 해주셨는데요 시대에 맞춰서 문학도 문인들도 변화가 필요하고, 한국 문학의 세계화 가능성을 열어갈 방법을 모색하면서 요즘 세대에 맞춘 플랫폼의 다양한 확대 등 이미지에 익숙한 차세대와의 소통을 위해 기존에 전해 내려오던 문학적인 방식이나 틀을 깨고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유의미한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 등 이전의 틀을 깨고 채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열어갈 필요가 있다는 말씀으로 결론을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그렇게 정리해도 될까요?
▶ 김효은 : 네. 너무 잘 정리해 주신 것 같아요. 제가 이야기 한 내용이 다 맞는 건 아닐테니 다른 선생님들의 다양한 말씀들도 들으면 좋겠습니다.
▶이은숙 : 예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황정산 선생님께 대중의 문학에 대한 무관심의 문제에 대해 그 원인이 무엇에 있다고 보시는지 여쭈어봅니다. 문예지 한 권 정도는 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당위성은 고사하고 오늘날 문예지에 대한 관심도가 우리 문인들이나 문학 습작생들, 예비 문인 지망생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경우를 흔하게 보게 됩니다. 이런 문제의 원인이 과연 무엇일까요? 문학에 대한 무관심이 문예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 것인지, 아니면 문예지가 대중과의 교각 역할을 잘 못해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이유가 있을지 그 원인에 대한 분석적인 견해를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황정산 : 저한테 제일 어려운 질문을 하시네요. 분석해서 설명하라니. (웃음)
사실 우리 문학이나 문예지가 과거 1910년대부터 시작해서 거의 1980년대 초반까지는 다른 문화와 예술을 선도했잖아요. 80년대 이후부터는 급격히 문예지와 문학의 위상이 떨어지면서 선도보다는 부수적인 걸로, 소수 문화적인 형태로 치부되고 있는 게 현실인 것 같아요. 이런 데는 사회적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 됐고, 그 사회적 변화의 원인으로는 매체 환경이 급격히 달라졌다는 것을 들수있죠. 디지털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주류 문화를 형성하게 되면서 문학이나 종이책 등이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과거에는 문학이 다른 예술을 포함한 문화 전반을 선도해 온 것에 반해 최근에는 그 주도권을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예술에 내어주고 있는 듯합니다. 디지털 기계의 발달과 각종 멀티미디어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문학이 갖는 메시지 전달력이라던가, 예술 표현력, 그런 걸 넘어선 다양한 예술 형태가 생겨났기 때문에 문학이 어쩔 수 없이 그런 문제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대중들은 이제 소설책이나 시집에 빠져들기보다는 대작 영화나 인기 드라마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문학에 관한 관심은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도 이런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만이 아니라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는 원인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문단 자체 내의 문제인데요. 문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문예지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앞서 말한 시대의 변화에 사실 문예지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죠. 대응이라고 해봐야 계속 대중들의 취향을 뒤쫓아가는 형태로만 진행해온 형국입니다. 독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든가 변화된 매체 환경에 따라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든가 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항상 사회변화를 선도하거나 앞서가지 못하고 뒷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뭔가 문학이 갖고 있어야 할 이니셔티브를 놓쳐 버리고 있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른 예술이 할 수 없는 새로운, 문학만이 보유한 어떤 것을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대중들의 취향에 영합하거나 뒤쫓아가는 그게 문예지 스스로 더 문학에 관한 관심을 약화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요.
둘째는 독자들의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영화평론가가 지금의 대중들은 ‘지적 허영심’이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루하고 난해한 예술을 감상하면서 느끼는 자기 만족감을 포기하고 가벼운 즐거움으로써 예술을 향유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어렸을 적에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명작’이나 ‘창비’나 ‘문지’, ‘사상계’ 같은 잡지를 들고 다니며 보는 겉멋(?)을 내곤 했는데(웃음) … 이해가 안 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영화도 어려운 예술영화 같은 것을 졸면서 보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지루하고 어려운 내용을 참지 못합니다. 그런 예술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짓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이해할 수 있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넘치는데 왜 쓸데없이 그런데다가 체력을 낭비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을 해버리는 측면이 있어요. 그러니 더 이상 어려운 문학, 진지한 문학, 이런 것들이 대중들한테 받아들여지기 곤란한 상황이고 본격적인 문학에 깊이 빠져들 수가 없겠지요. 이 점은 학교에서의 예술교육이나 문학교육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교육은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인데, 예를 들면 클래식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에 대한 다양한 훈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오늘날의 빠른 시간에 감상이 가능한 매체 환경에 놓이게 된다면 애들이 클래식을 이해하지 못하죠. 깊이 있는 음악 세계를 이해하면 좋은데. 문학도 마찬가집니다. 좀 어렵더라도 이러한 걸 학교 교육에서 진지하게 다뤄 줘야 하는데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지 않나 이렇게 좀 생각이 들어요. 요즘 애들이 짧은 단편소설 하나도 제시간에 앉아서 잘 읽어나가지 못하더라고요. 그런 것을 학교 교육이 좀 담당해야 하는데 입시 위주의 교육이 그러한 부분을 많이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독자들이 너무 많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엘리트주의적 관점이라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좀 더 논의가 필요할 듯하고, 일단 이상의 두 가지 측면이 문학예술이 대중에게 외면받고 있는 가장 큰 영향이지 않을까 그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 이은숙 : 문예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침체의 악화 일로를 향해갈 수밖에 없는 문화적 환경과 우리 문단의 문학적 상황, 문학 작품 감상론적인 교육이 약화된 오늘날 청소년들의 입시위주 교육 환경 등, 문학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의 문제 원인의 대해 분석적인 의견을 들려주신 황정산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승하 교수님께서 2000년대 초반에 『한국 현대시문학사』(소명출판사 공저)에서 ‘산업화시대 시의 모색과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에 1970년대는 “문단의 전반적인 분위기부터가 문학의 시대로 규정하기에 별 모자람이 없는 시대였다.”라고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하여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70년대와 비교할 때 오늘날 문학은 어떤 시대적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교수님의 분석적인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까 김효은 선생님께서 언급해주신 지점과 또 황정산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답변에 지금 드리는 질문에 대한 교집합적인 지점들이 있는 것도 같은데요. 그렇더라도 이승하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오늘날의 문학은 어떤 새로운 시대적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보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 이승하: 그 책은 2019년 2월에 증보판을 냈는데 2000년대의 시문학사(이경수)와 부록 편에 「4차 산업혁명과 한국 시의 미래는?」(권성훈)과 「새로운 독자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이승하)를 넣었습니다.
오늘날의 독자는 ○○○과 같은 카피라이터의 시와 SNS 관리를 잘하는 ○○○의 시, 그리고 웹툰과 웹소설에서 파생된 시를 좋아합니다. 이런 와중에 시집 독자의 일부는 시 낭송가로 가고 일부는 시조 창작으로 가고 일부는 광고계나 방송국으로 감으로써 시의 시대를 더욱더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디카시단의 성장으로 인해 이제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나 80년대는 시인이 존경받고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 시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영광의 시대는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뿐만 아니라 문학의 시대가 가고 영상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 현상이 저는 너무나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대학의 학과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인데 웹소설 강좌를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거든요. 학생들이 워낙 원하고 있으니까, 요청한 거죠. 그런 강좌가 필요하다고. ‘카피론 특강’, ‘편집론’ 이런 취업 관련된 강좌도 하고 있고요. 학생들은 이미 그 ‘세계 명작고전’ 관심이 없어요. 돈이 되는 것, 시나리오, 드라마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시를 쓰고자 하는 학생보다 월등히 많아요. 훨씬 많습니다. 소설도 그냥 정통소설이 아니라 재미난 읽을거리를 쓰는 것이 대세이고, 시대의 분위기가 아이들한테까지 전이 돼 가지고 대충 그러한 상황이죠. 그리고 문단 상황을 보면 점차 ‘디카시’가 상당히 유행을 타고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든 시인이 될 수 있고, 스마트폰 들고 다니면서 몇 자 쓰면 등단하지 않더라도 상금도 타고 그러니까. 그리고 또 이제 시 낭송 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어서 거기에 준비하고 입상하고 낭송가, 낭송 선생님이 되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그리고 또 시가 워낙 어렵고 길고 하니까 시조 시장이 상당히 활성화되고 있는 그런 측면도 있고, 그래서 우리가 그야말로 과거처럼 문인이면 어떤 사회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그건 뒷전이고 오히려 연예인들 비슷한 그런 사람들이 각광을 받는 그런 시대여서 안타깝습니다. 그걸 또 부정할 수도 없더라고요. 저희 학과에서 학부 시절에 시로 등단하고 나서 졸업할 시점에 <○○○> 신춘문예에 소설까지 당선된 친구가 있었어요. 시, 소설로 제대로 등단의 과정을 거친 이 녀석이 작품활동을 안 해요. 왜냐하면 유명광고회사에서 특차를 했어요. 광고인이 돼서 작품을 하나도 안 써요. 광고인이 되기 위해서 문학을 했던 거죠. 저는 참 비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글재주가 있던 그 친구를 다들 부러워했었는데 광고계로 가더니만 단 한 편의 시도, 소설도 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그걸 또 학생들은 상당히 선망하고 있어요. ‘나도 열심히 시 공부해서 나중에 광고계로 가야지’ 라고요. 이러한 현실이 상당히 절망스럽기도 해요.
▶ 이은숙: 이승하 교수님께서 현재 대학생들을 가르치시며 경험하신 것을 토대로 스펙과 물질에 우선순위를 둔 학생들의 인식 속에서 사회에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문학인이나 예술인이 되기보다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어 하는 안타까운 현실, 애석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현 시대적 국면을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의 현실에 대한 교수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공동질문 한 번 드리고 다시 선생님들께 각각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 문학만의 독자적인 언어적 묘미와 문학성을 잃지 않고 내일의 문학으로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을 안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우리와 같이 문예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먼저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나마도 발전할 가능성은 사라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좋은 문예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방법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시는지 선생님들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각자 가지고 계신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 황정산 : 앞서 이승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러한 문제를 얘기하려면 밝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보다 한탄 밖에 안 나오는 게 현실이거든요. 실제로 사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타개해나갈 길을 얘기해보자 질문을 하셨는데 사실 길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문예지는 지금과 어떤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돼야 한다는, 옛날에 가졌던 문예지의 위상을 회복한다던가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 같고 다른 형태를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고요. 예를 들면 아주 그야말로 우리가 몹시 어려운 난해한 문학만 모아서 한다거나 전혀 독자들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문예지, 아니면 정말 독자 지향으로 독자들의 요구대로만 맞추거나 뭐 이런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고 지금과 같이 어정쩡한 형태, 대중들을 지향하면서도 나름의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게 지금 모든 문예지가 가진 아이러니한 딜레마거든요. 문학성이나 문학적 수준을 지키려면 대중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있어서 수준을 지키든가 아니면 과감하게 대중성을 포기하든가 이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너무 좀 극단적인 예를 주장한 것 같은데. (웃음)
▶ 이은숙 : 황정산 교수님 말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래도 대중들을 완전히 외면한 독자 없는 예술인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웃음) 혹자의 말처럼 세계 없는 개인이 없고, 독자 없는 작가가 없듯이 현실이 절망적이더라도 문학성과 독자 양쪽 다 포기할 수만은 없는 것이 방금 황정산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문예지가 가진 아이러니한 딜레마적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이 저도 참 안타깝고 앞전에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육의 구조적인 변화부터 일어나서 클래식 음악이 되었건, 어떤 고전문학이 되었건 이런 것들이 다음 세대에게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 특별한 작가들만 누리는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하겠고, 문예지는 문예지대로 아까 이승하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사회 속에서 도전하고 응전하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이동재 : 냉정하게 생각하면 기존의 우리가 얘기하는 문학이나 문예지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은 다 공감하는 감정 같아요. 근데 조금 뭐 어느 정도 현실에 적응하면서 조금 더 유지할 수 있느냐,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느냐 그런 문제일 텐데 우리가 문학의 역사를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길게 놓고 보면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좀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어요. 언어학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짧게는
5만 년 전부터 언어를 사용하면서 기록문학이 등장하기까지 사실은 굉장히 오랜 시대를 어떤 언어활동, 몸짓 언어를 포함해서 어떤 나름대로 지금 우리가 문학이라고 하는 활동이 거기 있었을 거예요, 분명히. 그리고 역사시대로 들어와서 어느 시점까지 고대, 중세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을 언어에 의존하니까 근대 이전까지 문학의 주 매체는 구비문학이었던 거죠.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문학,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한 어떤 것들이 이제 근대문학과 관련된 것일 텐데 그 직전까지는 구비문학이 주류였고, 근대에 들어오면서 인쇄 매체를 중심으로 한 기록문학이 대세였다가 지금 이제 탈근대라고 해야 할까요, 디지털이 등장해서 좀 아까도 신문기사를 보니까 AI가 쓴 작품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는 코너가 있어서 관심 있게 봤는데, 모든 인간의 문학이라는 개념조차도 역사적인 개념일 텐데 현시대의 문학 개념부터 다시금 개념 정리를 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좀 생각해보니까 일단 기존의 문학 개념이 이렇게 보면 인간의 언어예술이라는 거죠, 거기서 중요한 게 인간인데 근데 4차 산업혁명이 되면 주체가 헷갈려요. 인간과 기계의 문제가 되잖아요. 그러니깐 문학 개념부터 이제 다시 수정해야 하는 거예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문학 얘기를 하려면 문학 개념부터 사실은 다시 정의해야 하는 거잖아요. 인간부터 걸려요. 주체가 인간이냐 기계냐,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 이게 가장 보편적인 기준의 문학 개념일 텐데 이것부터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 언어, 예술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데 인간부터 우리가 다시 고민해야 하고, 어쨌든 지금 뭐 디지털 시대로 가야 하는 이런 역사의 흐름을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고 그래서 아까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던 그게 뭐 결국은 인간, 대중이라는 게 대중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 아니에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인 이해관계를, 돈을 따라갈 것 아니에요. 문학도 그렇게 따라 움직였어요. 순문학이든, 순수문학이든 우리가 뭐라고 얘기하든 간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문학도 결국 돈을 따라 움직였단 말이죠. 뭐가 돈이 될 것이냐. 우리가 흔히 근대문학 초창기에 얘기했던 신문연재소설이든 뭐든 다 사실 지금 우리가 이미 디지털 시대에도 경험하고 있는, 그것이 이제 OTT나 다른 어떤 매체로 왔을 뿐이지 기존의 우리가 이미 근대문학 초기부터 고민했던 문제들이잖아요. 그것이 매체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약간 옮겨가는 건데 이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문학이냐, 기계의 문학이냐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에 와서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얘기하는 기존의 문학을 애도할 수밖에 없는 자리인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어떤 다른 생존할 수 있는 틈을 찾아서 명맥을 유지하면서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해야 한다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 황정산 : 명맥을 유지한다고 하니까 되게 불쌍한 것 같이 느껴지는데요. (웃음) 저는 이런 생각을 좀 해봤어요. 제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제까지 문학이 주류를 형성해왔잖아요, 1980년대까지는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문학은 주류가 아니라 소수의 문학으로 남아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남을 수밖에 없고 거기서 생존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자본주의 시대에서 큰 문화의 주류는 돈을 버는 문화잖아요. 지금은 사실 대중문화가 주류 문화가 되어버렸고요. 그 흐름을 쫓아가는 문학은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다른 매체에. 그럴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항하는 소수자로 끊임없이 남아있는, 예를 들어서 문학이 끊임없이 환경 문제나 생명 문제에 태클을 건다거나 이런 거는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식의 이런 자본주의 주류가 흘러가는 것에 대항할 수 있는 문학 나름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재 : 이 문제에 대해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황정산 선생님 말씀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저는 좀 다시 생각되는 것은 ‘문학이 문화의 중심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그동안 그렇게 착각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러니까 70년대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더 문화판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전체적인 문화판을 보았을 때 문학이 중심인 적이 있었는가 그런 생각이 좀 들어요. 회의가 들어서 그런지, 청년 독서량이나 통계를 놓고 보면 문학이 절대 우리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거예요. 그동안 전체 한국인들 국민 독서량이 두 권이 안 되었고, 최근의 통계를 보니까 성인 독서량이 4.5권인가 나오더라고요. 그건 모든 장르를 합쳐서 얘기하는건데 거기서 문학작품이 또 얼마나 될까. 텔레비전이나 다른 어떤 매체를 보는 것에 비해서 얼마나 대중적으로 접근했는지 그런 것을 생각했을 때 문학이 언제 문화의 중심이었고 예술의 중심이었냐 이런 생각이 좀 들어요. 그래서 예술에서의 중심이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문화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문학이 결코 중심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근대사회에서. 그것부터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 이은숙: 우리가 어떤 기온을 체감하는 온도가 다르듯 문화 속에서 문학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지, 얼마나 중심 역할을 했다고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체감하는 바나 그 온도가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것 같습니다. 사실상 우리나라는 괴테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동시에 들어온 나라잖아요. 근대와 탈근대가 일제라는 외압에 의해서 단시간에 한꺼번에 들어왔고 이후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또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첨단 시대로 짧은 시간에 획기적인 문화의 세례를 받은 민족이다 보니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극한 상황 속에서 잠시 문학이 시대의 중심 역할을 했던 시기를 보냈던 것도 같으나, 현재 처한 현실이 비관적으로 흘러가다 보니 또 이동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역사적으로 문학이 시대를 이끌 정도로 중심인 적이 있느냐는 문제는 각각 여러분들께서 바라보시는 시각에 따라 체감하는 바가 다 다를 것 같고요.
▶ 이동재 : 우스갯소리로 한마디로 한국 근대문학사 100년을 놓고, 자기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사람이 누굴까요? 시든, 소설이든 자기 작품을 아무리 많이 팔았어도 방송작가인 김수현 작가가 돈을 더 벌었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사실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지만, 문화의 중심에 문학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학인들의 착각일 수 있다는 거죠.
▶ 황정산 : 근데 그건 저는 약간 좀 생각을 달리하는데 중심이었다는 거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향유 했느냐보다 그 사회를 이끌어갔던 계층들이 어떤 문화를 갖고 있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조선시대 같은 경우에는 수많은 일반 백성들은 글도 못 읽었을 것 아니에요. 하지만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것은 선비들이 썼던 시문, 글들 이런 것들이 조선시대라는 문화를 형성했잖아요.
▶이동재 : 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문제들도 문학이 안 팔리고, 문예지가 안 팔리는 문제로도 그런 차원에서 얘기하면 그렇게 비관적인 게 아니에요. 우리가 대중문화를 많이 소비하고 그렇지만 경제적인, 물질적인 흐름에 따라서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렇죠? 우리가 돈이 안 돼도 시를 쓰고 자존심을 지키면서 그래도 글로 된 어떤 것들이 우리 사회에 중요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사상적인 어떤 것들을 이끌어 가는 일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죠? 그런 측면에서 선생님 말씀에 다 동의합니다. 제가 어떤 경제적인 수치나 베스트셀러나 갖고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고 문학적인 자존심은 우리가 문학 전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다 보면 그런 착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거죠.
▶ 이은숙 : 문인들끼리의 문학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저도 문화 속에서 문학의 소외, 특히나 시에 대한 대중들의 외면을 말씀드렸는데요. 워낙 현실이 이렇다 보니 이동재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한편으론 황정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러 도전과 응전의 시기를 거쳐 문학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문학이 짧은 시간이었더라도 어떻게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고 또 오늘날 상황을 이렇게 비관적으로 만든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을 직시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모색하는 일을 우리 문예지를 만들어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해 나가야할 것 같습니다. 황정산 교수님, 이동재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하고요.
▶ 김영자 : 전 여기서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어요. 물론 세 분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현실이 절망적이다, 길이 안 보인다 그런 느낌을 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현재 우리가 있는 이 시점에서 오늘 공동질문이 좋은 문예지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과 방법이 요구된다고 생각되는지를 논의하자는 것이었던 만큼 여기서 이제 어떠한 길을, 작은길이지만 모색을 해보는 데 의의가 있지 않나 생각 해봅니다. 근데 저는 언어가 있는 한 문학은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가느다란 희망이랄까 이런 것도 가져보거든요. 어떠한 형태로든 흐름에 따라서 변화할 뿐이고 그 문학의 본정신은 그래도 인류가 있는 한 살아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김효은 : 저는 ‘좋은 문예지’라고 했을 때 그것을 어떤 의미로 우리가 바라봐야 할까를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많이 팔리는 문예지가 좋은 건 아니잖아요. ‘좋은’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먼저 우리가 얘기해봐야 하지 않나. 문학 하는 사람들 자체가 우선은 좀 변해야 하는데도 정말 잘 안 변하는 부류가 문학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좋은 문예지’라 했을 때 굉장히 이상적인 뭔가가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 이은숙 : 김효은 선생님께서 굉장히 핵심적인 문제를 짚어 주셨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좋은 문예지라는 것에 대해서 같이 고민을 해보고 싶어서 이러한 질문들을 드린 것인데, 마침 이렇게 핵심적인 문제를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이승하 교수님, 황정산 교수님, 이동재 선생님, 김영자 선생님 이렇게 여러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종합을 해볼 때 ‘좋은 문예지’라는 것은 먼저 황정산 교수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현대의 변화를 계속 뒤쫓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닌 무엇이 되었더라도 우리가 가진 문학적 결기와 특성을 고수하면서 앞장서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러한 물꼬를 트는 문예지, 물론 어렵겠지만 그런 노력을 하는 문예지가 좋은 문예지이지 않을까, 아까 황정산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고, 또 이승하 교수님께서 과거 여러 가지 시대적 아픔과 어려움이 있었을 때 응전하는 역할을 했던 문예지, 그런데 오늘날 과연 그러한 역할들을 문예지들이 하고 있나 지적해주신 것처럼 엔터테이너적 플랫폼의 역할을 하려 하거나 너무 엘리트시즘적으로 치우쳐서 독자를 외면해버리거나 아니면 반대의 극단적인 부정적인 모습들을 지양하고 아까 김효은 선생님이 지적해주셨던 대로 도무지 변하지 않는 답습적인 모습들, 그런 고인 물 같은 것들을 좀 과감하게 획기적으로 깨는 용기와 결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결기를 가진 문예지가 좋은 문예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황정산 : 편집장님이 뭐 다 결론을 내버렸네요. 『시와산문』이 아주 발전하겠네…. (웃음)
▶ 김효은 : 저는 100호를 넘긴, 『시와산문』처럼 지속가능한 문예지가 좋은 문예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생존도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30년 동안 이어졌다는 것은 지속가능성을 가진 좋은 문예지라는 거니까요. (웃음)
▶ 황정산 : 중요한 것 같아요. 오래 지속 해왔다는 것은 나름의 존재 의미가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모두 웃음)
▶ 이은숙 : 지금 이 말씀 꼭 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음)
문예지의 미래 전망, 나아갈 길
▶ : 갑자기 고무적인 느낌이 막 드네요. (웃음) 여러 귀한 말씀들 듣는 과정에 선생님들과 함께 ‘좋은 문예지’는 어떤 문예지인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어서 저로서는 굉장히 의미 깊은 시간이 된 것 같고요, 덕담까지 들으니 여러모로 참 감사합니다. (모두 웃음)
그럼 이어서 김영자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겨울호 특집 기사로 쓰신 차주일 선생님의 글을 보면 문학계의 어떤 끼리끼리의 문화, 패거리 문화에 대한 강한 우려를 드러내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우리 『시와산문』 창간인이셨던 고 이충이 선생님께서도 그러한 패거리 문화에 의해서 문단의 벽이 높아지는 것을 굉장히 지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술계나 문학계에 흔히 사실상 꼰대 문화, 예술이 또 사사하는 성격도 없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더라고 서열을 정하고 군기를 잡는 문화가 강한 집단이라는 인식이 사회의 주요한 평가인 점, 외면할 수 없다고 보고요. 지난번 사회에서 크게 이슈화됐던 미투 사건 때도 주요한 몇 단체들이 집중적으로 고발됐던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주로 상·하급자 문화를 가진 단체들이었고 그중에 문학계 역시 미투에 연루된 많은 이슈가 있었습니다. 등단이라는 제도에 의해서 거대한 선배와 후배 간의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고 등단지는 어딘지, 몇 년에 등단했는지, 주류인지 비주류인지, 평등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암암리에 이런 급을 나누는 프레임에 메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문인들이 이러한 시류에 구속받지 않고 많은 재능이 있고 필력이 있는 젊은 신진 작가들이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쉽게 활발히 할 수 있기 위해서 문학계가 발전해 나가려면 문예지가 우선하여 달라지고 개선해야 할 점이 무엇이 있을까요? 김영자 선생님께서 고견을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 몇 가지 말씀을 드리면 첫째 저는 문학 장을 넓히려는 그런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금 문학계도 열심히 노력하고는 있지만 가끔가다 보면 굉장히 폐쇄적이라는 것을 저도 실감하고 있어요. 문단의 벽이 참 높구나. 그게 어쩌면 ‘우리가 주류’라는 생각, 또 어쩌면 어느 단체만의 우월감 이런 것에서 비롯된 의식들이 팽배해져서 생긴 벽이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이것을 뛰어넘으려면 우선 ‘나’부터, 문예지 발간하는 출판사부터, 발행인, 편집주간 모든 사람이 열린 마음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게 현실적으로 참 어려워지고 있고 점점 더 높은 벽을 쌓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사회자님 말씀하셨듯이 구별짓기, 우리끼리, 등단 연도, 등단지, 이런 것들로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너무 갈라져 있고, 또 보이지 않는 많은 경계선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복잡한 사회 속에서 끼리끼리 폐쇄되어 있다 하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그런 점들을 해소해 나갈 때 변화가 가능하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보면 ‘문학 권력’이라는 말까지 대두되고 있는데 저는 이런 말들이 참 각박하고 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답지 않은 그런 언어처럼 다가오면서 이를 깰 방법은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자정의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 『시와산문』에서 조그만 일이지만 시도하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면 우리 시와산문도 『시와산문』만의 울타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작은 것이라도 교류를 시작해보자 해서 몇 년 전부터 타 문단, 타 문예지하고 작품 교류를 시도하고 있어요. 그게 작은 일이지만 서로 교류를 시도하다 보면 열린 넓은 마음을 가지는 데 조금은 더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인도네시아 문학 단체하고 저희 시와산문문학회가 교류 관계가 시작됐어요. 그쪽 작품을 우리 지면에 실어주고 우리 작품을 인도네시아 문학 사이트에 소개하고 지면도 나누고 인터넷상에서 서로의 소식도 실어주고 하면서 활발히 교류하고 있는데 이게 하나의 작은 날갯짓이지만 이러한 시도를 통해 긍정적 변화의 흐름을 이뤄나가는 줄기를 이루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문예지 독자의 93%가 창작자들이라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거의 문학 하는 사람들만 관심을 가지고 본다고 봐야 하는데 문학 활동을 하지 않아도 분명 관심 갖고 문학 활동에 도전도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또 어딘가에는 있을테니 좀 더 독자층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 방안을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와산문』이 문예지 간 친목과 교류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그동안 영미문학의 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인도네시아와 국가 간 교류를 통해 우리끼리, 국내 문인끼리 뭉치지 않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김영자 선생님께서 말씀을 해주셨고요. 또 문예지 독자들이 대부분 창작자일지라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어찌 됐든 독자층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김영자 선생님의 말씀에 대해 추가로 말씀하고 싶으신 분 계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 김영자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시와산문』의 앞날이 밝아 보입니다. 제가 『시와산문』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가족적인 분위기는 좋았어요. 그런데 『시와산문』이 잡지도 오래 만들고 사람들도 좋은데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고문님께서 넓히겠다고 생각하시니까 앞으로 큰 발전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되고요. 그 발전하는데 미력하게나마 제가 도움을 주는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웃음) 항상 문예지 하는 사람들 보면 문예지의 주인들은 좋은 문예지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열을 항상 의식하면서 서열로 모든 것을 하더라고요. 작품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떤 ‘레떼루’(레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어느 급수의 사람인가, 이것만 보고 청탁할 때도 그런 사람이 들어가야 문예지가 좋아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해서는 문예지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예지가 발전하려면 정말 시를 잘 쓰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알아봐 주고, 가능성 있는 사람들을 캐낼 수 있는 이런 역량을 갖춰야 하는데 대부분의 편집진들이 오직 그 사람 이름과 어디서 등단했는지, 어디서 시집을 냈는지만을 가지고 판단하려 하고 평가하려 합니다. 이런 걸 하다 보면 다 고만고만한 잡지들이 됩니다. 과감하게 그런 서열을 파괴하고 좋은 작품을 찾는 안목을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 누구보다 레벨 있으신 황정산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니까 레벨이 없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희망적입니다. (웃음) 예, 이승하 교수님 하실 말씀 있으신지요?
▶ : 『시와산문』은 상당히 어찌 보면 전통 지향적이라서 실험을, 모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편집 방향도 그렇고. 기본에 충실하지만 구태의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틀이 너무나 예스러운 틀을 지속하고 있어서 과연 바꿔볼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보통 특집이 좋으면 문예지를 챙기는데 녹색시와 생명시를 표방한다거나 『문예연구』 같은 잡지는 영화를 많이 접목 시도하는데, 이런 변화가 대중의 구미에 맞추는 거지만 어떤 곳은 아예 문학보다는 영화를 중심에 놓더라고요. 요즘 『녹색평론』이 문을 닫았는데 『시와산문』은 생명, 환경, 생태 이런 주제를 가지고 발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식의 개성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하고요. 『신생』 같은 부산에서 나오는 문예지도 그것을 중시하더라고요. 어차피 우리가 인공지능으로 로봇, 코로나바이러스하고 함께 살아가니깐 미래사회, 다른 생명체와의 공존, 소수자 보호, 인권, 기계문명, 신과학 이런 데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선도하는 문예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기존에 『시와산문』에서 해오던 것들을 단시간 내 파격적으로 바꾸기보다는 기존에 하던 것들을 존중하면서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승하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저는 개인적으로 미래사회에 관심이 있는데요, 첨단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이때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이 자동화되고 자동화에 의한 감시체계에 수동적으로 길들어 버린 디스토피아적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곤 합니다. 미래사회의 여러 변화된 요인들과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다면 어떤 존재 방식으로 공존을 도모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고 고민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 주제에 대한 또 다른 말씀 하실 분 있으실까요?
▶ : 저는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데 요즘에 독립 문예지들이 2017년 후에 나타나고 있잖아요. 독립문예 작품들의 대두가 한편으론 바람직하다고 보지만 여러 분들은 어떻게 보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 : 1인 잡지가 많아졌어요. 젊은 애들끼리 모여서 자기네들의 구미에 맞게끔 만드는 잡지들도 게릴라처럼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 : 기존 전통을 깨보고 자기들끼리 뭔가를 해보고 싶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봐야 할까요?
▶ : 좋은 현상이지만 그것도 사실 자기들끼리 모이는 것이고 문제는 접근성인 것 같아요.
▶ : 그게 양면이 있는 것 같아요. 문집들끼리의 폐쇄적인 부분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고, 사실은 잡지가 700종이 넘어요. 국내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가. 그러니까 사실은 이런 현상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거거든요. 다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고 다양하게 나오는 중에서 자기 취향에 따라 접근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보는 거니까요.
▶ : 문학도 소위 ‘덕후화’될 것 같아요. 그래서 젊은 층에게는 팬시화 되어 굿즈와 함께 제공이 된다든지. 그런 경향이 될 것 같고, 다양성은 예전보다 많아진 것 같아요. 문집 같은 경우도 몇 명이 모여서 내고 독립서점에 납품하고.
▶ : 요즘 와서 숫자가 늘어난 건 있겠지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만큼 저변확대가 됐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내가 안 봐도 다른 사람은 볼 수 있으니까요.
▶ : 우리나라는 영화도, 잡지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나, 쓰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데 사실 독자는 줄어든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오히려 저는 발표할 수 있는 기반들이 늘어나는 것은 일단 좋다고 생각해요. 창구가 되는 거잖아요. 꼭 기성 문인들만 발표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오히려 지금 젊은 세대들이 등단하지 않았어도 잡지를 내고, 1인 출판사를 하고 그런 것들이 굉장히 고무적인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 : 이미 잡지가 동인지화 되고 향토지화 되잖아요. 거기서 조금 더 가면 1인 출판이 되는 건데 그거는 뭐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봐야할 것 같아요.
▶ :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 : 최근에도 문예지 창간호가 많이 나오는데 보면 다 비슷하더라고요. 그건 좀 안타까워요. 왜 계속 창간은 되는데 매뉴얼, 필진, 목차는 똑같은지. 그점에 대해 저는 회의감이 좀 들어요. 그래서 획기적인 모험이나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 : 김효은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목차도 매호 마다 같아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판형이나 목차의 틀부터 깨는 개방적인 태도도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요. 아까 이동재 선생님께서 문예지 애도까지 언급하시기도 했지만(웃음), 말씀을 듣다 보니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들을 전환해 볼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번엔 이동재 선생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여러 건축과 철학, 역사서도 인기 도서가 나오고 대중의 열띤 관심을 끄는 것들이 유튜브 영상 속에서도 어떤 도서가 나오면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람들이 강연자로 나와서 강연도 하고 열띤 관심을 끄는데도 불구하고 문학, 그중에서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대중들에게 시가 읽히지 않는, 소외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앞서 다른 선생님들께도 여쭈어보았지만 묘연해진 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라는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그 대책과 함께, 문예지가 어떻게 나서면 좋을지 이번엔 이동재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 아까하고 비슷한 얘기일 수 있을 텐데요. 일단 문화의 중심에서 문학이 조금 멀어지고 있어요. 이건 저도 동의하지만, 문학에 관한 대중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줄어든 거냐… 그건 아니라고 봐요 저는. 발행되는 책의 숫자나 여러 가지 독자들의 평균 독서량이 통계를 보면 늘어났거든요. 문화판에서 상대적으로 문학이 위축된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어서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문학이 지금 소외되고 있다, 사회자께서 지금 질문 한 대로 그중에서도 시가 소외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약간 동의 할 수 없어요. 현재 통계를 보면 드러나거든요. 20~30년 전에 비해서 책의 절대적인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고 문학 관련 도서 판매량도 발행 부수도 늘어나고 있어요. 통계를 보니까 2018년 우리나라 단행본 출판은 13,151권이었는데 그 가운데 시집이 3,012권(39%), 소설 2,174권(28%), 수필 2,207권(28.6%)였습니다. 문예지가 726종인데 그중에 시와 관련된 문예지가 524종으로 2020년 통계를 보니까 20권이 더 늘어났어요.
잡지도 독자 수에 비해서 그 수가 너무 많은 게 근본적인 문제예요. 안 그런가요? 수요보다 공급이 너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현상일 수 있어요. 자본주의 경제학의 기본이죠. (웃음) 그런데 최근 몇 년간 계속해서 잡지 수가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예지가 위축됐다고 느끼는 것은 비평의 위축 현상과 관련된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문학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느끼는 7·80년대를 생각해보면 비평의 위상이 매우 높았던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평적 담론의 목소리가 높았죠. 사회 문제를 둘러싼 거대 담론의 시기였던 점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비평이 문학을 선도하는 것 같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이후 급격히 비평이 몰락하게 된 배경에는 거대 담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던 우리 사회와 학문 및 문학판의 지형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문학 내부의 구성원 또는 대학을 둘러싼 제도의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비평가들의 대부분이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대학과 그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비평가들은 끊임없이 배출되지만 이제 그들에게 비평가로서의 등단은 정규직 교수가 되기 위한 스펙의 일부일 뿐입니다. 시나 소설 쪽도 어느 정도 사정은 마찬가지죠. 정규직 교수가 되고 나면 본격적인 비평은 뒷전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자리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연구실적으로서의 논문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연구실적으로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평론보다는 이왕이면 논문에 집중하는 것이 실용적인 선택이 돼버린 겁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하면 비평 청탁을 거절하게 되고, 심혈을 기울여 쓰게 되지도 않죠.
다양한 디지털매체의 등장을 포함한 매체 환경의 변화와도 상관이 있겠지만 문학의 정체성이나 방향 및 위상에 대해서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던 비평의 추락은 문학 관련 단행권 발행 수의 절대적 증가, 문예지 수의 증가, 그리고 미미하게나마 독자 수의 절대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위축됐다고 느끼는 가장 큰 원인의 하나가 아닌지 싶습니다.
▶ 이은숙 : 단행본 출판 통계와 문학판의 지형변화 등 자세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드린 질문의 요지는 우리 출판인들이나 창작자들 사이에서 문학이 소외되는 것을 얘기한 것이 아니고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13,151권 중 시집이 3,012권으로 출판 시집이 차지하는 비율이 39%라고 말씀하셨는데… 경향신문을 비롯한 자료조사에 의하면. 인기 도서 1~100위 중에 시집이 차지하는 비율이 39%는 고사하고 5%로도 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시가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그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질문드린 것이었고요. 출판 양적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관심을 왜 이토록 못 끄는 걸일까에 대한 문제로 짚어보고자 했습니다. 출판 양적인 부분에서는 과잉된 것이 사실인것 같습니다.
▶ :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수필이나 소설 같은 장르에 비해서 줄어들었다면 말이 되는데 절대량은 증가했다는 거죠. 출판량뿐만 아니라 독서량이 우리나라 국민 독서량의 통계를 보면 그건 증가했다는 거죠.
▶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종합분야, 심지어 문학 분야에서조차 최근 10년간 베스트셀러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의 인기 도서 항목에 시가 단 5%도 차지하지 못했던 단적인 데이터만 보더라도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볼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질문드린 것인데요.
▶ : 동일하게 반복되는데 다른 어떤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상대적으로 위축된 것은 사실인데 문학 소비량의 절대량을 보면 증가한다는 거죠. 때문에 우리가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미 20~40년 전의 문학 관련 소비 독서량보다 지금이 훨씬 더 증가했거든요. 문맹률이 80~90% 되는 사회에서 문학작품을 얼마나 읽었겠어요. 문학이 상대적으로는 위축됐지만, 독서량을 보면 문학에 관한 관심이 절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 선생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다만 제가 드렸던 질문과 선생님의 답변이 살짝 포커스가 맞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 부분을 말씀 드렸고요. 다른 분들은 이동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 : 제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교에서 신입생들을 맞이하게 되면 일단 “시를 쓰고자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학생은 10%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한 학년에 시인 지망생이 한, 두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문예창작학과에 들어오는 학생들 중에서조차 시인 지망생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어요. 판매가 되고 그런 것을 따지기 전에 문예창작 학생들조차 절대다수는 스토리텔링, 방송국 구성작가, 방송국 드라마 작가와 같은 것을 원하는 학생들이 절대다수다. 소설을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드라마 작가를 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창작자들을 배출해나가는 과정에서 보면 시는 ‘쫄딱’ 망했어요. 학생들이 시를 쓰려고 오지 않아요. 적어도 문예창작학과에 가는 학생들은 시를 써서 시인이 되려는 학생들은 없다고 봅니다.
▶ : 오늘 좌담이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다 보니 저도 각 신문사와 언론사들이 낸 최근 10년간의 자료조사를 했는데 하면서 보니 심지어 문학 분야에서조차 시집은 ‘인기 순위’에서 밀려있고 그나마 시집 분야에서만 놓고 봤을 때 어느 정도 다른 책들과 견줄 만큼 판매량이 나오는 시인이 나태주 시인과 류시화 시인이더라고요. 그러한 현실이 좌담을 준비하면서 저도 안타깝게 여겼졌습니다.
▶ : 근데 요즘은 시인이 되는 것이 너무 쉽고 시집을 내는 것도 너무 쉬워졌어요. 꽤 괜찮은 출판사에서 연중 수십 권의 시집을 내고 있으니까 느닷없이 다들 시를 읽지 않고 쓰고 있잖아요. 독자가 되기보다 다들 창작자로서만 길을 가니 문제가 아닌가 싶고요. 시를 읽고 즐겨야 하는데, 사람들이 쓰기만 하니까 성급하게 시집을 내서 너무나 많은 시집이 양산되고 있어요. 그것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제강점기 시절에 고심해가지고 겨우 시집 한 권을 낸 시인이 얼마나 많아요. 또 시집도 못 내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은 등단하면 몇 년 내로 시집을 내버리니까 너무 쉽게 시집을 내고 있지 않나요.
▶ : 너도나도 독자보다 창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진지한 독서를 건너뛰고 우선 창작자로 나서는 이들이 늘고있는 세태를 문제로 지적하시는 것 같습니다.
▶ : 지금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백석의 『사슴』이나 서정주의 『화사집』을 과거에 100권~200권 찍었다면 요즘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도 천 권씩 찍잖아요. 그래서 제가 농담으로 10권 찍어서 한정판처럼 하자는 이야기도 했었는데요. 수요와 공급의 측면에서 보면 여하튼 너무 많은 공급이 이뤄지고 있어요.
▶ : 맞습니다. 공급의 과잉도 문제인 것 같고, 지금 이승하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너도나도 창작자가 되고만 싶어 하는 현실도 문제인것 같습니다. 모두가 창작자가 되려 하다 보니 비교적 독자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까 김효은 선생님께서 김영자 선생님의 질문에 개인 잡지사가 늘어나는 것은 고무적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공감
했던 부분이 그렇게라도 문학에 관심을 두는 젊은이들이 늘어난다면 출판물 생산이 다소 과잉되더라도 그것도 고무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김영자 선생님께 여쭤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계간 『시와산문』은 창간 이래 사회 또는 우리 문화 속에 과연 어떤 가치와 효용력을 발휘했다고 보시는지요. 또 미흡했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을 보완하면서 우리 문예지의 내일을 열어갈 수 있을지 『시와산문』의 회고와 전망을 써 주신 선생님께서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사회자가 ‘『시와산문』의 가치를 어디에 두나.’ 이런 질문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시와산문』을 발행하신 이충이 선생님의 창간 정신에서 가치를 찾아봤습니다. 이충이선생님은 90년대 초 주변에 발표지면을 찾지 못한 창작자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움을 갖으셨고 그것이 창간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창작 욕구가 있고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들을 내가 찾아서 지면을 제공해주겠다.’ 그리고 ‘창작 의욕을 고취하겠다.’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거기에 가치를 두고 싶고요. 효용력을 발휘하기 위해 본인이 창작 교실 열어 문인들이 공부할 수 있는 문도 열어주셨고 매달 셋째 목요일에 목요 카페를 여셨어요. 그때 자료를 많이 준비하셔서 국내 작품도 감상하게 해주고 이야기도 나누고 비평도 하고 유명한 시인을 초대해서 담론도 나누었어요. 그런 구체적인 시도가 있었고 일 년에 두 번씩은 꼭 문학기행을 가면서 문학 세미나 하고, 강의 듣고, 낭독회도 하고 여러 프로그램을 꾸준히 하셨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문학 하는 즐거움을 회원들에게 주었고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창작 의욕도 고취시켜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와산문』에서는 다른 문예지에서 연례행사로 일 년에 몇 명씩 발굴하는 신인문학상을 하지 않으셨어요. 뽑을 사람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공부 좀 더 해서 하자 그러시고 회원을 늘리거나 뽑지 않았어요. 그건 어떤 문단 시류에 무조건 휩쓸리지 않은 본인만의 곧은 정신이라 할까요. 지금은 장병환 이사장님의 1,800만 원 후원으로 신인문학을 제정해서 신인 발굴을 하고 있는데요. 미흡했던 점을 질문하셔서 말씀드리면 사실 그때는 원고료를 지급하기가 힘들었어요. 그게 너무 안타깝고 미안하니까 제가 회장 때 자구책으로 원고료 1,000만 원을 모금해서 조달을 했었어요. 적게는 3만 원에서 5만 원씩이라도 지급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걸 꾸준히 하지 못했던 것, 그걸 계속 이어 나갔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근데 그게 한 2년 하다가 중단되었어요. 이러한 아쉬운 점이 있었어요. 앞으로는 상당한 원고료를 지급할 수 있는 『시와산문』이 되리라고 믿어봅니다. 우수 잡지도 시도해보려 사단법인으로 설립허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충이 선생님께서 건강이 안 좋아지시면서 우수잡지 신청은 못하셨지만 이제 또 되지 않을까 싶어요.
▶ : 『시와산문』의 지나온 길을 자세히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김효은 선생님께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많은 문예지가 영세한 상황에서 힘겹게 출판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요. 앞서 이동재 선생님께 질문드렸던 대중과의 소통을 중심으로 문학이 도외시 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문예지가 앞으로 어떠한 변화와 혁신을 일으켜야 더욱 발전적인 존속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김효은 선생님만의 아이디어와 좋은 의견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BTS의 경우 우리나라 인구수가 작은데 세계를 장악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시는 또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시’를 아는 외국인들은 만나 본 적이 없거든요. 다 드라마 얘기하고 BTS 얘기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아니면 몇 년 전의 싸이의 강남스타일. 그런데 ‘시’는 왜 그렇게 되지 못할까. 그런 것들이 아쉽고 소통 문제라든지, 향유층의 확대라든지, 그런 것들은 조금 더 폐쇄성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러려면 문학의 순수성, ‘순혈주의’ 같은 것들을 지켜서는 변화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시도와 변화가 있어서 그중에 획기적인 하나가 나올 수 있는 거잖아요. ‘변이들’ 속에서도 진화가 있고 발전이 있는 것처럼 저는 많은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문예지도 편집위원을 갖춘, 지금의 세대한테는 이것도 권위일 수 있고 청탁권과 편집권도 권력일 수 있으므로 이런 것들도 완화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저는 다양한 형태의 문예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까 시집이 너무 많이 나와서 공급 과잉이라고 했는데 과잉 속에서 명작이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어떤 시인 같은 경우 100편을 써야 정말 좋은 시 한 편 나오는 시인들도 있거든요. 근데 또 어떤 시인은 남들 100편 쓸 시간에 1편을 갈고 닦아서 쓰는 시인도 있고, 그래서 시인도 다양한 만큼 문예지도 다양하게 많이 나오면 좋을 것 같고요. 또 왜 이렇게 문예지가 안 변할까 생각해보니깐 반대로 안 변하는 게 문예지의 생명력인가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뭔가 안 변하는 게 본질인가?’ 이런 생각도 들 만큼 100년 전 잡지와 지금 잡지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제는 조금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학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지만 진짜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안 변하잖아요. 기득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깨기 위한 노력도 있어야 하고 자정작용도 필요한 것 같아요.
▶ : 저는 지금의 문예지들이 너무 작가나 시인들을 출신에 따라 차별하고 자기들만의 벽을 만들어 자기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문예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기존의 평가에 따라서 시인이나 작가를 고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품을 보는 밝은 눈을 가지고 좋은 작품과 역량 있는 시인이나 작가를 발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은숙: 좋은 말씀 감사하고, 또 말씀해 주신 것을 듣다보니 각 계간지의 편집진에 의한 청탁 이외에 다른 방법도 많이 구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보니까 어떤 문예지는 많은 시인들의 투고도 활발히 받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작품이 투고되었을 때 어느 누가 청탁했느냐, 어느 인맥에 의했느냐,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이 좋으면 지면을 내어주는 운동을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굉장히 귀감을 받았었어요. 편집위원들을 모셔서 각 문예지가 일일이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작가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투고나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아까 김영자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열린 자세로 나아갈 필요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특정 문예지가 자신들의 논리와 지론에 합당한 작가나 평론가를 섭외해서 작품을 게재하고 평가하다 보면 아무래도 각 평론가가 중요하게 다루는 이슈 또는 어떤 시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슈와 맞닿아 있는 작가들끼리 모이게 되고 이런 것들이 결국 부르디외가 말한 것과 같은 ‘구별짓기’로 이어지거나 또다시 ‘끼리끼리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는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특정문단의 이슈에 동의하는 독자층만이 모이게 될 수 있다는 문제를 극복하면서 각 문예지사들이 추구하는 정신을 결기있게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만족시키는 일은 좀 더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황정산 선생님께 마지막 질문을 여쭤보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가르치고 계시는데요.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다음 세대들이 스스로 문학을 향유할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고 또 차세대 문학 독자가 될 수 있도록 교각 역할을 해주시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정산 선생님께서 쓰신 『쉽게 쓴 문학의 이해』라는 저서를 보더라도 우리 삶과 문학이 무관하지 않도록 거리를 좁히시려고 애쓰신 마음이 느껴지는데요. 선생님의 저서들을 읽어보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문학정신은 지금의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 하는 좀 더 바람직한 가치를 열망하고 추구해 가는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정신을 현실 속에서 잘 구현하기 위해서는 선생님께서 바라시는 바와 같이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향유하는 문학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 문예지는 앞으로 과연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마무리 발언으로 우리 문학과 문예지가 나아갈 길과 연결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문예지 나름의 고유한 특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다른 분들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문예지가 비슷한 포맷으로 만들어지고 있어요. 서로 비슷한 것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특화된 분야를 깊이 파고든다거나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여 전반적으로 우리 문학을 풍부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문학이나 문예지들이 나아 갈 방향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대중화의 길입니다. 지금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콘텐츠나 매체 형식을 개발하여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이지요. 최근 소설 등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창작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또 하나의 방향은 ‘현실의 안티’가 되어 대중들이나 독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최첨단 전위적인 문학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엘리트주의적이라고 지적 받을 수 있겠지만 이런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봐요. 이를테면, 난해한 ‘실험시’들이 있어 우리의 시가 항상 새롭게 발전하는 것이지요.
▶ : 의미 깊은 말씀 감사합니다. 황정산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문학인으로서 결기와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소외되기를 자처하는 좁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게 문학인들이 가진 숙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이승하 교수님께 마무리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글을 보면 ‘70년대의 시문학사 흐름’을 말씀하시면서 “시인들이 현실적으로 어떤 신념이나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어떤 표현 방법으로 현실, 오늘의 삶, 일상성을 형상화하고 얼마만큼 삶을 진실하게 인식하여 자신과 세계를 정직하게 탐색하느냐 하는 문제이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다수의 좋은 작품을 게재하며 문예지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문예지들과 같이 저희 『시와산문』도 작가들의 진실한 작품활동을 돕기 위해 오늘날의 시대 흐름에 맞춰 변모해야 할 점은 무엇이며, 또 도전적으로 혁신해야 할 점은 무엇이 있을지 마지막 마무리 발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시와산문』이 창간 30주년을 맞으면서 이런 대담의 자리를 마련해주었으니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간 116호를 냈지만 『시와산문』이 우리 문학에, 문단에 어떤 기여를 했나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다수 문인의 작품을 실어주는 역할은 충실히 했지만, 문단에 새로운 이슈를 제공하는 특집의 새로움이 없었습니다. 판형도 편집 방향도 좋게 말하면 기본에 충실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구태의연합니다. 동네에 있는 군소서점이 전혀 취급하지 않는 두 가지 책이 문예지와 시집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매력이 없는 책이 바로 문예지와 시집입니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영자 님께서 『시와산문』을 발자취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말씀하신 ‘녹색시와 생명주의’를 계속해서 표방한다거나 『문예연구』처럼 영화와의 접목을 시도한다거나 『쿨투라』처럼 영화를 중심에 놓고 문학을 예술의 한 갈래로 다룬다거나 하는 혁신이 필요합니다. ‘이사할 때 문예지부터 버린다’라는 것이 문인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히 행해지는 말입니다. 문단의 사랑방 노릇을 하는 문예지는 차고 넘칩니다. 매호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시와산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종철 씨가 돌아가시자 『녹색평론』이 결국 문을 닫았는데 아까도 언급했지만 부산에서 나오는 『신생』처럼 문예지의 방향을 ‘생태환경’이나 ‘문명비판’에 두는 것도 좋고 인공지능과 로봇,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게 된 세상이니 기계문명, 신과학, 미래사회, 인류의 공존, 평화주의, 소수자 보호, 인권 등을 표방해도 좋을 것입니다.
▶ : 이미 영상 장르 안에 시나 소설이 다 들어가 있어요. 제가 최근에 내려는 시집이 넷플릭스 영화, 드라마 시집인데 하다 보니까 이미 영화, 드라마 속에 시를 능가하는 대사들이 있어요. 웬만한 문학 수준을 넘어섰어요. 그래서 웬만한 수준을 가지고 그들과 경쟁하면 안 되겠다. 옛날에 소설이란 장르 속에 기존의 모든 문학 장르가 다 들어와 있었듯이 이미 영상이라는 매체 속에 인류가 그동안 해온 모든 문학 장르가 다 들어가 있어요. 황정산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7~80년대 문학이 사회적인 담론으로 중요한 화두를 제시하고 사회 문제에 중요한 역할들을 던지면서 문제의식을 가져갔잖아요? 그런 부분이 문학의 본질적인 속성일수도 있는 거죠. 근본적인 인간의 사회 문제들을 파헤치고 그런 것들을 공유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저는 그냥 신흥 소설이던 잘 쓰는 수밖에 없다. 문예지도 잘 만드는 수밖에 없다. 결국은 우리가 작가로서, 시인으로서, 문예지 편집위원으로서 깊이 있는 작품을 쓰고 근본적인 작가 의식을 가지고 승부를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 : 선생님들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문예지의 미래와 전망이라는 너무나 막연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고견들을 말씀해 주셔서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고 또 많은 아이디어도 얻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행의 흐름 때문에 좌담에 응해주신 다른 분께 질문하고 싶었으나 못 하신 부분, 또는 추가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한 말씀씩 하시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문예지의 미래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귀한 시간 가졌는데 94년 봄에 창간된 『시와산문』이 30주년이 되어가기 때문에 이 자리도 마련된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 가지 큰 뜻을 갖고 많은 이야기를 나눠 주셨고, 그것을 통해 우리 『시와산문』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나 미래를 함께 조망 해볼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몇백종이 넘는 수많은 문예지들 가운데 『시와산문』 하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겠지만 그동안 그 어려운 가운데 항구함이 없었다면 오늘이 있지 않았을 것이고, 이승하 선생님 기고문에 그런 내용이 있더라구요. ‘문예지는 끊임없이 계속 나와야 살아남는다.’ 여기까지 온 것도 항구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처럼, 앞으로 물론 고쳐 나가야 할 점이 여러 가지 많이 있겠지만 30년 동안 우리는 뿌리를 내렸다는 것 그리고 줄기도 세우고, 잎도 피웠고, 지금은 꽃봉오리도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또 열매도 맺을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나가면 그러한 날이 오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을 해보면서 어렵더라도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를 열어갔으면 합니다.
▶ :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봐요.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깊이 한 번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왜 이걸 하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글을 오래 써오고 잡지도 오래 만들어왔지만 그러다 보면 왜 이걸 하는지를 까먹을 때가 있어요. 자동화되고 타성에 잡혀서 살다 보면 관습적으로 하게 되더라고요. 왜 내가 이것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한번 깊이 던져 보면 문예지나 문학이 나아갈 방향이 거기서 아마 잡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 저는 지금 문학의 위기라는 문제는 항상 있었던 주제고, 저도 또 그런 주제로 평론들을 더러 쓰기도 했는데요. 담론에 그치면 똑같이 반복되고 탁상공론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중요한 건 변화와 시도와 실천인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문예지의 미래에 관해 얘기하고 있지만 다음 호부터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으면 이것은 또 담론에 머무르게 되는 거잖아요. 이번에 창간된 ○○○라는 잡지가 왔길래 봤더니 거기도 좌담 주제가 문예지의 미래더라고요. 문예지를 처음 시작하는 창간호의 주제가 30주년 주제와 거의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이 문제는 항상 문제로만 남아있나?”란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그 창간호를 보니까 문예지의 미래를 얘기하며 창간이 됐지만 여러 문예지와 달라진 건 없더라고요. 그래서 변화라는 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려면 아까 말했듯이 저희처럼 뭔가 학교에 몸담고 있고, 잡지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변화되어야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최근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많은 것들이 비대면화됐잖아요. 정말 격변의 시대, 이게 정말 위기의 시대였지만 어떤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면 이 전환점 시기에 이제는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문학도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나. 이제는 문학도 꼭 종이를 갖춰서 나와야 한다는 것에서도 벗어나야 하고 아까 말했듯이 고인 물을 좀 방출하고 새로운 ‘약수물’을 받아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렇지만 갑자기 바뀌면 물고기들이 죽잖아요. 조금씩 변화를 모색해야 다 같이 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웃음)
▶ : 의미있는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시기를 겪으면서 데이비드 소로가 말했던 “이제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한탄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재성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더욱 더 문학과 같은 예술을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선생님 말씀처럼 담론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 전환점의 시기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시도해나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쥐스킨트가 그랬잖아요. “우리가 ‘레테의 강’을 건넌 듯이 책을 읽고 단 한 줄도 기억하지 못 할지라도 책을 읽었으면 삶이 변화돼야 해.”라고 『깊이에의 강요』에서 말했듯이 우리도 이렇게 회의를 했으면 좌담에서 무엇을 얘기했지?하고 하나도 기억 못 하더라도 무언가 변화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오늘 아주 무거운 숙제를 안고 가는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요.
▶ : 저는 항상 문제작을 써왔다고 생각하지만 (웃음) 개인적으로 편집위원으로서 아까 한 얘기가 있으니깐 『시와산문』이 한 챕터라도 볼 만한 것이 있는 그런 잡지 구성이 될 수 있도록 편집위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네요. (웃음)
▶ : 한 가지 고무적이었던 것은 작년 여름호에 판권 750권이 다 소진된 바 있어요. 물론 시즌이 지난 뒤 서점에서 반품된 것들이 몇권있긴 했지만 이런 일이 앞으로 더 많아져 독자층의 저변확대도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그로 인해 점차 판권도 더 늘려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시와산문』이 30주년을 향해가는 이 중요한 시기에 오늘 좌담시간이 정말 의미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흡한 질문에도 좋은 답변을 주신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선생님들 모두 오랜시간 함께 해 주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상으로 오늘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