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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복음 11:1-44
4월은 개나리, 진달래꽃, 목련화, 벚꽃 복숭아꽃 살구꽃 등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나면서 온 세상을 꽃대궐로 바꿔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이 소생하는 4월에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소식이며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셨고 우리들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두움에서 나오는 비결을 배우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역사하고 있는 어둠과 슬픔 그리고 운명과 무기력의 무덤에서 나와서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16)
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3km 떨어진 베다니라는 마을에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란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어떤 병든 자가 있었으니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였습니다. 마리아는 과거 어두움에 붙들려 살던 자매였습니다. 정욕귀신, 교만귀신, 안일귀신, 잠귀신, 미움귀신, 사치귀신, 춤바람귀신 술귀신 등 각종 귀신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리며 헤매던 자매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고 각종 어두움으로부터 자유함을 덧입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전 재산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아래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렸습니다(2). 마리아는 참으로 정열적인 자매였습니다. 마르다는 성실하여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활동적인 자매였습니다. 이런 자매들과 달리 오빠 나사로는 몸이 약하여 잔병을 자주 앓았습니다. 그래도 오빠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아주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나사로는 가정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이 안 계셨지만 서로 의지하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 세 남매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그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기도 하셨고 음식을 드시기도 하셨습니다(눅10:38-42).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덜컥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감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갈수록 열이 오르더니 급성 폐렴이 되었습니다. 두 자매는 급히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3절을 보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병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늘 건강하고 평온하고 사업도 잘 되고 공부도 잘하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 수 있고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 문제만 바라보다가 시험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잘해도 암에 걸릴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절망하고 넘어져서 삶을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환난을 통해 믿음이 더욱 연단되고 성숙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순금과 같이 순수한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말씀도 주시고 많은 영적 깨달음을 주시고 우리를 낮추셔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절을 보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마르다와 마리아가 볼 때 나사로의 상황은 심히 위중하고 절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우리들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이제 5,6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데도 당장 달려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특별히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고 나중에는 시신이 썩어 냄새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에게는 큰 고통과 슬픔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해와 불신과 원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를 아시면서도 왜 이틀이나 더 지체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인 부활신앙을 심어주시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영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서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시는 것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좋은 것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기도에 즉시 응답하지 아니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틀이 아니라 때로는 2년, 길게는 20년을 지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다림을 통하여 우리를 만드시고 연단하십니다. 야고보서 1:4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17-27)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중동지방은 기온이 높기 때문에 빨리 시신은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 때가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도전하셨습니다. 그동안은 병이나 마귀에게 도전을 하셨었지만 이번에는 죽음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나가 맞았습니다(20). 그리고 만나자마자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마리아의 첫 마디도 마찬가지였습니다(32). 이를 볼 때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에 대하여 섭섭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이렇게 지체한 것이 못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실제로는 나사로를 더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죽자 의지할 대상을 잃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그들에게 큰 슬픔과 허무를 안겨주고 삶의 의욕과 희망을 앗아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원망한 것이 미안했던지 예수님께 대한 막연한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는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하며 부활을 장래 일어날 일로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미래의 부활은 믿었으나 현재 살아 날 줄은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못하다보니 그녀는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25, 2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여기서 '나'는 'I am', 즉 현재형으로 씌여있습니다. '믿음'이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항상 현재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현재 예수님을 믿고 능력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우리의 소망이 바뀝니다. 우리의 육신은 나날이 쇠약해집니다. 탄력 있던 피부가 40-50대가 되어 감에 따라 주름이 조글조글 해집니다. 이렇게 되다가 사람은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육신의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찬란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왜 생명보다 부활을 먼저 언급했습니까? 여기서 '부활'이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는 부활의 권세를 지니신 분이심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먼저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게 되었습니다. 영적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육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살게 됩니다. 또 예수님이 살아서 믿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는 둘째 사망 즉 영적 죽음이 없습니다.(계20:6)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영이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성령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골짜기에는 마른 뼈가 심히 많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마른 뼈에게 명하도록 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그러자 마른 뼈들이 그 음성을 듣고 뼈가 서로 들어맞아 연결되더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여 살아 일어나서 큰 군대를 형성하였습니다(겔37:4-10).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은 영적으로 보면 죽어서 말라 비틀어진 뼈들입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을 때 생명력이 충만하여져서 박력 있고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을 때 어둡고 운명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밝고 환한 믿음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생기를 받을 수 있습니까?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셨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실제로 이 세상에 오셨고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3일 만에 살아나신 것을 믿으면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 세계는 빛의 세계요, 기쁨과 희망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더 이상 허무에 시달리지 않고 운명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슬프고 서러운 인생을 살지 않고 운명을 개척하며 창의적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2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며 부활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믿는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셋째, 우리도 예수님 말씀 듣고 무덤이 문을 열어야 합니다. (28-44)
28절을 보면 마르다는 신앙고백을 한 후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마을 어귀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아래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29-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 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슬픔의 눈물과는 다른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까닭은 죽음의 권세에 굴복 당하여 우는 인생들이 불쌍해서 나온 사랑과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깊이 동정하셨습니다. 그 분은 인생의 질고를 아시고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삯인 죽음때문에 인생들이 당하는 고통과 횡포에 대해서 슬픔을 느끼셨고 사망권세에 대하여는 비통하게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38,39a). 그러자 방금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b)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마르다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 마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순종하여 믿음으로 무덤돌문을 옮겨 열어야 했습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자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41). 그 후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44).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죽음은 즉시 사로잡았던 나사로를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생명을 주실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 부활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딤후1:1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나사로의 상황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두움속에서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지배아래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오셔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명하십니다. "경수야, 나오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허무와 절망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운명과 무기력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죽음의 세계에서 뛰쳐나와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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