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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궁궁통1
일제 강점기 때
김일성은 나라 밖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1945년 9월 18일에
들어왔습니다.
김일성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고향이었습니다.
김일성의 고향은
‘104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마침 김 교수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평양 부근의
송산리 고향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아버지는
동네의 여러 청년을 불러서
자신의 집에서
조찬 모임을 마련했습니다.
나라 밖에서
막 돌아온
김일성에게
국내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려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김형석(철학과) 연세대 명예교수는 25세까지 일제 강점기를 경험하고 광복 후에는 공산 치하의 북한도 몸소 경험했다. 김성룡 기자
일본에서 막 돌아온
젊은 김형석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왔으니
보고 배운 것이
많을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날
김형석 교수는
김일성의 집에서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김일성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궁궁통2
김형석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그때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김일성은 나보다
여덟 살 위였다.
게다가 나와 같은
초등학교 선배였다.”
그 자리에서
김형석은 김일성에게
물음을 던졌습니다.
“이제 우리나라가
해방됐는데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젊은 시절의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을 안고 있다. 김형석 교수는 김일성과의 만남과 대화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연합뉴스
그러자
김일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첫째 친일파 숙청,
둘째 전 국토의 국유화,
셋째 모든 산업시설의 국유화….”
김일성은 그렇게
6가지를,
암기하고 있는 걸
오차 없이
풀어내듯이
줄줄 이야기했습니다.
그걸 본
김형석 교수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숙제 외운 걸
줄줄 읊듯이 하더라.
아, 저렇게
기계적으로 공식을 외우듯이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이
공산당원이구나.”
김 교수는
그때 그렇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고민의 공간,
고뇌의 여백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