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5)-1
히로시마(廣島)재판의 수수께끼(謎)
대기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칙사가 파견되어 「조속히 입궐하라」고 전해진 것은 10월8일 오전 8시 30분경이었다. 대원군은 건청궁으로 갔으며, 고종, 미우라 공사와의 3자회담이 시작되었다. 미우라가 일본 수비대까지 동원해서 왕궁을 점령한 목적은 민비 암살 뿐 아니라, 그 다음의 친일정권 수립이다.
미우라 공사는 사건 전에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를 통해서, 대원군에게 승낙을 받았다는 「약조(約條)」에 따른 3통의 문서를 왕에게 보이고, 승낙을 재촉했다. 왕은 승낙하고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서 미우라는, 내각 개편을 주로 하는 선후책을 제시했다.
김홍집(金弘集),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등 3사람을 중심에 앉히고, 죽은 궁내대신 이경식의 후임으로는 예정한대로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李載冕)을 임명, 그 밑에서 실권을 잡는 궁내협판에 친일파인 김종한(金宗漢)을 두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러시아공사를 국왕으로부터 멀리 하기위한 포석이다. 또 훈련대가 왕궁경호를 하도록 할 것도 결정했다. 일찍이 박영효가 이것을 시도하다가 실패 했으나, 이번에는 무력에 의한 성공으로, 2일 후에는 시위대의 병사만이 훈련대에 편입되었다.
국왕, 대원군, 미우라 공사의 회담이 시작될 무렵부터, 암살 실행대의 민간인은 삼삼오오 왕궁을 삐져나갔다. 친일정권 수립은 그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 무렵 광화문 부근에는 왕궁의 사건을 안 대중이 무리지어, 이 광장으로 통하는 도로는 밀어닥친 사람들로 극도로 혼잡했다. 왕궁에서 나온 일본인 폭도들은 그 이상한 모습을 구경꾼들의 시선에 들어내면서 걸어갔다.
그들을 목격한 것은 대중들뿐이 아니었다. 코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 秀雄)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때 러시아 공사와 미국 공사가 사변정보를 듣고 동행해서 입궐했다. 지사 일행중, 빨리 왕성을 나온 자는 두 공사와 종루가(鐘樓街) 근처에서 만나고, 늦게 나온 자는 왕성 안에서 그들과 얼굴을 마주쳤다. 국제관계 문제로 되었기 때문에, 두 공사가 사건과 일본인과의 관계를 주장하고 물러서지 않은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둘러 결행 일을 앞당긴 무리가 끼친 것인가, 또는 계획이 처음부터 거칠었던 것인가. 분명히 양쪽이겠지만, 더욱이 막바지가 되고부터 “암여우 사냥”이야기를 듣고 예사로 이유도 없이 분발하고, 멋대로 참가한 자들이 있었으므로, 한층 통제가 문란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라”와 같은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암살에 관여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일본 수비대에 대한 일본 측 자료를 읽으면, 대원군 가마를 앞뒤에서 지키고 광화문으로 침입한 제1중대만 가담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다른 중대도 참가했다. 조선 측 조사에 따르면, 건청궁에 가장 가까운 북쪽의 신무문(神武門)을 비롯하여 각 문으로부터도 침입했다. 그러나 그 실수(實數)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관도, 7일 밤, 호리구치(堀口)관보나 오기와라(荻原)경부와 같이 용산으로 갔던 6명만이 참가한 것이 아니다.
『일한외교사료∙5 한국왕비살해사건』(市川正明 編, 原書房)에, 「부록3」으로 어느 순사의 수기가 정리되어 있다. 그는 대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기와라(荻原)경부로부터 <사복을 입고, 도검(刀劍) 또는 피스톨을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해서 이유는 모르는 체, 아리마(有馬)순사와 같이 남대문으로 갔다. 머지않아 오기와라 경부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와서, <곧 대원군 일행이 올테니까 같이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를 살해하여 우물에 던져 넣어라. 장정(壯丁) 4, 50명도 같이 가는데, 장정들에게 뒤처지지 말라>고 해서, 용감하게 실행대에 참가했다.」
같은 경위로 실행대에 가담한 순사가, 달리 몇 명이나 더 있었는지는 불명이다.
또 이 순사는 「한 장정이 느닷없이 왕비의 뒷머리를 칼로 치고」. 다시 「누구도 왕비의 얼굴을 알지 못하므로, 아리마(有馬)순사가 왕태자와 여관(女官)감독을 데려와 보였는데, 역시 그게 왕비였다」고 말했다. 코바야카와(小早川)를 비롯, 일본 측의 자료는 「궁녀에게 유체 확인을 시켰다」고 되어 있는데, 이 순사의 「왕태자」는 조선 측 조사와 일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비대도 경찰도, 암살에 관여한 인원수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일본인 총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민간인으로 국한해도, 히로시마에서 재판을 받은 48명보다 훨씬 많다는 것은 확실하다.
미우라 공사가 경복궁에서 공사관으로 돌아오니,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던 우치다(內田) 영사가 “대단한 소란 이었군요” 라고 했다. 일의 중대성에 그는 가슴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나 미우라 공사는 아주 좋은 기분으로 “아니 이로써 조선도 드디어 일본 것으로 되었다. 이제는 안심이다”하고 밝게 답했다.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 세력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왕비의 목숨을 끊은 지금, 벌써 조선은 일본의 천하----라는 단순하고 낙천적인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의 전망이 이 말에 나타나 있다.
일본정부가 이 사건을 안 것은 쿠스기(楠瀨)중좌로부터 카와카미(川上)참모총장 앞으로의, 10월8일 오전 8시50분 발 전보에 의한다. 그러나 쿠스기는 「대원군이 훈련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갔다」고, 미우라 공사가 줄거리를 써 준대로 보고했을 뿐이며, 그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암살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어서 신노(新納) 재 조선공사관 부 무관으로부터 이토(伊東) 해군 군령부장 앞으로, 9시20분발 전보에서 「국왕무사, 왕비 살해되었음」이라는 보고였다. 불가해한 것으로 신노(新納)는 이 전보 이전에 역시 이토(伊東) 앞으로 「지금 훈련대, 대원군을 받들고 함성을 치면서 대궐로 쳐들어감」이라고 타전하고 있으나, 그 발신 시간인 6시32분은 정확히 일출 시각이다. 대원군은 아직 왕궁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여하튼 이것이 제1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낮을 지나도 외무성에는 미우라 공사로부터의 보고전보는 오지 않는다. 오후 1시에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 公望) 외무대신 임시 대리는 미우라 공사 앞으로, 참모본부에 대한 무관의 보고내용을 말하고 「사실을 지급전보로 보고해 주기 바랍니다. 동시에 일본인이 이에 참가했는지 아닌지도 보고하기 바랍니다.」라고 타전했다.
사이온지는 그 30분 후에, 미우라의 오전 11시발 전보를 받았으나 그 내용은 「대원군의 쿠데타」이며, 「왕비는 행방불명」이라는 것이었다. 줄곧 계속해서 전보가 서울과 도쿄(東京)간에 교차하였는데 그 주된 것을 들면,
사이온지로부터 미우라에게, 오후 2시30분 발 「정부훈령 있기까지 우리 수비대를 움직이는 일은 위험하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로부터 스기무라 준(杉村 濬) 앞으로, 오후 2시45분에, 사변에 대하여 6가지 질문을 보냈다. 「일본군은 훈련대를 음으로 양으로 교사하지 않도록」 「오카모토(岡本)는 귀국의 길에 오르도록」 등----. 이에 대해 스기무라(杉村)의 답전은 그날 밤 늦게 도쿄에 도착 하지만, 미우라의 참모격인 그가 진실을 보고할 리도 없다.
오후 3시30분, 미우라는 사이온지에게 다음과 같이 답전을 보냈다.
「왕비의 소재 지금까지 상세하지 않고 아마도 살해 되었을 것임. 일본인이 가담했는지 아닌지는 조사 중임」
이어서 미우라는 3시20분에, 사변 후의 조선 신내각의 면모를 보고했다.
이날 오후 3시 반쯤, 러시아 공사 베벨을 비롯하여 주 조선 각국공사가 일본공사관을 방문하고, 오늘 아침 사변에 대하여 미우라 공사를 힐문했다. 제너럴∙다이와 사바친의 목격담을 듣고, 또 그들 자신, 무기를 가진 일본인이 왕궁에서 나오는 것을 봤으므로, 그 힐문에는 확실한 뒷받침이 있어, 미우라의 궤변은 통용되지 못했다.
베벨 등은 “이 사변은 대단히 중대한 사안으로 이대로 봐 넘길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우치다(內田) 영사는, 미우라 공사가 의기 쇠침했다고 썼다.
미우라는, 이미 일본에 대한 보고를 거짓말로만 굳혀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깨달았을 것이다. 사이온지에 대한 오전 10시32분 발 전보에는, 「오늘 아침 사변에 일본인 가담 유무 조사방법은 잘 알고 있음. 표면상 조선인의 일이면서 이면에는 다소의 일본인이 가담하고, 연이나 본관이 묵시한 것임」이라고 말해, 그때까지의 주장을 흐트러지게 했는데, 그러나 아직 “대원군 쿠데타설”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시 미우라는 오전 11시55분발로, 외국 공사들의 내관 전말을 상세히 보고했다. 어쨌든 외교 루트로 일본에 알려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미우라의 전보가 도쿄에 도착한 것은 9일 오전 4시, 처음부터 미우라의 보고에 의심을 기지고 있던 정부는 이튿날인 10일, 사건 조사를 위해 외무성 정무국장 고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郞)의 서울 파견을 결정한다. 정부가 무엇보다 우려하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한 러시아 등 제 외국의 강경한 태도이며, 고무라에게 정부의 방침에 따른 처리를 하게하고, 이 이상의 사태 분규를 방지하는 것이 참된 목적이었다.
미우라는 사건 처리 계략으로서, 일본정부에 대해 거짓 보고를 하고, 조선정부에도 강하게 압력을 가하여 자기의 책략에 동조하게 하고, 사건에 관여한 일본인에게는 입막음을 하며, 또 일본의 신문 특파원들에게는 미우라의 계략에 따른 보도를 하도록 했다. 10월9일자 『漢城新報』는 일한 양국어로 사건을 크게 보도했으나, 그것은 코바야카와(小早川)나 쿠니토모(國友)의 원고에 스기무라(杉村)서기관이 가필한 것이다.
미우라의 보도통제는, 구미 기자단의 통신에도 미쳤다. 『뉴욕∙헤럴드』특파원 콜로넬 코크릴은, 제너럴∙다이의 목격담을 중심으로 한 장문의 기사를 타전하려고 했으나, 미우라는 전신국에 압력을 넣어 이것을 깔아뭉갰다. 이것이 일∙미간에 큰 문제가 되었고, 일본정부는 미국정부에 양해를 구했으며, 나아가 내각서기관장 이토 이요지(伊東 已代治)가 코크릴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한 한 장면까지 있었다.
코크릴의 기사가 게재된 뉴옥∙헤럴드 지는,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존되어 있다. 날짜는 1895년10월15일로, 민비가 죽은 지 7일 후이다 (권두화 참조). 이 기사에는 민비의 컷(cut)이 붙어 있으나, 당시 미국인에게는 조선왕비의 모습을 상상하는 단서도 없었던 듯, 청국 향비(香妃)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용모를 비롯하여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이 꼭 닮아있다. 향비(香妃)는 18세기 중반 변경지방 카슈가르(Kashgar/역자 주:중국 신강위구르 자치구 서부의 오아시스도시)에서 청국 건륭제(乾隆帝)에게 보낸 “향기를 풍기는 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