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위를 떨치는 폭풍에도, 경이적인 탁류에도, 이 이상은 무리라고 해도 "나는 그리 간단하게 포기할 수 없다!" 고투하는 동지가 있기에, 총무는 계속 전진했다. 사제는 '무한한 승리의 사슬'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회장에 취임한 후, 일본에서 재해가 사라지기를 기원했다.(1961년, 미에) 이세만태풍이 할퀸 자국은 어마어마했다. 1959년 9월 26일 밤, 태풍의 최대풍속은 50미터였고, 30미터 이상의 폭풍권은 반경 300킬로미터에 달했다. '초대형 태풍'이었다. 그 중에서도 주부는 엄청난 재해를 입었다. 아이치에서는 사망자가 3000명을 넘어섰다. 또 부상자 2만 8400명, 가옥 전파와 유실은 2만 8000가구. 끔찍한 대참사였다. <수필 인간세기의 빛>에 나와있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미에현 욧카이치방면으로 가기로 즉각 결정했다. 대난이 일어났을 때 영원히 번영하는 승리와 복운을 열고, 자기 자신의 혼을 스스로 죽이면 안된다. '용기'을 주어야 한다. '꿋꿋이 살 수 있는 힘'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태풍의 맹위는 나가라가와에 걸치는 교통을 끊어놓았다. 무서운 탁류가 굉음을 내며 가로막고 있었다. 모두 망연자실해 '이 이상은 무리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이케다 선생님) 그리 간단히 포기할 수 없었다. 강 저편에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 못할 리가 없다! 우리 혼과 혼은 무한한 승리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당시 저는 아직 입회하지 않았지만 이웃에 살던 학회원이 "무슨 일이 있으면 제목을 부르세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태풍이 불던 밤, 바닷가에 위치한 저희 집으로 해일이 밀려왔습니다. 저도 파도에 휩쓸렸는데, 그때 세탁할 때 사용하는 나무 대야가 떠내려 왔어요. 저는 그 대야에 올라탔습니다. 몇 번이나 파도에 전복될 뻔 했지요. 그때마다 이웃이 가르쳐준 대로 정신없이 제목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무사히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저녁 8시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컴컴한 폭풍의 바다를 이리저리 떠다녔습니다. 이튿날 아침, 정신을 차려보니 바닷가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절규하듯 제목을 부르느라 목이 완전히 쉬었지만, 목숨은 건졌지요. 어부 말에 따르면 이세쪽에서 떠내려오면서 조류를 잘 탄 덕분에 살았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이유가 학회원이 가르쳐 준 대로 제목을 부른 덕택이었다고 실감한 저는 바로 입회했습니다. 태풍이 일어난 지 3일이 지난 9월 29일. 간사이 남자부 간부들이 삽과 건빵 등을 짊어지고 미에로 달려왔다. 기소가와, 나가라가와 등이 파괴되어 아이치와 미에를 연결하는 철도망이 불통이었기 때문에 총무(이케다 선생님)는 간사이에서 구조대를 보냈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학회본부에서 곧바로 각지의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그곳으로 청년부 간부들을 속속 파견해 구호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 (<수필 신 인간혁명>) 이케다 선생님은 간사이 청년부에게 늘 지도하셨습니다. "청년부는 도다 선생님의 무사입니다. 일단 유사시에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무사입니다. 청년부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학회나 회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열일을 제쳐두고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청년부입니다." 이세만태풍 때, 저는 그 무사정신을 떠올리며 미에의 구호활동에 참여했습니다.(중략) 도착했을 때 주변을 보니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한 인간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아연해 했습니다. 그러나 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학회 동지나 지역에 사시는 분들에게 "부디 지지말고 힘을 내십시오!"라며 주먹밥을 나눠주거나 다다미를 치웠습니다. 어느새 장화 속에도 흙탕물이 들어와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이세만태풍을 통해 제가 학회원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가슴 뜨겁게 느낀 적은 간사이에서 구호물자가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수건이나 의류는 물론, 비누와 치약, 칫솔 등의 일용품까지 산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게다가 구호물자는 온통 새 것뿐이었습니다. '오사카 동지는 굉장하구나. 이렇게 신속하게, 이렇게 많은 물자를 보내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아야 한다.' 하고 당시 심정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훗날 그렇게 신속하게 손을 써주신 분이 바로 이케다 선생님임을 알았습니다. 혹독한 현실에 맞닥뜨린 저희에게 보내는 깊은 진심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태풍이 왔을 때, 히가시도미다에 있는 단층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집은 여기저기 침수되고 연립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근처 2층집으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거기도 흙탕물이 밀려와서 배를 탄 것처럼 흔들거렸습니다. 모두 공포에 떤 나머지 염불을 외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미 신심을 하던 저는 "염불을 하면 안 돼요. 남묘호렌게쿄를 불러야 합니다!"라며 필사적으로 제목을 불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제목을 불렀습니다. 어린아이가 탁류에 빠졌을 때도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 덕분에 화를 면하는 등, 다들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흙투성이가 된 집안정리는 오사카에서 달려온 청년부원들이 부모형제처럼 아주 친절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만나서 격려하고 싶다! (1982년, 긴키일본철도역) 노선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아직 열차운행표는 몹시 혼란했다. 결국 간사이를 돌아가는 우회노선을 택해 열차를 갈아타며 미에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 긴키일본철도 욧카이치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었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전진했다. 굉장히 멀리 돌아가기는 했지만, 강을 건너지 못해 기후에서 간사이로 들어갔다가 다시 그곳에서 미에로 가는 경로를 택해서 고난과 싸우는 벗의 곁으로 서둘러 갔다."(<수필 신 인간혁명>) 총무(이케다 선생님)의 가슴속에는 '동지를 이대로 불행에 내버려 두면 안 된다.'하는 강한 마음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저도 사카이 씨 철물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학회활동을 하러 나가는 사카이 씨 부부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상한 종교를 시작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카이 씨 부부에게 "창가학회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온다"라는 말을 들어도 가게를 치울 생각뿐이었지요. 이케다 선생님이 청년부 몇 명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잠시 후 많은 사람을 격려하신 후였는지, 아무튼 2층에 있는 사카이 씨가 "이케다 선생님이 부르시니 2층으로 올라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요. 선생님은 저에게 "지지 말고 힘내세요."라고 자상하게 말씀하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일개 종업원에 불과한 저까지 격려해 주신 선생님 인품에 학회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습니다. 그 후 이케다 선생님 회장 취임을 기념해 입회했습니다. ㅡ이케다 선생님의 훌륭함에 또 한 번 경탄한 때는 17년 후인 1976년 7월이었습니다. "사카이 씨 댁에 직원이 계셨지요? 만약 건재하다면 근행책을 드리세요."라는 선생님 지시로 낙관이 찍힌 기념 근행책을 받았습니다. 만남이라 해도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아직 입회하지 않은 일개 종업원인 저를 17년이 지난 훗날에도 기억해 주셨습니다. 위대한 스승을 만난 복운에 코가 찡했습니다. <수필 신 인간혁명>에도 당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미에의 중심자로서 욧카이치에 사는 사카이 마사카즈 씨 댁을 먼저 방문했다. 동지들은 모두 커다란 충격과 슬픔 탓인지 아무런 말도 없고, 눈물도 흘리지 않고, 피로가 많이 쌓인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눈빛은 모두 진지했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대악(大惡)이 오면 대선(大善)이 온다'라는 성훈을 배독하면서 강하게 힘주어 말했다. '설령 집이 파괴되고 가재도구가 유실되었어도 신심만 무너지지 않으면 반드시 변독위약할 수 있습니다. 신심만 열심히 한다면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광마와 같은 폭풍이 아무리 엄습해도 절대로 지지 마라! 새롭고 영원한 활력을 지닌 무한한 생명력으로 반드시 승리의 황금성을 쌓을 수 있다. 지지 마라, 절대로 지지 마라! 오래된 왕좌(王座)가 다 무너졌어도 고뇌의 밑바닥에서 결연히 딛고 일어나, 설령 작을지라도 새로운 환희의 왕좌를 만들어야 한다!" 구호대책본부를 차린 사카이 씨 댁에서 이루어진 만남. 총무(이케다 선생님)는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벗도 있다는 사실, 동지를 격려하려고 분투하며 뛰어다니는 헌신적인 멤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장 고생하는 벗의 곁으로 가자." 총무는 그렇게 결심했다. 저희 집은 태풍피해를 면했지만 가업인 양복점이 반년 전에 도산해 가난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신심하지 않는 사람은 손해를 봅니다. 신심하는 사람은 최후에 반드시 승리합니다." 힘찬 말씀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버지 손을 꽉 잡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와서 "훌륭한 분이야. 선생님 손의 온기가 잊혀지지 않아."라고 감동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은 저희 집이 숙명전환하는 데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 후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양복점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0여 년 후, 미에문화회관에서 다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버지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재기를 진심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총무(이케다 선생님)는 막대한 재해를 입은 욧카이치 도미다지구, 가와고에초, 구와나시(市) 등이 위치한 북부 해안지역으로 이동했다. 도로 양쪽에는 지붕이 날아가 버린 집들과 탁류로 벽이 무참히 뚫려버린 집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도로 바닥에는 뿌리채 뽑힌 나무, 벽토(壁土), 기왓장 등 쓰레기가 쌓여 산이 생겼다. 공터에는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옷가지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생생한 재해의 양상이었다. 구와나방면으로 가는 국도 1호선은 가는 곳마다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총무가 탄 차는 계속 우회하며 목적지를 향해 갔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자고 결심하고 사카이 씨 안내를 받으며 특히 피해가 큰 도미다, 도미스하라, 가와고에, 그리고 구와나로 향했다. 눈앞에는 세찬 탁류가 흐르고 있었다. 태풍이 통과하는 시간과 이세만의 만조시간이 겹쳐 이 연안부의 피해는 비참할 정도였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길을 가면서 여러 동지를 만났다. 그때마다 '정열로 일어서라! 단호히 새로운 길을 만들자!' 라고 계속 힘주어 말했다. 그때 재기를 다짐하며 진지한 결의를 빛낸 벗의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수필 신 인간혁명>) 반장이던 마쓰자키 씨가 숨을 헐떡이며 저희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조금 있으면 이케다 선생님이 오시니까 지금 곧 국도로 가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달려갔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하러 간 듯합니다. '이케다 총무라니, 어떤 사람일까? 좋아, 가 보자.'라며 국도 1호선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도미다와 가와고에초 중간에 위치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저쪽에서 가옥 파편 등이 흩어져 걷기도 힘든 거리를 헤치고 이케다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첫인상은 '시원시원한 눈매를 지닌 당당한 분이구나.' 했습니다. 오랜 세월 접객업에 종사해서 여러 사람을 봤지만 이렇게 왕자와 같은 인품을 지닌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하얀 와이셔츠, 검은 바지, 검은 장화 차림으로 나타나신 선생님은 저희에게 여러 차례나 "끔찍하군요. 정말 참혹해요."라며 한숨을 지으셨습니다. 그 말씀에 자애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힘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수난(水難)을 만날 업(業)도 이번에 끊어졌으니 이젠 괜찮습니다." "이젠 괜찮다."라는 한 마디가 가슴에 박혔습니다. 헤어지기 직전, 선생님은 "절대로 퇴전하면 안 됩니다."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때는 입회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퇴전'이라는 말뜻도 잘 몰랐습니다. 올해로 신심 50년이 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신심을 지속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때 이케다 선생님이 하신 '한 마디' 말씀 덕분이었습니다. 사카이 씨에게 선생님과 구와나 피해현장에 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와나의 마치야바시를 통과할 때였습니다. 사카이 씨는 말했습니다. "그때 이케다 선생님과 차를 함께 탔다. 구와나에 들어서면서 나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여기가 시구레 오차즈케(어폐류와 녹차로 만든 음식)로 유명한 구와나의 다이묘(관직명)가 살던 조카마치(일본에서 무가시대에 다이묘의 거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 구와나입니다. 조카마치인 만큼 인습이 뿌리깊어 염불도 강해 좀처럼 포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케다 선생님이 엄하게 지적하셨지. '당신이 그렇게 마음먹고 있으니까 광포가 진척되지 않습니다. 일념을 바꾸면 얼마든지 포교도 할 수 있고 광포가 발전합니다.'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하면 본래 무작의 삼신이 염념에 일어나느니라. 소위 남묘호렌게쿄는 정진행이니라.'(어서 790쪽)는 <어의구전>어문을 인용하며 '열심히 제목을 부르며 분발하세요.'라고 격려해 주셨다. 자애 가득한 한 마디였다. 나는 '장으로서 지녀야 할 책임감'을 배우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심으로 고생한 사람이 최후에 승리합니다." (1981년, 오이타) 이세만태풍으로 전국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약 5000명, 부상자는 약 3만 9000명을 헤아렸다.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이는 무로토태풍(1934년), 마쿠라자키태풍(1945년)의 피해를 훨씬 초월한 사상 최대의 피해였다. 특히 아이치와 미에현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4500명이 넘어 전체의 90퍼센트가 넘었다. 10월 25일에는 오후 1시에 나고야시 히가시구에서 이세만태풍 희생자를 추선하는 '합동 위령법요'를 차분히 거행했다. 아이치와 미에, 기후현의 학회원과 돌아가신 가족 분들을 추선하는 법요였다. 지난해의 '가노가와태풍'에 이은 두 번째 '합동 위령법요'였다. 이 법요는 이케다 총무가 지휘했다. 당시 총무는 당시 심경을 소설 <신 인간혁명>에 이렇게 썼다. "신이치는 희생자의 명복을 기원하고 주부의 동지가 하루라도 빨리 고난을 극복하기를 일심(一心)으로 염원하며 홀로 다짐했다. 내 생애는 이 존귀한 불자의 행복을 위해,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동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총무 행동에 주부의 동지는 일어섰다. 그대도 투쟁하라! 나도 투쟁하겠다! (2001년, 도쿄) 아버지가 이세만태풍 때 들은 선생님 지도를 종종 말하셨습니다. "주부는 이세만태풍을 계기로 숙명전환했다." "이 태풍으로 불법의 정사(正邪)가 분명해졌다." 아버지 말에 따르면 이세만태풍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동지들의 체험담을 많이 듣고 불법의 위대함을 주위 분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여자부원은 '앗'하는 사이에 탁류에 휩쓸렸는데 전혀 헤엄을 치지 못해 익사할 뻔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깜깜한 밤중에 무언가를 붙잡고 매달려 발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도착해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알고보니 그것은 개의 꼬리였습니다. 피해가 컸던 나고야의 미나토구에서는 돌아가신 동지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피난장소에서는 학회원과 미입회 멤버가 함께 행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불법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홍교면에서 전국을 제패할 수 있었지요. 정말 변독위약을 실증할 수 있었습니다. "고생한 사람일수록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정말 이케다 선생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고 몇 년 뒤, 나고야에 사는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세만태풍으로 재해를 입고 어린아이들이 배가 고파 울고 있었다. 그때 학회원이 보트를 타고 와서 '주먹밥'을 나눠주었다. 주먹밥 한 개를 조금씩 뜯어서 아이들에게 먹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그때 받은 감격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때 진심으로 '여기에도 이케다 선생님의 진심이 미치고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었다. 힘겹지만 열심히 투쟁해서 좋았다.'라고 실감했습니다. 이세만태풍 때 일이 장편시 <행복의 바람 주부의 하늘>에 이렇게 적혀있다. "재해를 당한 날로 일주일 만에 가까스로 나는 고통 받는 벗의 곁에 도착했다. 가슴까지 차는 진흙탕 속에서 나눈 재기의 대화 강인한 불자의 웃음에 미래의 서광을 발견하고 안도하면서 만감이 담긴 심정으로 용자의 여행을 기원했다. 내 사랑하는 사명 있는 동지들이여 강해져라 더욱 강해져라 그대들이 일어서 비참한 이 땅에 반드시 행복의 꽃들을 피게 하자 그대들이 일어서서 이 국토세간을 덮치려고 구름 떼 같이 달려드는 숙명을 날려버려라. 그리고 언젠가 꼭 상락(常樂)의 불국토를 구축하라." 결의에 빛난다! 상락의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맹세를! (1998년, 나고야) 태풍으로 재해를 입은 욧카이치와 구와나의 학회원이 그 후 어떻게 사는지 걱정되어 격려차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방문하고 귀국한 직후였습니다. 병석에 있던 남편과 함께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서자 차에서 내리던 선생님이 가만히 저희를 보고는 "신심을 지속하는 도중에 여러 가지 일이 있겠지만 안심하고 저를 잘 따라오세요."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염주와 염주보를 꺼내며 "이것은 도다 선생님에게 받은 선물입니다. 인도의 부다가야에 가지고 간 것이지요." 하며 남편과 제게 주셨습니다. 불법서환(佛法西還)의 여행으로 피로한 몸을 이끌고 복구상황이 걱정되어 오신 선생님 모습에서 동지를 끝까지 지키는 진정한 학회정신을 배웠습니다. 훗날 선생님을 만나뵐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이세만태풍에 대한 이야기를 곰곰이 회상하듯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맨 먼저 달려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고생하시는 동지들에게 아주 가까이 가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교통수단이 없었어요.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 처지였지요. 그것이 무엇보다 후회스러워요." 선생님이 가장 재해가 심각하던 아이치와 미에로 진흙범벅이 되어 달려가실 때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자애는 항상 가장 비참한 마음을 안고 있는 벗의 곁에 있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주니치신문사 사회부에서 출판한 <아이치의 정치사>에는 이세만태풍 때 모습이 이렇게 나와 있다. "이케다 씨 제안에 따라 재해지역을 중심으로 좌담회가 열렸다. … '시에서 주먹밥을 주지 않아 창가학회가 나눠 준 주먹밥을 먹었다.' '식사 꾸러미를 펼치면 힘내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서 얼마나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등, 학회원이 불면불휴(不眠不休)로 펼친 구호활동에 감격해 좌담회에서 입회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리하여 이듬해 1960년에 아이치 학회원은 3만 세대가 넘었다. 총무는 철저하게 '한 사람'을 지킨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한 사람에서 시작해 한 사람으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큰 재해를 끼친 이세만태풍이었다. 그러나 "고난이 그대를 옥(玉)으로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사제가 펼친 '노도와 같은 드라마'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폭풍 건너에 승리의 무지개가 반드시 빛나고 있다."라고 말이다. SGI 만세! 내 동지 만세! 벗의 승리를 기원하며 힘찬 전진을 찬탄하는 이케다 SGI 회장. 사제에 끝까지 사는 '청년'이 세계에 구축해 낸 창가평화의 대연대. 새로운 역사를 구축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6월 18일, 도쿄마키구치 기념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