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나 물처럼 너무 당연하게 여겨 그 의미와 중요성을 잊기 쉬운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글 폰트 같은 것이다. 컴퓨터나 랩톱 자판을 두드리며 늘상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이것을 처음 만든 이들은 무척 고생을 해야 했다. 이들의 헌신을 우리가 쉽게 잊으면 안 된다.
‘한글은 한국 기업이 만들고 지켜 발전시킨다.’ 콘텐츠 크리에이터 플랫폼 기업 산돌(대표이사 윤영호)이 ㈜윤디자인그룹(회장 편석훈)을 인수한다고 3일 밝히며 산돌 창업주인 석금호 의장의 좌우명을 되새겼다. 산돌은 윤디자인의 지분 100%를 155억 7000만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 오는 24일까지 인수 절차를 매듭짓기로 했다.
1989년에 설립된 윤디자인그룹은 국내 대표적인 폰트업체 중 하나로, ‘윤고딕’, ‘윤명조’, ‘안성탕면체’ 등 일반 소비자와 기업을 위한 다양한 폰트를 개발해 왔다. 또한 폰트 클라우드 서비스 폰코(font.co.kr)를 운영하며 폰트 플랫폼 서비스 기업 입지를 굳혀 왔다. 이번 인수를 통해 산돌은 윤디자인그룹이 보유한 우수한 폰트 개발 역량과 브랜드 가치를 획득함으로써, 고객에게 다양한 고품질의 폰트 콘텐츠를 제공하여 고객 편익을 증대시킬 계획이다.
지난달 23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석 의장은 홍익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원 광고학과 석사학위를 땄다. 글꼴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80년대 초 미국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의 아트 디렉터로 일하면서였다. 일본에서 사진 식자기와 식자판 등을 수입해 한글을 사용하던 현실에 충격을 받아 창업을 결심, 1984년 국내 최초의 폰트 회사 '산돌타이포그라픽스'(산돌의 전신)를 설립한 뒤 한글 글꼴 개발에 매진했다.
한글 글꼴 개발은 영어에 견줘 훨씬 어렵다. 영어는 알파벳 대소문자 52개만 만들면 끝난다. 이에 반해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합쳐 글자 조합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2350개에 이르는 글자를 일일이 디자인해야 한다. 이것을 조합형이라 한다.
그런데 정부가 업계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본의 사례를 참조해 완성형 4800자를 국가표준으로 정해 버렸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했을 때 최대치로는 1만 1172개를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완성형으로 안 쓰이는 글자들이 있었다. 아래 한글은 내부 코드를 조합형으로 유지하며 워드 시장을 독식했다. 학계와 업계가 꾸준히 정부를 설득해 조합형도 표준이 되는 과도기를 거쳐 유니코드에서는 두 가지 모두 수용됐다. 지금은 조합할 때 필요한 부분만 디자인하고 인공지능(AI)도 발달해 힘을 들이는 수고가 많이 줄어들었다 한다.
석 의장은 설립 초기에는 한글 서체를 팔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3년 동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폰트 연구에 밤을 지샜다. 지면의 가독성이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 글자 크기를 비롯해 자간이나 행간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상철, 김진평, 안상수, 손진석 등 한글꼴 디자인 개척자들과 함께 한글 타이포그라피 연구에 골몰했다. 산돌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글 기본 서체인 '맑은 고딕'을 만들어 기존 윈도 폰트 '굴림체'를 대체했다. 특히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본사를 찾아가 끈질긴 설득 끝에 윈도 폰트를 굴림체에서 맑은 고딕 폰트로 바꾼 일은 유명하다. 그는 또 산돌광수체, 나눔 고딕, 산돌 네오고딕 등 최근까지 720종의 서체를 개발했다. 현대카드, 삼성전자, 네이버, 배달의민족 등 많은 기업의 전용 서체를 제작했다. 산돌은 2022년 10월 코스닥에 상장했다.
산돌과 같은 폰트 회사의 주된 수입원은 저작권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불법 복제해 사용하는 개인이나 기업을 단속해 저작권 소송을 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석 의장은 "악의적인 불법 사용자도 있겠지만, 사용 기한이 만료된 것을 몰랐거나 사용 범위에 제한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개인 사용자도 있다"며 2020년 4월에 200여 가지가 넘는 사용 범위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도록 인쇄, 출판, 영상용 폰트의 사용 범위 구분을 없앴다. 업계 최초의 사례다.
한 발 나아가 폰트 구독형 플랫폼인 클라우드 서비스를 2014년 론칭, 클라우드에 저장된 폰트를 내려받아 사용하게 했다. 유료 폰트는 만료일이 되면 아예 비활성화되게 했다. 4년 뒤에는 이를 플랫폼 서비스로 전환하며 "산돌은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산돌은 2016년부터 전국 초중고교에 산돌 구름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022년 8월부터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폰트를 무료 지원하는 '캔(can)퍼스 캠페인'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