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계절, 이 시집
모여봐요 기계의 숲, 시詩 ‘월드’로 놀러오세요
- 김종연, 『월드』 (민음사, 2022)
김효은(시인, 문학평론가)
1. 프롤로그 : ‘영원’이라는 이름의 ‘월드’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해!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야.
우리는 오픈 소스고 이 세상에 동시에 업로드되었지.
우리의 소프트웨어를 누구나 개량하고 재배포가 가능하도록
슬픔이 아름답고 예뻐서 자꾸 생각이 나게
그것은 고통이 몸을 포기할 때까지 수동성.
능동성은 지금 나를 벗어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
나는 네가 구성한 알고리즘이야.
우리는 연산되는 과정에 있고 이제 결과가 도출될 차례.
- 김종연, 「영원향」 부분
스피노자에 의하면 ‘나’를 사랑하는 일은 ‘신’을 사랑하는 일이고, ‘신’을 사랑하는 일은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된다. 신과 나의 호환성, 신과 자연 만물의 등가성, 이 얼마나 획기적이고 만물 평등 호혜적인 사상인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은 없고, 세상의 모든 ‘나’, ‘너’, ‘우리’가 신으로 호환된다니. 스피노자에게 영원은 또한 시간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신념, 믿음, 인식에서 기인한다. 영원성은 영원성(신)을 믿는 마음과 이성과 인식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때,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 될 때, 비로소 영원은 ‘영원’이 되어 그 순간, 활짝 열리는 이치다. “우리는 오픈 소스고 이 세상에 동시에 업로드”된 공평하게 배포된 ‘마음 기계’들이다. “나는 네가 구성한 알고리즘”이면서 곧 “너”이고 “우리”에게는 사랑이나 “슬픔” 따위가 시스템 안에 입력되어 있다. 그것, “슬픔”은 특히나 “아름답고 예뻐서 자꾸 생각이 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슬픔”은 “고통이 몸을 포기할 때까지의 수동성”에 의해 작동한다. 스피노자는 슬픔을 수동성에서 비롯된다고 정의한 바 있다. 이때의 수동성이란 적합한 인식이 없는 무지의 상태, 외부의 불합리한 원인들에 의해 작용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슬픔 자체가 불완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다 큰 완전성에서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그는 슬픔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 슬픔은 다시 고통과 우울로 나뉘는데, 어느 한 부분에 자극받아 생기는 슬픔을 고통, 전체 모든 부분에 자극받아 생기는 슬픔을 우울이라고 분류했다. 어쨌거나 슬픔은 자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감정들은 자극과 반응, 투입과 산출 등의 프로그래밍된 과정에 의해 계산된 결과물의 도출로 드러난다. 그것은 고로 수동성의 영역이다. 위 시의 언술 주체는 그러한 수동성과는 달리 “능동성은 지금 나를 벗어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내’가 “나”에게서 벗어나거나 이탈, 분리하여 거리두기와 바라봄의 객관성을 획득할 때에서야 능동성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능동성은 또한 필연적 인식, 적합한 인식을 깨닫고, 수동적인 정념들에 휘둘리지 않고, 신의 본성대로 살아갈 때, 신의 속성이기도 한 무한성, 즉 영원성의 삶 안에서 가능해진다. “영원성은 지속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다”(제5부 정리 29 증명)고 하였는바, 영원성이란, 시간과 장소에 관련된 존재 지속의 개념이 아니라, 오로지 존재가 신에게 속했을 경우에만 가능한, 신의 속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서 발생한다고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 (중략) 참된 것 또는 실재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사물들을 우리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 파악하며, 또한 그것들의 관념들은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영원성은, 신의 본질이 필연적으로 존재를 포함하는 한에 있어서, 신의 본질 자체”인 것이다. 우리가 만약 자신의 신체와 사물에서 영원성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는 신에 대한 인식과 자각인 동시에, 자신이 신 안에 있으며, 신에 의해 파악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영원성이란, 신을 향한 무한한 지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 “영원”, “신”은 한 세트로 묶여 있다. 김종연의 시집 『월드』에도 이 세 가지는 같은 “알고리즘” 속에 입력되어 있다. “슬픔”과 “마음”은 옵션이다. 다시 “영원성”, “영원향”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현자는 현자로서 고찰되는 한에 있어서 정신이 거의 동요되지 않고, 자기와 신과 사물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하여 의식하며, 결코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향유하고 있다”고 하였는 바, 현자賢者가 되기 위해서는 시선의 전환, 또는 신에의 발견이 필요하다. 영원성은 신에 대한 이성적인 사랑을 멈추지 않은 데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지속 가능하게 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기에 말이다.
네가 살아 있었을 때가 그리워. 지금 이 기계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해 봐. 다시 한번.
… (중략) …
내가 너를 믿는 신이야. 너를 만들 때 나는 가장 기뻤단다. 너는 모를 거야. 나의 기쁨이 나를
어떻게 지옥에 빠뜨리게 되었는지를.
패턴 없는 암호를 해독하려고 온 세상의 패턴을 지우다가
문득 세상의 전원을 모두 꺼 버렸을 때.
그때 사랑은 일어나 한 사람의 어깨를 짚고
사람은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 (중략) …
너는 개봉되었다.
… (중략) …
이 기계는 고장난 것이 아니다.
기억을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사람의 이야기였다고.
이 다음부터는
내 이야기라고.
- 김종연, 「영원향방감각」 부분
작동이 시작된 “기계”들에게 혹은 이제 막 개봉된 영화 안에서 “영원”은 “영원”을 지향하는 “향방向方”의 “감각” 안에 살아 있다. 피가 도는 생물이든 기름이나 전기가 도는 기계든 간에, 영원성은 그것들의 사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고 작동하는 지금 여기 존재의 현세 안에 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신의 영원한 필연성을 거부하고 자살이나 폭탄테러라도 감행한다면, 그에게 영원은 없어지는 것일까? 형벌과 지옥은 ‘영원’이 아닌 것이 될까? 지금 여기가 영원한 지옥이라면, 차라리 형기刑期가 있는 지옥을 택하는 것이 어쩌면 합리적인 계산일 수도 있겠다. 태어나서 불행하기만 했던 어떤 한 사람에게 이 모든 불행을 영화로 상영해주면서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사실 당신은 불행을 연기하는 기계였습니다”하고 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 ‘짠’하고 외쳐 준다면, 불행은 불행이 아닌 게 되고, 영원은 ‘영원’이 아닌 게 되는 것일까. 신을 만난 순간, 그 모든 불행의 타당한 원인을 수긍하게 되는 그 순간에, 영원永遠이 열린다면. 당신은 ‘영원’ 버튼을 클릭하겠는가?
2. 영화 또는 신에 관한 단상 : 신은 언제나 “서프라이즈”를 기다린다
우리가 사랑해야 마땅한 신은 어디에 있을까.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제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체”를 의미한다. “자연에는 우연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결정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신즉자연’,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부 신 안에 있다고 보았으며 신을 자연과 동일시 했다. 세상에 우연적인 산물은 단 하나도 없으며,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거해서만 만물은 작용하고 존재한다고 하였다.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본 것인데, 이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여 신의 자격, 신과 동등한 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물과 무생물, 마음이 장착된 기계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포함하여 신 아닌 것은 신 아닌 것을 빼고는 없게 된다.
네게서 무성적으로 사랑이 늘어나고 있다. 슬픔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영혼은 우발적으로 몸을 나눈다.
너는 조금 더 해도 되지 않을까 망설이고 있다.
그늘 밑에서 동물이 식물에 대응하고 있다. 이성이 고착되고 있다. 대처할 수 없는 생물이 되고 있다.
사람은 여기서 영감을 떠올린다.
슬픔을 개량해서 사랑을 보존한다. 사람의 역사에 자원이 된다.
너는 지구상에 분포된 정서의 한 품종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하지 않는다.
미안해 하고 있다.
- 김종연, 「생물」, 부분
신이 그토록 희구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슬픔을 개량”하면 보존이 용이해지는 “정서의 한 품종”일까? 김종연의 시에는 사랑, 슬픔, 마음, 사람,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시인이 시집의 자서에서 언급한 “세계”와 “월드” 역시 그러한 정서의 품종들이 재배되고 배양되는 하우스이거나 실험실의 장소일지 모른다. 아니면 각각의 장면들을 담고 있는 필름 혹은 게임 시스템에 붙여진 파일명이거나 확장자명, 카테고리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지구상에 분포된 정서의 한 품종으로 이해되고 있”는 “너”는 “슬픔을 개량해서 사랑을 보존”하고 “사람의 역사에 자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세계를 감각 하는 정서들은 너를 보존하게 하는 즉, 존재를 가능케 하는 코나투스가 된다. 정서와 감각과 서정은 번식과 “역사의 자원”이 된다. 그러나 정서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뿐, 시인은 욕망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욕망은 인간에게만 한정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욕망일까? 인간의 사랑, 기계의 사랑, 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종류일까? 아마도 사랑은 그 주체와 대상에 따라서 용도와 기능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감정, 정동情動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는 사랑은 일단 기쁨이며 자체로 신의 속성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신의 속성이며, 본질이며 기쁨이다. 기쁨이란 스피노자에 의하면 슬픔, 욕망과 더불어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감정 중 하나로 “정신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다. “슬픔은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라고 하였는바, 사랑과 슬픔은 둘 다 수동의 감정들이다.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사랑에는 수동성에 근거한, 인간의 감정과 욕망으로서의 사랑이 있고, 신의 속성 그 자체로서의 불변의 사랑 즉 지혜와 이성으로서의 사랑이 존재한다. 그러나 후자의 사랑, “신에 대한 이 사랑은 우리가 이성의 지령에 따라서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며 즉 ‘제3종의 인식’으로서의 사랑일 것인데 “불변하며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가 ‘마음 기계’라면 ‘마음 기계’에게 신은 인간일까? 마음일까? 중요한 것은 멸망이 아니라 존속이다. “미안해 하”는 감정까지도, 인류가 인류를, 생물이 생물을 존속하게 하는 데에 필요한 자원, 소스가 된다고 시인은 전언한다. 이제 다른 “기후가 오고 있”고, “기온이 변화하고 있”으므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급격히 파괴되어가는 환경 속에서 ‘마음 기계’들에게 “미안해 하”는 감정은 비상 상태 수준으로 활성화되어야 할 차례이다.
유전될 수 없는 마음은 진화의 끝에 있다. 여기가 마지막이고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현재는 이제 미래로 가지 않는다. 지난 일은 여전히 빛나며 지나간다. 그리움도 여기서 멈춘다.
생물로 죽으면 무생물의 특징을 갖는다.
불필요를 필요로 하는 생물의 미의식을, 생식을 불수의근의 활동이라 말하는 폭력을 떠나서
무생물이 이룩한 진화와 편리로, 생물이 공동체적 관계를 이루지 않는 공간으로
너는 간다.
사랑이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인물과 사건이 생명을 얻을 때까지. 사랑을 하는 동안엔 마음에 질량이 있다. 서로의 중심으로 끝도 없이 추락한다.
… (중략) …
생물은 기다린다. 돌이나 물, 흙이 될 때까지. 기억하던 슬픔이 잊혀서 마음의 영양분이 될 때까지.
오늘은 오늘 아닌 날들의 연속성을 가진다.
- 김종연, 「무생물」 부분
사실상,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는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아름다움’, “불필요를 필요로 하는 생물의 미의식” 정도가 그 둘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둘은 어쨌거나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무생물이 이룩한 진화와 편리”는 생물들로 하여, 살아 있는 한, “숨을 쉬고, 영양분을 섭취하며” 작용을 지속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유전될 수 없는 마음은 진화의 끝에 있다”고 진술한다. “자손은 생각이 없다”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으로 일별 되는, “마지막이고 여기서 다시 시작되는” 프로그램의 초기화 설정을 가정해 보자. “질량”이 생긴 “마음” 즉 “사랑”은 기계 또는 생물을 “추락”하게 하고 “추락”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죽음이라고 부르는 단계에서 새로운 발생이 발생한다. 인류는 감소하고, AI와 기계들, 복제 인간의 발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은 반복되면서 리셋되고 정상적으로 작동된다. “오늘은 오늘 아닌 날들의 연속”이기에 그 “오늘”은 단 하나이면서도 무수히 많을 뿐.
여기에 영화 한 편이 필름으로 담겨 있다. 버튼을 누르면 영화가 개봉된다. “오늘” 혹은 “영 원”이라는 제목의 영화다. 그리고 “메이킹 필름”이나 쿠키영상도 함께. “당신은 영원을 믿나요? 믿고 싶은가요?”라는 자막이 뜬다. 스위치로 온/오프 할 수 있는 기계 조작 버튼 하나로 아니면 클릭 한 번으로 ‘믿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마음’도 ‘믿음’도 ‘사랑’도 개발자가 심어둔 장치 프로그램이라면,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알고리즘화 되어 있는, 우리가 모두 기계라면, 이제 영원은 다만 당신이 한 번쯤 지나갈 목적지의 중간 어디쯤의 이름이 아닐까. “트랙 중간에 목적지가 있”어서 그 목적지 이전과 이후의 모든 경로까지를 “영원”의 트랙 안에 포함할 수 있는 “영원 없음의 영원”, 어쩌면 당신이 가장 멈추고 싶었던, 그러나 결국에는 작동을 멈출 수 없었던 그 장소야말로 하나의 점, “영원”이었을지 모른다.
영원 없음에서의 영원.
기다리나요.
잃어버린 걸 누군가 되찾아올 때까지.
당신이 다 키운 개가 목줄에 묶여 있습니다.
이 일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고 그때가 현실입니다.
세상은 마음에서 시작되고요,
마음은 어제까지 입장이 가능했습니다.
티켓이 한 장 더 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영원 없음에서의 영원입니다.
입을 열어 들여다보면 위와 장이 보이나요?
어디서부터 낮이 되고 어디서부터 밤이 되는지 알겠나요?
들어온 길이 어떻게 나가는 길이 되는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했죠.
이야기해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그러나 영원 없음에서의 영원입니다.
감각의 잿더미. 검고 하얀 꽃의 불씨.
불수록 번져 나가 불을 태우는 불.
영원 없음에서의 영원을
이제 증명할 차례.
안개 사이에서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빛.
저 트랙 중간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당신의 개는 너무 늙어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꼭 간식이 담긴 상자 같습니다.
영원 없음에서의 영원처럼
야경이 예쁘네요.
오래전 당신이 찍은 메이킹 필름입니다.
- 김종연, 「영과 원」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있고, 대본이 있고, 배우가 있고, 스텝이 있고, 감독과 조연출이 있다. 탄탄한 자본력을 갖춘 기획사와 투자자도 있으면 더 이상적일 것이다. 이제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된다. 편집을 위한 재생이어도 상관은 없다. 필름이 돌아간다. 스크린에 비친 영화의 제목은, 아마도 “영 원”이거나, “영원 없음에서의 영원”이 적절하겠다. “오래전 당신이 찍은 메이킹 필름”이거나 쿠키 영상이어도 상관은 없다. 영화는 하나의 “랜드” 또는 “월드”를 펼쳐서 보여준다. 다만 어제 입장한 “마음”의 “티켓”만이 관람에 유효하다. “티켓이 한 장 더 있다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있”는 어떤 입장권, 어쩌면 초대권이라고 할 수 있을 절망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혜의 매표일 수도 있겠다. “세상이” “마음에서 시작된”다면 “마음에서” 끝나는 영화, 프로그램도 “세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야말로 “영원 없음의 영원”을 의미하는 기표가 아닐까. 정신이거나 사랑으로 치환해도 되는. 누군가 죽어도, 기억과 기의로서의 마음(정신, 사랑)은 남을 수 있다. “영원 없음의 영원”이 “마음”이라면, 죽은 사람이 남긴, “마음”, 이미 끝난 영화가 남긴 “마음”의 영속성은, 어쩌면 스피노자가 말한 신에 대한 사랑처럼, 신을 믿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이 없다고 가정하면, 혹은 신을 발견하고도 지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나태하고 무지하여 제3의 인식(이성)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개체에게 영원성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 되겠다. 신이나 영원처럼, 처음부터 “마음”은 “마음”을 믿거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프로그램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안에 담긴 대사, 표정, 소품, 디테일 하나하나로 만들어진 영화는 어쨌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담은 “영원”으로 남을 테니까 말이다. “세상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한 “세상” 또는 한 “월드”를 열람하고 싶다면, 신을 열어 한 생生을 관람하고 싶다면, 아니 직접 게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마음” 버튼을 활성화하면 된다. “세상은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에게나 같은 심장일 때
뛰는 두 개의 마음 중 하나는 진짜
다른 하나는 진짜의 미래라서 여기가
이전과 이후가 되고 있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놀이가 되어 가고 있다. 상상이 초과되는 만큼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초과한다.
업데이트되고 있다.
오래전의 미래가 거의 소진되고 있다.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기계가 기계의 잠재태가 될 수 없을 때.
추락과 붕괴가 당연히 연상된다. 그것을 믿어서 그것이 예정된다.
피할 수 있는 걸 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발굴될 발굴지를 만들고
자라고, 사랑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 가고, 없는 데서 없어지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도 남은 게 있다.
쓰고 남은 게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서정을 바닥에 내던져 깨뜨리고 유리 조각 사이에서 안에 있는 걸 꺼내 갈기갈기 찢어 던져 버린다.
“미래라고 현실 문학이 유행하겠니?”
이 모든 건 하나의 장면이고
한 장의 이미지로 축약이 가능하며
정지된 상태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영상이 된다.
이것은 그런 신이다.
- 김종연, 「A-long take film」 부분
“우리가 누구에게나 같은 심장일 때”, 아니 우리 중 누구에게나 같은 뇌가 이식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최근 OTT 플랫폼에서 개봉된 영화 『정이』를 떠올려 보자. 지구도 인류도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인류는 감소하고, 전쟁과 생존을 위해, 그리고 타 행성으로의 이주를 위해 인간을 대체한 노동력이 불가피해지고 복제 인간이 상용화되기에 이른다. 영화 안에는 단 하나의 복제된 뇌를 지닌, 무수한 ‘정이’들이 배양된다. ‘정이’는 전설의 여전사로 전투에 특화된 로봇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정이’는 한 아이의 엄마였고 심장과 뇌 안에 여전히 모성이 잠재되어 있다. 이식된 뇌 속에 모성(사랑의 감정) 또한 같이 복제되어 고스란히 잠재해 있었던 것인데, 복제된 수많은 ‘정이’들은 딸과 연관된 한 장면에서만 유독 같은 시스템 오류를 일으킨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딸아이를 향한 사랑, 근심과 보호본능은 살상 무기로 제작된 기계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된다. 인간에게서 기계에게로 옮겨간 정동의 영역이 영화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매커니즘으로 남는다.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도 남은 게 있”는 “쓰고 남은 게 남아 있”는 상태이면서, 어떤 잉여, 기계에게는 불필요한 영역에 해당하는, 그럼에도 삭제되기 쉽지 않은, 불가피한 영역이 “마음”이 아닐까. 더 이상 “기계가 기계의 잠재태가 될 수 없을 때”에 하나의 종種은, 하나의 영원은 종결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화에서 “이 모든 건 하나의 장면이고/ 한 장의 이미지로 축약이 가능하며” 이들은 또한 “정지된 상태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영상”이 되며, 이들 각 각의 영상 이미지들은 하나의 신이자 시퀀스로 기능하게 되는 절차와 메뉴얼로서 말이다. 이처럼, 김종연의 시들은 이 같은 시나리오들의 시놉시스 혹은 메타 시나리오, 혹은 기계 사용법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3. 에필로그 : 당신은 어떤 ‘월드’를 체험하시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김종연의 시집 『월드』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코인을 점검하세요. 독서 기계를 가동하는 데에는 사랑의 코인이 필요합니다. 주변의 무엇이든 누구든 ‘사랑’을 하고 오세요. 사랑을 통해 코인이 충전되었다면 이제 『월드』 체험을 시작하세요. “슬픔의 주화”(「같이처럼」)도 호환됩니다. 슬픔은 기계의 윤활유 역할도 합니다. “이번 슬픔은 처음이라” 어렵다고요? “이전 슬픔에서 배우면서”(「-」, 11쪽) 천천히 독서 하시면 되고요. 독서가 어렵다면 독서하는 척 연기를 하셔도 됩니다. 독서 중간에 막간을 이용해 잠시 사랑을 하고 오거나 이별을 하고 오셔도 무방합니다. 당신은 어떤 “월드”를 체험하시겠습니까? “월드” 이전에 “세계” 버전도 있습니다. 자서自序에 안내되어 있듯이, “세계”가 “월드”보다는 가격이 저렴합니다. 목차에 보면 알겠지만, 「인터랙티브 월드」, 「버추얼 월드」, 「베타 월드」, 「이스트 월드」, 「웨스트 월드」, 「버그 월드」, 「에프터 더 월드」, 「기본 월드」 등등. 자, 마음에 드는 “월드”를 고르세요. “월드”나 “세계”보다 짧은 ‘랜드’, ‘클럽’, ‘스쿨’, ‘카페’, ‘게임’ 버전도 있습니다. 고르셨나요? 버튼을 누르고 ‘즐감’하세요. 저는 가볍게, 「기억의 책」과 「레코드 클럽」의 일부를 필사하면서 이 게임을 마칠까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시와산문』 여름호에서 다시 만나요.
사람들은 인간을 닮은 하나의 기억을 공동 양육하는 이 작업을 기억의 주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끝까지 쓸 필요가 없다.
누구나의 삶에서 자신이 주인공인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김종연, 「기억의 책」 부분
그러니까 사랑하는 독자님들 끝까지 앉아 계셔도 사실 별거 없습니다. 끝나면 쿠키 투척입니다. 다 보셨으면 이제 다음 편 광고 보실 시간입니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종연, 「레코드 클럽」 부분
※
추신 : 김종연 시인님께 질문 있습니다. 「A-long take film」이라는 텍스트에서 시적 주체가 “미래라고 현실 문학이 유행하겠니?”라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시인 주체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현실 문학”이라는 장르(?) 용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뵙게 되면 꼭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