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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으로 입대한 아들의 훈련소 수료식을 다녀왔습니다.
공군훈련소는 진주에 있습니다. 학사장교든, 부사관이든, 일반병이든 공군의 모든 훈련은 진주에 있는 공군교육사령부에서 합니다.
‘진주라 천릿길’의 각인 효과 탓인가요? 진주는 물리적인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멉니다.
해서, 그날도 11시의 수료식에 늦지 않기 위해 새벽 4시 반부터 잠을 깨어 서둘렀습니다.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띤 것은 식탁 밑의 파란색 코스트 코 대형 쇼핑백입니다. 그 속에는 어젯밤 늦게까지 아내가 분류작업을 한, 아들 녀석과 같은 방을 쓰는 14 명의 분대원들에게 나눠줄 지퍼백이 들어 있고, 그 지퍼백 속에는 쵸코파이, 마가레트, 스닉커즈, 호두과자, 크라운 롱스, 귤, 포도 등속이 담겨 있습니다.
훈련소에서 보내온 행사계획표에, 11시에 시작된 수료식이 12시에 끝나면 12시 10분에 귀향 버스를 타고 2박 3일 위로 휴가를 떠나는 걸로 되어 있으니 나눠줄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다고 누누이 얘기했건만, 6개월 전에 먼저 훈련을 마친 아들의 고등학교 절친, 보근이와 현호 엄마 모두 먹을 것을 꼭 준비해 가라고 했다면서 끝내 준비한 아내의 고집 결과물입니다.
이왕 준비한 것, 모른 체하기로 했습니다.
새벽 5시 20분.
점차 밝아오는 여명을 헤치고 새벽의 올림픽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차는 한남 IC를 통해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비룡 JC로 빠져서 대전-통영 고속도로로 내달립니다.
그런데 비가.... 천안 지날 즈음부터 흩뿌리기 시작합니다. 무주를 지날 때에는 빗방울이 더 굵어져 덕유산휴게소에 차를 멈출 때에는 어쩌면 수료식을 실내에서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휴게소에 차가 멈추니 오는 내내 자던 아내가 귀신같이 깹니다.
덕유산휴게소는 식당 유리문 뒤편의 조망이 참 좋았습니다.
여느 날 같으면 출근을 마악 끝내고 숨을 고를 시간인 아침 8시.
커다랗고 파란 파라솔 밑 나무의자에 앉아 아내가 건네준 아메리카노 커피를 천천히 마십니다. 발밑에 펼쳐진 누런 벌판 건너편 산중턱에 걸려 있는 비구름들이 아름답습니다. 그 한 폭 동양화를 감상하면서 듣는, 툭.툭.툭... 헝겊파라솔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좋고,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종이컵의 따뜻한 온기도 쏘 굳!입니다.
분위기가 좋은 김에, 또 결혼 후 처음일 아내와의 드라이브 데이트를 하는 김에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숱하게 짓고 허물었던, 퇴직 후의 귀촌 계획을 조심조심, 짝짓기가 끝나면 잡아먹히는 숫사마귀의 암사마귀 접근처럼, 아조 조심스레 꺼내었으나 반..응...은.... 힝!입니다.
덜 떨어진 가장의 때늦은 몽정쯤으로 치부합니다.
그래도 일단 운을 떼었으니 지아비의 칭얼댐은 계속될 것입니다. 쭈∼욱.
다시 차가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덩달아 윈도우브러시도 바빠집니다.
네비가 이르는 대로 ‘함양’, ‘산청’을 지나 남해고속도로로 빠져서 문산IC로 나오니 드디어 ‘공군교육사령부’ 이정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5주 훈련 수료식도 졸업식이라고 정문 근처 양 길가에서는 꽃 파는 아줌마들이 꽃다발을 흔들어 댑니다. 앗싸,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이 된 기분입니다.
통제병들이 안내하는 대로 차를 주차장에 얌전히 주차시킨 후 행사장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탑니다. 헌데, 버스는 행사장이 마련된 잔디밭 연병장보다 훨씬 못 미친 곳에 승객들을 풀어놓습니다. 한 손에 우산, 다른 손에는 그놈의 코스트 코 쇼핑백을 들고 가느라고 낑낑, 죽을 힘을 씁니다.
그래도 아내가 샌스 있게 준비해 온 은박돗자리를 행사장 스탠드의 플라스틱의자 두 자리에 걸쳐서 깔고 큰 우산으로 덧씌우고 앉으니 안락하기가 봉암사 대웅전 꽃방석입니다.
추적추적... 비는 계속 내립니다. 한기도 조금 느껴집니다.
훈련병보다 2, 3 곱절 많을 성싶은 가족들이 아들 모습 보기에 더 나은 자리를 찾아서 떼지어 가는 모습들이 세링게티 초원을 줄지어 가로지르는 누우 떼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 어디선가 ‘전우가’ 군가가 들려옵니다.
부르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힘찬 군가소리만이 연병장 너머에서 한동안 들리더니 이윽고 1,651명의 공군 730기 대오가 노란 소대 깃발을 따라 드넓은 잔디밭의 연병장으로 들어섭니다. 저 속에 아들 놈도 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비옷을 떼로 입혀놓으니 흡사 독일병정 같기도 하고, 동굴박쥐 같기도 한데, 6주 전의 까까머리 동자승 티는 그 새 완전히 세탁‧헹굼‧탈수‧건조되어 제법 병정 티가 물씬 납니다.
어때, 그럴 듯하죠?
수료식은 20여 분만에 끝났습니다. 우중행사임을 고려하여 빨리 끝낸 듯싶습니다.
훈련병임을 나타내는 백색명찰을 일제히 떼어 ‘훈병에서 이병으로’ 신분상승한 장병들은 다시 대대별로 숙소로 돌아가 비옷을 반납한 후에 전투복 차림으로 줄맞춰 돌아옵니다.
바야흐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기 직전인데, 그 새를 못 참은 몇몇 엄마들이 서로 질세라 대오 속으로 뛰어드니 구령대의 통제장교는 속수무책입니다.
스탠드의 우리 부부도 아들 찾아 나섭니다.
진작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2-2-1>, 2대대 2중대 1소대 깃발을 찾아 연병장으로 내려가니 어랍쇼? 스탠드에서는 잘 보였던 깃발이 수평의 눈높이가 되자 도통 보이질 않고 얼룩무의 제복의 난반사에 눈만 어질합니다. 죄다 그놈이 그놈입니다. 앞서 장정(壯丁)의 바다에 다이빙한 아내도 종적이 묘연합니다.
그렇게 ‘군중속의 고독’에 당황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용케도 아들아 먼저 아비를 찾았습니다.
녀석이 “아빠!” 부르는 순간, ‘아, 짜아식이 거수경례나 감격의 부자포옹으로 TV에서 보았던, 그 짠한 장면을 연출하겠구나.’ 은근 기대했는데.... 불러만 놓고 멀뚱히 눈만 꿈벅이는 시키, 멋대가리 없기가 돌할방입니다. 친자(親子) 확인입니다.
겨우 녀석 어깨 한 번 두드림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애정 표현을 끝내고 그때까지 무겁게 들고 있던 쇼핑백의 과자들을 분대원들에게 나눠주라고 이르는데.... 이미 저마다 가족들에 휘감겨 사라진 분대원들 -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나눠줄 시간이 없다고 내 그렇게 일렀건만 소띠 마누라, 제 귀에 경 읽기로 지아비 말에 꿈쩍을 않더니만 개띠 서방님, 개고생을 시킵니다.
운 좋게 만난 동기 대여섯에게만 가까스로 과자봉지를 떠넘기고 나서 이번에는 코코호도 상자를 소대장에게 갖다 주라고 이르니 아들 녀석은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입니다.
거듭된 애비 채근에 마지못해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구령대 위의 빨간 모자를 발견하곤 뛰어가 전합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소대장은 내 있는 쪽을 향해 허리를 숙입니다. 나도 손을 흔들어 그동안의 수고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그렇게 대충 주변을 정리하고 드디어 집에 가기 위하여 멀리 떨어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다가 갑자기 욱, 성질이 뻗침은 계속 이어지는 아들의 볼멘소리 때문입니다.
‘왜 핸드폰을 안 가져왔느냐’, ‘빨면 안 되는 청바지를 왜 빨았느냐’며 걷는 내내 제 어미에게 짜증을 부리는 녀석 꼬라지에 나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그동안 성질이 많이 죽어 이제는 발기불능이라고 여겼던 내 불뚝성이 간만에 '발'기탱천 했습니다.
“야, 시캬, 여기 오려고 엄마, 아빠는 연가 내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힘들게 왔는데 6주 만에 만나자마자 겨우 한다는 소리가 핸드폰 안 가져온 거와 청바지 빤 거 가지고 찌증을 내고 있어? 네가 지금껏 한 말의 90% 이상이 다 불만스런 말이잖아. 이건 군대 가서도 뭐 달라진 게 없네.”
소리를 냅다 지르니 우산 받쳐 들던 손으로 아내는 나를 툭, 칩니다. 아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앞서 걷는 다른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한번 터진 봇물 꾸중을 멈출 수 없습니다.
녀석 딴에는 오매불망, 학수고대했던 핸드폰을 안 가져 왔으니 친구들에게 연락할 길이 없고, 애지중지 아끼던, 코팅이 된 바지를 빨았으니 이후 세탁력이 떨어지리라는 생각에 짜증을 낸 것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간만에 만난 제 어미에게 저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죽하면 (고생한) 너에게 이러겠느냐’고 씩씩대니 녀석도 미안했는지 올라오는 차 안에서는 그래도 제 엄마에게 살갑게 달라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동안 못 들었던 음악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제 엄마 스마트폰으로 들으라고 했더니 이어폰을 안 가져왔다고 해서 그냥 틀어놓고 들으라고 했는데, 아, 운전하면서 올라오는 5시간 동안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녀석이 골라 듣는 노래란 게 죄다 시끄러운 힙합풍의 소음 일색이어서 좁은 차 안에서 함께 듣다가 50代 돌연사 하는 줄 알았습니다.
집에 닿기도 전에 벌써 녀석 휴가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아, 이래서 아들 휴가가 반갑지 않다고 하는 구나’ 어느 정도 실감이 갑니다. 그런데.. 그런데...추석 때에 4박 5일의 휴가를 또 온다고 하니..... 반갑기도 하고 뜨악하기도 합니다. ‘무어 그리 명절 때마다 찾아올 것까지야...’ 속마음은 떨떠름한데 “그으래?” 반가운 척 표정연기를 합니다.
흐흐, 안 보면 그립고 보면 지겨운(?)...우리 사이.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아들의 휴가 소식이 아비에게는 ‘공습경보’로 들립니다.
아, 아들 시키가 시도 때도 없이 서울 상공을 저공비행하면..... 솔개에 놀란 미어캣 모양 아비는 잽싸게 책상 밑으로 숨어야 하나?
아니면, 문경, 그... ‘남쪽으로 튀어?’
갖가지 상념에 정신이 사납습니다.
에고, 그렇게 그날, ‘진주라 천릿길’은 만감이 교차한 ‘유정천리(有情千里)’였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몇 구비 인생길’이었습니다. ‘♬유정천리 꽃이 피’었었습니다.
무정천리 비도 왔었습니다.
-끄읕.
* 추신 - 아들 녀석 사진입니다. 안경을 안 쓴, 오른쪽 녀석입니다. 흐흐, 동기들 손에는 아들이 반강제로 떠안긴, 문제의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습니다.
첫댓글 저는요...훈련소 수료할때 친구녀석들이 경운기 30여km 타고 면회와서 쪽팔려.. 죽는줄 알았어요. ㅋㅋ.
이담에 희산이 면회갈때...트랙타로 가줘야겠죠...ㅋ
이건 내 혼자 생각인데... 쪽팔리기도 친다면, 추석 회식용 돼지를 잡다 놓쳐서 흰 까운.. 흰 모자...흰 앞치마..흰 장화를 입고 신은 채 돼지 쫓아 온 부대 안을 휘젓던 취사병 친구를 경운기 친구들이 더 쪽팔려할 것 같은뎅....ㅋㅋ
푸하하하
방발이 출신 아비의 정한이 ㅋㅋ
새벽이는 정기휴가에 포상휴가 열흘을 아비가 안심할 틈없이 배치해 나오더이다
군대 넘 짧다는 생각이 볼끈 솟기도 ㅎㅎ
창섭이가 늠늠한 군발이가 된 모습을 보니 뿌듯~
글 하나 올려놓고 다음 날 댓글 조황 확인하는 기분은 물안개 자욱한 새벽 강가에서 간밤에 친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옹(漁翁)의 설렘과 비슷할 듯. ㅋㅋ, 오늘도 입질이 괘안쿤. .
크하하하~ 웃겨 죽는 줄 알았네요.
공군은 전부 안경 낀 사람들이 가는가 보죠~
10분만에 해산이라는데 과자 봉지라니...,
그런 과자봉지는 육군들, 면회때 전혀 해산하지 않는, 내무반에서 부모 면회 안 오는
동료들이 많은 곳에서는 꼭 필수지요. 혼자인것도 서럽고 남 먹는 거 쳐다만 보는
전우들 다 모아서 돗자리 펴고 김밥에 탕수육에 불고기에 치킨에 과일...앗싸~!
부부가 나이 들어서도 꼭 붙어 살 필요 있나요?
알만큼 알고 살 만큼 살았으니 각자 살고 싶은 곳에서 살아 보는 것도 좋죠.
우리는 나중에 아이들 다 출가 시키고 각자 살고픈데서 살기로 했어요.
남편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토굴에서 완전 생식으로 살아 본데요.
오라버니도 구지 싫다는 마눌님 억지로 데려 올려고 기운 빼지 마시고
가고싶은 곳으로 가서 기운 껏 살아 보세요 화이팅~!
흐흐, 새비는 모래실 댓글녀!
그런데 마누라를 억지로 데려오려는 게 아니고 내 한 몸, 이제 그만 방생해 달라는 거임.
ㅋㅋ 잼있다~ 딸하나있는 나로서는.... 흠../근데.. 며칠전에 당장 2학기에 필요하지도 않은 산이 참고서를 급하게 건네주러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위 글을 읽으니, 곳곳에 숨어서 호시탐탐 은은하게 찔러보는 귀촌,귀농의 의지가 ..... ㅋㅋ
2학년 산이에게 3학년 참고서를 안겨줌은 (비록 전학년이 3명뿐이기는 하지만) 선행학습으로 내년에도 전교 1등을 놓치지 말라는 심오한 뜻임
잘 키운 방위하나 백현역 안부럽다. 쯪쯪 방위출신 저도 4주간의 훈련을 마친후 아버지를뵈었을때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는데. 오호 통재라! 스마트폰에 청바지라니. 형 글이 너무 재미있어 웃느라 눈물이 납니다
ㅋㅋ, 내는 배목수네 후라이팬 용도가 더 눈물 나.
ㅋ ㅋ ㅋ명절휴유증으로 삭신이 쑤시고 의욕이 바닥에 내동댕이 이 쳐진 때 글을 보니
비타민 한봉지 같아요.
귀촌의 의지를 띄운 리트머스님 용기에 박수 보내요.
양손 벌려 환영할터이다 .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