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5.18 광주에 대한 '기억'을 다룬 노순택의 사진집 <망각기계>(청어람미디어 펴냄)에 대한 문화평론가 천정환의 본격적인 서평과 함께, 노순택 작가의 인터뷰를 함께 싣는다. 한국 사회의 모순을 담아내는 그의 사진에 대한 보다 폭넓은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편집자>
5월 광주와 사진
사진으로 5월 광주를 말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는 인식과 기억이 미디어와 맺는 관계 문제 전체를 건드리는 듯하다.
1980년 광주가 80년대를 살았던 청년·학생들에게 추체험되고 급기야 어떤 '도덕'의 기준이 되었던 것도 미디어의 힘에 의해서였다. 1988년 광주 청문회나 1995년 5공 청산 특별법의 제정에 의해 '광주'의 진실이 공론장에 등장하기 전까지 그 미디어는 대략 네 가지였다. 그 미디어들은 공통적으로 항쟁의 진실을 알리고, 군사정권과 보수 언론의 왜곡에 맞서 대결을 벌였지만, 각각 다른 역능과 다른 역할을 했다.
첫째는 5월 광주에 관한 소문과 구술 미디어이다. 소문과 구전은 모든 '혁명적 운동'이 만들고 유포하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미디어이다. '그들'이 진상을 철저히 은폐하고 5월 광주가 생산한 구술적 미디어를 '유언비어'라 불렀기 때문에, '2000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등의 구전과, 아름답거나 잔인한 <5월의 노래>들에 담긴 광주의 표상은 더욱 진실한 것이었다.
둘째는 문자미디어와 문학이다. 광주는 1985년 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남사회운동협의회 엮음, 황석영 지음, 풀빛 펴냄), 1988년 작 <5.18 광주민중항쟁증언록1 : 무등산깃발>과 같은 증언 문학과 1985년 작 <밤길>(윤정모 지음, 책세상 펴냄), 1988년 작 <깃발>(홍희담 지음, 창비 펴냄) 등의 소설, 그리고 김준태의 1980년 작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1980) 같은 시편들에 담겼다. 그중 특히 서사물들이 행한 역할은 크다. 그것은 80년대 대학과 운동의 기본 '교재'였으며, 광주로부터 어떤 총체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했다.
세 번째는 외국 언론에 의해 촬영되어 몰래 유포된 광주항쟁 동영상이다. 대개 독일·일본 등의 방송사 카메라에 의해 제작되고 편집된 '광주 비디오'는 80년대 중반부터 한국으로 유입되어 대학 학생회와 종교 단체에 의해 방영됐다. 물론 '광주 비디오'는 강력했다. 그것은 동영상 미디어가 가진 본원적인 힘을 그대로 발휘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1988년 가을 국회 광주항쟁 청문회에서 최초로 항쟁의 진실이 '공식적'으로 규명되려 할 때 광주항쟁 비디오의 방영 문제가 사안이 될 정도였다.('광주항쟁 비디오를 방영하라', 1988년 12월 2일 <한겨레> 6쪽 참조)
▲ <망각기계>(노순택 지음, 청어람미디어 펴냄). ⓒ청어람미디어
네 번째는 사진이다. 사진의 역할은 어쩌면 가장 강력했다. 그것은 정지해있음(still)으로써 '비디오'보다 더 '외설적'이고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었다. 그것은 수잔 손택이 <사진에 관하여>(이재원 옮김, 이후 펴냄)에서 말한 원론과 같은 것이다. 즉,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깔끔하게 포착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며, "뒤의 이미지가 앞의 이미지를 곧장 지워버리곤" 하는 동영상과 달리 "어떤 순간을 특권화해 놓은 것"이다. 인간의 기억 자체가 동영상이 아니라, 사진처럼 되어 있다는 주장들을 참고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광주 사진은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더 세밀한 항쟁의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더 다양하고 많은 인간의 육신과 표정을 담아냈다. 백주대낮에 저질러진 학살의 반(反)풍경-대검에 찢기고 총탄에 뭉개진 또는 버려지고 모욕 받은 시신-그리고 목숨을 건 저항에 나선 시민들의 희망과 절망-학살 군대를 몰아내고 만든 시민공동체 등등.
그 사진들은 대단한 힘으로 광주 사진 앞에 선 이들의 이디오진크라지(Idiosynkrasie : 특정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공포 등을 드러내는 특이한 체질)를 건드리고, '해방'과 '혁명'의 상상력을 일궜다. 1980년대의 대학가에서는 5월이 오면 '광주의 벽'이 설치되었었다. 그 벽의 중심은 바로 사진들이었다.
당시의 많은 청년·학생들로 하여금 5월 금남로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동일시하게 함으로써, '존재 이전'을 결행하게 만든 거대한 집합적인 힘은 그 사진들로부터 나온 것이리라 감히 생각해본다. 만약 수잔 손택이 광주와 그 사진을 봤다면, 또는 1980년대의 한국 상황을 세세하게 알았다면 <타인의 고통>(이재원 옮김, 이후 펴냄)의 내용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광주의 사진은, 노순택의 책 <망각기계>(청어람미디어 펴냄)에서 정당하게 성찰되는, 사진의 모순을 뚫고 나아갔던 것 아닌가?
광주의 두 이미지
그 사진들은 대략 주로 (1)의 계열 또는 (2)의 계열에 속하면서 심상을 재생산했다 생각한다.(예시한 두 사진은 모두 당시 서독 주간지 <슈피겔>에 실린 것이다.)
▲ (1)
▲ (2)
(1)은 상상을 초월한 국가폭력과 그에 대한 저항과 비극적인 패배를 요약했다. (2)는 무고한 희생과 순결한 슬픔을 상징하고 또 그것에 대한 죄의식을 표상하고 생산했다. 그리고 (1)과 (2)는 합력으로서 사진을 응시하는 자들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내면화하게 했다.
중요한 것은 1980년대가 종결되고 난 뒤에도 한참, 우리가 '광주 사진'이라 할 때 품게 되는 '이미지의 기대 지평' 또한 (1)+(2)의 선에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5월 광주에 관한 또 다른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이창성 지음, 눈빛 펴냄)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5월 <중앙일보> 기자로서 광주를 취재한 이창성은 당시 찍은 사진들을 군부의 검열 때문에 공개하지 못하다가 28년 만에 모아 출간했다. 이창성이 뒤늦게, 그러나 새로 보여준 사진도 주로 (1)과 (2)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즉 그 스틸 이미지들은 잔혹한 탄압과 실패한 숭고한 항쟁에 관한 것이며, 이러한 두 과정이 야기하는 도덕 감정에 대한 것이다.
이창성은 사진집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1980년대의 '운동'과 청년 학생을 지배한 시대의 심성,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말이다.
"또다시 오월이 왔다. 매년 오월이면 나는 광주항쟁 기간 중에 마주쳤던 시민군들의 그 형형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 (그들은) 거의 모두 사망했다. 나는 살아남은 자로서 그들에 대한 책무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그들은 (…) 목숨까지 바쳤는데 나는 기껏 사진 몇 장을 공개했을 뿐이다. 눈물 어린 회한과 아쉬움이 앞선다. 이제야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지휘부에 약속한대로 나의 사진을 역사의 증언으로서 온전하게 세상에 내놓는다."(6쪽)
그러나 이 집단심성은 시간의 작용에 의해 마치 선사시대 공룡 발자국 화석처럼 변했다.
메타 포토그래피
이처럼 '광주 + 사진'에 대한 경험은 실로 강하고 숭고하며 집합적인 동시에 일면 고정된 지평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광주를 말한다는 것은 이제 아예 더 이상 불가능하거나 매우 모험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진집 <망각기계>에서 노순택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광주-사진'의 윤리 전체에 대해 과감하게 성찰하고 심문한다. 노순택 자신의 말을 인용한다.
"기록을 통한 '고발과 계몽'이라는 사회적 다큐멘터리 작업의 어떤 속성이 지루해졌다, 고 말하면 마음이 홀가분할 텐데, 사실은 겁이 났던 거지요. 사진도 의심스럽고, 저 자신도 의심스럽고. / '사진이라는 기록' 또는 '사진을 통한 기억'에 집착했던 마음이, 망각 그 자체 또는 '사진을 통한 / 사진이 저지르는 / 사진이 보여주는 망각'이라는 모순적인 생각으로 흘러갔습니다. 하물며 광주는, '종결되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사실 그것이 현재진행형임을 반증하는, 기억과 망각의 교차 시공간이거든요. 저는 오늘날 광주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광주의 망각을 고백하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망각기계>, 203쪽)
고로 <망각기계>의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사진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의 광주의 기억과 광주 사진에 대한, 즉 재현되었던 것들을 재현하고 성찰하는 '메타-사진'이라 할만하다.
ⓒ노순택
ⓒ노순택
'기억의 터' 자체에 관한 이런 근본적인 성찰은, 노순택이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가 중에서 가장 도전적인, 책의 해설에서 비평가 김현호가 적절히 말했듯 '한국 사진의 어떤 최대치'에 가 있는 작가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5월 광주의 기억에 대한 성찰은 비단 사진가뿐 아니라 어떤 다른 영역의 예술가나 작가, 지식인도 거의 감행하지 않는 총체적이고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성찰은 노순택 개인의 탁월함에서뿐 아니라 5월 광주와 사진이 맺는 특별한 관계에서 주어졌을 것이다.
기억의 변형과 2010년대의 광주
30년의 세월을 건너는 동안 광주는 성역(聖域)이 됐고, 광주의 기억은 망월동으로부터 파내어져 '국립묘지'에 옮겨져 묻혔다. 광주의 진실은 '부분적으로는' 알려졌으며, 국가권력은 광주의 피해를 '불충분하게나마' 보상했다. 이 '부분적임'과 '불충분'은 특히 5.18의 피해당사자였던 바로 그 대통령과 '민주정부'(들) 덕분에 디스카운트돼 버린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망각기계>는 출발하고 있다.
노순택의 말이 맞다. 그의 기억론에 별로 덧붙일 것이 없다. 기억하는 순간, 또는 기억한다고 말하는 순간이야말로 거대한 망각의 시작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5월 광주는, 박근혜가 참배를 하고 이명박은 참배를 안 하고 이런 따위의 문제에 갇혀버린, 오직 그런 문제만이 남은 듯한, 또는 그런 문제도 5월 18일 단 하루의 '제스처'에 갇혀버린, 화려하고 깨끗한 기념물이 된 '국립' 묘지 뒤의 것은 아무것도 잘 안 뵈는, 그런 것이 돼 버렸다.
ⓒ노순택
<망각기계>는 집합 기억의 근본 문제들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동체에서 국가가 독점하고 주도하는 기억 말고는 어떤 기억이 가능한가? 봉기의 기억? 해방공동체의 기억? 그런 종류 기억은 누가, 어떻게 간직하면 되는가? 개별자들의 몫이거나 단지 예술의 몫인가?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광주는 이제 30년이 더 지난 너무 오래된 '과거'가 아닌가? 30년은 너무 긴 세월이고, 광주 그 자체 뿐 아니라, 5월 광주에 의해 구성된 1980년대의 도덕조차 케케묵은 '과거'가 아닌가?
여기 '광주 행사'에서 희희덕거리는 또 다른 권력자들을, 또는 광주가 낳았지만 기실 역사의 '부산물'인, '박제되어버린 천재'적 정신을 보라.
ⓒ노순택
그리고 특히 내 눈에는 다음 사진이 그야말로 결정적인 '한 컷'인 것처럼 느껴진다.
ⓒ노순택
이 사진에서 '광주'는 광주 그 자신으로서 오늘과 미래의 광주 자신에 대해 말한다. 오늘의 광주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먹고 살아남아야 하는, 일개 지방자치체의 하나로서, 1980년 5월을 저처럼 '콘텐츠화'했다. 저 이미지는 '광주'가 스스로 1980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음을, 또한 광주 혼자 5월 광주를 다 떠맡아 안을 수도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얼굴 없는 미륵의 일어섬
물론 노순택이 우리들의 '망각기계-됨'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난 뒤, 그럼에도 망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든가 기억에 대한 불가지론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는 선명하게, 이 땅의 모든 '5월'과 '광주'에 내재한 근본적인 원망을 '망각'과 대비시키고 있다. 운주사의 얼굴 없는, 아직 일어서지 않은 미륵불들, 영겁이나 된 시간 속에서 그 부처들은 얼굴이 지워졌지만 없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은 광주의 이름 없는, 버려진 채 영원히 누운 영정 속 민중의 얼굴과 같다.
ⓒ노순택
ⓒ노순택
미래의 미륵들로 부족하다면, 책의 말미에 실린 노순택 자신의 말을 직접 듣는 것도 좋아 보인다.
"제 꿈속에 수시로 드나들었던 죽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오월의 영령이고,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장례를 치르노니 이제 작별을 고하노라' 통보할 수는 없지만, 이쯤에서 제 생각의 일단락을 지을 수는 있을 듯도 합니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가능하다면 오월의 살인마 전두환이 죽어 기억되고 망각되는 풍경도 지켜보고 싶습니다. 화려하고도 잔인했던 그의 휴가가 어떻게 종료되는지, 산 자들은 지켜봐야 하는 거잖아요."(<망각기계>, 223쪽)
<망각기계> 노순택을 만나다 인터뷰 / 김용언 기자
노순택. 1971년 생, <교수신문>과 <오마이뉴스>의 기자로 일하다 2003년 전업 사진가를 선언한 후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 촛불 시위, 용산 참사, 한진중공업 사태,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 등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갈등의 현장에 항상 있었다.
괴롭거나 힘겨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참 말을 고르는 노순택 작가의 입술은 자주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말을 삼키거나 에두르거나 감추진 않았다. 선명함과 모호함의 경계선 사이를 오가는 그의 사진이 언제나 남북 분단 이래 오작동을 일으켜온 한국사회의 한순간을 포착해왔던 것처럼, 노순택은 자신의 작업에 관해 정확하게 기술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래 마주앉아 이야기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 같다. 5.18 광주의 기억을 포착한 사진집 <망각기계>는 5월 4일 출간되었다. <망각기계> 사진전은 5월 4일부터 6월 24일까지 열렸다. 그러나 우리가 '망각기계'임을 처절하게 일깨워주는 일들은 지금도, 내일도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사진에 입문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노순택 : 저널리즘으로 사진을 시작했고, 지금도 저널리즘 언저리에 있다고는 할 수 있겠다. 화이트 큐브라고 불리는 갤러리 공간이 더 주된 활동 공간이긴 하지만, 작업물이 최종적으로 갤러리에 걸리기 전까지는 뉴스 현장을 다루고 저널리즘과 계속 관계를 맺는다는 측면에서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지금 계속 옆에서 사진을 찍으니까 너무 쑥스럽다.(웃음)
프레시안 : 사진가로서 본인은 피사체와 대화하면서 찍는 편인가.
노순택 : 사진 찍히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되게 중요하다. 특히 내가 작업했던 공간, 대추리나 강정마을 등에서 사진 찍히는 분들 입장에서는 사실 그 모습이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름답지 않은 순간들일 수 있다. 본인에게 무척 힘든 순간들인데도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사진 찍는 걸 허락해줄 때, 최종 결과물에서 그분들의 입장에 대해 생각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감사의 형태라고 해야 할까. 그분들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들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행동을 취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나 스스로도 사진 찍는 일보다 사진 찍히는 게 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카메라에 찍혀준 분들에 대해서 항상 감사드린다.
프레시안 : 이를테면 <망각기계>의 사진들 옆에는 광주 망월동 옛 묘역에서 당신이 만난 남성과의 대화가 한 줄씩 실려 있다. 그분의 사진은 여기 없는 것 같은데.
노순택 : 저널리즘에 종사할 때는 글을 설명하기 위한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는 글을 굉장히 많이 쓰는 편에 속하는 사진가인데,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설명하는 글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진하고 글이 어떤 관계를 갖긴 하지만, 굳이 글을 설명하기 위한 사진이거나 사진을 설명하려는 글일 필요는 없다. 묘역에서 만났던 남자분의 경우는 대화가 중요했다. 나야 사진 찍으러 묘역에 갔지만, 그분은 순수하게 참배를 하러 온 분이었다. 내가 가졌던 의문들이 그대로 그 남자분의 입에서 나왔을 때 사진을 찍기보단 그 대화를 잘 기억하고 메모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기자 일을 그만둘 때, '내가 하고 싶은 작업'에 대한 갈증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나.
노순택 : 매체에 있을 때 좋았다. 매체가 주는 여러 장점들이 있지 않나. 일단 월급이 나오고,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에 일반인의 자격으로 갈 수 없는 공간에 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백화점식 취재를 해야 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마침 대학원을 다니던 때였는데, 한 학기 출석 한 학기 휴학을 되풀이했다. 결국 학위를 제대로 마무리 짓겠다면서 회사를 그만뒀는데, 결과적으로는 학위와 회사를 모두 포기하기 된 거다.(웃음) 이 돈과 이 시간으로, 작업을 계속 하는 쪽을 택하게 됐다. 막연하긴 한데…, 의문이라고 해야 하나. 예전엔 사회가 굉장히 견고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기자의 입장에서 봤을 땐 이 사회가 작동하고 있는 현상이 오작동처럼 느껴졌다. 특히 한국 사회의 모순에서 아주 주요한 요인으로 분단이 있다. 한국 사회가 분단의 오작동 공간, 분단의 오작동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게 당장의 핫한 뉴스는 아니라고 해도, 나한텐 자꾸 의문으로 다가왔다. 그걸 더 탐색하고 싶었다.
프레시안 : 사진가로서 위치 선정이 바뀌어온 과정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노순택 : 사진을 시작한 계기 자체도, 내가 본 장면과 미디어를 통해 바라본 장면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군사정권 말기,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학교를 다녔는데, 내가 직접 참여한 장면과 다음날 신문에 실린 사진 속 장면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 사진은 굉장히 투명하고 객관적이며 사실을 말하는 매체라고 생각했는데 이 간극은 뭘까? 사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기보다는, 매력을 느끼게 됐다. 굉장히 교묘한 매체구나, 누군가가 교묘하게 찍었다기보다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교묘한 것이구나 싶었다.
특히 매체에 있을 때에는 정보 제공이라는 목적 때문에, 당연하게도 명확하고 극적인 장면을 취하게 된다. 명확한 사진으로도 부족해서 캡션에서도 정확한 정보를 줘야 한다. 그러다가 개인 작업을 하다 보니까, 어떤 건 정보를 넣기보단 정보를 빼는 방식으로 가게 된다. 보자마자 '이건 A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까 또 그건 아닌 것 같은 방식으로. 저널리즘이 하나의 정점, 사태의 명확한 정점을 취한다면 나는 그 정점이 지나간 뒤거나 오기 직전을 다루게 된다. 오히려 그 정점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끔.
프레시안 : 위치 선정의 문제에 있어, 북한에서 찍은 사진집 <Red House>(노순택 글·사진, 청어람미디어 펴냄)의 경우는 더 심각했을 것 같다.
노순택 : <Red House>에선 북한을 바라보는 세 가지 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첫 번째는 '북한은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고 싶어하는가'의 문제다. 남한도 마찬가지지만, 북한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강박이 무척 큰 사회 같다. 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 열악한 게 사실인데, 대외적으로는 강력하고 강인하고 질서정연하고 행복한 사회로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런 강박이 크면 클수록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반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북한의 현실을 찾아 헤맸다기보다, 찾을 수가 없었다. 통제된 사회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걸 찍어서 그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장의 제목이 '펼쳐들다'이고, 부제는 '질서의 이면'이다. 이 질서의 이면은 두 가지다. 북한 사회의 이면, 그리고 남한 사회도 이런 종류의 질서와 동원 문화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 질문이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로 되돌아오길 바랐다. 분명 강도는 다르겠지만, 한국 역시 1988년 서울올림픽이나 1986년 아시안 게임 때 엄청난 규모의 매스게임을 하지 않았나. 혹은 나 역시 군대를 다녀온 이후 동원 예비군과 지역예비군, 민방위까지 20년 가까이 비상시적 군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2장의 제목은 '스며들다'이며 부제가 '배타와 흡인'이다. 남한과 북한이 교류하는 장에서 내가 봤던 건 사진에 대한 강박이었다. 북에 간 사람들의 강박은 '내가 여기 왔다는 걸 증거 해야 한다'는 거다. 한 마디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 물론 북한 측에서 찍으라고 허용한 공간에서만 끊임없이 찍는다. 북한 측도 남한 사람들을 많이 찍는다. 남한 사람이 공화국의 맛있는 음식과 행복한 삶에 감동받았다는 걸 선전해야 하니까. 서로가 끊임없이 총 대신 카메라를 겨누는 거다. 사진의 강박이 각자의 입맛에 맞춰서 서로를 강박적으로 찍으며 재현해낸다. 서로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흡인하려 한다.
3장의 제목은 '말려들다'이고, 부제는 '전복된 자기모순'이다. 여기선 남한 사회에서 북한이 어떻게 재현되는가를 찍었다. 눈으로 봤을 때는 그 풍경이 자연스러운데 사진으로 재현되었을 때에는 기괴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김일성과 김정일의 목을 자르고 불태우는 화형식이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지는 아주 극단적인 풍경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 광장에서 남한 대통령의 목을 자르고 불태우면 그게 좋아 보일까? 설령 내가 싫어하는 대통령이라도, 저 사람들 미쳤나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렇다면 김일성의 목을 자르고 불태우는 건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1장 제목으로 돌아간다면, 북한은 스스로의 강인함을 강박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건 거꾸로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표현의 하나가 아닐까. 남한과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각자의 욕망으로 서로를 현미경처럼 호시탐탐 들여다보고, 망원경의 욕망으로 멀리서 확대하여 본다. 이 욕망들이 거대하게 부딪히는 광경이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고 한편으로는 슬프다. 북한을 아름답게 볼 순 없지만, 남한이라고 해서 지상 낙원은 아니다. 북한이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남한이 괴물이 되어가고, 북한 역시 남한이라는 적과 대립하기 때문에 점점 더 괴물로 치닫는 게 아닐까. 천성 자체가 괴물이라기보다 우리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괴물이 되라고 주문하는 상황은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도 건강하게 논의되어야 할 내용, 예를 들어 행정수도 이전이나 사립학교법 개정, 무상 급식 등을 두고 토론할 때 나오는 말이 '친북이냐? 빨갱이냐?' 밖에 없지 않나.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북한의 모순을 바라보려 하지만, 나는 우리 안에 있는 모순을 보여주고 싶었다.
프레시안 : 최근 개봉한 용산 참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두고 '현장성'이라든 부분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서도 이에 대한 생각이 많을 것 같다. 5.18 광주에 대한 사진집 <망각기계> 같은 경우는 특히 거기 대응하여 생각할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노순택 : 나도 그 논의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조금 다른 얘긴데, 나도 <두 개의 문> 배급위원이다. 그날 그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됐다.
프레시안 : 잠깐, 용산 참사 당시 그 현장에 있었다는 말인가?
노순택 : <두 개의 문> 관련하여 매체에 배포된 사진들이 내가 찍은 사진들이다. 그게 참 희한한 게, 참사가 벌어진 날이 2009년 1월 20일이다. 예를 들어, 9.11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노순택 : 대부분 그럴 것이다. 참 흥미로운 게, 1973년 9월 11일은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전복된 날이다. 그러니까 칠레인들에게는 '9월 11일'하면 즉각 아옌데 대통령의 의문의 죽음이 떠오를 것이다. 어떤 날을 지칭할 때, '누군가만의 날'이 아니라는 거다.
2009년 1월 20일은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출범하는 날이었다. 오바마 정부의 출범이라는 게 상징성이 크지 않았나. 부시 부자가 차지했던 그 전의 미국 정부는 '1퍼센트 아니면 다 죽어야 한다'는 강자의 지배 논리이자 백인의 논리를 세계에 강제했던 정부이다. 그에 비해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상징성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때 마침 일본의 고단샤 출판사가 창업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바마 정부의 출범일인 1월 20일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This day of change>라는 사진집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전 세계 100명의 사진가에게 작업을 의뢰했고, 나도 연락을 받았다.
원래는 DMZ 쪽을 찍을까 싶어 19일에 임진각 쪽을 사전 답사했다. 그날 저녁 용산 남일당 위에 망루가 세워졌다. 연락을 받고 용산 쪽에 갔는데 경찰들이 몰려들고 있더라. 지켜보다가 망루를 설마 오늘 당장 침탈할까 싶어 집에 돌아갔다. 다음 날 임진각에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으니까. 그런데 새벽 3시경에 기분이 이상하더라. 카메라를 챙겨들고 다시 용산으로 갔다. 그리고 새벽 5시가 넘어서 참사가 벌어졌고, 뜻밖에 그걸 목격하게 되어 사진으로 찍었다. 결국 고단샤 쪽에 보낸 1월 20일의 사진은 용산 참사의 풍경들이다. 강자의 논리를 강제하던 부시 전 대통령의 세계관이 이젠 미국에서 폐기처분되었는데, 한국에선 부시의 세계관을 추종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며 1월 20일 그 세계관이 반영된 너무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써서 보냈다. 목격한 자의 일종의 부채라고 해야 할까.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식이 치러지기까지 1년 동안 용산 작업에 매달렸다.
프레시안 : 우연이라기엔 참 놀라운 일이다.
노순택 : 사회적인 갈등의 폭발을 다루는 이야기가 하나의 방식이거나 형식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작업할 때 마음의 온도와 작업의 온도가 일치하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그게 항상 일치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엔 물음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두 개의 문> 같은 경우, 다른 형식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용산 참사를 옆에서 목격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작업을 할 수 없나 라는 질문 앞에서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같은 이야기를 다루되 어떤 형식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말하기의 방법은 정보 제공형도 있을 것이고, 평서형도 있을 것이고, 분노형과 호소형과 의문형도 있다. 현재 진행형의 참사에 대해서라면 저널리즘은 당연히 정보 제공형의 입장을 취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질문을 던져주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 역시 대추리를 다룬 '얄읏한 공' 전시회를 준비할 때 그런 고민을 했다. 대추리에서 살면서 작업했고, 그동안 주민들과 함께 포스터도 만들고 매체에 기고도 하고 그랬지만, 그 작업을 갤러리에 끌고 올 때에조차 예전의 되풀이일 필요가 있는지 고민했다. 포스터 저널리즘이라든가 실시간 중계를 조금 더 좋은 프린트와 액자에 담아 깔끔한 벽면에 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화이트큐브라고 하는 공간에서 요청되는 언어의 방식이 있는데, 그에 맞는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얄읏한 공'의 작업 노트는 "나는 왜 이렇게 에둘러 갈 수밖에 없었나"를 변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추리 상황이 이 지경인데 공놀이를 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나 스스로도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다.
내 작업의 목적이 '남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재확인시켜줘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다 안다고 생각한다. '용산 철거민들 불쌍하게 죽었잖아', 혹은 '테러리스트들이 죽음을 자초했지'. 사실은 입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도 없는 거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 용산참사에 관한 다큐가 걸릴 때, 어떤 방식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이 시점에서 '재탕'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방식은 오히려 용산에 대한 생각을 더 지루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나의 당위이자 참사에 관여했던 이들의 당위지,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의 당위는 아니거든. 무관심한 이들에게 질문을 어떻게 던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꼭 <두 개의 문>이 아니더라도 작가들 모두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망각기계>라는 제목을 영어로는 'forgetting machine'으로 표기했다. 망월동 옛 묘역에 놓인 죽은 이들의 사진이 자연적으로 퇴색하고 망가져가는 현재진행형의 과정과도 연관되는 것 같다.
노순택 : 우리 자신이,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기억 기계인 동시에 망각 기계다. 역사적인 사건은 끊임없이 기억된다고 선언되지만, 그 선언 이외의 것들은 망각되고 있는 게 아닐까.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기억을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거물 같지만, 그런 특정한 순간 내지는 공간을 제외하면 그 근방의 넓게 펼쳐진 것을 함께 보여줄 수는 없다. 사진, 또는 사진기는 사실은 망각을 다루는 기계다.
프레시안 : <망각기계> 작업이 5.18기념재단 측과의 협업으로 처음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사진들을 보면 5.18기념재단 측에서 원하던 것과는 꼭 맞아떨어진 않았을 것 같은데.(웃음)
노순택 : 딱 1년 동안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재단 쪽에서 의뢰했던 광주의 미래지향적인 사진들로는 주로 기념 공간 사진들을 넘겼다. 5.18 기념공원, 새로 단장한 묘역 등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학습) 공간들의 사진이다. 재단의 도움이 분명 시작점이었지만, 광주에 대한 사진을 찍고 싶다는 건 오랜 바람이었고 이번에 어떻게든 끝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3년 정도 혼자 작업할 때 청어람미디어로부터 책을 내자는 얘기가 나왔다. 계약한 다음 3년을 또 끌었다. 출판사 쪽에서 오래 기다려줘서 정말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때 책을 안 내길 잘했다고도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면 어설프게 나왔을 수도 있었을 테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관련한 풍경을 광주에서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 시간을 끌면서, 묘역에 놓인 죽은 이들의 사진이 망가지는 과정 자체도 찍을 수 있었다.
프레시안 : 작년에 김태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오월愛>를 봤다. 5.18을 여전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당연한 일이겠지만 5.18과 광주를 여전히 연결시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망각기계>를 작업하면서 비슷한 걸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노순택 : 광주에 대한 기억의 강박은 광주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고, 망각에 대한 강박 역시 광주를 덮어버리고 싶은 사람들만의 것도 아니었다. 망각이라는 건 공조에서 비롯된다. 죽인 측에서도, 죽임을 당한 측에서도 잊고 싶다는 의지는 똑같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기억한다는 건 대체 뭘까. 망각을 용인해달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죽은 이들의 무덤 앞에 놓인 사진들은 '우리가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더라도 용서해주세요'라는 제스처 같기도 했다.
<망각기계>에선 광주뿐 아니라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묘역에 왜 사진이 놓여 있나. 일단 이건 개인의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다. 그랬다면 우리가 많이 아는, 비석만 세우는 무덤의 방식을 취했겠지. 하지만 이건 사회적인 죽음이었지 않나. 망월동 묘역은 죽은 이를 아는 사람들만이 찾아오는 곳이 아니다. 모르는 이들도 무수히 찾는다. 비석만 세운 똑같이 생긴 무덤들 사이에선, 죽은 이들 각자의 개별적인 삶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사진을 놓은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이 살아생전 그 사진을 찍었을 땐 곧 닥칠 죽음의 중거물로 쓰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삶을 증거하던 사진이라는 도구가 '나는 죽었습니다'라는 증명으로 사용되는 풍경.
어쩌면 그건 '당신들을 사진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퇴색하는 기억의 한 부분들은 용서해 주세요'라는 변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이 망가져가는 과정 자체가, 당연히 살아있을 때 찍은 사진인데도 이젠 죽었을 때의 모습을 찍은 사진처럼 보인다. 많이들 물어보는 것처럼, 내가 그 사진에 포토샵으로 뭔가 후처리를 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하지만 그런 오해 앞에서 당신이 틀렸다, 잘못 봤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프레시안 : 운주사의 부처상 사진 중에 입상을 거꾸로 배치한 사진이 있다. 전시회장에도 영정사진들이 배치된 공간 바로 입구 쪽이 이 사진이 크게 인화되어 걸려있던 게 기억이 났다. 와불 사진과 또 다르게, 이 사진은 왜 거꾸로 배치했나.
노순택 :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재미없어지는데… (웃음) 와불이 있고 그 다음 페이지에 토끼풀밭에 누워계신 아저씨가 있지 않나. 운주사의 부처님들에 얽힌 이야기처럼 세상이 뒤집히길 바랐던 사람들은 천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광주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용산참사를 겪은 가족들,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가족들 역시 죽음과 같은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주지 않고 뒤집혀지지 않는 세상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겠나. 뭐가 거꾸로 된 게 아냐? 하는 생각은 1000년 전에나 오늘에나 다 있었다. 그렇게 유구한 전통이 있는 기다림인데…, 그건 별로 필요치 않은 전통이기도 하고, 답답한 전통이기도 하다. 결국 새 세상이 오지 않았으니까.
와불이 뒤집히면 세상이 바뀐다는 건 아름다운 전설이지만 사실 아름답지 않고 잔인한 전설이다. 하지만 운주사 옆 토끼풀밭에 누워있는 아저씨는, 내가 살아온 40여 년 경험상 30분이나 1시간 뒤면 잠에서 깨어 일어날 것이다. 내겐 1000년을 기다릴 여유는 없지만, 그 아저씨가 일어나길 기다릴 여유는 있다. 세상을 뒤집는 것도, 세상을 뒤집지 못하는 것도 결국 사람의 몫이지, 누워있는 와불의 몫인가. 서있는 와불을 뒤집든 거꾸로 세우든, 어설픈 작가의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부질없는 질문이라도 던지면 다행이고, 그것조차 갖지 못하면 좀 답답하긴 하겠지. 질문을 갖지 못하는 삶이 제일 위험한 삶인 것 같다. 세상을 이렇게 괴물로 만드는 건 확신하는 사람들이고, 그 확신은 질문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동조에 기반한다.
프레시안 : 현재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이주빈 글, 노순택 사진, 오마이북 펴냄)를 작업하는 등 강정마을 작업에 집중하는 중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대추리, 평택, 용산 등에서 사진을 찍었다. 활동가나 주민, 당사자들만큼이나 작가 본인에게도 계속 고통스러운 싸움의 현장을 지켜본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일 것 같다. 당신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노순택 : 황지우의 시 '여정' 중에 '그러나 안간힘도 힘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음… 모르겠다.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남들에 대해 기대가 없다. 타자에 대해 내가 해주고 싶은 게 없으니까 내가 타자에게 바라는 것도 없다. 다만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 질문, 이런 일이 왜 벌어질까 하는 질문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본 장면과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장면은 왜 다른가, 이런 것이 옳은가 그른가. 그런 호기심, 질문이 작업을 계속 하게 하는 안간힘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와선 작업이 작업을 밀고 가는 것 같다. 하던 지랄이 있으니까(웃음), 더 안 할 수가 없다.
물론 지금 당장의 연대를 계속 고민한다. 용산 참사 때처럼 달력을 만들고 '찌라시'를 만들고 매체들에 기고하고, 희망버스긴급 사진집도 만들고, 판매 비용은 전부 현장에 기부하고. 그런 당장의 연대를 끊임없이 고민하긴 하지만 그게 내 작업의 궁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대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요청되는 연대의 형식들을 고민할 필요가 있지만, 그게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내 나름의 작업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백남준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가 썩어야 예술이 된다고. 사회가 썩으면 예술의 소재가 많아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소재가 많아진다기보다 예술에 요청되는 예술적 상상력이 긴급하게 요청되는 거라고 이해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썩은 사회에 질문을 던지기 힘드니까. 하지만 내 사진으로 대안을 제시하거나, 세상을 바꾸거나 변혁시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내 작업이 누군가에게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질문을 던져주면 다행이고, 아니면 할 수 없고.
아도르노도 그런 말을 했다. '대안을 제시하는 게 예술의 책무는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책무는, 인간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이 세계의 발전 방향에 대해 형식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고 하면 사진을 하면 안 되지. 사진을 사회 변화, 변혁의 도구로 생각하는 건 위험한 것 같다. 너무 쉽게 지칠 수도 있고. 사진이란 건 굉장히 모호하니까.
프레시안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또 광주처럼 마음속에 품고 있는 또 다른 프로젝트가 있다면 공개해줄 수 있을까.
노순택 : 아직 정리가 안 된 작업이 좀 있다. 용산을 다룬 작업도 그렇다. 용산참사가 진행형일 땐 긴급 전시도 하고 사진 기고도 했지만, 내 작업으로는 또 따로 준비해야 한다. 제목은 '남일당 디자인 올림픽'으로 정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열심히 추진했던 디자인 올림픽 사업, 올림픽이라는 행사의 배타적인 성격 뿐 아니라 예술과 실용이 만나는 '디자인'의 과정에서 어떤 참사가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1장은 참사가 벌어졌던 2009년 1월 20일의 사진, 2장은 그로부터 1년 뒤에야 비로소 치렀던 장례식과 험난한 싸움의 과정의 사진이다. 3장은 망루의 사진이다. 아무도 자기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망루다. '다가오면 떨어진다.' 망루의 메시지는 딱 그거다. '손을 놓는 건 나지만, 나를 죽이는 건 너다.'
또 다른 계획으로는 문정현 신부님에 대해 책 두 권을 만들고 싶다. 1권은 나와 신부님이 직접 나누는 대담을 모으고, 2권은 십 몇 년 동안 찍었던 '거리의 신부'의 사진집이다. 어떻게 보면 근 세 번의 정권,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우리 사회에 벌어진 가장 굵직한 사건들 한복판에 문 신부님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내가 사진을 찍었다. 문정현 신부님은 물론 명망 높은 사회 운동가이지만, 이제는 나이가 아주 많은 친척 어른처럼 느껴진다. 신부님의 미덕은 젊다는 거다. 아주 인간적인 고민들과 호기심도 많고, 어떤 때는 버럭하는 성질도 있고, 그래서 여전히 조금 애 같다.(웃음) 전시회보단 책으로 더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