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속에는 달이 자주 등장합니다. 보름달 아래에서 차를 마시며 거문고를 뜯는 선비 그림도 있고, 소나무 숲을 그린 병풍에도 달이 훤하게 떠있습니다. 잘 알려진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月下情人)에서는 가녀린 달빛 아래 담장에서 수줍게 마주친 연인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시절엔 사람이 달나라에 직접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9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쏘아 올린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어요.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 두 명의 우주비행사가 달에 발을 디뎠습니다. 전 세계인이 TV로 이 장면을 지켜보았는데, 그중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던 화가 한묵(1914~2016)도 끼어 있었어요.
한묵은 추상회화의 선구자이자 기하추상을 개척한 화가로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했던 분입니다. 평생을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전시회도 자주 열지 않았고, 수도자처럼 고요히 살던 작가에게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커다란 충격이었어요.
그날 이후 한묵에게 달은 더 이상 꿈처럼 아련하고 신비로운 미지의 빛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곳은 울퉁불퉁 거칠었고 실제로 발을 디딜 수 있는 현실의 장소였으니까요. 예술은 이래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이 크게 바뀌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작가는 3년 동안이나 아무 작업을 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했어요. 그리고 고뇌 끝에 새로 붓을 들었을 때 그의 작품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런 예술에 대한 한묵의 생각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전시회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오는 3월 24일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한묵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동양의 묵화를 배웠어요. 그러다가 청소년 시절부터 서양의 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이번 전시회는 작품이 그려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어서 시기마다 작가가 어떤 것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가 전쟁을 겪었던 1950년대의 그림은 어둡고 침울한 느낌이 납니다. 작품1은 전쟁을 겪은 땅에서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가난한 가족을 그린 것이에요. 착 가라앉은 갈색의 분위기 속에 표정을 알 수 없이 간략하게 묘사된 인물들이 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있고, 왼쪽으로는 아버지로 생각되는 남자의 모습도 보여요.
1961년 마흔일곱 살의 한묵은 새로운 그림을 찾기 위해 파리로 떠납니다. 새것을 찾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주위에서 만류했어요. 작품2는 파리에 도착한 이듬해에 완성한 것인데, 네모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전의 어두침침한 색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작은 네모들이 노랑과 청색, 빨강의 원색으로 한 겹 칠해져 있고, 그 위에 흰색으로 덧칠했으니까요. 이렇듯 네모들로 화면을 구성한 것은 수평선과 수직선이 이루는 안정된 조화로움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의 생애에서 배우게 됩니다. 한묵은 102세까지 장수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가 47세에 새로운 도전을 했던 것이 결코 늦지도 않았었고요.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계기로 한묵은 미래 공간으로서의 달나라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파리에 도착해 새로 시작한 수평·수직 구도의 그림은 안정된 느낌은 들지만 운동감, 생동감은 부족했죠. 작가는 고민에 빠집니다.
▲ ③‘푸른 나선’. /서울시립미술관, '한묵: 또하나의시(詩)질서를위하여'展
우리가 느끼지는 못해도 지구는 분명 돌고 있지요. 지구뿐 아니라 하늘의 수많은 별과 달은 큰 원과 작은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공간은 빙글빙글 회전하는 우주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요?
▲ ④‘번개 탑’, 1976. /서울시립미술관, '한묵: 또하나의시(詩)질서를위하여'展
작품3은 원과 나선이 빙빙 돌아가며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듯 엄청난 속도를 만들어내는 그림이에요. 그뿐이 아니에요. 빨간 선들을 보세요. 톱니 모양으로 생겨서, 찌릿찌릿 전기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냅니다. 이런 지그재그 선은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칠 때 사진을 찍으면 실제로 나타나는 모양인데요. '번개 탑'이라는 제목의 작품4에서도 그런 선들을 볼 수 있어요. 손을 대면 감전될 것만 같은 그림이에요.
작품5는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네요. 둥근 행성들이 저마다 움직임의 발자취를 남기면서 리듬감 있게 배치되어 있지요. 캔버스 틀에서 끝나버리지 않고 그 안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무한한 우주의 느낌, 바로 화가 한묵이 표현하고 싶었던 우리 시대의 달나라가 아니었을까요.
신윤복 그림 속 부분월식 보고 언제 그린 작품인지 알아냈대요
▲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월하정인’ 속에 그려진 달에는 무심코 지나치면 놓칠 비밀이 있습니다.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에 들어 있는 ‘월하정인’은 청사초롱을 밝히고 밤길을 나란히 걷는 연인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들 위로 떠 있는 달 생김새가 조금 특이합니다. 달 형태는 초승달인데 볼록한 면이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달 모양입니다. 달 모양이 이렇게 가로로 누워 위로 볼록하게 되어 있는 것은 ‘부분월식’일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월식은 보름에만 일어나니 이 연인들은 부분월식이 있던 보름날 밤에 만났던 것이지요.
천문학자 이태형씨는 2011년 “신윤복이 태어난 18세기 중반 이후 100년 동안 서울에서 관찰 가능한 부분월식은 1784년 8월 30일과 1793년 8월 21일 두 번이었는데, 1784년 당시에는 사흘 연속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이 그림은 1793년 부분월식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