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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마르코 12,28ㄱㄷ-34
하느님과의 첫사랑!
사랑에 관해서 하느님은 참으로 요구가 많으시고, 절대 양보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십니다.
인생 모든 것을 걸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존 포웰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체험한 하느님과의 첫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게 와 닿았다.”
신부님은 그 특별한 체험 이후 자신의 삶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답니다.
“완전히 새롭게 아름다운 세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렇게 새로운 눈을 뜨고 보니 그 전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한 그 이후, 더 이상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의 접촉 이후 더 이상 이웃을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감미로운 체험 이후 봉헌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 두 가지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둘은 구약 모든 율법의 종합이요 요약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경쟁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도 없는 성공을 위한 갈망, 나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접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안에 길고도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갈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게 될 때 새 안경을 처음 쓰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자비의 흔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뵙듯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우리 삶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새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매 순간 흠뻑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총이 오늘 우리에게 펼쳐지기를 기대하며, 이 하루를 기쁘게 살아내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법의 얽매임이 어떻게 자유와 평화를 주는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0-31)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목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수만 가지 복잡한 율법을 단 두 개의 기둥으로 압축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라는 '수직적인 기둥'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수평적인 기둥'입니다. 이 두 기둥이 교차하여 만들어지는 모양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내 마음대로 편하게 살고 싶은데, 하느님은 왜 이토록 무거운 사랑의 의무로 우리를 옭아매려 하실까요? 얽매임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요?
어느 날, 세상의 모든 규칙과 인간관계에 지쳐버린 한 젊은이가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와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국가에 세금을 바치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억울하고, 매일 부딪히는 이웃들의 비위를 맞추며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지긋지긋합니다. 수직적인 의무도 없고 수평적인 관계도 없는, 아무도 저를 간섭하지 않는 완벽하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공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까?"
젊은이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랍비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물론 있지. 그곳에 가면 자네에게 세금을 내라거나 법을 지키라고 독촉하는 왕도 없고, 자네의 속을 뒤집어 놓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귀찮게 구는 이웃도 전혀 없다네. 아주 완벽하게 고요하고 자유로운 곳이지." 젊은이가 눈을 번쩍이며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런 천국 같은 곳이 도대체 어디입니까?"
랍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공동묘지라네. 오직 차갑게 죽어있는 시체들만이 왕에 대한 수직적 의무도, 이웃에 대한 수평적 사랑의 얽매임도 없는 완벽한 자유를 누린다네. 젊은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면 응당 그 관계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져야 하는 법이라네."
그렇습니다. 의무와 관계의 얽매임을 거부하는 완벽한 자유는 곧 죽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지우신 이 수직과 수평의 얽매임은 우리를 구속하려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거칠고 무서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생명과 절대적인 자유를 완벽하게 지켜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고안해 내신 가장 완벽한 '안전 시스템'입니다.
이 위대한 십자가의 얽매임이 어떻게 우리를 지켜주고 자유롭게 하는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국가와 법'의 원리를 통해 먼저 들여다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그 나라의 법률이라는 강제적인 사슬에 우리 자신을 묶어야만 합니다. 국가의 모든 법은 가만히 뜯어보면 정확히 두 갈래의 얽매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위를 향한 의무입니다.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대에 가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내 피 같은 돈을 떼어 세금을 내야 합니다. 둘째는 옆을 향한 의무입니다. 형법과 민법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웃을 함부로 때리거나 이웃의 재산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얽매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두 가지 의무가 답답하다며 이렇게 소리친다고 상상해 봅시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완벽한 자유인이 될 거야!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을 것이고, 내 기분대로 이웃의 물건을 빼앗고 마음껏 때리며 살겠어!' 이 사람이 과연 자유를 얻을까요? 아닙니다. 이 두 갈래의 법을 어기는 순간, 국가는 공권력을 발동하여 그 사람을 체포해 차디찬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는 100퍼센트 영원히 박탈당하고 맙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세금을 내기 싫고 이웃의 비위를 맞추기 귀찮아도, 기꺼이 이 두 가지 법의 사슬에 우리 자신을 묶고 순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가 위를 향해 바친 세금과 국방의 의무로 인해, 국가는 거대한 군대를 키워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우리가 옆을 향해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법을 지킬 때, 국가의 경찰과 공권력은 강도와 살인자들로부터 '우리의 집과 평화'를 완벽하게 지켜줍니다.
그렇습니다. 위를 향한 국가에 대한 사랑(세금)과 옆을 향한 이웃에 대한 사랑(준법)이라는 얽매임은, 남을 좋게 하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밤에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나의 완벽한 자유와 평화'를 보장받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선택하는 생존의 밧줄인 것입니다.
우리가 속하고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집단의 수준을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이 위를 향한 법과 옆을 향한 법이 얼마나 철저하고 깊이 있게 지켜지느냐에 따라, 그 집단이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크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둠의 세계에 있는 깡패 집단을 생각해 봅시다. 그곳에도 나름의 위계질서가 있고 의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법의 바탕에는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위를 향한 존경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옆을 향한 의리는 돈과 이익 때문입니다. 사랑의 법이 작고 얄팍하기에, 그들은 늘 다른 조직이 자신들을 깔보거나 공격할까 봐 두려워하며, 부하가 언제 배신할지 몰라 밤잠을 설칩니다. 겉으로는 힘이 세 보이지만 내면에는 평화가 전혀 없는 지옥입니다.
반면, 우리가 머무는 가정을 보십시오. 가정은 세상의 어떤 조직이나 회사보다 위를 향한 질서(부모 공경)와 옆을 향한 질서(형제애)가 끈끈한 사랑의 법으로 지켜지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아무리 치이고 상처받아도, 집에 돌아와 문을 닫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법의 강도, 곧 사랑의 얽매임이 강할수록 평화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사랑(수직)과 이웃 사랑(수평)이라는 십자가의 계명은 바로 이 가정의 사랑을 우주적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하느님 나라라는 우주 최고의 가정에 소속되어 영원한 보호를 받기 위해 우리가 서명해야 할 '영적 헌법'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그 어떤 법보다 훨씬 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아가페적인 사랑을 요구합니다. 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이 가장 무겁고 철저한 십자가의 헌법이 지켜지는 곳이기에, 그곳에는 사탄의 어떤 위협이나 상처도 침범할 수 없는 100퍼센트 완벽한 평화와 자유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사랑의 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일상에서 연습하는 이들만이 그 영원한 나라에 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의 단잠을 포기하고 성당에 나와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예배하고 십일조를 바칠 때 (수직적 세금),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신 팔을 뻗어 사탄의 맹렬한 공격과 지옥의 공포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완벽하게 방어해 주십니다.
우리가 내 속을 썩이는 얄미운 직장 동료나 배우자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꾹 참고 용서할 때 (수평적 준법), 내 주변은 분노와 복수의 칼날이 사라진 안전한 평화의 요새가 됩니다. 결국 십자가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우주 최강의 보디가드 시스템입니다. 이 법을 지키는 자는, 우주의 통치자가 나를 지켜주신다는 압도적인 자존감 속에서 '왕의 여유'를 누리며 세상을 두려움 없이 걷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기적적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끄시자마자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이라는 무거운 법을 주십니다. 1계명부터 3계명까지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수직적 계명이고, 4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수평적 계명입니다.
이제 막 자유를 얻은 백성에게 왜 또다시 무거운 사슬(율법)을 채우셨을까요? 만약 광야에서 이 수직과 수평의 법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며칠도 안 되어 먹을 것을 두고 서로를 죽이고 빼앗는 짐승의 무리로 전락하여 사막의 모래에 파묻혀 멸망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자유로운 야만인'이 아니라 '안전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남게 하시려고 십계명이라는 단단한 성벽으로 그들을 묶어 보호하신 것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20장).
교회의 위대한 학자이신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사랑의 짐을 거부하는 자는 생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수레바퀴는 축에 단단히 매여 있을 때만 힘차게 굴러갈 수 있고, 악기의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묶여 있을 때만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두 기둥에 당신을 단단히 묶으십시오. 그 결박이 당신을 천국의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참조).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첫째가는 계명”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묻는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하나로 통합하여 답하신다. ★하느님 사랑: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이웃 사랑: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온전히, 갈라짐 없이 하느님께 마음을 바치라는 뜻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하느님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의 기준이며, 우리의 모든 사랑과 행위가 하느님께로 향할 때 참된 신앙과 덕이 된다.”(De Doctrina Christiana, 1,5 요약)라고 풀이한다. 교부들은 하느님 사랑을 전 존재를 향한 사랑의 총체라고 보았고,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행위가 일치하는 삶을 의미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형제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신앙”이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은 마태 25,40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 증거이다. 교회의 전통적 해석에서도,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이웃 사랑이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사랑은 신앙과 실천을 통합하는 핵심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마음, 정신, 힘, 목숨을 분리하지 않고 하느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형제, 자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일상에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교리 지식이나 외적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삶 속에서 통합될 때, 신앙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하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는 우리가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이미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을 삶 속에서 살아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미국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 더글라스 젠타일의 연구팀 내용이 있습니다. 대학생 496명을 네 그룹으로 나눠서 12분간 캠퍼스 안을 걷도록 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 마음속으로 다음의 특정 생각을 품도록 지시했습니다.
1)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이라며 따뜻한 마음을 보냄.
2) ‘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함.
3) ‘내가 상대보다 뛰어날 것 같은 점’에 주목하도록 함.
4) 상대방의 복장이나 물건에 대해 관찰하도록 함.
그 후 참가자들의 행복감, 불안, 공감도, 타인과의 유대 등을 측정했습니다. 과연 어떤 그룹이 가장 좋은 효과를 보았을까요? 첫 번째, 타인의 행복을 바랐던 그룹이 가장 행복감이 높았고, 불안이 감소했으며, 공감도와 사회적 유대감에서도 좋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하면 결국 자기에게 좋은 영향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선사시대에는 집단을 이루며 살 수밖에 없었기에, 그 유전자가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져서 협력관계 안에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계된 우리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행복을 원한다면, 가장 먼저 타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라고 묻습니다. 이는 당시 율법학자 사이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질문이었습니다. 수많은 계명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첫째가는 계명’ 하나만을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둘째 계명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계명’은 복수가 아닌, 단수입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을 묶으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비의 실천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가장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이를 알게 된 율법학자는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있다고만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천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만이 결국 나를 행복의 길로 들어가게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사랑으로 태어났다. 사랑은 우리의 본성이다(루미)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6.04.목.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사느냐가
우리 삶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결국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는
참된 사랑뿐입니다.
이렇듯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근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인간 회복의
참된 본질이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 곳에
우리는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사랑은 인격적 만남의
최종본이며 완성입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을 함께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실천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께로 가는
가장 복된 길이며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 그 자체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힘든 사람을 받쳐주는 받침대가 되고
어려운 사람을 살펴주는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마치 자신의 공로인양
여기는 탓에
억울하고 섭섭해서
설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 아닌지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일꾼의 삶이 얼마나 어려우면
바오로 사도가 “애쓰십시오”라고
하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교회는 계급사회가 아니며
교회는
세속의 삶으로 평가되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능력은
교회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한
힘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하느님의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님 뜻의 요점에 주목하여
그분의 나라에 가까이 가기 위해
애를 쓰는 우리 모두이기를 기도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2티모2,8-15 마르12,28ㄱㄷ-34
영원한 현역
“주님 사랑의 학인, 주님 사랑의 전사”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시편25,4-5ㄱ)
사람이 물음이라면 그리스도 예수님은 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없이 아무리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구체적으로 물음인 사람에 대해 답이 나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나 더하기 사랑>은 전부이지만 <나 빼기 사랑>하면 제로,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뿐입니다.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깊어질수록 참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구도자 율법학자 덕분에 참사람이 되기 위한 답을 배웁니다. 구도자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하는데 바로 율법학자가 이 두 자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이 정확히 핵심을 잡고 있습니다. 율법에는 613개 계명이 있는데, 율법학자는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인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두를 둘로 압축 요약한 <가장 큰 계명>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신명기 6장4절과 레위기19장 18절의 인용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에 전적으로 공감 화답하는 그대로 우리의 심중을 담은 율법학자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이런 높고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슬기로운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하고 그의 깨달음의 경지를 인정하십니다. 참사람이 되기 위한 둘이자 하나인 하느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의무이자 명령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해갈시킬 수 있는 궁극의 답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의 실천뿐입니다.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은 이 둘을 요약한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좌우명을 삼았습니다.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의 수행이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평생 노력의 실천을 기울여도 영원한 초보자 학인일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검증되고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이웃사랑의 열매를 통해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이 검증되고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새삼 이런 이웃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실천동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일치의 빛나는 모범이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충실할수록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참으로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은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신, 또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뿐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제자 티모데오에게 주신 권고가 우리에게도 참 적절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은총으로 굳세어 지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전사답게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이어 주시는 바오로의 가르침이 참 지혜롭습니다.
“설전을 벌이지 마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뿐입니다.”
건전한 토론이 아닌 감정싸움으로 비화된 설전은 백해무익합니다.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 죽을 때까지, 평생 졸업이 없는 영원한 현역의 <사랑의 학인>으로, 평생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사랑의 전사>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의 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사랑>의 소망을 고백한 오래 전 자작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은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날로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짙어지고
깊어지는 당신 사랑이면 좋겠습니다”<1997.3 >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2,8-15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