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4-8 베드로는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보라고 한 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고는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 사람은 걷고 뛰게 되어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 말씀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시간에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있는 성전으로 함께 올라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것이다. 그 때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에 앉아 날마다 구걸하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하였다. 이어지는 말씀은 베드로가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보면서 자신을 보라고 한 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며 그 사람을 일으키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다가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내용이다.
4절은 원어에 보면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돈을 달라고 했기에 돈을 주든지 아니면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돈을 주는 사람들도 그냥 돈만 던져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라는 말은 베드로와 요한은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했다. 그를 눈여겨 본다는 말은 한번 흘끗 본다는 말이 아니라 한동안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는 뜻이다. 눈여겨 본다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14번이 나오는데 그 중 12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온다. 이는 두 사람이 멈춰서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이는 한번 흘끗 쳐다보고 돈을 던져주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다. 그렇게 바라 보면서 한 말은 "우리를 보시오" 이다.
5절을 보면 "그러자 그는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 라고 했다. 그냥 돈이나 주고 지나가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바라 보면서 자신들을 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 사람은 단지 뭔가 얻을까 미리 넘겨 짚을 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이 땅바닥만 보고 앉아 있었던 것은 세상만 바라보고 산 것이고 고개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 본 것은 하늘을 본 것이기에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다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문맥에 담긴 누가가 전하려는 내용은 무시하고 은혜를 끼치려고만 하는 해석이다. 이 사람은 뭔가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라고 한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사람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아직 깨닫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6절도 원어에는 그러나 라는 말로 5절과 연결한다. 이렇게 뭔가 얻을 것이라고 넘겨짚는 이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은과 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준다는 암시가 담긴 말이다. 베드로는 이 사람에게 말하길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라고 했다. 금과 은이라는 말은 돈을 뜻하는 말이고 줄 돈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듣자 이 사람은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라고 했다. 5절에서 쳐다 보았다는 말 원어에서 표면을 만 단단히 잡아서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실제로 붙잡은 것이 아니라 시선을 고정시켜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4절의 눈여겨 보았다는 말과는 같은 뜻이면서도 전혀 다른 단어를 쓴 이유는 6절에서 가지고 있는 것과 대조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두사람의 표면만 붙잡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리고 걸으라!" 라고 한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말로 명령하여 기적을 행한 것은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주로 하시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는 달리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이름도 말하지 않고 바로 명령하셨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곧 자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행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10:38절에 보면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라고 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능력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베드로가 처음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10:1-6절에 보면 예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17절에서 70명의 제자들은 그러한 능력이 자신들의 말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고 놀라서 예수께 보고했었다. 베드로도 이러한 능력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을 전하고 있기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내면에 갖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유의 은사를 행한다는 사람들은 자기가 기도하면 낫는다고 말하는 망발을 저지른다. 우리를 통해 어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도 절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거들었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거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 분의 말씀과 능력을 전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일 뿐이다.
믿는 자들은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만 해야 한다. 그런데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회가 커지기 시작했고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님의 자리에서 주님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교황들과 그들과 함께 권력행사를 하던 지도자들이었다. 그 중에 1130년부터 1143년까지 교황을 지냈던 Innocent II가 한 말은 그들이 더 이상 십자가의 능력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Innocent II는 어느날 큰 돈을 세면서 Thomas Aquinas를 불렀다고 한다. Innocent II는 "토마스 당신이 보다시피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소"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토마스는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교회는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온 교회는 걷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같은 세상을 향해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능력을 전했었다. 그러나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권력과 재물을 갖게 되자 더 이상 절름발이 신자인 사람들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베드로 당시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분명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였다. 그러나 성전 안뜰에 가득히 서 있던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들도 역시 절름발이이다. 저들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걸어갈줄 모르고 말로만 하나님 말씀을 따라 걷는다고 떠들던 영적 절름발이였던 것이다. Innocent II세도 역시 베드로 당시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과 똑같이 영적인 절름발이였던 것이다. 베드로가 이 사람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은 또한 그 안에 있던 모든 영적 절름발이들에게도 예수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을 한 베드로는 7절에 보면 새번역이나 개역 모두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원어는 모든 영어 번역들과 같이 오른 손으로 일으켰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른 손을 사용하여 그 사람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자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다리와 발목에 즉시 힘이 들어가 튼튼하게 된 것은 놀라운 권능이다. 그 권능에 사용된 손은 베드로의 오른손이었만 그 권능은 베드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었다.
이는 이사야 35:6절이 성취된 것이다. 이사야 35:6절은 "그 때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라고 했다. 이는 메시야의 시대가 온 것을 예언한 구절인데 예수님 오셔서 이러한 기적을 행하심으로 성취되었고 이제 사도들에 의해서 계속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고 했다. 벌떡 일어나서 라는 말은 땅 속에서 갑자기 물이 땅 위로 솟구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두운 암흑과도 같은 삶을 살던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솟구쳐 올라 이제 밝은 세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샘솟듯 솟구쳐 오르며 일어섰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걸었다는 말은 계속해서 걸어다녔다는 뜻이다. 만약 이 사람이 앉아있던 문이 Nicarnor 문이라면 자신이 있던 여인의 뜰에서 걸어다녔을 것이다.
원어에서 그 다음 동작은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라는 말이다. 자신이 앉아있던 그 문으로 들어가서 성전 안마당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성전 안마당으로 들어가서 한 행동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라는 말이다. 처음에 걷는다는 말은 성전 바깥 마당에서 걸어다녔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뻐하며 걸었겠는가?
그런데 그 다음에 걷는다는 말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 안으로 따라 들어가서 걸었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성전 안마당을 걸어다녔다. 전에는 흠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던 곳이다. 그러다가 그토록 들어가 보고 싶었던 성전 안마당에 들어간 것이다. 처음으로 성전 안마당에 들어간 이 사람은 감격해서 계속 걸어다닌 것이다. 너무 감격했기에 그냥 천천히 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펄쩍 펄쩍 뛰어다닌 것이다. 그렇게 뛰면서 이사람은 그 넘치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본인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혼자서 끌고 다니면서 배웠다. 한쪽 발을 페달에 올려놓고 다른 발로 땅바닥을 차다가 잠시 자전거에 매달리기 시작하면서 배운 것이다. 그 때는 어린이용 자전거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자전거를 가지고 배웠었다. 그 자전거는 어린 내게 너무 높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리를 프레임 사이에 넣고 탔다. 우리는 그렇게 타는 방식을 "옆 자전거" 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어느날 처음으로 높은 안장에 앉아 혼자서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발이 끝까지 닿지도 않았기에 발로 차서 올라오는 페달을 밟았었다. 그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부여 경찰서 앞 로터리를 얼마나 여러바퀴 돌았는지 모른다.
이러한 경험을 말하는 이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걸었던 사람의 감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도행전 4:22절을 보면 이 사람의 나이는 40이 넘었다고 되어있다. 수명이 짧았던 고대 사람들에게 40이 넘었다는 말은 거의 한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는 뜻이다. 늘 집에서만 기어다녔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먹고 살 길이 없어지자 친척들은 그 사람을 메어다가 성전 문 앞에 놓았을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25년 이상은 그 자리에서 구걸을 했을 것이다. 그는 늘 그 문 앞에 앉아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걷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앉아있던 성전 바깥 마당에서만 걸어다녔다. 그러다가 자신도 자신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사람들처럼 걸어서 성전 안 마당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들어가 성전 안마당을 걷다가 기쁨을 감당하지 못해 펄쩍 펄쩍 뛰다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감사를 드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찬양하지 않았다. 이 사람도 이 능력은 베드로와 요한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