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0일 연중 15주일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갈대 같은 인생이라지만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를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먼데서 갈대밭을 보면 바람에 파도가 넘실대듯 그렇게 갈댓잎이 부드럽게 나부낍니다. 갈대꽃은 처음에는 자주색으로 피지만 점차 담백색이 되면 멋진 풍경에 넋을 잃고 그 유혹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갈대를 줄여서 ‘갈’이라고도 하고 한자로 노(蘆) 또는 위(葦)라고 하기도 합니다. 습지나 갯가, 호수 주변의 모래땅에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갈대의 줄기는 마디가 있고 속이 비었습니다. 그래서 갈대를 꺾어 내기는 참으로 어렵고 쉽게 잘라 내지도 못합니다.
갈대와 비슷한 억새풀도 있습니다. 들이나 산에서 자라는 억새풀을 갈대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합니다. 강원도 정선이나 충청도 오서산 정상에 있는 억새풀은 가을에 하얀 꽃을 피우는데 억새꽃을 보노라면 정말 포근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억새 잎이 칼날과 같아서 억새풀이 많은 곳에는 반팔이나 반소매로 갔다가는 상처가 많이 납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억새풀과 아주 비슷하지만 갈대는 쓸모가 아주 많은 풀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프랑스의 사상가 B.파스칼이 ‘팡세’에서 인간을 비유하여 말했습니다. 인간은 천지 만물 중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광대무변한 대자연 가운데 '한 개의 갈대'와 같이 가냘픈 존재에 지나지 않으나, 생각하는 데 따라서는 이 우주를 포옹할 수도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갈대’란 인간은 위대함과 비참함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모순된 양극을 공유하는 인간 존재와 그 밑바닥으로부터 싹트는 불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약한 존재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갈대는 뿌리에서 새로운 갈대를 키웁니다. 갈대의 새로운 싹들이 번성해서 갈대숲을 이룹니다. 한 뿌리에서 나온 이웃들이 잘려지고 부러져도 새해가 되면 싹을 다시 틔웁니다. 갈대가 부러지면 마디가 잘라집니다. 그래서 그 줄기는 금방 말라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꺾어진다고 하여도 쉽게 잘라지지 않고, 날카로운 칼이나 낫으로 베어내지 않는 한 꺾어진 채로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뿌리가 같으면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뿌리에 근거를 둔 사람은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올바름이 최후의 승리를 할 때까지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오 12, 19-21)
세상에 살면서 꺾이지 않고, 부러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메말라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진 바람에 아무리 흔들리고 홍수에 뿌리 채 뽑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러지지 않았다고 하여도 낫이나 칼에 베어져 밑동부터 잘려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희망을 걸 수 없는 속에서도 올바름이 승리할 때까지 부러진 갈대도 다시 꺾지 않으시고 꺼진 심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도 희망을 심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없고 능력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희망을 둔다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소도 언덕을 보고 비빈다.’고 합니다. 그 믿는 구석이 예수님입니다. 희망의 뿌리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갈대처럼 부러지고, 꺾어지고, 낫이나 칼로 베어져도 내년에 그 뿌리에서 새싹이 나올 희망을 걸어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처럼 병에 걸리고 죽음을 맞이해도 생명의 희망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희망을 둘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고 기댈 데 없는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면서 올바름으로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보루입니다. 우리의 뿌리가 되고 우리의 줄기가 되고, 우리의 마지막 꽃이 될 수 있는 희망이 됩니다. 그래서 모진 세파에 꺾어지고, 찢어졌어도 마지막으로 내 전부를 의탁하고 희망을 걸 수 있는 좋으신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그 믿음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합니다. 비참한 세상에서도 그 때문에 아침에 행복하게 일어나고, 외로움이나 괴로움을 견뎌냅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2,37-42
그 무렵 37 이스라엘 자손들은 라메세스를 떠나 수콧으로 향하였다.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도 육십만가량이나 되었다.
38 그 밖에도 많은 이국인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가고,
양과 소 등 수많은 가축 떼도 올라갔다.
39 그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 없는 과자를 구웠다.
반죽이 부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쫓겨 나오느라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여행 양식도 장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40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사백삼십 년이다.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
42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