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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2)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 16:32-33 / 김동호 목사
불교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과 인생을 고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생과 고통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 살면 살 수록 그냥 설명없이 마음과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참 사는 건 힘들고 만만치 않습니다.
고통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가벼운 감기처럼 그냥 왔다가 그냥 가는 작은 고통이 있지만 세상에는 그 고통의 정도와 깊이가 크고 깊어서 우리의 생명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큰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고난은 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와 같은 환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33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환난을 당할지도 모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예 단정적으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환난을 만나고 그 때문에 고통 정도가 아닌 고난을 격는 일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환난과 고난을 주는 까닭은 세상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와 시스템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의 책임도 있습니다. 당하는 고난도 있지만 자기가 스스로 만든 그래서 자초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거나 숨기고 무조건 자신의 고난을 자초한 고난이 아닌 당하나 고난으로만 설명하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못하고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분명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고 세상에 있는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의 원인과 책임이 세상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당연히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 네 책임이라고, 세상 책임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주장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이 그 책임을 져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세상을 바꿀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억울한 고난을 주지 않은 완벽한 세상과 세상의 고조를 만들고 바꿀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에 고통과 고난이 들어온 후부터 단 한번도 사람에 의하여 그와 같은 고난과 고통이 사라진 완벽한 세상이 세워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단 한 번의 예외를 이야기 한다면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거듭난 초대교회 공동체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세상을 향하여 그 잘못됨과 왜곡됨을 웨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싸우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그것이 정의라는데 백 퍼센트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우리의 정의 때문에 세상이 바뀌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억울한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서서 저들에게 고난을 가져다 준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 싸움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난당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끝도 없는 지리한 싸움을 하는 동안 저들은 그 고통과 고난에 함몰되어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고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식과 법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하심으로 옳지 않은 세상과 싸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면서 그 고통과 고난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과 싸워야 하지만 세상과 싸운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어 고난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고 왜곡된 억울한 세상에서 당하지만 않고 그 싸움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법을 하나님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는 왜곡된 세상에서도 그 세상에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승리의 웨침을 웨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이해인 수녀의 <겨울 길을 간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전에도 한 번 소개해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해인 수녀는 수녀로서의 인간적인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겨울 숲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가난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의 겨울 숲길을 홀로 가는 것과 같은 그의 삶은 당연히 불행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놀랍게도 '행복'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함 속에도 행복이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 이유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근사하게 표현합니다.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그의 고운 별은 하나님입니다. 가슴에 묻은 그 고운 별 하나 때문에 가난하고 외로운 겨울 숲길을 행복하게 걸어갑니다.
그의 행복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봄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가슴에 품고 있는 '고운 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제자라고 지금까지 나를 따라 나와 함께 하였지만 얼마있지 않아 너희들은 다 나를 버려두고 흩어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고통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합니다. 아마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가장 큰 이유와 원인이 이것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문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자신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그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아멘.
저는 세상이 바뀌어야만 사람들의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말 환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모두 세상이 바뀌는 신기루를 좇다가 그 세상의 사막에서 다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세상과 세상의 구조를 바꾸는 일을 그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그와 같은 일에 쓰임 받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러나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입니다. 해인 수녀가 자신의 시에서 고백하고 있는 그 믿음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세상 바뀌기 전에도 승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없다면 세상이 혹 바뀐다고 하여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하는 세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어떤 세상에서도 당하지 않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요 16:32-33 / 김철현 목사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전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난 1일 저녁에는 대한민국과 북한이 서울에서 시합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1:0으로 이겼습니다. 그런데 한 민족끼리 축구시합을 한다는 이 사실이 세계인들의 주목거리였습니다. 그것도 정치적으로 적대국가여서 그 관심은 더 높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본질적인 축구시합 외에도 신경전을 펼쳤습니다.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가 북한이라고 불렀다고 북한 팀 감독이 자기네 나라는 북한이 아니라 조선인민주의공화국이니까 그렇게 정확하게 불러달라고 아주 기분 나쁘게 그럽니다. 그리고 또 양쪽 감독이 서로 이기겠답니다.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각오를 각각 밝혔습니다. 응원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하는 거면 반드시 이기라고 응원합니다. 가끔씩은 왜 한민족끼리 저래야 되나 싶을 때도 있지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엊그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시합에 이기고 나도 항상 씁쓸함이 남는 것이 남북한전입니다. 하여간 스포츠를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이런 문제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철학자[야스퍼스]는“싸움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싸움이라는 것은 운명적 상황이라는 겁니다. 원치는 않지만 부득불 싸워가며 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숙명 적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평생을 어떤 형태로든지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연과 더불어 싸워야합니다. 추위와 싸워야 하고, 때로는 더위와 싸우고, 홍수와 싸우고 가뭄과 싸우고, 그리고 지진과 싸우고, 무서운 바람과 많은 재난 사건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다못해 요즘은 황사와 싸우다시피 합니다. 그러고 보면 단 하루라도 자연이 순하게 넘어가는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런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은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가피한 싸움이 있는 것을 압니다. 나라끼리 총을 들이대는 직접적인 전쟁을 차치하고라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서두에 말씀 드렸던 스포츠 등을 통하여 팽팽한 긴장과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온 세계가 싸움 속에 긴장하고 있고 그 속에서 굳게 서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하는 이것이 곧 하나의 싸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더 무서운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때로는 자기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하고, 죄와 정욕과 욕심과 자존심과 시기와 질투들과 싸워야 합니다. 알고 보면 사실은 이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치열한 것입니다. 어느 하루도 자신과 싸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 아닙니까? 모르긴 해도 오늘만 해도 그럴 것입니다.‘자, 이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교회를 가야하나 마나’로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는 모두 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최소한의 싸움을 싸우면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이겨서 이 시간에 여기 나온 사람은 그 마음이 평안이지만 싸움에 패배자가 되어서 아디 다른데 가 있는 사람의 마음은 지금도 편치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 싸움에서의 승리란 결국 무엇이냐 하면 평안입니다. 평안해야 이긴 겁니다. 내가 분명히 이겼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없단 말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나오지 않고 다른데서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합시다. 그리고 자기는 그 결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게 이긴 겁니까? 승리한 것이냐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겼다는 것이 정복의 개념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승리를 생각할 때 그 개념을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것이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힘의 대결에서 누군가 하나가 무너지고 내가 딛고 올라서야만 승리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인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진정한 승리라고 하는 것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남을 누르고 즐기는 것이 아니고 화목하고 더불어 기뻐하는 거기에 참 승리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내가 지는 것 같지만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공존하는 승리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승리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만큼 힘으로 돌려주고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는 그런 잔인한 승리가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참 승리라는 것은 재능과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권세도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환경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승리라는 것은 자세의 문제입니다. 어떤 자세로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중요한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의미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난 다음에 곧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십자가를 지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 곧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지만 십자가 지실 것을 알고 계십니다. 본문32절을 보면 곧 그 십자가를 져야 할 때임을 말씀합니다.“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당신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과 제자들이 다 도망할 것까지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당시에는 왕이 대관식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대통령 취임식 같이 왕으로서의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식이 나귀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이 스스로 이미 왕처럼 승리하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결코 세상에 패배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임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요12장에 나와 있고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나누면서 몇 시간 후면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아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33절입니다.“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먼저 승리를 선포하고 그리고 최후 승리를 향해서 나가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의미의 승리에 대한 선포입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시는 모습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큰 고민과 싸웠습니까?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실 만큼 어지러웠던 자신과의 싸움에서 곧 바로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이 결단을 이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뿔뿔이 떠날 것을 아시고 인간적으로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배신 아닙니까? 사람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이마저도 아셨습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누가 내 곁에 있겠느냐?’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해답을“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느니라.”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그러니 너희도 담대 하라.”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십자가로 승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 앞에서도 그리스도인들만의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때로 손해입니다. 희생입니다. 겸손입니다. 자기부인입니다. 십자가는 곧 자기욕망의 포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곧 승리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의 승리를 믿는 우리들이라면 예수님의 그 승리방식도 받아들여야합니다.
[본 훼퍼]라는 신학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만한 이유가 없는 분이신데 왜 어떻게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을까를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자기라는 우상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살고 죽는 건 상관없이 생명을 깨끗이 잊어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요, 그것이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업적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나?’,‘내가 죽고 나면 그동안에 해온 사업이 무너질 텐데...’그러나 예수님은‘내가 떠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 제자들은 어떻고 교회는 어떻고..’생각 안했습니다. 내가 떠나면 아무 것도 안 될 것이라는 업적에 대한 우상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명예에 대한 우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명예에 목매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평가가 중요합니까? 명예에 대한 평가가 중요합니까? 여러분, 내가 죽고 나서 내 인격을 아까워하며, 내 신앙에 대해 두고두고 아쉬워하며 기억 속에 묻어 두며 마음의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명예의 끈에 묶여 끌려 살다가 마지못해 인사치레나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까? 깊이 한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제발 인격이 바탕이 되지 않고 더군다나 신앙도 없는 명예 따위는 잊어버립시다. 사람이란 기본적인 욕망이 있어서 명예라고 생각되는 순간 질투가 생기게 되고 질투와 시기에 빠지면 원수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감옥에 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직접 그려 넣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이라는 작품에서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을 그렸고,<빌라도의 법정>이라는 작품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던 유대인 패거리 중에 한 사람으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돌아온 탕자>라는 유명한 작품에는 자신의 얼굴을 탕자의 모습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렘브란트]는 그 그림 속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나도 거기에 있었어요.”라고....그는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리고 복음을 부정하던 살인자의 부끄러움으로 주님에게 다가서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할 때 그런 죄인의 심정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승리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였는데 우리는 하루에도 수 천 번씩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승리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내 욕망을 내려놓지 못해서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갑니다. 세월이 지나가는데 헛된 명예를 아직 버리지 못하고도 용케도 하루하루를 견뎌가고 있습니다만 언제 실패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으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십자가에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역시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라 하시는데 감히 그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하기에 차마 부끄러운 모습으로는 더 이상 안 됩니다.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에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장이 쿵쾅거려야하고 그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우리의 가슴에는 세상을 이길 지혜를 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승리하신 주님께서 최후 승리를 위해 나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승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종려주일과 아울러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는 고난주일을 맞이하며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결코 고난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 승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깊이 생각하며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는 고난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독교인과 왕따문화
요 16:32-33 / 이필재 목사
세계의 어느 나라나 7, 8월은 휴가철입니다. 이때를 휴가로 지내는 이유는 모든 교육기관이 여름방학을 해서 자녀와 부모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휴가철이 교회는 반대로 일 년 중에 제일 바쁜 시기입니다. 어린이부터 청년부까지 특별 신앙 훈련 프로그램이 이때에 진행됩니다. 오늘 주보에 보시면 갈보리교회 여름 수련회 프로그램이 아주 자세히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 신앙적으로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 때문에 교회마다 열심히 경비도 많이 들여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청소년’이라고 하는 단어가 생긴지 얼마 안 됩니다. 우리나라 문화가 청년이 없는 문화로 지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903년 교회가 ‘청년회’라는 간판을 처음 걸었을 때 “이 단체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가?”라고 고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사회적, 정치적 문제까지 발전돼서 처음으로 청년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시작한 기독교가 적지 아니한 고난의 역사를 살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다 일찍 결혼해서 어린이가 바로 어른이 되는 문화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14살에 결혼을 하셨습니다. 어린 애가 바로 어른이 되어버리는 중간 청년 문화가 없는 것이 우리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모범적 청소년은 누구인가? 어른들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머리 모양을 하고 어른들이 쓰는 말을 하고 어른들이 좋아하는 옷차림을 한 사람은 모범 청년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청년의 개성을 살리는 사람은 불량배같이 보이고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아야 되는 청년 문화였습니다. 기성세대 마음에 들어야 좋은 평가를 받는 문화 속에 살아왔습니다. 저희 교회에 미용업을 크게 경영하시는 집사님이 계셔서 우리 목회자들이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제가 처음 갔을 때 한 100여명이 모였는데 머리를 예쁘게 해주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갔으니까 제가 좀 유머러스하게 설교를 하려고 “저는 평생 헤어스타일이 변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단정하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은데 보기 좋나요?” 그랬더니 거기 모인 사람들이 “아, 요즘에는 너무 그렇게 단정한 머리보다도 조금 헝클러져야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헝클어보겠습니다.” 그리고 내 머리를 막 헝클린 후에 “어떤가요?” 그랬더니 미용사가 금방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머나! 멋있어!”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의 심리분석을 해보는 것이 청소년 신앙 지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청소년들은 심리적으로 세 가지 욕구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면 도움이 됩니다. 그 첫째가 뭔지 아십니까? 소속감입니다. 어떤 조직에 하나가 되어 있을 때 행복감을 가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중고등학생 시기에 심각합니다. 친구들 가운데 왕따가 되는 것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그래서 제일 골탕을 먹이는 일이 따돌림, 외톨이 만들기입니다. 만약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그 학생은 학교가 싫어집니다. ‘공부는 잘해서 뭐하는 거냐?’ 공부고 학교고 다 싫어집니다. 여러분, 심해지면 자살까지 합니다.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것을 청소년의 심리로 파악하고 청소년들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절에는 소속감 때문에 써클 활동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아주 열심히 합니다. 소속을 만드는 것입니다. 파란만장회, 기절초풍회, 요절복통회 등 이런 요상한 이름을 지어서도 잘합니다. 히피의 발상지가 버클리 대학입니다. 비록 건전하지 못한 방향으로 갈지라도 소속감이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도시마다 갱단 조직이 사회적 문제인데 로스앤젤레스가 제일 많습니다. LA 경찰국에서 갱단에 가입한 사람이 십만 명 정도가 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갱단 생활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서로 죽이고 죽습니다. 어느 사회학자가 신문에 갱단에 대해 연구 발표를 했습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로스앤젤레스 흑인 사회 청년들은 30대 이전에 절반이 죽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것이 끊이지 않고 계속 된다면 흑인 멸종의 문제까지 연결될지 모른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만큼 무섭습니다. 왜 그 위험스러운 갱단 조직에 가입해서 인생을 망치고 있는가? 소속감 때문입니다. “나는 어느 파에 소속된 단원이다.” 그 파의 상징 색깔의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딱 나타나면 “아, 저 놈은 어느 파다.” 아주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이 소속감의 쾌감은 청소년들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소속감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위험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갱단들이 서로 물어봅니다. “야! 너 사람 죽여 봤어?” “못해봤는데요.” “이런 바보 같은 놈!” 이 친구는 그 갱단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사람 죽이는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 해봤어!” “이야! 대단한데? 그러면 너 회원 자격 있어!” 여러분, 저도 죽을 뻔 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 불과 나이가 19세나 20세 정도의 젊은이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미국에서 노동을 하면서 일하고 있는데 제 가슴에 식칼을 갖다 대고는 “금고문 빨리 열어! 안 열면 죽이겠다!” 이런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악이지만 소속된 조직에서는 하나의 경력이 되므로 위험한 노력을 감행하면서까지 그 소속의 인정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알아주는 조직이 있다는 그 하나의 쾌감을 누리기 위해서 청소년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에너지 발산이 절대 필요한 시기입니다. 축구가 16강에 들지 못하는 바람에 할 일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거리 응원이라는 것을 보시면 축구 선수보다 더 힘든 일을 밤을 새워서 뛰며 소리 지르며 하지 않습니까? 무엇인가는 힘을 쏟을 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청소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성하게 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훌륭한 방법의 인생 방향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먼저 그 소속감에서 크리스천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립시켜 주는 일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의 소속은 어디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소속에서 매우 건강한 노력을 하여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알아주는 인격 형성을 목표로 정하고 훈련합니다. 이러한 영적 소속감이 확립이 되면 그 아이는 일평생 아무 염려 안 해도 됩니다. 이 영적 소속감이 확립되어야 그의 일생은 빛이 납니다. 교회가 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 갈보리교회 청년 한 사람이 제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과거에도 저에게 몇 번 와서 기도도 받고 장래 일을 상의하고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대학을 마치고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잘 됐어!” 이제 근무해서 한두 달 밖에 지나지 않은 그런 청년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 기도 받고 싶어서 왔는데 첫 월급 받았습니다.” 몇 백만 원 받았습니다. “이거 그냥 헌금해도 되지만 기도 받고 싶어서 목사님 찾아왔습니다. 헌금 하겠습니다.” 제 앞에 놓고는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에 나가서 첫 월급 받았으면 그 월급 받아가지고 친구들과 모여서 밤새도록 파티하고 놀아야지 아니, 이것을 목사 앞에 모두 갖다놓고 “기도해 주십시오.” 하니 이 청년은 영적 소속감이 확실한 것입니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 이 소속감으로 살아가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는 쓰임을 받는 것이 확립된 청년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돈이 필요한, 이제 첫 월급 몇 백만 원 받은 것 가지고 한 푼도 쓰지 않고 탁 갖다 놓고 “기도해 주십시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이 신앙만 버리지 말고 나가라. 내 앞날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틀림없다.” 그래서 이 교회는 영적 소속감의 써클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써클에서 활동하라! 젊음을 여기다 투자하라! 에너지 발산을 거룩한 곳에 하라. 사회적 써클 활동과 교회 영적 써클 활동의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일반 사회, 학교, 써클 같은 곳에서는 자신들끼리 하기 때문에 그저 오락, 흥밋거리에 빠져서 잘못하면 퇴폐로 갑니다. 교회활동은 분명한 방향과 지도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는 존재의 확인! 이것만 시켜주면 그 사람은 평생 염려 없습니다. 나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일평생 믿고 살아야 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내 삶에 어떤 유익이 있는 것인가? 이것을 확립시켜주면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가 열심히 하는 교육의 방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가 자기 삶의 책임을 자신이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이 의존하게 되면 삶이 힘들어 집니다. 다른 사람까지 힘들어집니다. 성숙한 인간, 능력 있는 사람! 자기 인생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 가는 사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너무 많은 위로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를 가장 위로해줄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확립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분량이 아주 적습니다. 자기 필요를 다 정리한 후에 남은 적은 분량의 빵 조각 하나를 손에 들고 여러 군데 떼어서 나눠주다 보면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절대 만족이 올 수 없게 됩니다. 그럴 때 불만이 생깁니다. 더 많은 것을 주길 바라는데 주지 않습니다. 우리 가족 관계에서 이런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딸은 어떻게 합니까? 똑같이 사랑해야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똑같이 사랑해드려야 합니다. 손자, 손녀들이 많아질 때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친손자만 제일이고 외손자는 찬밥이냐?” 이런 말을 합니다. 친가, 처가 차별이 없어야합니다. 어머니, 장모, 아버지, 장인 똑같이 해드려야지 그렇지 않고, 조금만 소외감을 느껴도 불평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남에게서 기대하면 불만 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제가 외국에 살았을 때 젊은 회사원들이 외국 근무를 해서 같이 온 부인들이 교회에 많이 나왔습니다. 낯선 타국 땅에 오게 되면 처음에는 막 불평을 합니다. “뭐 이런 데를 데리고 와서 사람 고생시키느냐? 하나도 재미없다!” 3년 정도만 지나면 90퍼센트 이상의 여인들은 더 근무할 수 없냐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외국에서 살면서 다 조사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일 큰 이유가 젊은 부인들에게 친정, 시댁 의무가 점점 많아집니다. 외국에 살면 이것을 하나도 생각 안 해도 됩니다. 외국에 나왔으니까 나 혼자만 잘 살면 됩니다. 나눠줄 것도 없는데 수 없이 많은 곳에 사랑을 나눠줘야 하는 게 너무 피곤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의무가 없어지니까 너무 좋습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확실합니다.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교회는 본래 가족적인 분위기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바울은 혼자 살았는데 어머니가 많았습니다. “그는 내 어머니라.” 또, 혼자 산 사람이 무슨 아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는 내 아들이라.” 성경에 수없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할 때 네 어머니라고 가족 관계로 설명하셨고, 바울 서신에 보면 “형제, 자매들이여!” 다 가족 관계 용어로 썼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그런 관계의 공동체를 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관계를 이기주의 생각에서 정리할 때 문제가 크게 발생됩니다. 교회 권사님을 보면 어머니 같고, 할머니 같고 집사님들도 오빠 같고 동생 같고 목사님이 아버지 같고 삼촌 같은 혈통적 분위기를 좋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가 잘 유지되면 만족하지만 어느 날 그런 관계가 변질돼서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나타날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가족적 분위기의 교회는 말할 수 없는 고난에 빠지게 됩니다. 기대감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 훈련 노력은 주려는 신앙 인격체 형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받으러 가지 마라! 어디서 찾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나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 신앙 훈련의 초점을 찾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이 없습니까? 교회처럼 사랑이 많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갈보리교회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인종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400군데나 매월 선교비를 예산의 30퍼센트 외부에 꼬박꼬박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들 갈보리교회 때문에 솔직히 다 먹고 살고 있습니다. 주려고 할 때는 얼마든지 사랑이 필요합니다. 400군데가 아니라 4,000교회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적으로 받으려고 할 때는 아무도 안 줍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의 근본적 정신에서 인간관계를 생각해야 됩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연설에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국가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달라고, 그래야 유명한 국가 건설이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주님께 드릴 것이 무엇인가? 내가 내 형제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삶의 철학으로 삼는 신앙 인격체 형성, 그것이 어린 시절에 형성된 사람은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가 평생을 통해서 “인간들을 향하여 외친다!”라고 말한 소리,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연으로 돌아가라!” 인간끼리 모두가 모였지만 실망스러운 일만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도 모여 보면 실망이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와 한 달만 같이 생활해 봐라! 존경이 가는가?” 그래서 “자연에서 기쁨을 찾으라!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 속에서 인간 회복, 홀로 서기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심방 다니면서 많이 봅니다. 손자, 손녀들을 기절할 정도로 너무 예뻐합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봐도 손자, 손녀가 너무 예뻐 지루하지 않고 행복합니다. 손자, 손녀들이 이제 자라면 이기주의자로 변합니다.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말이 달라집니다. “손자들 예뻐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무엇을 바랬기에? 준 것으로 끝나야합니다. 기대하면 실망합니다.
골프를 너무 좋아하신다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회 집사님이 나를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골프를 안 하시지만 우리 교회 목사님은 골프를 너무 좋아하셔서 교회적으로 문제가 되는데 우리들은 말할 수 없으니 목사님이 우리 목사님 골프 좀 그만하시라고 좀 권고해 주세요.” 아마 친구니까 부탁하셨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되겠습니까? “목사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 목사는 교인들에게서 받으려는 위로를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잘못 받았다가는 오히려 실망하시니까 포기하시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자기 위로를 찾았습니다. 교인들 쳐다보면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오를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연으로 나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잘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두십시오. 집사님들이 그것 때문에 목사님을 존경하실 수 없다면 다른 교회 나가십시오. 우리 교회는 오지 마십시오.” 우리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홀로서기 운동, 여행이나 문화 활동, 적당한 취미활동과 영적 생활을 통해서 자기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가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어떤 것을 기대했다가는 실망밖에 오는 것이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홀로서기 운동의 훈련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것을 심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베푸는 사랑, 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괴로움이 되고 나 자신도 실망밖에 느낄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빛을 남긴 인물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주기만 했던 사람들, 테레사 수녀, 슈바이처 박사, 데미안 신부, 간디, 프랜시스, 사도 바울 모두 주는 것으로 끝난 사람들입니다. 어린 시절에 이런 신앙 인격이 형성되면 그 사람은 일평생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게, 행복하게 자기 사명을 감당하면서 평생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주변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버림받은 왕따가 되셨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왕따가 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제자들에게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하나 위로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서글프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버림 받았고 로마 사람들에게 배척당했고 민중들에게 미움 받았으며 제자들마저도 예수를 버렸습니다. 이제 혼자 외로이 외로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위로는 무엇인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이 내적 능력이 있을 때에만 너희는 평안하고 행복할 것이다. 누구도 너희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내적 능력의 사람이 되라. 그렇게 살려고 할 때 다소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게 될 것이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홀로서기 운동은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 평면의 세계에서 자기 고난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 신앙인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도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그렇게 많은 군중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시며 끝냈습니다.
비록 왕따가 되었어도 주려는 자는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이 많습니다. 왜? 주려하기 때문입니다. 얻으려는 기대감이 어긋날 때 사람은 돌출 행동을 하면서 불만스러워 합니다. 무엇을 얻으려 했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왔느냐?” 바울 선생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바울이 무슨 빚이 있습니까? 그는 빚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 빚을 다른 사람에게 갚기 위하여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내가 열심히 주려고 사는 것입니다. 가장 괴로우셨던 시간에도 어느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가 되셨던 그의 슬픔 고백을 우리가 보면서 성령님의 뜨거운 임재가 이 7, 8월에 계획된 모든 수양회 행사에 참가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이 일평생 주님과 함께 소속감을 누리며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영적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7, 8월에 계획된 이 모든 수양회 프로그램에서 주님의 성령이 나타나서 어린 시절에 일평생 살아갈 수 있는 영적 소속감을 가지고 주님에게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결단과 각오의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승리의 법칙
요 16:33 / 문기태 목사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다."
날마다 살아가는 것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살았다는 것은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 라이벌과의 경쟁, 악한 영과의 영적 전쟁 등 많은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싸움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싸움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닥쳐올 때 '나는 승리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이래 이런 승리를 고백한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예견하면서 승리를 말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분안에서 함께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늘 싸움을 걸어오는 세상은 어떤 존재입니까? '세상'은 죽이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비난하고 거절하는 세상입니다. 핍박하는 환난의 세상입니다. 선한 일을 오해하는 세상입니다.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에 나가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살아갈 일을 생각하며 불안해 합니다. 세상에서 만날 환난을 바라보고 도피처를 찾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만나는 환난이 두렵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어려운 업무를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오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쓰를 받고 위축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들고 나아가 전하려고 하면 온갖 공격이 집중되지 않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하면 가만 두지 않으려고 날을 세우지 않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병들게 되고,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지기도 합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되게 틀어 지기도 하고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기도 하고 아내나 남편이 속을 썩여 미워질 때도 있습니다. 부모와 형제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먹고 사는 데 힘겹게 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되기도 합니다. 불의와 불법이 득세하는 것을 보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겁내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런 세상에서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승리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승리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오늘 승리가 내일 패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영원한 승리는 없습니다. 결국 모두 패하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승리는 잠깐 비춰주는 번갯불 같아서 숙명적 괴로움이 있습니다.
승리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기면 한 사람은 패배합니다. 한 사람이 영광을 얻으면 한 사람은 쓴잔을 마셔야 합니다. 한 사람이 면류관을 쓰면 한 사람은 수모를 겪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동안 한 사람은 슬픔의 눈물에 젖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승리는 영광이요, 실패는 비참한 것입니다. 영광과 수모가 교차합니다.
승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는데 성공했으나 진실을 잃었습니다. 돈을 버는데 성공했으나 양심을 잃었습니다. 사업에 성공했으나 건강을 잃었습니다.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온전한 승리, 영원한 승리, 절대적인 승리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한 승리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승리를 얻으려고 하면 할수록 승리를 얻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반드시 빼앗기는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빼앗기지 않을 영원한 승리를 하셨습니다. 부분적인 승리가 아닌 온전한 승리를 하셨습니다. 상대적인 승리가 아닌 절대적 승리를 하셨습니다. 우리도 승리하신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승리자가 됩니다. 세상이 우리를 삼키려고 끊임없이 공격하나 완벽한 승리의 주인공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며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1.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환난당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환난을 이기는 최고 비결은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평안은 예수님 안에서 나옵니다. 세상은 결코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이기게 하고도 남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분노가 일어 갈등할 때도 예수님의 평안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했을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로 평안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참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려도 마음의 참 평안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참 평안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사람의 모든 지각을 뛰어 넘는 완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안에는 참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슴하시기를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예수님의 참 평안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환란을 만날 때에도 빼앗기지 않는 평안 곧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대신 싸워주시고 대적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얼마나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지쳐 있는지 아시고 피곤한 이들을 지친 이들을 모두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평안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평안이 주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어느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내가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지 전투가 그친 주일 아침에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평안이 밀려 온 거예요. 예배드리는 순간 어디에서 얻을 수 없는 평화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토마스 아킴퍼스가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의 품안에 안기우기 전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쉴 새없이 불안하고 불만 걱정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예수님의 품을 떠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쉼을 얻고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2. 담대함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 담대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우리가 환난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모든 환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 남은 기간 동안 예수님의 평안으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승리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양이 앞의 쥐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쥐는 본래 뒷다리가 길어서 빨리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뒤따를 수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그런데 이 쥐가 고양이를 한번 본 다음에 빨리 달아납니까? 빨리 달아날 수 있는데, 그러면 고양이한테 잡혀 먹히지 않겠는데 달아나지 못해요. 고양이를 본 쥐는 부들부들 떨면서 맥을 못 쓰고 기어갑니다. 두려워서 그래요. 그래서 쥐는 고양이에게 잡혀 먹힙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쥐가 고양이를 보면 잡히기 전에 두려움에 싸여서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으면 볼 것을 바로 못보고, 생각을 바로 못하고, 말도 바로 못하고,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마비되어서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서커스단에서 줄을 타는 사람이 줄을 잘 타다가도 아래를 잠깐 내려다 보고 두려운 생각이 들게 되면 그순간 줄에서 떨어진다고 합니다. 군인이 전장에 나가서 전투를 잘 하다가도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패전하고 맙니다 이처럼 두려운 마음이 주는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병이 나서 치료받는 사람도 그 병에 대해서 겁을 먹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내가 이 병 때문에 죽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다시 일어나기가 매우 어렵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병들어 죽지만 두려워서 죽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서반아 왕 가운데 페르디난드 5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 "왕께서는 마드리갈이라고 하는 곳에는 아예 가지 마십시오. 그 마드리갈에서 왕께서 장차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왕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두려워서 좋은 별궁을 지어 놓고도 21년 동안 거기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마한 촌락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왕은 신하에게 "이 지방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옆에 있던 신하가 "네 폐하, 이 곳 이름은 마드갈레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드갈레'가 '마드리갈'과 발음이 비슷했습니다. 사실은 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왕은 '아이구,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더니 며칠 안 되어 정말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왕을 죽였습니다. 두려움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두려움을 온전히 이기고 든든한 믿음과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대지에서 활보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부르신 것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이런 지경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위험한 곳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될 때 천군과 천사가 우리 편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은 자연히 물러갑니다. 시편 27편 1절을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기독교청년운동을 시작한 미국의 롤링 박사는 아침에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라고 세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뜻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하는 말입니다. 그 목적은 그의 마음속 잠재의식에까지 믿음으로 충만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일을 하시기 전에 "나는 예수님의 승리를 믿는다."라고 크게 외쳐보세요. 용기와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세계의 영웅 나폴레옹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그러나 '나는 불가능한 패배를 모른다.' 하면서 오직 승리만을 생각하며 전쟁으로 세계를 재패하려던 그의 꿈은 부서지고 센트헤르나 섬에 유배되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참 승리자요 나는 그를 우러러 볼 뿐이다. 나는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였지만 패하고 말았고 오! 갈릴리 예수여 그대만이 사랑으로 온 세계를 점령한 위대한 승리자일 뿐이오."
여러분, 인생의 패배자가 될까봐 불안합니까? 두려우십니까? 여러분은 연약하여 자주 넘어집니다. 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주어진 환경이 어렵습니다. 이겨본 경험도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안에서 승리를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힘입어 담대하게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담대하라
요 16:33 / 최응희 목사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후 홀로 남을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불신앙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세상의 풍조를 거스려 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담대해야 합니다. 주님도 그런 세상 속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단순하지 않은 세상에서, 이렇게 불신앙의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그 세상을 이길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시다는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해드릴까?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해드릴까 등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한 믿음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상이 벌어지면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런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안계신가봐.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등등 하나님 근본에 대해 의심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어려움에서도 적어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어려움이 오거나, 내 생각과 다른 현상이 벌어질 때에도 성도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게 하셨을까? 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하나님이 계시냐는 물음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어려움 속에 처하게 하시냐는 물음입니다. 어려움이 온 것을 보니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라고 생각하거나, 내 생각과 다르게 일이 벌어졌다고 하나님을 못믿겠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내 생각과 내 마음처럼 움직여지면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내 마음과 다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이 어떻든지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변덕부리는 작고 옹졸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거대하시고,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다만 그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무릎을 꿇는 일입니다. ‘나의 계획과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맞는다면 이 일을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일이지 마치 하나님이 나의 심부름꾼인 것처럼 기도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내 생각과 같지 않다 하여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내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내 문제가 어떻게 바뀌든지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심지어는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절대로 의심치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항상 선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는 듯이 보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역사가 거꾸로 가는 듯이 보여도 세계와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십니다. 이 믿음은 항상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때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의의 최후승리를 믿으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8:28
요셉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무엇이 요셉을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렇게 낙관적이고, 그렇게 담대하고,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한 것일까요? 그의 성품이 좋아서일까요? 그는 원래 아무 데서나 적응을 잘 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요셉을 그 어떤 환경에서도 굳굳하게 서게 하고, 결국은 모든 고난을 딛고 최후승리자가 되게 한, 그의 삶의 중심에 있었던 그 Key Word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일이 꼬이고, 힘들어 가는 현실 속에서도 결코 놓치 않았던 믿음--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 하나님은 선하셔서 결국은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바로 그 믿음이었습니다.
성도는 당장 코앞의 이익에 눈이 어둡지 않습니다. 또 당장 겪고 있는 어려움에도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지금은 고통스러워도,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지금은 어두워도, 결국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내 길을 인도하시고, 나를 알아주시고, 내게 상 주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복음성가 가사(찬송가620장)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사랑과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승리를 믿노라.
그렇습니다. 때로는 넘어지는 것이 인생이지요.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선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시고, 해결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상을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이런 믿음이 우리를 담대하게 하고 세상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이 믿음으로 늘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절대로 의심치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해야 하고, 내가 완전해야 하고, 내가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넘어집니다. 나는 실수가 많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죄를 짓습니다. 나는 유혹에 넘어갑니다. 나는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 믿음만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나를 받아주시고, 죄에 빠진 나를 용서해 주시고, 연약한 나를 세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가까이 계십니다. 내가 연약해 졌을 때에 하나님은 눈동자같이 나를 보고 계십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갔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재산을 다 탕진했을 때에도 잊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그의 못된 짓과 재산 탕진과 불명예스러운 행동에 대해 일체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돌아와 준 아들을 기쁘게 맞이해 주시고,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 다시 복음성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내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인자한 귀로써 들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계심을 절대로 의심치 마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로 의심치 마십시오. 내가 완전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절대적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넘어집니다. 나는 실수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때에도 심지어 죽는 순간에도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할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세 가지 믿음은 흔들리거나 오염돼서는 안될 믿음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 어떤 세상 환경 속에서도, 그 어떤 환난 중에서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주님이 그렇게 세상을 이기셨던 것처럼 우리를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한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담대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을 늘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요 16:33 / 정필도 목사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장차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될 천국과 이 세상은 다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다른 점은 천국에는 환난이 없고 기쁨과 평강만 있지만,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우면 환난이 더욱 많아지는데, 창세 이후로 없었던 전무후무한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0~22절에 「20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환난인지, 그 환난이 길어지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그날을 감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환난이 예비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는 죄악이 더 관영할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환난도 더 많아지고 더 커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6~8절에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기근과 지진, 화산폭발, 콜레라, 테러가 앞으로 더 많이, 더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난보다 우리에게 더 고통을 주는 것은 이슬람교도들의 테러행위입니다. 그것도 자기 몸에 폭탄을 감고 자살 폭탄을 터트리는 극단적인 행위는 자신이 죽어서라도 상대편을 더 많이 죽이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악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에서는 예수 믿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테러범들의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북한도 그런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굶어서 죽을 바에는 남한과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극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연평도에도 폭격을 가해서 주민들이 살 수 없게 하는 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환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승리자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승리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도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평안을 찾으려 해도 만족할 수 없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평안합니다. 어떤 환난이 와도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승리입니까?
환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 승리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승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 승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환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절대주권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 부해지고 가난해지는 것,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아무리 재난이 온다고 해도 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장 6~7절에서 한나는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모두 망한다고 말해도 하나님께서 흥하게 하시면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10장 28~31절에는 「28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은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셀 만큼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입니다. 소속이 다릅니다. 멸망하고 심판받을 자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또, 로마서 8장 1~2절에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책임져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12절에는 예수님께서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축복의 대상입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사야 43장 4절)」이라는 말씀처럼 보배롭고 존귀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8절에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성령이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를 받은 예수 믿는 사람은 큰 환난이 와도 평안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8~20절에 예수님께서는 「18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환난과 박해를 당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함께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환난을 당해도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추방명령을 받아 모두 중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나던 선교사님 한 분이 제자훈련을 받고 중국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자란 중국 목사님과 차를 마시면서 “앞으로 많은 환난과 핍박이 몰려올 텐데 견딜 수 있겠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중국 목사님이 가만히 차를 바라보면서 “선교사님, 차가 뜨겁죠? 이 티백이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 맛을 잃었나요? 아마 뜨거운 물속에서 진짜 맛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우리의 이 신앙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 환난 속에서 주님 앞에 입증해 보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교회가 없어지고, 지하로 들어가서도 이들이 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서 등소평이 개방을 하고 나서 교회를 허락하고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몇 배로 늘어난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아니고, 정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환난이 와도 승리하는 줄 믿습니다.
네 번째 이유는 환난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환난도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큰 환난을 겪게 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큰 환난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첫째 유익은,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큰 환난이 오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하다 보면 죄를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어서, 더욱 거룩하게 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큰 은혜를 받게 되고 큰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자라고 환난이 두렵지 않고 환난 중에도 마음에 평강이 있고 담대하게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유익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는 잘 모르지만 큰 환난 때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함께하시는지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한 사람도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열 번의 재앙이 계속되어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보호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갈 때에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평안할 때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지만, 광야 길을 갈 때에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오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함께하시는 것을 체험할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유익은,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했을 때,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서 성도들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이때 그들은 흩어져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전도를 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한순간이라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안디옥에 간 사람들은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는데, 이들이 복음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지, 예수를 잘 믿고 섬겨서 교회가 부흥이 되고,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환난 때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쁨과 평강이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기 전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숨어 있었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기쁨과 평강과 사랑이 넘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이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환난 때에 해결책은 하나입니다. 오직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에 빠지지 않고, 담대한 마음으로, 평강을 누리면서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용기있는 그리스도인
요 16:33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정직해야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 담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겁쟁이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학교를 다닐 때는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어떤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도 하려고 듭니다. 우리 모두는 용기 있는 사람, 담대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겁쟁이를 멸시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모두 용기 있고 담대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악역을 맡은 사람은 대개 비열하고 겁쟁이로 등장하곤 합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향해서 우리는 존경과 박수를 드립니다. 자기 생명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군인, 시민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순경, 불타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사람을 구출하는 소방서원을 지금보다 더 존경해야 합니다.
사실 극적인 일들뿐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만나는 일상적인 도전들을 직면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살면서 비뚤어진 길로 가지 않고 바른 길을 걷기란 역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매일 우리가 하는 선택을 통해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비겁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담대한 사람이 될 것인지 비겁한 사람으로 전락할 것인지가 판명됩니다.
세상을 바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해야 하며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자질의 배후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변화된 사람이 될 때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세상을 닮아가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과 혼합되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 흐름을 따라가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기꺼이 자신이 변화되려고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환난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이 아니라 기정사실입니다. 놀랄 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때에 “담대하라”고 격려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우리가 용감해야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매일 살아가면서 용감할 수 있는 세 가지 기초를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불이 붙는 건물로 뛰어들지 않고도, 수류탄을 몸으로 덮치지 않고도, 매일의 일상 속에 용감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1.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직면합니다.
의도적으로 지금 죄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죄라는 단어를 기피하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단어대신에 실수, 착오, 인격적인 결함, 판단오류라고 말하길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사람은 모두 죄를 범한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죄가 없다고 우기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만 옳다고 주장하면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질 않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인정하기를 우리는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서 솔직하질 못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잘못했어”
“미안해”
“용서해줘”#
“그것은 내 잘못이야, 용서해줘”라고 잘못을 인정할 때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영적으로 건전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은 용기의 표상입니다. 죄를 직면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고 말할 줄 모르는 어른은 겁쟁이입니다. 혹시 여기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 가운데서 아직 한 번도 그 말을 해 보지 못한 분은 없습니까?
특히 자녀들에게, 아내에게 “여보, 잘못했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어본 적이 없는 분은 없습니까? 그런 사람은 “내가 죄를 지었어요.”라는 말을 하나님께 한 경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대면하길 싫어합니다. 자기 실수를 자신이 인정하고 갚으려는 자세가 바로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우리는 털어 놓고 자백하지 못합니까?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 아니면 직장생활에서 두려워서 말 못하는 죄악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길게 보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부인하는 것은 잠깐 동안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잠깐 동안은 가면을 쓰고 살 수 있지만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살 수는 없습니다. 부인하는 것은 결코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와 책임을 직면하지 못하면 결혼도 파괴되고 관계도 깨어집니다. 사업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실수했어”#
“잘못했어”
“용서해 줘”라는 말을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결혼생활을 파괴해 온 주범입니다.
우리 남자들이 이것을 더 어려워합니다. 길을 잃어도 잘 물으려고 하질 않고 헤매면서 마치 드라이브라도 하는 척 합니다. “멋있는 경치이네”하고 바람을 잡습니다. 가을 남자답게 감성 있는 처신이 아니라, 길도 모르는 불완전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나온 가식입니다. 남자다운 늠름함이 아니라 도덕적인 비겁함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찾아와서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진실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실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새롭게 시작할 삶의 영역을 직면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울에 비친 대로 자기 모습을 바라보고 “여기가 잘못 되었네”라고 말하는 것은 때로 담대함이 요구됩니다.
세상에 영구한 변화를 가져다 준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무흠한 사람들입니다. 사기를 치는 것은 오래가질 않습니다. 진리가 오래갑니다. 진리와 함께 가면 삶이 평탄합니다. “이 부분은 나의 강점이고 이 부분은 나의 약점입니다. 여기에서 가끔 실수하기도 했지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담대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나를 따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매우 정직했기에 수 천 년이 지난 우리까지 그의 연약과 실수조차 알 수 있습니다. 용기는 자신의 죄를 직면하는데서 나타납니다.
둘째로 2.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은 믿는 대로 처신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합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고전16:13) 오늘날, 옳은 바를 위해서 일어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희귀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중요시되는 세상입니다. 관용이 진리보다 중시되는 사회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좋은 것이고 이것은 나에게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위해 일어나기를 주저합니다. “꽉 막힌 사람”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 “시대에 뒤진 사람” “비판적인 사람”이란 소릴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위에 어떤 신자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침묵합니다. 바로 말해주길 원치를 않습니다. 지적해서 고쳐주려 들질 않습니다. 사랑으로 꾸짖으려 들지 않습니다. “잘못이긴 해도 내가 누군데 잘못을 지적하랴”고 물러섭니다.
만약 여러분이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겔3:18)
잘 생각해 보시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면서, 혼돈된 삶을 살며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나에게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낙태로 한 해 이백만 이상의 영아들이 학살을 당하는 책임은 정부와 의사에게 있질 않고 침묵하는 여러분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 입을 다물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알면서도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 삶이 내리막을 치달으며 삶이 멸망을 향해 내닫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향해서 코웃음 치고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큰 소리를 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친구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일 수도 있고, 학교를 함께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나 이웃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질 않고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알코올중독이나 약물중독에 빠져있기도 합니다. 아니면 잘못된 관계를 맺고 결혼생활이 파괴되어 가는데도 침묵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습적으로 상대방을 속이기도 하고, 자기가 다니는 회사 물건을 훔치기도, 근무시간을 도적질하기도 합니다. 음란한 사진이나 동영상에 중독되어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아는 여러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변명합니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던데요, 내가 누군데 감히 판단합니까? 행복해 보이는데요.” 성경은 말합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14:13)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그러한 모든 웃음은 결국 가슴이 메어지는 것으로 귀착됩니다.
자신을 신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주장한다면 사랑 가운데서 바로 말해 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에서부터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바른 말을 친구에게, 가족에게, 배우자에게, 때로는 부모나 자녀에게 해야만 합니다.
“지금 너 아주 잘못 가고 있어, 파멸로 귀착하는 것을 바라보기에는 너를 너무 사랑해, 돌아서야 해” 잘못된 길로 가는 데도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 사랑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때로 사랑은 강인해야 합니다. 냉혹해야 합니다. 사랑하기에 대질해야 합니다.
“너를 사랑하기에 바로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단다. 요즈음 네가 하는 행동은 바른 것 같지를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집으로 가다가 불이 난 것을 발견했다면, 아이들이 거기 잠자고 있다면, 우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그들을 구해내려고 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아이들이 곤히 자는데 깨울 순 없어”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신문기자가 우리를 미쳤다고 해도, 소방관이 우리를 위험하다고 말려도, 우리는 달려들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구하려고 달려드는 것은 선택사안이 아니라 유일한 방안입니다.
이런 용기를 어디서 얻습니까? 가족이나 친척, 직장동료나 이웃에게 바른 말을 하는 용기는 어디서 얻습니까? 벼랑으로 치닫는 이를 보고 말리는 것은, 인생의 결정적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용기입니까?
시편은 말합니다. “주님,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내게 베풀어 주십시오. 내가 주의 율법을 열심히 지키니, 이제부터 이 넓은 세상을 거침없이 다니게 해주십시오. 왕들 앞에서 거침없이 주의 교훈을 말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시119:41, 45-4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듬어 가도록 합시다. 그 때 우리는 세상 조롱 앞에서도 용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거기서 진리와 지혜를 얻으면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용감히 사람들 앞에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우리를 용감하게 만듭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우리는 겁내어 침묵하지 않고 담대히 나서서 진리를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진리를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3.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은 믿는 바를 전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십시오.”(딤후 1:7,8)
베드로도 같은 맥락으로 권면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높이며, 여러분이 가진 소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벧전 3:15)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괴롭히질 마십시오. 진리의 몽둥이로 사람들을 후려치지 마십시오. 진리란 사람들을 향해서 쏘아대는 총알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치는 권투 선수의 장갑도 아니고 사람들을 찌르는 양날선 단도도 아닙니다. 예의를 지켜서 진리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린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그러기에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찔러서는 안 됩니다. 심각한 자각 없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아무데서나 외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예의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떤 분들은 자신이 복음을 잘 알지 못한다고 움츠려 듭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주공학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쉽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울산교회는 지금부터 24년 전부터 새생명훈련을 해왔습니다.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사이 영계에도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제1원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위하여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혹 글을 읽지 못하더라고 전할 수 있습니다. “젊은 청년, 이 책자 나를 위해 한 번 읽어주게”라고 부탁하면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전도하는 데는 여러분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논쟁을 해서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보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사랑을 그들의 마음으로 전달하면 됩니다. 사랑의 가교를 통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오도록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전문가가 되어야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새생명훈련을 받은 울산교회 성도님들을 존경합니다. 여러분의 입에는 천국열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침묵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용사가 되길 바랍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우주공학 자처럼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타내기만 하면 됩니다. 기회가 오면 사영리로 무장하고, 진리를 전하십시오. 당신이 믿는 진리를 전하는 일에 담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한 주간 앞으로 다가온 이번 공동체 전도 축제를 위해서 순종해 보십시오. 원하기만 하면 믿는바 진리를 위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는바 진리를 말로 전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우리 울산교회 성도들만큼 이 일에 잘 구비된 분들은 없습니다. 사영리를 전할 수 있고 대부분의 구역은 팀미팅을 해낼 수 있으며 복음으로 사람들을 잘 양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이 모든 것을 배웠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겐 새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 다만 용기를 갖고 담대히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세상을 바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용감함을 회복할까요? 네 단계가 있습니다. 3.1 공적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세례란 여러분을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는 의식입니다. 더 이상 비밀요원이 아니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규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평복을 입고 사람들 사이에 숨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제복을 입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해, 세례란 여러분이 마음으로 믿은 바를 삶 속에 공포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임을 알도록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라 담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의식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갈3:27)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풀어서 번역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세례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씻는 것만이 아닙니다. 또한 세례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살아가도록 옷을 입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혹시 지금껏 주님을 마음으로 믿으면서도 세례를 받지 못한 분은 없습니까? 신구약 성경을 읽으시고 세례공부를 신청하십시오. 자신의 방 안에만 갇혀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세례를 통해 활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선을 넘어 자신이 주를 따르는 사람임을 밝히십시오.
3.2 용감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용기를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사도 바울도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잇도록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엡6:19)
3.3 하나님이 사용해 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여기 땅 위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일에 담대할 것을 기대하며 소망합니다.”라고 아예 써서 눈에 잘 띠는 곳에 붙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믿음을 나타낼 때 여러분의 삶에서 역사하십니다. 용감함은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용감함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바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염려 가운데서도, 때로는 불안 가운데서도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바른 말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담대함을 구하고 하나님이 사용해 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3.4 종말을 기억하십시오. 마치 세상은 자기들이 승리한 것처럼 설칩니다. MBC방송국이 그런 일에 앞장서 있는 것을 여러분을 잘 알고계실 것입니다. 얼마든지 사실의 전부를 말하지 않고 일부를 가지고 전부를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5.18 때 광주에 계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텔레비전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해 뜨면 거기서 일어나는 현장을 보고는 편집되서 방송되고 있는 방송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의식화가 된 것입니다.
어리석게 살지 마십시오. 형식은 갖춥니다. 이사람 이야기도 저사람 이야기도 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부분은 짧게 끊어버리고 모함하는 부분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는 결코 바른 이야기들이 전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지리니합창단’ 일도 보여 지는 것만을 사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선한 일에는 기도의 후원이 필요합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50살 이후에 사귄 사람 중에 제일 신뢰하는 사람은 임태정 목사입니다. 저는 울산을 사역하면서 그런 친구를 얻게 된 것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문제는 반주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표자는 전체를 보면서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언론은 기독교의 치부들을 들추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쉽게 낙심되고 용기를 잃기도 합니다. 담대함을 얻기보다 낙담되고 맙니다.
그러나 결코 낙담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종말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만물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날 모든 것이 청산되고 보상될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처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상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든 말든 이 일은 성취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전쟁의 승리자는 여러분입니다. 결과는 분명합니다. 최후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내십시오. 주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약5:8) 그 소망을 가지면 용기를 얻습니다. 최후승리의 희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담대함이 있습니다.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욥11:18)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의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눅 9:26)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 손을 들라고 할 때 손을 들었습니다. 70명 정도 되는 아이들 중에서 아마 저 말고 한사람 더 있을까 말까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또래 집단과 함께 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 여러분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세상을 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비겁한 변절자가 아니라 담대한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가운데서 여러분의 입장을 분명히 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주님을 알 때까지 진리를 외치십시오. 주님이 일손을 놓으실 때까지 여러분도 일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실 때 여러분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색깔은 너무 또렷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담대하십시오
요 16:33 / 문기태 목사
요즘 남자들이 두려워 하는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30대:신용카드
이리저리 막 그어서, 청구서가 날아올 때마다 가슴이 조인다.
▲40대:야한 속옷
아내가 야한 속옷 입고 앞에서 서성이면 두렵다.
▲50대:곰국
한솥 가득 곰국을 끓여 놓고는 그것으로 끼니를 때우라 하고 아내는 3박4일 놀러 나간다.
▲60대:이사
혹시나 날 버려두고 이사갈까봐 이사가는 날 보따리 껴안고 트럭 조수석에 꼭 붙어 있는다.
▲70대:등산
혹시 산에 내다버려질까봐.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죽음, 사고, 실패, 따돌림, 질병, 가난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격의 근심이나 두려움이든지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결단하고서는 가족들의 반대와 위협앞에 무릎을 꿇고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신앙을 고수할 경우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들어가는등 견디기 힘든 핍박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보이지 않는 압박과 따돌림등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안으로 옮겨 왔는데 무당이나 점쟁이가 종교를 바꾸어서 재앙이 찾아오고 있다고 겁을 주니까 그만 속아서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기보다는 귀신을 다시 섬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같은 온갖 두려움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하면 결코 믿음이 충분히 자랄 수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은연중에 위협하는 여러 종류의 두려움에 맞서는 담대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마도 우리의 상황에서는 설과 같은 명절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다보면 믿지 않는 가족과 신앙문제로 적지 않은 마찰을 겪는 일이 종종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이 다수이거나 교회를 다녀도 믿음이 약한 이들이 많으면 공격을 많이 받습니다. 심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에 상처가 크게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로인해 명절만 되면 영적인 침체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담대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나 너무 겁내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담대하게 마음을 먹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감당하기 벅찬 상대를 만났어도 겁내지 말고 담대하면 주님이 다 해결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까?
1. 예수님이 환란을 만날 것을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크게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조금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셨기 때문에 불안하고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따랐는데 주님이 떠나가시고 보이지 않으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술 더 뜨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요 16:20)" 세상은 기뻐하고 제자들은 곡을 하고 애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약이 오르는 일입니까? 세상은 곡을 하고 애통하게 되고 제자들은 기뻐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여자들은 이 말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면 은근히 두려움이 밀려오지 않습니까? 해산의 고통이 크기 때문에 겁이 납니다. 혹 잘못되어 죽는 것은 아닐까? 혹 아기가 잘못되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여 염려하고 걱정을 합니다. 어떤 분은 실제로 아이를 낳다가 너무 고생을 하여 다시는 안 나을거라고 하더니 하나 더 낳고 늦둥이까지도 낳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낳을때는 두렵지만 낳고나서 보면 얼마나 기쁩니까? 신비하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얼마나 기쁜지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게 만들어 줍니다. 다 잊어버리니까 또 낳고 더 낳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만나는 환란도 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환란을 만나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주님이 기쁨을 주실 것이고 그 기쁨이 너무 너무 커서 근심이 기쁨속에 묻혀서 다 잊혀지고 그 기쁨을 배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비로소 "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서 나오신 분으로 깨달았다"고 진실된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금에야 깨달아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으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바로 지금이 핍박과 고난과 흩어짐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늦게야 깨닫고 열심을 내고 헌신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그것도 아주 잠깐이고 본격적으로 핍박과 위협앞에 흔들리며 흩어지는 위기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으로부터 큰 공격을 받게 되지만 담대하라 내가 책임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환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분명히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담대하라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고서 당황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누구나 예수안으로만 들어가면 오직 잔잔한 호수같이 평화롭고 순풍에 돛을 달고 순조롭게 달려가는 배처럼 될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인의 여정이 그처럼 순탄하기만 하다고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본문같이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할 것이다. 미움을 많이 받을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갖고 나아가는 삶에 환란이 있음을 미리 알고 마음준비를 하여 당황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받고 진리를 깨닫고 성숙을 향하여 결단하고 헌신할 때 환란이 찾아오는 수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집니다. 내가 결단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상을 가지고 맞아 주실 줄 알았는데 왜 이런 큰 환란이 덤벼드느냐?며 흔들립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전진하고자하면 우리의 대적도 우리의 전진을 막고자 더 세게 공세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고된 환란이니 마음을 굳게하여 멈추어 서지 말고 담대함으로 계속해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담대하라"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면 주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도 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가 모두 떨고 있었습니다. 적의 군대가 너무 강하고 숫자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적장은 체구도 몹시 크지만 그 전투경력과 명성이 주변의 모든 강대국에도 알려진 무시무시한 장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덩이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나이도 작고 체구도 작고 전투 경험도 없는 소년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왔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광경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싸우겠다고 자원했습니다. 다윗은 단숨에 물 맷돌로 적장 골리앗을 거꾸러 뜨렸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군대가 힘이 솟아나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반대로 적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우왕좌왕하는 중에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다윗 한 사람의 승리가 온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신 승리가 우리에게 큰 승리를 안겨준 것입니다. 우리가 환란을 만난 당시에는 다 끝장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환란이 너무 크고 절대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만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힘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하고 끈기도 부족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깨가 내려갑니다. 슬금슬금 도망갈 길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걱정할 것 없다. 이미 쉽게 이겨본 경험이 있는 내가 네 뒤에 버티고 있다. 너는 두려워말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거라" 라는 말입니다.
사실 다윗이 기술이 좋아 이긴 것입니까? 전술이 탁월했기 때문입니까? 힘이 강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뒤에서 함께 싸워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갔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꺼꾸러 뜨리신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란이 밀려오지만 환란보다 더 큰 하나님이 너를 대신하여 싸우실테니 겁내지말고 하나님만 믿고 계속 전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8-10) 바울은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환란을 만났습니다. 심한 고생을 겪었습니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죽었구나! 하고 죽음의 위협이 절박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았더니 하나님이 큰 사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여러분, 환란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까? 핍박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까? 질병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까? 가난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까? 불행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까? 위기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까? 맞습니다. 여러분은 이길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강한체하여도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여러분의 지혜로, 여러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뒤에 계신 하나님이 "네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면 내가 싸워 이길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과 이미 싸워 이기신 분입니다. 담대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앞에 있는 환란을 다 처리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성숙을 향하여 헌신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십시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충만을 체험한 후에 정말 담대해졌습니다. 세상은 제자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온갖 위협을 했습니다. 감옥에 가두웠습니다. 시범적으로 야고보사도를 죽였습니다.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때리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예배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담대하게 거리에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지역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에게 더이상 안전은 무의미합니다. 오로지 도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만이 관심사였습니다.
저는 이번에 필리핀 선교여행을 추진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그곳은 안전합니까? 괜찮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가는 곳은 민다나오섬입니다. 회교도들이 많습니다. 공산반군들의 거점이 민다나오입니다. 종종 외국인 납치와 학살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 민다나오섬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위험한 곳에 깊숙히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리핀의 선교사들의 8-90%가 마닐라 근교에 몰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권귀동선교사님은 회교도와 반군들이 숨어 있는 깊숙한 오지로 들어가서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큰 고생을 감수하며 10여년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반군중에서 총을 버리고 개심한 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런 곳에 찾아가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은 목숨을 담보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도 선교사님들중에는 목숨을 담보로 미전도종족을 찾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실제 그러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들이 일년이면 몇 건씩 발생합니다.
여러분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안전함만을 추구해서는 진정한 주님의 평안을 맛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도 맛볼 수 없습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도전해보세요. 복음을 전하다가 어떤 손해를 입을까봐 눈치만 보지말고 담대하게 부딪쳐보세요. 예수 믿다가 어떤 해를 입는다 할지라도 환란에, 고난에, 주를 위한 모험에 도전해 보세요. 헌신하다가 어떤 오해를 받고 고통을 겪는다할지라도 겁내지말고 담대하게 더욱 많이 헌신하세요. 그러면 여러분과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근심과 두려움을 크게 안기는 세상을 여러분앞에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더욱 강해져서 세상의 눈치 보지않고 날마다 승리하는 큰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 해 전에 독일에 있는 선교사님 한 분이 공산주의가 팽배한 동구권에 들어가서 성경을 전달하고 전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늘 성경을 숨겨서 들어가고 전달하는 일을 했는데, 이 분이 한 번은 기도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좀 당당하게 성경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나.’ 그래서 보통 때는 007 작전처럼 성경을 숨겨서 들어가는 작전을 했는데, 기도가운데 담대함이 생겨 배짱 좋게 가방에 성경을 잔뜩 집어넣고, 헝가리 쪽으로 들어갔습니다.
경계선상에서 세관을 통과하는데, 세관 관원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고할 물품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처음으로 “예,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뭡니까?”라고 묻는 세관 관원의 물음에 선교사님은 가방을 열면서 “성경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세관이 눈이 동그래지면서 “이것이 왜 신고할 물품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이게 워낙 비싸서요”라고 말하자 “얼마나 비쌉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침착하게 “이건 너무 비싸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있는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평화가 없던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고, 죄 속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말씀이 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세관은 “그 책 나 하나 주시오”라고 하면서 나머지는 그냥 들고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이 분이 막 들어갔다가 나와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흥분된 어조로 “ 기적은 20세기에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답니다. 여러분, 기적이 20세기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을 순종하여 담대하게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적은 지금도 가능합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신명기 31:6
♣ 기도... ♣
주여!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구하기보다는
위험에 처하여서도 겁을 내지 않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고통속에서 벗어나기를 구하기보다는
고통에 처하여서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간구합니다.
근심스러운 공포속에서 울부짖으며 피할 길과 빨리 지나가기를 구하기보다는
담대하게 내가 직접 싸워서 이길 용기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겁장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너무 너무 내가 기쁘고 성공할 때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 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내가 배고플때
하나님이 내 손목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