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5)-2
대원군 집정으로부터는, 국왕도 그 중신들도 전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의세력 하에 있었다.
사건 전부터 미우라가 계획하고 있던 「폐후(廢后)의 조칙(詔勅)」에 서명할 것을 제촉 받은 왕은 격노하고, 각료들을 향해 「짐에게 그 서명을 재촉 하는 것 보다 차라리 짐의 양 팔을 잘라라」 하고 소리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폐후의 조칙」은, 「민비가 훈련대의 해산을 강행한 것이 이번 사변의 근원」이라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죄과를 들고,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한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왕비가 살해당한 것으로 되면, 바로 범인수사에 착수해야 되는 조선정부의 입장을 무마하는데도 유용했다.
아무리 격노해도, 국왕은 서명할 수밖에 없고, 중신 중에 강한 반대도 있었으나, 「폐후의 조칙」은. 10월10일의 관보에 발표되었다. 이에 대한 내외로부터의 반격은 강했고, 조선정부는 발표 이튿날인 11일, 「왕태자의 정성어린 효성과 정리를 보아, 폐서인인 민씨에게 빈호(嬪號)를 특사(特賜)한다」고 발표했다.
「민비 폐위조칙」에 서명한 여덟 사람의 각료 중 한 사람인 김윤식은 후에 「續陰晴史」라는 제목의 기록을 남겼으며, 그 중에서 그들 각료가 이 조칙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운 입장을 기술하였다.
「우리들은 생명을 걸고 왕의 입장을 구원하려고 했으나 될 수가 없었다. 민비는 죄과가 많았으므로, 폐위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폐위를 끝까지 반대하면, 우리들의 생명조차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왕도 그것을 이해하였고, 결국 민비 폐위에 동의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후 김윤식은 「지나치게 미우라에게 협력적 이었다」고 비난받았으므로, 위의 문장에서 석명(釋明)을 느낄 수 있다. 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총리대신 김홍집이 왕에게 <우리들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왕후 폐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사오나, 뒤에 복위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왕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라고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훈련대에 의해서 연금 비슷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왕은 독살을 걱정하여, 외국공관에서 차입하는 식품 이외에는 입에 대지 않는 상태였다.
10월12일, 극히 친일색이 짙은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외부대신 김윤식은 「왕후 폐위조칙」을 각국 공사관에 보냈으나, 미우라 공사만이 “국왕의 결단”에 상찬하는 말을 보내고, 다른 공사들은 일치하여, 「이것이 왕의 의지라고 생각할 수 없다」 「변란의 주모자 이하를 엄중히 처분해야 한다」와 같은 반론을 표명했다.
그 후 11월26일에 「폐후조칙」은 취소되었다.
서울에서는, 왕궁변란에 일본인이 관계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미우라도 방치해 두지는 않고, 12일부터 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이것이 결정되자 스기무라 서기관은 미리 조사받을 사람을 선정하고, 그들을 모아서 입을 맞추는 의논을 했다. 미우라 에게는 어쩔 수 없이, 몇 사람쯤 중형에 처하고, 30명가량은 조선에서 물러나는 처분을 하여, 일을 끝내려는 예상도 있었으며, 그것을 고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郞)가 도착할 때까지는 완료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사관에는, 암살 실행대 지휘자의 한 사람이었던 오기와라 슈우타로우(荻原 壽太郞) 경부가 맡기로 하였다. 전부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13일이 되어 미우라의 계획은 장해에 부딪쳤다. 사건관계자들은, 일본에서 조사단이 오면 광범위하게 처벌이 미치고, 중형자도 나올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선에서 물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의 형벌은 승복할 수 없다는 논의가, 공사관의 조치에 대한 불만과 함께 끓어올랐으며, 드디어 “만일 우리들이 형을 받거나 하게 되면, 공사관의 비밀을 폭로해 버린다”고 큰소리 치는 자까지 나왔다.
그들이 진상을 지껄이면,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러시아는 지체 없이 그것을 파악할 것이다. 주체하기 어려워진 미우라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주된 인물들이 조선에서 물러나게 되면 1인당 200엔을 지급한다고 전했다. 명목은 「대원군이 주는 보수」라고 했으나, 이때 대원군에게는 6.000엔이라는 거금을 자유로이 할 처지가 아니었고, 미우라의 기밀비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인당 200엔이 실제로 주어진 것은, 키쿠치 켄세(菊池 謙讓)의 수기에 의하여 밝혀졌다. 이 돈을 취급한 것은 무라사키 시로(紫 四郞),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 스즈키 즈미(鈴木 順見) 등이었다.
고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郞)를 비롯하여, 요코하마(橫浜)지방재판소 검사 마사야스 후지켄스케(正安 藤謙介), 인천영사관 보 야마자 엔지로(山座 圓次郞), 해군대좌 이주 잉고로(伊集 院五郞), 육군중좌 타무라 이요조(田村 怡与造), 해군소좌 야스하라 긴지(安原 金次), 육군소좌 와타나베 테츠타로(渡辺 鐵太郞/전 공사관 부 무관), 하라다 테루타로(原田 輝太郞)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0월15일이었다. 서울의 공사관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의 예상보다, 빠른 도착이었다.
그 전날인 14일에 미우라는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앞으로 장문의 전보를 쳤다. 그 중에서 미우라는 「가령 그 소행은 과격했다고 해도」, 민비 살해에 의해서 얻은 귀중한 성과를, 일본의 대 조선 정책에 충분히 활용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고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郞) 등의 서울도착에 의해서, 일본 정부와 출장책임자와의 방침은 처음으로 일원화되어, 사건의 조사와 대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고무라(小村)는 17일,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 公望)에게 전보로 보고했다.
「이번 사건에 대하여는 관민 공히 제법 관계자가 많으며, 그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움. 그렇기는 하나 오늘까지의 조사에 따라, 본관이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은 아래와 같음, 단적으로 말하면 이 사건의 사주자(使嗾者)는 미우라 공사이며, 대원군과 공사와의 사이를 주선한 것은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로 추측됨」
같은 17일, 미우라 공사의 해임과 소환이 결정되고, 고무라(小村)가 후임 공사로 임명되었다. 스기무라(杉村) 서기관은 「조선의 친일정권이 다시 와해될 우려」가 있다고, 미우라 해임에 반대의견을 상신하였으나 사이온지(西園寺)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무라는 미우라를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도록 계획하였으며, 또 관리 이외의 사건 관계자를 신속하게 조선에서 떠나도록 일본에서 처분해야 된다는 의견을 사이온지에게 전했다. 이유는 미우라가 서울을 떠난 후에,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외무성도 그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10월18일에 민간인들에게 조선 퇴거령이 내렸고, 22일에 스기무라(杉村), 호리구치(堀口) 등 관리들에게도 그렇게 지시하여, 그들 약 50명은 인천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 승선하게 되었다. 일본인이 돌아간 후의 처분은, 비밀로 되어 있었다. 민간인 중에서도 <조선을 떠나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각오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공사의 명령으로 한 일이다. 일본정부도 우리들의 “우국충정”을 인정하고, 틀림없이 관대하게 처분할 것>이라고 낙천적이었다.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는 처자와 같이 승선했다. 그는 토오야마 미츠루
(頭山 滿)와 만나야 된다고 중도에서 하선을 희망했으나 허용될 수 없었다. 이것도 한 예이지만, 미우라 공사를 위시하여 다수가 유력한 우익, 국수주의와 관계가 있어,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민비 암살사건의 원동력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
고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郞)는 서울 착임 이래, 이 나라에 주재하고 있는 여러 외국공사와 자주 만나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사건발생 직후부터 러시아를 비롯하여 구미에 주재하는 일본공사를 통해, 민비사건에 대한 각국정부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일본정부도, 고무라와 병행하여 여러 나라에 대한 양해공작을 진행했다.
먼저 각국주재 일본공사에게 전보훈령으로, 민비 사건이 일본정부의 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 혐의자는 조선에서 내 보내고, 관민 구별 없이 범죄의 증거가 있는 자는 법에 따라 처분한다는 것을 임국(任國)정부에 비공식 통고 하도록 했다. 더욱이 조선의 독립 존중과 조선 주둔 일본군은 요동반도의 보장점령 후에 철퇴시킬 것을 포함한 「선언서」를 발표한 것도, 여러 외국에 대한 양해공작의 하나였다.
일본정부는, 한발을 잘못 디디면 큰 사건으로 발전하는 우려를 지니고, 민비사건에 대처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일청전생에 이겨서 여러 나라를 놀라게 했으나, 그것은 국력을 전부 소모하면서 얻은 승리였다. 그에 이은 “3국 간섭”으로 군사력이 없는 나라의 입장을 통렬하게 느끼게 하여, 거국적으로 군비확충을 시도하게 되었으나, 이제 막 착수했을 따름이다. 러시아 같은 대국을 상대로 다시 전화(戰火)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태다. 민비 사건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다른 나라의 비난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