됫박 / 유종인
어느 날 화단에 버려진 낡은 됫박 하날 주웠지요
모서리가 깨지고 옆구리가 터진 걸
겨우 철사로 옭아매 썼던 날도 한참인 듯했지요
나는 눈에 익은 이 옹색한 애물을 가만 주워들었지요
사월의 화단은
야단을 맞고 쫓겨나온 꽃들의 주둥이가 댓발인데
허술한 됫박은 아직도 뱃구레가 홀쭉했지요
도둑고양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가난을
나무는 제 몸을 내줄 때 얼마나 마뜩치 않았을까요
그러나 사월의 됫박을 들고 오월의 꽃밭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 낡은 오지랖도
볼우물이 터지도록 인심을 옮겨 담던 선량(善良)인 걸 떠올렸지요
허술하고 미욱한 대로
계절을 놓친 봄꽃들은 아직 이마가 뜨거웠기에
그 화사한 절명(絶命)을 고봉으로 주워 담아 반그늘에 부려주고요
어느 날은, 느닷없는 천뢰(天籟)의 말씀인 우박을 퍼 담아
겨울을 모르는 꽃밭 귀퉁이에 구메밥처럼 넣어주고요
연못의 금붕어들에게 천천히 녹여먹으라 생색을 냈지요
허술한 대로 이 몸 한 됫박한테도
여독이 생기는 뿌듯한 하루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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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시인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 시,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사랑이라는 재촉들』
『양철지붕을 사야겠다』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