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5)-3
송환자 명부에 「영사관 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万一), 종자(從者데리고 다니는 사람) 요시노 칸(与謝野 寬)」이 있다. 사건 당일 서울에 없었던 요시노(与謝)가 귀국하게 된 것은, 증인으로서 경위청취를 하기 위해서 일까, 또는 서울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위험인물로 보였기 때문일까, 그는 히로시마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았을 뿐으로 석방되었으나, 이것은 사건관계자의 가족과 같이 다루는 것이다.
요시노(与謝野)가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것은 이 해 1895년(명치28년) 4월, 조선정부 학부성 을미의숙(乙未義塾) 교사로 부임한 때 였다. 일본을 출발할 때 22세의 그는 오사카(大阪)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사당에 참배하고,
들어 보소서/우리나라의 글을 저 나라(조선)에/전해 줄 수 있는/세상이 되었습니다.
하고, 일청전쟁 승리를 배경으로 자랑스러운 한수를 읊고 있다.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일청 강화조약 조인을 한 것은, 같은 해 4월17일이었다.
집지 『明星』에 게재된 회상기 「모래위의 언어」라든가 시가집『東西南北』 등에 조선에서의 요시노(与謝野)의 행동이나 감개가 쓰여 있으나, 거기에는 “虛”와 “實”이 혼합되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요시노(与謝野)는 서울의 일본 영사관에 임시로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万一)와 친했다. 이 여름 그는 장 티푸스로 한성병원에 2개월 입원했는데, 그곳으로 문병을 온 호리구치(堀口)와 아유가이 카이엥(點貝 房之進/槐園) 등 3사람이, 민비 암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東西南北』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경성에 가을이 오는 날, 카이엥(槐園)과 같이 짓는다. 때마침 왕비 민씨의 전횡일에 더하여, 일본당의 세력이 갑자기 땅에 떨어진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에 가을바람이 일자 큰칼 매만지며 내가 생각하는 일 없지도 않다」
또 다음과 같이 기생이 등장하는 노래도 많다.
긴 칼 매만지면서 술에 취해 우는 얼굴만 보는 가희(歌姬)도 그럴까?
「그 무렵의 나는 작은 돈키호테로, 격에 맞지 않게 한사람의 어엿한 지사인체 하고 있었다.」 고, 후에 요시노(与謝野) 자신이 쓴 것과 같이, 그는 민비 암살대의 청년들과 같은 정신적인 토양이었다. “남성적이고 대범한 시풍”의 시가를 많이 실은 『東西南北』이 젊은 세대 특히 장정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던 시대이다.
요시노(与謝野)는 그 후에도 2번 조선에 건너갔으나, 이렇다 할 행동은 하지 않았다. 특히 1897년(명치30년)의 3번째 조선에 간 것은, 유럽 유학의 자금을 벌 목적으로, 민간인에게는 법률로 금지되어 있는 인삼 매매에 손을 대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귀국했다. 이것이 “명성파의 가인 요시노 뎃칸(与謝野 鐵幹)의 前身이고, 그가 호오아키코(鳳 晶子)(후일 与謝野 晶子)와 만난 것은 민비사건으로부터 5년 후인 1900년(명치33년)이다.
조선으로부터 퇴거명령을 받은 사람들의 귀국풍경에 대하여. 그 중의 한사람인 키쿠치 켄세(菊池 謙讓)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 피고가 우시나(宇品/廣島)부두에 나타나자, 각지에서 모인 환영자들은 연도에 도열하고, 피고 일동에 심대한 동정과 열정적인 환영을 보였으며, 한때는 히로시마(廣島)옥바라지 때문에, 그 위로 방문자가 전시의 객사(客舍)에 가득했고,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광경.....」
서울 재류방인들이 개최한 송별회도 성대하였지만, 귀국자들은 그것을 떠올릴 여유도 없이, 48명이 바로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수갑을 채우지 않은 것은 미우라 공사뿐이었다. 이리하여 히로시마(廣島)지방재판소의 예심신문이 시작되고, 쿠스노키유키히코(楠瀨 幸彦)중좌 등 군인을 재판하는 제5사단 군법회의도 개시되었다.
일본정부는 조선국왕을 위문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를 전권대신으로 서울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을 안 조선 측은 <이노우에가 오면, 또 무엇인가 문젯거리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계속해서 그 중지를 고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郞)에게 간원했다. 이 건에 대하여 일본정부와 고무라 사이에 교신된 몇 개의 전보를 보면, 이노우에를 조선 측이 얼마나 혐오하며, 경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고무라는 조선 측에, 「이노우에는 단순히 위문사로 오는 것」이라고 알리고, 그들을 달랬으며, 이노우에는 이런 사정을 어디까지 알았던지, 예정대로 10월말 서울에 들어왔다. 그 후의 이노우에는 역시 그다운 움직임을 보여, 대원군을 은퇴시킨 것은 일본정부와 연락하기는 했지만, 조선 요인간의 세력다툼이 얽힌 훈련대의 문제로, 다시 일본의 병력사용을 중앙으로 진언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노우에를 하루라도 빨리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의 예심속행 중에, 조선정부는 “민비살해의 하수인으로, 이주회(李周會), 박선(朴銑), 윤석우(尹錫禹) 등 3사람을 체포하여, 취조하고, 전원에게 교수형 판결이 내렸다.
사건직후부터, 김홍집을 비롯하여 전 각료가 하수인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압밖에 내지 못할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명목만의 수사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외부로부터 압력도 있고, 언제까지나 방치할 수는 없었다.
3사람의 사형수 중 한사람, 박선은 당시 다른 죄로, 옥중에 있었다. 그는 금전문제로 모 여성과 말다툼을 할 때, 술김에 “나는 매우 신분이 높은 여성을 죽인 적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아, 이것이 화근이 되어, 민비를 죽인 하수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부산출신인 박선은 일본인 가까이에서 일한 적도 있고, 일본인과 같은 복장,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으므로, 「하수인은 일본인으로 변장한 조선인」이라는 일본 측의 “조작”에 합치하는 조건까지 갖추고 있었다.
다음의 윤석우는 훈련대의 부위(副尉)다. 그는 우연히 민비의 유체를 소각한 장소를 지나가는 길에, 그 유골을 땅속에 파묻은 행위가, 이 불행을 불러오는 결과가 되었다.
요컨대 위의 2사람에게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웠으나, 문제는 3번째 이주회다.
민비암살 실행대의 1사람인 코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 秀雄)의 수기에는 「대원군을 맞이하려가는 도중, 아소정 가까운 노상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주회 등 몇사람의 조선인과 합류하고, 그 후의 행동은 같이 했다.」고 쓰여 있다. 더욱이 「사건 후, 이주회는 민비 살해의 하수인이라고 자수하고, 처형됨으로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일본의 지사들을 구하려고 시도한 의인」이라는 내용의 기술이 있다.
나는 이 수기의 “이주회 의인설”을 읽었을 때 <좀 이야기가 지나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재판의 예심청구문 중에도 「아사야마 (淺山 顯臟)에게는. 전부터 대원군의 입궐을 열망하는 조선인 이주회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을 핑계 삼고」 「피고 겐소(顯臟)는 이주회를 면회하고, 오늘밤 대원군이 입궐해야 된다고 알려, 그가 몇사람의 조선인을 규합하여 공덕리에 닿는 것을 확인하고」와 같이 되어 있으므로, 피고들의 말에 “虛”가 많은 것을 알면서도 이주회의 실행대 참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박종근(朴宗根)은 저서 『일청전쟁과 조선』중에서, 「이주회가 사전에 일본인과 결탁하고, 대원군 저택 앞에서 일본의 군민을 선도했다는 것은, 완전한 조작극」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박종근의 기술에 따르면----.
「李周會 供草」를 읽어보면, 그는 시종 무혐의를 역설하고 있다. 사건 당시 왕궁 안에 있었던 것은 인정하나, 그 이유는, 그의 집은 왕궁에서 극히 가까우므로, 갑자기 왕궁에서 일어난 총성에 놀라, 평복인체 영추문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은 「나라의 변란을 듣고 걱정되고 분개한 데서」 일어난 행위이며, 신하로서 달려간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사건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주회는 제2차 농민전쟁 진압에 협력함으로써 일본군과 박영효의 추천에 따라 군부협판으로 출세한 사내다. 「李周會 供草」에서는, 그에 대한 신문은 박영효와의 관계가 중시되고 있다. 김홍집 등은 박영효와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박의 잔당을 내쫓을 방침으로, 민비 사건도 박영효 사건과 관련시켜, 이주회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계획한 것 같다. 이에 대하여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는, 이주회가 반 주류파이므로, 진상의 폭로를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또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이 재판을 “조작극”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상이, 박종근의 「이주회 무혐의설」 의 대요이다. 이만치 자료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에, 이주회는 민비암살사건과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일본인 폭도가 경복궁에 침입하였을 때, 왕궁의 각 문은 일본 병사들이 엄중하게 단단히 지키고 있었는데. 「갖출 것도 갖추지 않고 평복으로」달려온 이주회가, 어떻게 영추문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던가----도, 의문의 한 가지다.
「이주회 의인설」은 어디에서 생겨, 어떻게 사건에 관계한 일본인 사이에 널리 전해져 경의와 감사를 바치게 되었을까. 정성을 들인 일로, 사건이 일어난 지 32년 후, 일본에서, 토오야마 미츠루(頭山 滿)가 시주(施主)가 되어 「義人 李周會」의 33기년 법요(法要)가 올려졌다. 이 자료는, 토치기 켄(栃木縣) 사노시(佐野市) 향토박물관의 「스나가문고(須永文庫)」 중에 있고, 나는 법요의 사진까지 봤다.
우치다(內田)영사가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 公望)에게 보낸 보고 중에, 「(김홍집 내각은)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를 위시하여 일본인이 형벌을 받는 것은 유감스럽고 딱하기 때문에, 목하 취조중인 자를 민비 살해의 장본인으로 사형에 처하고, 대원군을 주모자로 하여, 일본인의 처벌을 되도록 가볍게 하고자 한다---는 의향」이라고 쓰여있다. 이 김홍집 내각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었지만,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이주회 개인의 의사로 되었는가. 일본인의 “조작”에 따라서, 또는 “실수” “오해”로 그는 “의인”으로 추대되어 버린 것일까. ----. 좀더 무엇인가 사정이 있을 듯 하나 이것도 또한 나에게는 판단이 미치지 못하는 사항의 한가지다.
12월28일, 이주회, 박선, 윤석우 세사람은, 민비 살해의 하수인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반달 후인 1896년(명치29년) 1월14일, 제5사단 군법회의에서 쿠스기(楠瀨)중좌 이하 전원이 무죄로 되고, 다시 1월20일에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예심에서도 전원이 면소(免訴) 되었다. 이것으로 민비암살사건에 관계한 일본인은 군 관 민 모두가 “청천백일”의 몸이 되었다. 석방된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는, 다시금 개선장군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재판기록을 읽어보면, 처음에는 상당히 엄하게 조사를 받았으나, 점점 엄한 기운은 얇아지고 마지막에는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마”라고 하는 듯이 느슨한 신문이었다.
전원 무죄가 실현된 배경을 생각하면, 먼저 1895년(명치28년) 11월28일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이 있다. 이것은 친러, 친미파 사람들이 국왕의 천궁(遷宮)과 김홍집내각 타도를 기도한 행동을 일으키고, 실패로 끝난 사건이다. 김홍집 내각의 조사에 따라, 이 사건의 배후에는 러시아 등 외국세력이 있었다는 점이 강조되어, 일본이 일으킨 사건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무디게 하는 결과를 끌어냈다.
다음으로 일본정부 및 고무라 쥬우타로(小村 壽太郞)의 사건처리가 공을 세웠고, 제 외국의 양해를 상당한 점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언제나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는 영국은, 그 방파제 역할을 다하는 일본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미국도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고, 출장지 책임자의 고삐를 다잡았다. 고립된 러시아는, 춘생문 사건의 영향도 있어 일본에 대하여 강한 태도를 취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조선 당국이 민비 암살 하수인으로 세 사람의 자국인을 처형한 것이, 일본의 입장을 대단히 편하게 했다. 본디부터 일본재판의 목적은 죄상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제 외국의 비난 공격을 피하고, 국제적 대 사건으로의 발전을 저지하는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