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초당을 다시 찾다
김 난 석
고희(古稀)의 어원은 당나라 두보의 시에 있다(人生七十古來稀).
고희를 맞기도 전에 고희의 어원을 찾아
2천 년도에 원로 문인들을 따라 중국 사천성에 있는
두보 초당을 찾아봤다.
그 뒤 이천팔년도에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기정수 님이 중국 사천성 성도와 상그릴라를 다녀왔다는데
나는 사천성 성도의 두보 초당을 답사한 후기를 꺼내본다.
두보(杜甫) 초당을 찾다(2008.2.29.-3.4) / 김 난 석
연전에 찾아봤던 두보 시인의 초당을 다시 찾아봤다.
그때는 원로 문인들 틈에 끼어
졸졸 따라다니기에 급급했지만,
이번엔 조금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리란 마음으로 다시 나서봤다.
두보라면 조선조에서도 그 시를 흠모하였던지
한글 창제 얼마 뒤인 성종 때 유윤겸을 통해
두시언해(杜詩諺解)를 펴낼 정도였으며,
학창시절 춘일억이백(春日憶李伯)이나 월야억사제(月夜憶舍弟)로
메마른 정서를 적시던 중국 당대의 걸출한 시인이기도 하다.
두보는 그렇듯 천이백여 년 전 성도(成都) 완화계의 강촌에서
처자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신병을 걱정하는 외에 자신의 처지를 조용히 관조할 뿐이었지만,
인구 천만을 넘는 지금의 성도는 두보 초당을 비롯한
인근 몇 군데의 관광지에 모여드는 객들로 호황을 누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야속한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曲江(곡강) / 두보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꽃잎 하나 떨어져도 봄이 가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모진 바람에 꽃잎 흩날리니 서러운 인사여
且看欲盡花經眼(차간욕진화경안)
지는 꽃 탐하는 것도 잠깐 사이려니
莫厭傷多酒入脣(막염상다주입순)
서럽다 하여 어찌 술 마시길 꺼릴 소냐
江上小堂巢翡翠(강상소당소비취)
강상의 작은 정자에 물총새 둥지 틀고
苑邊高塚臥麒麟(원변고총와기린)
궁원 큰 무덤에 기린 석상 쓰러지는데
細推物理須行樂(세추물리수행낙)
사물의 이치 헤아려 즐겨야 하리니
何用浮名絆此身(하용부명반차신)
어찌 헛된 이름에 몸을 얽맬 것이냐!
중국의 고전문학에서 2대 시가(詩歌)를 꼽으라 하면
공자가 지었다는 시경(詩經)과 굴원의 초사(楚辭)를 드는가 하면,
두보와 이백의 시를 들기도 한다.
이백의 시는 현실을 뛰어넘는 파격이 있기에
그를 시선(詩仙)이라 하고,
두보의 시는 현실을 직관하면서 조용히 침잠하는 기풍이 있기에
그를 시성(詩聖)이라 한다.
초당에 잠시 머무르던 두보는 시국이 소란하자
다시 유랑에 나섰다가 평생 천육백 여수의 시를 남기고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지만,
두보나 이백이나 모두 파란만장한 체험과 정신력 속에서
옥 같은 글이 샘솟지 않았나 싶다.
두보가 심었다던 도리화도
다른 꽃나무로 바뀌어 피기 시작하고
초당의 지붕도 세세연연 바뀌어 덮이고 있을 뿐이니
어디에 눈길 줄 것도 없이 경내를 휘이익 돌아 나올 뿐이었지만
별반 경륜도 생각도 없이 시를 쓰고 있다는 게 부끄럽기만 해
얼마 전 써두었던 못난 글을 꺼내본다.
너희가 시시를 아느냐
어머님이 무릎에 올려놓으시고
가슴 밀어대시며 쉬쉬 하시더니
아 시원해 하실 때
시시하면서 그 숨소릴 담아두었더라면
참 시원하게 시 한 줄이라도 써 볼 걸
식식거리며 발버둥이나 쳐대다가
쉬쉬 하면서 구린내나 풍겨대고
씨씨 하면서 길바닥에 설사나 해댔으니
이젠 가슴에 들어앉은 게 있어야 시를 하지
어머니!
(동인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어떤 날’ 중에서)
경내를 서둘러 돌아 나오려니
바깥 담벼락에 자기(瓷器) 파편으로 모자이크 한
<草堂>이란 글자 앞에 방문객들이 모여들어
여행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잽싸게 그 틈에 끼어 귀를 기울여보니
문화대혁명시기에 홍위병들이 중국 전통 자기를 찾아내어
모두 박살냈다는 것이고,
지각 있는 사람들이 그 파편을 다시 주워 모아
여기에 <草堂>이라는 글자로 모자이크했다는 것이다.
그 뒤에 모택동이 찾아와 이 글자를 들여다보면서
혀를 찼다는 것이고,
모택동이 들여다보던 모습을 뒤에서 찍은 사진이
바로 옆에 걸려있는 액자 속의 것이라 했다.
진실 여부야 다음에라도 가리면 되는 것이니
나도 모택동 흉내를 내어 황급히
뒷모습을 한 장 촬영해 달라 하고 일단 돌아섰다.
중국의 모택동은 생시에 세수와 양치질을 안 한 것으로 유명했다 한다.
('모택동 전기' 중에서)
중원 평정을 위한 대장정에 몰입하려니
여유 부릴 틈이야 없었겠지만
평소 행동도 그리 깔끔하거나 민첩하지는 않았다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곳 인민들로부터는 등소평과 함께
사상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는 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모택동을 사상적 원리주의자로 받든다면
등소평에 대해선 생활개선을 위한 실용주의자로 칭송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모택동은 사상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으나
그 전위대인 홍위병에 의해 유구한 전통을 파괴하는 잘못을 범했고,
이와 달리 등소평은 소위 흑묘백묘(黑猫白猫)라는 비유 아래
원리에 앞선 목표 달성을 외쳤으나
이런 구호가 여러 가지 병폐의 온상이 되고 있지 않나 싶은 것이,
요즘 심각하게 문제 되고 있는 중국산 짝퉁 현상이
모두 그런 정신 상태에서 발원하는 게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이다.
모택동은 1893년에 태어나 1976년에 타계했으며,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전통문화유산이 훼손되던 시기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였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초당 앞에 선 모택동 사진의
촬영연도가
1958년으로 되어 있었으니
두보 초당도, <草堂>이란 모자이크 글자도,
또 그에 얽힌 이야기도 모두 짝퉁이란 생각마저 들어 씁쓸하기만 했다.
그 흉내를 내어 뒷모습을 남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모자를 벗어 들여다보려니
이것도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아닌가.
짝퉁이라면 그 어원은 잘 모르겠지만
그 반대로 진품 명품이나 순혈의 전통성을 떠올리게 된다.
꽃이 열매를 맺기 위함 외에 은은한 향기를 내뿜듯
생활 용품이 그 용도에 더해 고아한 품위를 내보여야 하고,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Aura)가 있어야 매력이 있지 않은가.
돌아오는 길에 곤명의 석림(石林)에 들려 자수정을 샀다는 일행이
그조차 화공물질로 만든 짝퉁임을 확인하고
쓰레기통에 버렸으니
문화탐방도 물건을 사는 것도 모두 짝퉁 현상을 경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엔 훼손되지도 변질되지도 않는
청자의 이데아(Idea)가 있으니
얼마 전 써두었던 시를 꺼내본다.
청자(靑瓷), 그 빛과 그늘
자기야
네 어깨에 묻은 손자국, 그것은 외면하마
오직 청아한 눈빛 숨어 내 보일 듯
드러내어 감출 듯
천년을 두고 표정 하는 불변만 바라보마
억지로 끌려간 기구한 운명
그것은 외면하마
다만 길게 늘어 뺀 목을 오므릴 듯 열어
님을 부르는 지조만 들으려마
자기야
네 주인이 사시장철 바뀌고 있음은
외면하마. 오직
동가(東哥)에서도 서가(西哥)에서도 자기일 뿐인
네 속내만 들여다보마
겨드랑이에 끼고 사타구니에 끼고
체온을 나누려 한들
데워지지 않는 냉랭함
그것을 투명한 눈망울로 응시하마
그러면 자기야
네 어깨엔 내 눈망울이
내 눈망울엔 청아한 네 어깨의 눈빛이
서늘하게 자리 할 게다. (동인시집 ‘별것에 대한 애착’ 중에서)
* 人生七十古來稀는 두보의 시 곡강 2부에 나오는 절로
칠십을 살기 어려운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는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이다.
위 사진은 모택동, 아래는 필자
첫댓글 꽃피는 시절에 두보초당을 찾으셨네요. 삶의 애환 인간적인 체취 가득한 두보의 시를 좋아합니다^^
正是江南好風景 강남의 풍경 한창 좋은 지금 落花時節又逢君 꽃 지는 시절 다시 그대를 만났네.
네에 평생 그리움 속에서 살다 간
시선이었지요.
시대의 불안과 가난과 외로움
우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고운 노래를 불러야겠습니다.
겨울이 와서 좋고
눈이 와서 좋고
기정수 님이 와서 화답해주니 좋고요 ~
두보 라는 분의 시는 저도
접한 것 같군요
글 잘 보고 갑니다
네에 그렇겠지요.
날씨가 매우 춥다네요~
난석님~
저도 두보의 시를 참 좋아 합니다
두보의 시를 써서 병풍을 만들어 지인에게 선물도 했구요
저도 훗날 중국에 갈 일이 있으면 초당에 한전 가 봐야 겠네요
오늘도 건강하게 하루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네에 사천성에 두보 초당도 있지만
거기는 삼국지의 주 무대여서
들려보면 좋을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
네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