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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여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 2
뒤늦은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그녀의 모든 질환은 교통사고의 탓보다도, 쇼크성
질환이었다는 것. 교통사고로 인해 그녀가 얻은 상처는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것과.
다리 인대가 끊어진 것. 오직 그것 뿐. 정한은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대로 일어나버리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재벌총수는 되지 못해도 적어도 떵떵거리며 존경 받고 살 수는 있지 않은가?
그는 다시 자상하고 친절한 남편의 가면을 들었다. 그러던 그가 결국 류도에게 와서
아내를 죽여달라고 하게 된 이유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던 하나의 사실이다.
“아내의 친구에게 전화가 왔더군요. 나보고 개새끼래요. 돈을 보고 아내를 노렸던
거라며. 각오 단단히 하고 있으래요. 아내도 이미 알고 있다고. 쿡. 그래요 아내가
그렇게 되었던 건 내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에요.”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보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났기에, 정한의 목소리는 슬슬 꼬이기
시작했고 류도의 술도 세 병이나 동이 났다. 물론 류도는 아까의 그 한잔으로 겨우
입맛만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
“내 이야기 만으로도 충격인데, 죽을 고비를 넘었으니 당연하죠. 그땐 그녀가
가엾었어요. 아니, 사실 지금도 조금은 가엾어요.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나 그렇게
원하던 야망을 이룰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좋아요. 이미 회장님께서는 나를 아들처럼
대하시고, 내가 그룹을 잇게 되는 건 확정된 거예요.”
“두려웠겠군.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깨어질 까봐.”
“그랬죠. 킥킥… 아내의 친구는 죽여버렸지만 아내가 언제 제정신이 돌아올지도 몰라
그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죽였군.”
“후회하진 않아요.”
킬킬거리던 정한은 정색을 하며 말한 뒤. 다시 말 없이 술을 따랐다. 벌써 바닥을
보이고 이제 빈 양주는 네 병. 그때 류도가 말한다.
“그래, 그래서 그 계약이란 건 뭐야?”
그러자 정한은 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살짝 비틀 비틀, 류도가 있는 소파로
향한다.
“난 앞으로. 곤란한 일들이 많을 거예요. 비단,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흐끅.”
“..”
“그러니까아.. 당신이 필요해요.”
“말했지만 네 목숨은 유한해.”
“만약, 타인이 내 소원을 자기 소원인 것처럼 빈다면. 당신은 들어 줄 수밖에 없겠죠?”
그 말에 류도는 미간을 구기며 말한다.
“아니, 난 내 기분에 따라 손님을 받아. 네 놈 소원은 들어줄 일 없으니까 이제 꺼져.”
말을 마친 류도의 시야는 시계를 향한다. 퇴폐적인 회색 눈은 촛침 하나하나를
훑는다. 이제 열 시가 머지 않았다. 돌려보내야 할 때군. 류도는 곧 쇼파에서 일어났다.
“돈…. 돈을 뜨~음뿍 줄게요.”
점점 취기가 오르는지 혀는 더욱 꼬이기 시작했고. 단정한 정한의 얼굴은 붉어진다.
“필요 없어. 난 너랑 거래 안 해.”
“왜죠?”
그 말에 류도는 히죽 웃었다. 어쩐지 악마처럼 사악해 보이는 그 웃음에 정한은
딸꾹질을 한 번 한 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시간이 머지 않았음을 깨달은
류도는 곧 정한의 등을 현관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더욱 진하게 다가오는 불가리
익스트림의 향기에 정한은 머리가 아파왔다.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알 길이
없다. 그 와중에 류도의 목소리가 흐른다.
“그녀는 아마 당신을 사랑했을 거야. 기운을 차리면 그룹의 후계자로 널 삼아달라고
말했을 지도 몰라. 너를 물심양면 도왔겠지. 착한 여자를 죽였군. 만약 그녀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마음고생 할 필요 없이 그냥 너를 차버렸겠지.”
“…헛소리에요.”
재수 없다. 이때 아내의 얼굴이 떠오를게 뭐람. 생각해보면 그녀는 한결같이 정한을
사랑했었다. 자연 갈색머리와, 얇았던 그 머리카락. 그리고 새하얀 그 얼굴이
떠오른다. 정한은 머리를 저었다. 그러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문득 섰고. 류도는
눈썹을 치켜 뜨고 그를 내려다봤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그 말에 씨익, 미소가 지어지는 류도. 아름다우면서도 사악한 미소다.
“재미있으니까.”
“예?”
“죽음을 앞둔 사람을 동요 시키는 건 즐거워. 편안히 안식에 달하지 못하는 그 꼴을
보면 더더욱.”
정한은 굳은 것처럼 멈춰섰다. 이제 류도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 왔다.
류도는 다른 때 보다 더 기쁜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한의 절망적인 얼굴을
바라본다. 이봐 친구, 왜 그래? 난 죽음이 부러운데. 라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굳은 정한은 말한다.
“…죽음을..앞 두었다니..?”
“나 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왜 너한테 1년만 받았겠어?”
정한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이질 했고. 자신을 현관 쪽으로 이끄는
류도에게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걸어, 침대를 거실 겸 부엌과 분리시키는
고딕형 철제 파티션을 붙잡았다. 류도는 친절하게 말했다.
“아침. 네가 날 찾아왔을 때 넌 1년 하고 12시간 밖에 남지 않았었어. 고로, 넌 10시에
죽는다는 소리지. 지금 딱 3분 남았군. 어서 내 집에서 나가. 시체 치우는 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니까.”
“무슨 헛소리야?!”
정한을 고집을 피운다. 마치 그가 그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의 그처럼. 이러면 아무리
관대해진 류도도, 친절해진 류도도, 그를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 류도는 시체
치우는걸 굉장히 귀찮게 여기니까.
“아주 결정적인 증거는 내가 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거지. 난 곧 죽을
놈한테는 꽤 관대하거든.”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참았는지 알아? 뻥 치지마 개새끼야!
나가달라고? 그래 나가주지. 어차피 회장님을 만나 뵈러 가야 했으니까!”
정한은 화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현관으로 나아간다. 그는 불안해 보이고 위태로워
보였다. 온갖 감정이 교차 된 것이 그의 얼굴에 드러나고 류도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한다.
10시다.
“이런 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가면 경찰에 널 찔러주겠어 이 사기..”
그리고 쿵. 류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병신 새끼 나가서 뒈지라니까.”
정한을 가슴은 쥔다. 그의 얼굴은 오직 고통만이 남았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의 고통. 눈물이 고인 그 눈이 류도를 올려다본다. 그의 검은 눈엔 류도가 비친다.
류도, 그는 쇄골을 가리는 층진 흑발에 긴 목을 가졌고 지금 입은 크림색의 얇은
캐시미어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남자지만. 정한에게 있어서 그는 저승사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사신. 그래, 그는 사신.
“류우우도!”
그때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게로 향하는 계단에서 나비가 올라왔다. 류도는 곧
죽은 정한의 주검 앞에 이걸 어떻게 치워야 하냐, 하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있다.
나비는 어깨며 노란 머리털에 쌓여있는 눈을 털기 위해 몸을 흔들었고 덕분에 바지를
뚫고 나곤 삼색꼬리도 흔들거린다. 머리위로 쫑긋 솟아난 역시 삼색의 털이 덮인
얼어버린 귀를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손으로 녹이던 나비는 녹색의 치켜 올라간
눈으로 정한을 훑더니 말한다.
“낮에 왔던 사람이네?”
“응.”
“왜 여기 있어?”
잠시 침묵. 그리고 끝. 류도가 입을 연다.
“슈트케이스 가져와라.”
“앙?”
“곧 냄새가날거야.”
“난 냄새나는거 싫어! 내가 얼마나 코가 예민한지 류도는 알지?”
“그러니까 가져와. 그리고 너 내가 인간 꼴 하고 있지 말랬지.”
“어차피 류도 일 도우려면 이렇게 있어야 한다 뭐.”
볼이 퉁퉁거리는 나비는 구시렁구시렁 거리며 곧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통통거리는
귀여운 발소리가 들린다. 정한의 시체를 바라보다 곧 밀려드는 짜증에 다시 담배를
집어 든 류도는 능숙하게 입에 물었다. 녀석이 다 마셔버린 술을 보니 속이 뒤집힌다.
그래도 녀석에게 받은 돈이 꽤 되니까. 곧 나비가 슈트케이스를 들고 올라왔다. 꽤
무거웠던지 다시 주절거리지만 류도가 짜증을 내자 다시 볼이 퉁퉁해져 조용해졌다.
다행히 케이스는 컸기에 사후경직이 일어나기 전인 정한의 몸은 잘 구겨져 들어갔다.
살아있을 때라면 아프다며 소리질러댔겠지만. 그는 조용했다.
곧 류도는 현관을 나왔다. 그의 목엔 머플러가. 그의 손엔 슈트케이스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나비가 열심히 뒤를 밀며 따라오고 있다. 류도는 계단을 내려갔고.
그와 함께 쿵쿵쿵쿵, 커다란 소리가 난다. 능숙하게 다리로 문을 닫은 나비도 그의
뒤를 따라왔다. 케이스는 겨우 17세 소년의 힘밖에 없는 나비와, 힘쓰기 싫어하는
류도가 이끌기엔 버거울 정도로 무거웠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냄새가 심할 테니까
어쩔 수 없다. 바깥의 눈은 여전했다. 시끄럽고 화려한 조명도.
눈길 위에 네 개의 발자국과 그를 따르는 바퀴자국. 눈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나비는 녹색의 눈을 반짝이며 가늘어진 동공으로 새하얀 눈에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오늘 가한 만났어.”
“알아.”
“어떻게?”
나비는 곧 자신이 멍청했음을 깨닫고 피식 웃어버린다. 질문이 무의미했다. 두 사람이
같이 산 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시간이니까. 나비는 가한을 만나러 갈 때만 외출 후
당일 날에 돌아온다.
“가한이 시간 잘 받았데.”
“그래.”
후, 하며 연기가 내뿜어진다. 뿌연 연기는 차가운 공기를 만나 금방 사그라 들고 만다.
연기 사이로 눈이 떨어지는 것이 인상적이라 류도는 자신도 모르게 연한 미소를
짓는다.
“몇 년이나 당겨졌대?”
“이번엔 류도가 101년을 가져왔으니까. 당연히 101년이라고 그랬어.”
“…깐깐한 영감탱이.”
말을 하며 류도는 나비의 얼굴에 연기를 불었다. 나비는 얼굴만 찡그릴 뿐. 기침은
하지 않았다. 발전했군. 라고 생각하며 류도는 다시 앞을 바라본다. 잠시 물끄러미
류도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나비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버려 귀를 가리기 위해 쓴
니트모자를 더욱 눌러버렸다.
두 사람은 그 뒤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드르륵거리는 슈트케이스의 소리만이 잔잔한
배경 음처럼 들려왔을 뿐. 불도 꺼진 라면가게의 허름한 건물은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원효대교에 다녀온 두 사람은 정한의 시체가 없는
가벼운 슈트케이스, 그리고 나비가 좋아하는 캔 십 수개를 들고 다시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류도는 담배 대신 사탕을 문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캔이 든 비닐봉지를
흔들며 ‘ㅅ’ 모양의 입이 되어 즐거워하던 나비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가게 앞으로
향한다.
붉은색의 문. 라면이라고 연필로 여러 겹으로 새긴 간판이 있는 문. 그 문 앞에 검은색
캐시미어 폴라티를 입고 붉은색의 짧은 크롭 반바지를 입은 채 누군가가 앉아있다.
갈색의 긴 머리에 눈썹위로 지나치게 올라온 짧은 앞머리를 한 그녀는 아직 소녀로
보였고. 추운 것인지 부츠가 신겨진 정강이까지 끌어안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자고
있었다.
“저기요-, 여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그 바로 앞에 쭈그린 나비가 말했다. 자신의 볼과 코도 빨개진 나비는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베시시 웃고 있는 갈색머리의 소녀를 무던히 흔들었고. 드디어 소녀의 미간이
구겨지면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 속눈썹이 깜빡였다. 눈을 뜬 것이다.
※
으흐 여주인공의 등장이군요. 살짝 나온 가한도 중요한 인물!
단 한명을 제외하고 이 소설에 나올 인물들이 모두 나온 2편입니다.
원랜 하나였는데 너무 커서 두개로 나눴어요~
감사합니다. ^^
첫댓글 오!! 정말 신기한 스토리인듯!! 여 주인공!!! 기대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