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그 톰 포드(63)다. 내가 10년 넘게 써 온 선글라스가 그의 회사 제품이다. 지난 2022년 11월 미국 대형 화장품 기업 에스티 로더에 자신의 브랜드를 28억 달러(약 3조 6900억원)에 매각하고 영화 일에 전념하겠다고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연출 작품이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 야행성 동물들)는 화려한 볼거리로 우선 눈길을 끈다. '에일리언'과 '듄'의 디자인으로 낯익은 그로테스크 화가 H R 기거(1940~2014) 작품을 연상시키는 여성 넷의 나체 춤 향연이다. 추악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처진 살들을 출렁이며 추는 춤, 그런데 이 여성들은 모두 웃고 있다. 기괴하기까지 하다. 함께 보던 '집친구'가 그런다. "실제로 예전 공중목욕탕 가보면, 정말 어르신들 몸매가 저렇다."
이 비디오 작품을 소개한 미술관 관장 수잔(에이미 애덤스)은 공허하기만 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지만 자신의 삶이 빈 껍데기란 점을 절감해서다. 남편은 바쁘다고 겉으로만 돈다. 그러던 어느날 소설가를 꿈꾼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강요에 밀려 헤어졌던 전 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로부터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의 소설 감수본을 소포로 받는다. 수잔은 제목을 보고 흠칫 놀란다. 밤잠을 이루지 않고 일에 매달리는 수잔을 부르던 애칭을 소설 제목으로 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보니 토니(질렌할)와 부인 로라(아일라 피셔)가 딸과 함께 한밤 중 텍사스의 외진 도로를 달리다 불한당 셋한테 모녀가 처참하게 살해되는 내용이다. 토니는 레이(에런 테일러존슨)를 비롯한 불한당들에게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모녀가 참혹한 짓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수잔은 슬프고 폭력적인 대목이 나오면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한다. 사실 수잔은 에드워드와 결혼생활 도중 유부남 허튼과 바람을 피워 에드워드와 이혼한 뒤 허튼과 재혼했다. 그 과정에 에드워드와 가진 태아를 중절하기도 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토니는 죽음을 눈앞에 둔 보안관의 도움을 받아 불한당들을 응징한 뒤 본인도 목숨을 잃으면서 소설은 끝난다.
수잔은 남편 허튼의 외도로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작정이었다. 소설 속 레이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점을 깨닫고 죄책감에 용서를 빌고 싶어진다. 에드워드에게 이메일을 보내 만나자고 한다. 에드워드를 버렸을 때보다 놀랍게 달라진 글솜씨를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로 거듭 태어날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예쁘게 차려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 2인석을 예약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 보지만 에드워드는 끝내...
2016년 11월 미국에서 개봉했으며 오스틴 라이트의 소설 '토니와 수잔'이 원작이다. 제73회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첫 작품 '싱글 맨'(2009)에 이어 두 번째 연출작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톰 포드의 혜안과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다. 복잡할 수 있는 액자형 서술 구조를 거뜬히 소화해냈다. 중간에 불한당들에게 속수무책 당하는 내용이 어이없어 짜증나기도 하지만 소설 내용(황량한 텍사스), 과거 에드워드와 수잔의 갈등(뉴욕), 현재 수잔의 갈등(로스앤젤레스) 세 국면이 절묘하게 연결된다. 장르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도 매력적이다.
국내 영화평론가의 촌평이다. 김혜리-소설, 세상에서 가장 우회적인 복수의 방법, 정지혜-이야기와 작가는 이렇게 치밀하고 냉담하게 독자에게 복수한다. 총칼보다 무서운 펜의 복수다. 어떤 이는 적어도 닷새 동안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경험할 것이라고 했는데 나도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간격을 두고 두세 번은 관람해야겠구나 생각한다.
누구나 첫사랑을 놓친 아린 추억 하나쯤은 있을텐데, 인간과의 관계를 끊고 한 가정을 박살내 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온 수잔이 에드워드의 소설을 읽고 정말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에드워드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노력해야 할 첫사랑을 버린 대가를 평생 곱씹으며 살라는 메시지인 것 같은 것이 영화의 인트로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현대미술이 내용은 없고 허위와 가식 뿐이라는 것을 수잔 스스로 인정하듯 자신의 지난 20년도 실패였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중간에 불한당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한 로라와 딸의 시신이 사뭇 아름답게만 표현된 것도 인트로 장면들과 묘한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몇 가지 사소한 것들.
-영화 초반 수잔과 로라의 외모가 워낙 닮아 1인 2역인가 싶었지만 애덤스와 피셔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화에 등장한 명화들 소개가 좌르르 나온다. 데미언 허스트의 '성 세바스천', 제프 쿤스의 '벌룬 독(블루)'이 수잔의 저택 마당에 슬쩍 비친다. 이 밖에 알렉산더 콜더, 존 맥러플린, 로버트 머더웰, 앤디 워홀 등의 작품이 등장한다.
-왜 에드워드의 소설 제목이 복수형 '동물들'일까? 에드워드가 그토록 혐오한 상대는 수잔과 그녀 어머니였다. 그녀 어머니는 "너는 심지가 곧은 아이지만 에드워드는 다정해, 하지만 너에 비하면 너무 연약한 사람이야. 너의 부르주아 욕망을 채워주지 못해, 돈이 없잖아. 게다가 부서질 만큼 연약해. 분명 후회할 거야. 결혼은 안돼"라고 딸을 압박한다. 딸의 속성을 너무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었고, 에드워드는 모녀가 굉장히 슬픈 눈동자를 갖고 있다며 분명 두 사람 모두 불행할 것이라고 악담을 했다.
-마지막 수잔이 레스토랑에서 싸늘한 응징을 당하는 장면에 흘러나온 음악은 폴란드 영화음악가 아벨 코르제니오스키의 'Table for two'다. 이제야 에드워드의 뜻을 깨닫게 된 애덤스의 눈동자 연기가 압권이다. 코르제니오스키는 톰 포드의 두 영화 음악을 모두 작곡했고 마돈나가 감독한 영화 'W.E.'의 음악도 작업했다.
Table For Two (youtube.com)
[Playlist] 섬세하고 우아한 | Abel Korzeniowski's Score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