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시전문지 『애지』와 애지문학회가 제정한 제13회 애지문학상 수상작에는 송종규의 [구부린 책]이, 제2회 애지문학 작품상에는 박형권의 [도축사 수첩]이 선정되었다. 시상식은 애지신인문학상과 함께, 2015년 12월 5일 오후 3시 유성문화원에서 에서 열릴 예정이다.
ㅡ제13회 애지문학상 수상작품ㅡ
구부린 책
송종규
켜켜 햇빛이 차올라 저 나무는 완성되었을 것이다
꽃이 피는 순간을 고요히 지켜보던 어린 나방은 마침내 날개를 펴, 공중으로 날아
올랐을 것이다
바스러질 듯 하얗게 삭은 세월이 우체국을 세워 올렸을 것이다
숲과 별빛과 물풀들의 기억으로 악어는 헤엄쳐 나가고 행성은 궤도를 그리며 우주를
비행했을 것이다
천만 잔의 독배를 마시고 나서 저 책은 완성되었다
자, 이제 저 책을 펴자
잎사귀를 펼치듯 저 책을 펼치고 어깨를 구부리듯 저 책을 구기자
나무의 비린내와 꽃과 어린 나비가, 악어와 우체통이 꾸역꾸역 게워져 나오는 저 책
저 책을 심자
저녁의 우주가, 어두운 허공인 내게 환한 손을 가만히 넣어줄 때까지
ㅡ심사평ㅡ
송종규의 시는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또한 그 시선을 통해 세상의 깊이에 도달해 가려는 시인의 지적 탐색에 우리 모두를 동참시킨다. 송종규의 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형성하는 시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모색을 통해 새로운 세계 인식 방법을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리고 나라는 주체가 나의 모든 시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현실에서 ‘나’는 주체가 아니라 상품의 지배에 종속되는 타자일 뿐이다. 시간마저 순전히 내 것은 아니다. 그래서 타자화된 개인이 느끼는 파편화된 현실과 착종된 의식이 파괴된 언어로 나타나 현대시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까지 하다.
송종규 시인의 「구부린 책」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를 만드는 것도 내가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모두 타자들이 만들어 낸 오래된 시간이고 그 오래된 역사가 나의 모든 인식의 근원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구부린 책이라는 것이다. 그 책을 읽고 해석하고 그 책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시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요설적이고 난삽한 언어가 주류가 되어버린 세태 속에서 쉽고 명확한 언어가 어떤 깊이를 만들어내는지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송종규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이번 수상이 시인에게나 우리 <애지>에게나 큰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ㅡ반경환, 이형권, 황정산, 이승희, 안서현(글 황정산 대전대 교수)
수상소감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비 같고 회오리 같고 꽃잎 같은 잎사귀들이 내 뜰에 수북수북 쌓였으면 좋겠습니다. 가볍고 차고 환하게 얼비치는 그 아름다운 문장 속에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잠시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천산북로의 만년설처럼 녹지 않는 눈은 말고, 가슴 에이게 하는 사무치는 싸락눈은 말고, 낯선 손님처럼 처음인 듯 눈이 와서 나는 매 순간, 내가 나에게 바치는 설레는 첫 문장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어의 궁전을 내 안에 세워 올리려 했습니다. 시를 통해 당신께 이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변변한 집 한 채 짓지 못했고 당신은 너무 멀어 나는 거기에 닿을 수 없습니다. 또한 형체가 없으므로 나는 당신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영원한 부재로만 존재하는 모순인 당신, 혼돈인 당신. 흩날리는 이 말들은 또 누구의 혼돈이며 누구의 은유인지요.
작은 움막에 문풍지를 달아 주신 <애지>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ㅡ송종규
■ 연보 송종규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안동에서 마치고 대구에서 신명여고, 효성여 대 약학과를 졸업하다. 동산기독병원에서 약국인턴과정을 수료하고 결혼, 딸 미혜, 아들 영 진 태어나다. 1985년 난생 처음으로 쓴 시 3편이 <약사문예>에 당선 되다. 그 후 <물빛> 동인에 들어가서 습작을 시작하다.
*1989년 「겨울스케치」 외 4편으로 심상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옴.
*1991년 습작시를 묶은 첫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을 (둥지)에서 출간.
이 시집으로 문예진흥기금 수혜.
*1997년 시집 『고요한 입술』을 (민음사)에서 출간.
*1997년부터 십여 년간 계간 시와반시 편집위원, 기획위원등 역임.
*2003년 시집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를 (시와반시사)에서 출간.
*2005년 23회 대구 문학상을 수상.
*2006년 시집 『녹슨 방』을 (민음사)에서 출간.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
*2008년 봄호부터 2011년 겨울호까지 시와반시에 「송종규의 시집다시 읽기」 연재.
*2011년 31회 대구시 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2013년 3회 웹진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
*2015년 시집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을 (민음사)에서 출간.
*2015년 13회 애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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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애지문학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된 박형권 시인
ㅡ제2회 애지문학작품상 수상작품ㅡ
도축사 수첩
박형권
트럭에 실릴 때 한 번 우시고
도축장에 도착했을 때 한 번 우시고
보정틀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우셨다
그는 모든 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가 보정틀 안에서 모로 누웠을 때
나는 안면의 중앙을 전용 총으로 타격했다
나는 모든 인간과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뻗어버린 그가 예기치 못한 눈물을 주르르 흘렸을 때
나는 그가 그분인 걸 칼에 베인 듯 알았다
무논의 써레질이 있게 하시고
쇠죽 끓이는 가마솥이 있게 하시고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의 일을 있게 하신
그분인 걸 알았다
그분이 쏟아놓으신 눈물을 어떤 그릇에 담아야 할지 망연하였다
아주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셨다
저 먼 곳 더 크신 우주의 누군가가 대신 흘리는 눈물이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 전생을 반추할 줄 모르는
나의 식욕을 위해
우주 밖의 더 크신 공백이 안타깝게 부어주는 숭늉 한 그릇이었다
애초에 소처럼 반추위를 가지지 못한 나는
위장을 더부룩하게 채우면 그만이고
이웃과 우주와 우주의 심오한 계획을 위해
한 번도 되새김질하지 않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은
흘려도흘려도 담을 줄 모르는 나에게
오래전부터 그분이 보낸 서신이었다
이렇게 늦게 오시다니, 아니었다
다만 좀처럼 확인하지 않는 내 우편함에 이미 도착해 있었을 뿐이었다
이 행성의 이름으로 뜨겁게 견뎌낸 그분의 여름을
나는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단지 고깃덩이셨지만
우물우물 여물 씹는 소리로 온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셨다
ㅡ심사평ㅡ
논리적일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가 예술가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시인의 창작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아주 극단의 현실에서 비현실적 비의을 읽어내고 그 누구도 발견한 적 없는 눈물을 추려내어 함부로 흩뿌려대고 있는 멋진 시 두 편을 만났던 탓이다. 그 한 편이 박형권의 ‘도축사 수첩’이다. 나는 저 시편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의식을 잃어가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읊조리며 눈물을 흘렸을 ‘예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의 모습은 언제나 거대하고 영웅적이라기보다는 저렇게 나약하고 처연한 형상으로 인간들에게 수시로 다가왔다 돌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어쩌면 진짜 신의 모습일 런지도 모르며 신의 모습이 꼭 그랬으면 좋겠다.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신은 인간적이며 사랑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형권의 시편에서는 소의 목숨을 주재하는 도축사가 실은 신의 지위에 있으나 시인은 소에게 그 지위를 넘기고 있다. 신이며 곧 각이 떠져 부위별로 다른 생물들에게 분배될 육신을 조용히 내놓는(약자의 어쩔 수 없는 처지라고는 말하지 말자) 모습은 예수의 그것과 차마 닮아있다. ‘보정 틀’에 섰거나 누웠을 때의 모습은 인간의 교화를 위해 시정에서 체제를 위협하는 연설을 해왔을 ‘그’의 형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은 박형권의 신이나 신철규의 신이나, 그들의 슬픔이나 눈물은 환생이나 윤회의 오리엔탈적 정서를 함의하고 있다. 눈물은 고통과 슬픔, 환희의 부산물이고, 엎디어 우는 자의 등어리 위로 드러나는 애처러움과 눈물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 어떤 저울로도 달 수 없을 것이다. 박형권 시인께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ㅡ애지문학회 일동(글 민경환 회장)
수상소감
소에 관한 시에 당선소감을 적자니 한 슬픈 소에 관한 생각만 나고 좀 멋진 소재를 찾으려는 머리를 가슴이 와서 턱턱 막는다. 결국 가슴을 따르기로 한다.
반드시 필必 자와 사랑 애愛 자를 쓴 둘째누나의 이름에는 다음번엔 반드시 아들을 낳자는 백부님과 백모님의 염원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분은 둘째누나 아래로 딸 둘을 더 낳으셨다. 도시로 일 나간 부모님 덕에 어릴 때 큰댁에 간 나는 누나들의 경쟁적인 사랑에 싸여서 자랐다. 특히 둘째누나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나와 비록 사촌이지만 머루 다래 으름을 따면 자기 입에 넣지 않고 꼭 내 입에 넣는 것은 물론이고, 방앗간 집 개가 나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야말로 혈투를 벌이다 나대신 물리기도 했다.
둘째누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백부님과 백모님을 따라 농사일을 했다. 누나에게 공부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고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는 심성 때문이었다. 다른 누나들은 모두 도시로 공부하러 나가고 둘째누나는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 미련스러울 정도로 논밭 일을 했다, 저녁에는 풀어놓은 소를 몰고 내려왔다. 소를 몰고 오는 시간은 누나에게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끔 누나와 함께 소를 몰고 올 때도 있었다. 해가 뉘엿할 때 소를 몰고 오는 누나는 천생 하루 일을 마친 소였다. 자기 기분은 말하지 않는 누나가 무슨 마음인지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공부하고 싶다. 머리가 아파서 공부가 될지 모르겠지만.’ 천하장사 같은 누나가 아프다고 말하다니.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둘째누나는 이웃마을로 시집가고 딸 하나를 낳고 삼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뇌수막염이라고 했다. 백부님이 혼자 한탄하시는 걸 나는 들었다.
“소 같은 것... 부모형제에게 희생만 하고 갔어.”
자기를 내주고 가는 사람들, 석가와 예수와 간디... 모두 소 같은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소는 자기를 내줌으로써 한 우주를 탄생시킨다. 슬픈 소들이여, 아름답다.
이 상을 위해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ㅡ박형권
박형권 약력
1961년 부산에서 출생. 경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남 지방공무원을 하다 미술학원 운영. 200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우두커니(실천문학)』 『전당포는 항구다(창비)』 『도축사 수첩(시산맥)』을 냈고, 장편동화 『돼지 오월이(낮은산)』, 『웃음공장(현북스)』 『메타세쿼이아 숲으로(현북스)』 청소년소설 『아버지의 알통(푸른책들)』을 냈다. 김달진창원문학상, 수주문학상. 한국안데르센상, 201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현) 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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