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40년, 악착같이 번 돈은 한국에 다 부치고
조국 대신 저 세상으로 떠나는 그분들의 마지막이란…"
2008년 가을,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72세의 한국 여인이 숨을 거뒀다. 그녀는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 서독으로 파견된 간호사였다. 40여년 타국생활을 마감하고 조국이 아닌 저세상으로 떠나는 그의 마지막은 외롭고 쓸쓸했다.
"대부분의 파독 간호사가 그랬듯 그분 또한 억척스럽게 일했지요. 생활비 40유로만 빼고 나머지 월급은 모두 한국 가족들 생활비로, 동생들 학비로 보냈고요. 아랍인과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어 자기가 번 돈을 또 조카들 학비로 송금했어요. 그러다 췌장암 선고를 받았고, 가망이 없다는 걸 알자 모국에 돌아가 묻히고 싶어했지요. 그래서 한국 가족들에게 연락했더니 빈말이라도 '어서 오십시오' 하는 회답이 없었습니다. 종교 갈등이 있던 남편도 그녀 곁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고요. 참, 서글픈 인생 아닙니까."
이 파독간호사의 임종을 지킨 김인선(60)씨는 독일 베를린에서 '동행―이종문화간의 호스피스'라는 이름의 자원봉사단체를 이끌고 있는 여성이다. 2005년에 설립한 '동행'은 베를린에 이주해 사는 아시아인들이 타국에서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hospice) 단체. 독일에서는 유일하게 이민자를 위한 호스피스 그룹이고, 140명의 자원봉사자가 활약할 만큼 기여도가 커서 지난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5년간 '동행'의 도움을 받아 임종한 사람이 250여명. 1년 전 유방암 선고를 받고도 호스피스 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쳐온 김씨는 올해 '비추미 여성대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시상식 참석차 27일 서울에 온 그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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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 선고를 받는 순간‘내가 죽으면 누가 호스피스 일을 하지?’하는 걱정부터 했다는 김인선 대표.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로 가득했다. /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타국에서의 쓸쓸한 임종, 그 사연은…
―파독 간호사, 광부들이 그렇듯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줄 몰랐다.
"독일은 사회복지가 잘 돼 있을 뿐 개개인이 잘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특히 1966년부터 서독으로 파견된 간호사와 광원(광부)들은 노동자로 온 것이니 더더욱 고생을 많이 했다. 악착같이 번 돈을 대부분 한국으로 송금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게 없었다. 목돈으로 연금을 찾아도 한국 가족들 집 사주고 동생들 대학 공부 시킨다고 송금하고. 정작 자신의 노년을 위해 비축한 돈은 없다는 얘기다."
―한국 경제도 좋아졌고, 가족들도 밥은 먹고 살 텐데 왜 계속해서 송금을 하는가.
"조국이 어려울 때 떠나온 그분들 뇌리에는 자신은 항상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언니'라는 관념이 뿌리깊다. 지금은 동생들이 훨씬 잘사는데도 그들에게 돈을 부치지 않으면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느낀다. 돈을 보내면서 가족으로의 소속감을 유지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들이 독일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도 낳았을 텐데 왜 임종이 외로운가.
"아이들은 독일의 개인주의 문화에서 자라난다. 노년의 부모를 섬기는 일만 해도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사회적 규범이 있는 게 아니다.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한 광원은 임종 직전 자식들을 가리키며 '한국말도 못하는 저것들이 독일 애들이지 한국 애들이냐'고 탄식하면서 울더라. 귀소본능이 강한 남자분들은 말년에 우울증에 시달린다."
외할머니 간병으로 싹튼 '호스피스' 열정
―당신은 1972년 독일인 계부(繼父)의 초청으로 독일로 이주했고, 간호사로 30여년 일하면서 훔볼트대학에서 신학으로 석사학위도 받았다. 우선 어머니가 독일 남성과 재혼하신 사연이 궁금하다.
"색소폰 연주자였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일본 유학을 다녀와 교사, 기자 생활까지 한 신세대 여성이다. 사별 뒤 홀로 지내다 한국에 파견된 독일인 유엔 직원과 사랑에 빠졌다. 외할머니가 극력 반대해 결혼하지 못하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결혼해서 한국을 떠났다. 내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6년 뒤 독일로 따라갔는데, 왜 처음부터 함께 가지 않았나.
"난 문제아였고 고집만 센 외동딸이었다. 다른 남자랑 결혼한 어머니가 싫었고 한국을 떠나기도 싫었다. 일하는 어머니 대신 나를 거의 키우다시피한 외할머니에 대한 애착이 컸다. 내 생긴 그대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준 할머니는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이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몸 다 씻겨 드리고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이미 호스피스로서의 싹이 트지 않았나 싶다.(웃음)"
―독일로 와서 간호 공부를 시작했다. 독일 본에 있는 성 요하네스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기 시작해 30년 넘게 일한 것이 호스피스 단체를 만든 백그라운드가 되어준 셈이다.
"2001년 베를린에 있는 가톨릭 병원에 근무할 때 호스피스 교육을 처음 받았다. 간호사라는 게 환자들 죽음을 일상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직업인데, 그 교육을 받으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기 시작했다. 남의 얘기가 아니더라. 이방인인 나야말로 죽음을 어느 곳에서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생각하니 섬뜩했다. 한인사회에서 만난 간호사, 광원들의 외로운 말년을 이미 목격해온 터였다."
―그래서 6년간 붓던 생명보험을 털어 호스피스 단체를 만들었나.
"간호사로 일하면서도 간호대학, 신학대학 등 학생 신분으로 오래 살아 연금을 많이 붓지 못했고, 그래서 노후 자금이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생명보험을 들어둔 것인데, 종자돈으로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종자돈만으로는 운영이 불가능하지 않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단체의 유일한 스폰서는 내 어머니였다.(웃음) 지난해 독일 자원봉사단체 대회에서 2등 상을 받고 메르켈 총리로부터 감사패도 받으면서 이름이 알려지니 독일 정부 지원 프로젝트를 따는 데 수월해지더라. 독일 기업들이 후원해주면 좋지만 이민자들을 위한 단체라 선뜻 도움을 주지 않는다. 내 생활비는 대학 강사료로 충당한다."
죽음, 나도 예외가 아니더라
―'동행'이 돕는 사람들에는 한국인만 포함돼 있는 게 아니던데.
"베를린에는 200개 국가의 사람들이 산다. 그중 250만명이 터키 등 아랍사람들이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이 4만5000명이다. 수적으로 적어 외면당하는 아시아 이민자들을 돕고 싶었다. 동남아 사람들 중엔 불법체류자가 많고 독일 말을 전혀 못해 밑바닥을 전전하다 죽음을 맞는 경우가 허다하다."
―호스피스 활동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지나.
"1주일에 두 번 정도 말동무가 되어주고 임종을 위한 서류 작업을 돕는다. 노래치료를 통해 자기 일대기를 정리하기도 한다. 어릴 적 부르던 동요, 연애시절 유행했던 가요를 다시 불러보면서 많이들 울고 후련해하신다."
―호스피스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임종을 함께 한 사람들이 어른거릴 것도 같고.
"그래서 2년 활동하면 1년은 쉬게 한다. 늘 죽음을 접하니 '살아 있는 것'도 봐야 하지 않겠나.(웃음) 처음부터 교육을 시킨다. 상담 후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그분을 거기에 두고 오라고. 환자와 봉사자는 겹쳐지지 않는 철로 같은 것이어야 한다. 평행이 무너지면 서로 실패한다."
―지난해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현재 상태는 어떠한가.
"악성이라 빨리 수술했고 현재 약물치료 중이다. 항암치료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손톱, 발톱이 다 뭉그러졌다. 60년간 큰 병 없이 살아와서 언제고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죽음을 앞둔 분들과 동행하면서 나는 예외라고 생각했던 거다. 호스피스 활동가로서는 값진 경험이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의 심정을 절감했다."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
"결혼을 한 번 했었다. 아이는 없고. 독일에선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개인사가 한국에선 관심거리가 되니 문화의 차이를 느낀다."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비결이 있을까.
"독일 남자에게 버림받고 에이즈에 감염돼 죽어가던 태국 여성은 불교신자여서 그런가 삶에 별로 매달리지 않더라. 눈을 감는 순간까지 미소지었고 함께해준 우리를 무척 고마워했다. 오히려 한국 분들이 삶을 놓지 못해 힘들어하신다. 10명 중 8명은 고통 속에 눈을 감는다. 하루하루 충실히 살면 큰 미련 갖지 않을 듯한데, 그게 말처럼 쉬운가 어디. 매일 매일 '내려놓음'의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비추미여성대상 수상으로 2000만원 상금을 받는다.
"재정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동행 호스피스 활동은 물론 40년 전 독일로 가 현재 70~80세가 되신 간호사, 광부들의 현실이 조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잊혀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분들의 외로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