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사도 18,23-28; 요한 16,23-28 / 2021.5.15.;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고별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토록 길고 자상하게 예수님의 고별사를 전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자로서 그가 기억하고 있던 스승의 마음을 대변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스승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남김없이 전해주셨습니다. 그 열두 명의 제자들이 마치 인류 전체에서 골라 뽑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열두 제자가 장차 인류 전체에게 당신의 가르침과
무엇보다도 사랑의 마음을 전해줄 것으로 믿고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신비를
전해주셨습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이 열두 제자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보다 귀했고
인류 전체만큼이나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침만이 아니라 이 가르침의 진실성을
보증하시려는 듯이 당신 몸까지도 주저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스승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의 보증이 첫째 십자가요
둘째 성체성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고 못 박혀서 죽을 운명이 감지된 순간부터
그분은 공생활 동안 바리사이 반대자들에게 항변하거나 사두가이 직업 사제들의
권위에 대들던 태도를 싹 바꾸시고는, 마치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제처럼
시시각각 다가오는 고통과 마주 하셨습니다. 당신의 고통이 하느님께 제자들을 위하여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의 밀고도 제물이었고, 수석 사제들과
대사제의 비열한 음모도 제물이었으며, 혁명당원들이 자신들의 동료 바라빠와
맞바꾸려는 속셈으로 당신의 십자가 형을 소리 높여 외치며 군중을 선동한 것도
제물이었습니다. 뻔히 당신의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고, 적어도 로마에 대항하려던
정치반란범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서
당신에게 매질하라고 지시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형을 언도할 때에도,
그분은 빌라도의 저 비겁한 직무유기 행위에조차 인류를 위한 숭고한 제물이 되기를
원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열한 제자들이 당신을 위하여
나서지 못하고 몰래 숨어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음을 아시고 그들의 못난 모습을
탓하시기보다는 그들의 부족한 믿음조차도 하느님께 바치시기로 작정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위한 스승 예수님의 결정적인 가르침이었던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라고
권고하시는 가르침을 두 번에 걸쳐 강조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스승 예수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라고 권고하는 말씀 안에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하느님 곁에서
거들어 주시겠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의 믿음 안에 현존하시면서
일이 이루어지도록 마무리를 맡아서 해 주시겠다는 배려가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구체적으로 이런 저런 청을 하는 제자들보다도
이들을 거드는 아드님 예수 때문에라도 그 청을 들어주시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그 청이 당신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더군다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그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면 그 청원의 효력은 배가(倍加)될 것입니다.
보통 이 마무리 효과가 일 전체 성과의 99%입니다. 천상에서 하느님과 예수님만 알고
계셨고,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던 일급 비밀입니다.
태연하고도 진지하게 천기(天機)를 누설(漏洩)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우리 교회가 미사와 같은 공식 전례에서는 물론이고 개인 기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는 이유와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에
우리가 들인 수고와 겪어야 했던 갈등과 바친 희생의 크기보다도 더 크고 더 좋게
결과가 나타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고작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면서도 중요한
모든 것을 다 가르치신 것처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이렇듯 여유만만한 심정을 보이시는 이유는 3년이라는 기간이 길거나 그 동안에
전해준 가르침의 양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는 내내 당신이 성령으로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성령으로서도 제자들의 사도직을 이끌어주신 또 다른 사례가
사도 바오로에게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바오로는 열두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배우지도 않았지만 더 뛰어났습니다. 소아시아 전체에 공동체들을 세웠고,
당대 지중해 세계의 문화적 중심이었던 그리스를 복음화시키는 일에 혈혈단신으로
겁도 없이 뛰어들었으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로마시민권을 십분 활용해서
당대 제국 권력의 심장부였던 로마에까지 진출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사도직을 수행하는 이에게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사도 바오로의 선교활동입니다. 이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던 바오로도 자신에게
맡겨진 제자들, 실라스와 티모테오와 루카와 티토 등을 그렇게 가르쳤고 특히 본시는
천막 만드는 동업자에 불과했던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도 제자로 삼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이 부부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구약성경에 정통했던
아폴로라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나서, 아폴로에게 사도 바오로에게서 전해들은
가르침을 더 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그 부부는 사도 바오로의 제자로서 그의 분신(分身)
처럼 행동했습니다. 이 모두가 스승 예수님의 제자들의 보여준 활약입니다.
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진리를 전해주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작은 스승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