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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묵상글 ( 한가위. - 인생의 가을에서 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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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0.06 02:43
- 인생의 가을에서 나는?
오늘 복음은 많은 소출을 거둔 부자에 관한 주님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읽으면서 인상 깊은 것은 ‘독백’입니다.
비유에서 부자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그는 한 해 농사를 잘 지어 많은 소출을 거두었지만
그러나 그의 주위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외로운 부자이고,
오늘 한가위 명절로 치면 명절에 자기 혼자입니다.
결혼했다면 이혼했거나 별거 상태이고,
자식이 있다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지만 명약관화(明若觀火)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길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는 돈은 많이 있어도 사람은 없고,
욕심은 많이 있어도 사랑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도 없고,
행복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한가위 명절은 농사를 짓고 수확까지 한 사람이
풍성한 소출을 앞에 놓고 그 풍요와 기쁨 곧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인데
그는 곡식 농사는 잘 지었는데 사람 농사와 행복 농사는 잘 짓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 농사와 행복 농사에서 필수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 아닙니까?
그는 그것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사랑에 실패한 겁니다.
그러나 필수적인 것이 사랑뿐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필수적이고
인간 사랑뿐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왜냐면 그래야 인간 사랑도 완전하고,
그래야 미래 행복도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한가위 곧 추석이 가을 명절이고
그래서 올 한 해의 가을걷이가 어떤지 돌아보는 날인데
우리는 올해 뭘 심었고 뭘 얼마큼 거뒀는지 돌아보는 것도 해야 하겠지만
인생의 가을에서 난 뭘 심었고 뭘 거두고 있는지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도 그래야겠지만
인생의 가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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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롭고 행복한 삶
“하늘에 보물을 쌓으십시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시편67,1)
오늘 화답송 시편 첫구절이 참 좋습니다. 오늘 10월6일은 한가위 추석입니다. 새벽 아름다운 다음 초대송 후렴에 이은 찬미가로 한가위 하루가 활짝 열렸습니다.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창조주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 계절의 움직임에 조화이루어
어느새 곡식들이 무르익어서 추수한 첫열매를 봉헌하도다.”(찬미가 1절)
미사중 감사송 후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주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계신 조상들을 기리며 주님께 감사드리는 우리에게 평화의 주님은 한가위의 기쁨과 축복을 흠뻑 느끼게 하십니다.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 섭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니,
저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사람과 온갖 피조물과 함께 평화로이 조화를 이루며,
주님의 은총으로,
땀을 흘려 주님께 바칠 예물을 마련하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는 사랑과 기쁨에 넘쳐,
모든 천사와 성인과 온세상 만물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끝없이 찬송하나이다.”
새삼 한가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계신 생명과 사랑, 축복의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동시에 한가위가 얼마나 조상 대대로 이어온 우리 한민족의 뿌리와도 같은 최대의 명절이자 겨레의 날인지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서늘한 기후에, 풍성한 햇곡식과 햇과일로 술을 빚고 떡을 만들어, 토란국에 오색 과일로 제사상을 차려 먼저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마친 다음에 술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노래와 춤과 갖가지 놀이로 낮과 밤을 마음껏 흥겹게 보내는 민족의 명절이다.
또한 한가위는 중추절이라 하여 동양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 인도에서도 이날을 큰 명절로 즐기고 있다.’ 하니 명실공히 한가위 중추절은 동아시아 나라들의 최대 명절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저절로 떠오르는 질문에 저절로 나오는 답입니다. “지혜롭과 행복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을 살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답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우선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지 않으면 결코 무지와 허무의 심연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가위의 중심에 축복의 원천으로 자리하고 계신 하느님입니다. 요엘 예언자가 영적 시온의 자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른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참 아름답고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찬양과 감사의 삶이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둘째, 죽음의 심판과 구원을 늘 눈 앞에 환히 두고 사는 삶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가르침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한 주님의 계시 말씀이 이런 자각을 깊이 해줍니다. 요한에게 하늘에서 울려오는 다음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
바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사랑하고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죽음에 대한 최고의 처방은 주님께 대한 신망애, 향주삼덕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성령님의 화답입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은 기쁨으로 곡식을 거둘 것입니다. 한결같이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한 신망애의 사람들! 사필귀정 무조건 해피엔딩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셋째, 늘 탐욕을 경계하는 삶입니다.
모든 불행과 비극, 재앙의 근원은 끝없는 탐욕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한계를, 경계를 무너뜨리는 탐욕입니다. 탐욕에는 눈이 없습니다. 눈멀게 하는 무지의 탐욕이요, 반대로 무욕의 지혜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사람의 생명은 재산이 아닌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맑은 정신을 마비시키는 탐욕, 탐심, 탐식, 탐애, 탐닉 모두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고약한 것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무욕의 지혜로운 삶,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넷째,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가 참 좋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완전히 하늘의 하느님과 이웃의 사람들에 차단된 창문이 없는 고립단절의 자기감옥에 갇힌 수인의 삶입니다. 탐욕의 무지에 완전히 포로된 부자입니다. 땅에다 보물을 쌓는 일에 전념해온 업보입니다.
그래서 자기도취, 자기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우리에게 주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느님과 이웃과 더불어 섬김과 나눔의 삶이 하늘에 창문을 내는 일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구원의 길임을 까맣게 잊은, 탐욕에 눈먼 참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참 준엄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부단히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 하느님만으로 충만한, 텅빈 충만의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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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복 가득 찬 한가위입니다.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도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이루신 그 사랑, 그 놀라운 일에 찬양과 감사를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어줄 수 있었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노래합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또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주며,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느님의 축복인 ‘생명과 재물’에 대해 말해줍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이 말씀은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지 않듯, ‘생명’ 또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 참조), 곧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루카복음> 12장 33절에 나오는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 참조) 입니다.
그것은 먼저,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재산)’임을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곧 자신이 누구의 재물인지를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당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전부’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소유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의 재물을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소유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소유가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소유가 되면, 우리 역시 그분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고, 전부를 가진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한가위, 전부를 가진 꽉 찬 보름달로 피어오르는 날 되세요~ 아멘.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직, 저의 전부이신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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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더 쉽게 다가오는 말은 ‘추석’입니다. 멀리 타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추석이면 ‘선물’을 준비해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심부름은 주로 제가 했습니다. 고모님 댁, 외 할머니 댁에 선물을 가져다드렸습니다. 이렇게 서로 나누는 것을 ‘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추석이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가정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정 미사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조상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고, 준비한 음식을 나누면서 추석의 밤은 깊어 갔습니다. 이젠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멀리 타향에 있으니,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추석을 지낼 수는 없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려고 합니다. 추석 ‘둥근달’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운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한가위나 설날에는 본당의 어르신에게 ‘덕담’을 청하곤 했습니다.
오늘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51살에 늦둥이 딸을 낳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던 중 어린 딸이 골프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멈추고 뉴질랜드로 갔습니다. 거기서 리디아 고를 가르치던 코치에게 딸의 골프 레슨을 부탁했습니다. 아버지는 9년 전에 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베드로인 아버지는 딸이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성당을 찾았습니다. 딸은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딸은 주니어 골프대회를 우승하면서 골프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딸을 도와 주기가 힘들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지난 7월에 뇌경색이 있었고,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딸은 골프를 중단하고 아버지의 병실을 지키면서 간병하였습니다.
밤에는 아르바이트하였습니다. 숙소는 아르바이트하는 식당 주인의 배려로 식당 한쪽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인데 딸은 씩씩하게 아르바이트하면서 아버지를 간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한국으로 가야 하는데 비용이 문제였습니다. 일반석을 탈 수는 없고, 간호사가 함께 가야 했습니다. 딸의 대모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Go fund me’를 개설했습니다. 아버지와 딸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아서 개설했습니다. 구역에서 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생활 성가대회에서 우승한 팀은 기꺼이 상금을 나누었습니다. 세상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정성이 모여서 목표액을 훌쩍 넘었습니다. 병상에 있는 아버지의 눈에는 아직도 딸이 어리고, 약해 보였지만 이제 딸은 아버지를 간병할 수 있고, 스스로 앞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리운 고향으로 갈 수 있었고, 딸은 이제 원하는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 주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은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 말씀을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경주의 ‘최부자집’입니다. 여섯 대에 걸쳐 부를 이어온 집안이었지만, 그 부의 비밀은 ‘나눔의 철학’에 있었습니다. “재산은 1만 석 이상 모으지 말라.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구든지 와서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가게 하라. 흉년이 들면 곳간을 열어 굶주린 이웃을 살려라. 며느리가 시집오면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그래야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이해한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된다.” 최부자집은 단순히 부를 쌓은 집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재물을 흩어 나누며 이웃을 살린 집이었습니다.
한가위의 달빛은 모두에게 차별 없이 비춥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밝게 비치는 둥근 달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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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맘몬 병(Mammon Illness)!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5일 일요일- 마흔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축적의 삶에서 풍요로움의 삶으로
예수님은 돈과 권력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 절대적이고 단호셨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우리가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도전적인 말씀에 대해 숙고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은 돈에 대해 혼란스럽고 죄스러우며 강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즉 우리는 돈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고, 돈이 많으면 죄책감을 느끼기기도 하지만 부족하면 불안과 열등감을 느끼는 이중적인 감정에 휩싸이며, 돈에 대해 집착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소위 부정직한 집사라는 루카 복음의 비유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부(富) 혹은 우리가 "맘몬"이라고 일컫는 것 사이에 명확하게 이분법적 구분을 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맘몬은 부와 돈, 외관 중심성, 그리고 성공의 신(神)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너희는 마침내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대부분은 제가 비-이분법적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만, 절대적으로 이분법적인(이것 아니면 저것) 가르침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대개 권력과 관련된 것이거나 돈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아시기 때문에 돈과 권력에 대해 절대적이고 단호하신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맘몬이라고 부르는 신을 섬깁니다. 예수회 신부 존 호기(John Haughey)가 설명하듯, 루카 복음은 맘몬을 일종의 병으로 묘사하기까지 합니다: "맘몬은 루카 복음에서 그저 중립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또 그것은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혼란과 무질서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맘몬은 혼란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맘몬으로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맘몬 병"은 단기적 안목에서 오는 실용적인 이득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생의 모든 것을 볼 때 우리에게 덮치는 병입니다. 우리는 돈이 우리로 하여금 여러 단기적인 문제들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거나 - 해결해 주는 - 능력이 있지만, 일단 우리가 그것을 축적하고 모아들이고 늘리고 저장해 놓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혀 버리게 됩니다. 이에 대해 솔직해집시다.
저는 이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장기적인 안목의 해결책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다르리심(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계산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 용서와 사랑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 셈하고 따지고 자격을 판단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절차나 조건으로도 선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무한히, 자유롭게 주어지는 은총이며, 인간의 계산과 자격 중심의 사고로는 결코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획득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잃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벌어들이고 잃어버리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 안에 머무는 한 우리는 영원한 분노와 시기 안에서 살거나 끝없이 올라서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계산기로 작동하려 하면 그 본래의 방식과 정신, 기반과 근원을 잃기 마련입니다. 달리 얘기해서, 하느님의 은총은 계산할 수 없으며 종교가 그것을 계산기로 작동하려 할 때, 그 종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담아내는 그릇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참으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모두가 그 요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한한 은총과 자비의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동시에 방어적이고 유한한 작은 정신으로 셈하고 계산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개미에게 은하계의 지도를 그리라고 요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일 겁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가 하느님이 자신의 실수들을 낱낱이 따지실까봐 걱정하는 어떤 수녀에게 훨씬 더 직설적으로 조언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절대 모르시는 과학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덧셈이예요!" [2]
하느님의 나라(다스리심)는 풍요로움의 세계관입니다. 하느님은 결핍의 세계관에서 무한함의 세계관으로 우리를 들어높여 주십니다. 이 무한한 세상의 모든 부분 역시 무한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은 그야말로 무한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줄어들거나 제한되지 않으며, 언제나 온전하고 무한하게 우리에게 흐른다는 말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우리 공동체의 연장자 중 한 사람으로서 젊은 수녀님들이 과자들을 사는 데 돈을 쓰고는 다 먹지 않고 남겨두는 모습을 보면 꽤 낙담하게 됩니다. 저는 남은 과자들을 정리하는 일을 자원해서 하면서 제가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리처드 신부님의 “"좋은 곳으로 가는 길(Going Somewhere Good)”이라는 묵상 글이 저의 좁은 시야를 영원의 풍경으로 열어 주었고, "나라는 편현합 정신구조"에서 "당신이라는 존중받을 만한 인격"으로 시선을 바꾸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사랑에서 시작되어 점점 더 포용적인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인격적인 사랑'에 온전히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저에게 계속 일깨워 주시는 선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Louisa L.
References
[1] John C. Haughey, The Holy Use of Money: Personal Finance in Light of Christian Faith (Doubleday and Company, 1986), 11.
[2] Sœur Thérèse of Lisieux: The Little Flower of Jesus, ed. T. N. Taylor (Burns and Oates, Ltd., 1912), 241. This early translation of Thérèse’s autobiography, The Story of a Soul, includes “Counsels and Reminiscences,” a chapter not part of recent editions.
Adapted from Richard Rohr, “Money,” homily, September 22, 201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arón Blanco Tejedor, untitled (detail), 2017, photo, Finland,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사과를 내미는 열린 손은 탐욕에 대한 조용한 비판이 되며, 풍요를 쌓아두지 않고 나누는 ‘충분함’의 지혜와 영성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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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가을의 한가운데 있는 가장 큰 날에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을 빌어 드립니다!~~~
우리 숨영성 벗 여러분 모두 주님 은총과 축복 안에서 복된 한가위 명절 보내시길 빕니다.~~~
한가위 명절은 전통적으로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특별한 날입니다. 음력으로 "8월의 한가운데 있는 가장 큰 날"이라고 해서, 크다는 의미의 "한"과 가운데라는 의미의 "가배" 혹은 "가위"를 합쳐서 한가위라고 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한가위는 특별히 풍요로움과 가족에 대한 감사와 조상에 대한 감사, 그리고 우리 인간 삶에서 화합과 함께함이 지닌 중요성과 의미를 되새기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한가위의 풍요로움은 단순히 풍성한 수확이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풍성한 수확이 있기까지 함께한 모든 존재 때문에 참된 풍요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한가위에 여러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빙빙 돌면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풍요로움은 '나' 혼자로 이루어낸 것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풍요로움은 우리 가족과 동료 인간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벗이자 동료요 형제자매들인 해, 달, 땅, 공기, 물 등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이루어준 함께함의 풍요로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한가위에 '나'와 다른 모든 존재, 즉 '나'를 '나'로 있게 해 준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특별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듯이, 틱낫한 스님은 "꽃은 꽃이 아닌 다른 모든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지요!
결국 '나'는 '나'가 아닌 다른 모든 '너'인 것이고, '너'는 '너'가 아닌 다른 모든 '나'인 셈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존재에 부여해 주신 가장 중요한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사회교리서에서도 한 사람이 얻은 재물은 그 사회 전체의 노력과 자원 덕분에 가능한 것이므로, 개인의 재물이라 할지라도 공동체와 나누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재물이 하느님의 창조 선물이며 모든 인류의 공동 자원임을 강조하며, 재물은 사적 소유의 권리가 있지만 공동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교리서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사회적 약자를 돕고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재물을 사용해야 하며, 돈에 대한 욕심과 집착은 복음적 삶에서 멀어지게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이 재물을 소유할 권리를 인정하지만, 재물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더 큰 그림 안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것이 나 우리 것이요, 또 우리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라는 내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것은 모두 서로의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풍요로움이 있기까지 도움을 주었는데도 우리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오늘 이 명절을 지내는 이유일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모두에게 나의 것을 다 나누어 주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한 가지 덧붙여서 이 한가위에 풍요로움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도 역시 우리 조상들처럼 언젠가는 후대에게 이 모든 자연의 형제자매들(여기에는 우리의 재물도 포함됨)을 후대에게 남겨 주고 이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엄연한 진리를 감사의 마음(?)으로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상기한다는 것은 이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가 아닐까 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어느 해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졸업 축하 연설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을 상기하는 것은 외부의 기대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삶은 제한되어 있다며 낭비하지 말라고 하면서 타인의 소리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매일 아침 죽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어떻게 하면 더 의로 충만한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더 큰 열정을 지니고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현재를 풍성하고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저는 가끔 현실에 대해 제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들 때마다 죽음의 현실을 떠올리면서 그런 막연하고 무의식적인 삶에 대한 관념들이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참된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이지요.... 그러고 나면 이 삶의 버거움 때문에 짓눌리기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특별히 용서와 자비,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온마음과 온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준비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준비를 잘 할 수 있다면, 참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 삶을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고, 이 충만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성을 진심으로 중요시하며 좋은 관계성을 맺기 위해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멈추고 그들 역시도 우리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한몫을 하는 존재들이라는 긍정의 시각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물리적인 세상에서도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생명도 에너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말하듯이, 형태는 변할지 몰라도 그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우리 생명의 여정은 끊임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에너지와는 달리 우리 생명은 끊이없이 이어지면서도 동시에 계속해서 더 풍요로워집니다. 이 생명이 계속해서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말에서는 하느님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영어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세 단어로 표현됩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과 "하느님의 현존" 그리고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이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그곳이 하느님의 사랑과 선이 지배하는 곳, 모든 것이 그 사랑과 선에 의해 계속 커지지만 한계가 없이 영원히 커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현존"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겠지요?! 물론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느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성의 현실이기에 '곳'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당하지 않지만, 한계가 있는 이 세상에서 들 수 있는 비유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말하자면 참된 관계성은 만남의 장소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이 중요한 현실, 즉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로 이루어져 있고, 그렇기에 '내' 생명은 더없이 충만한 생명이며, 우리는 이 충만한 생명을 완전히 누리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 완전히 다른 현실을 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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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는 곳간보다 안전한 창고
“재산은 사람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잠언 13,8)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그런 재산은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자기 목숨을 보장받지 않고 썩어 없어질 곡식을 쌓아 두는 데 바빴습니다. 네,장차 그 앞에 서야 할 주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아 속절없이 멸망할 참이었는데도,그는 썩어 없어질 곡식을 쌓아두기만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는 말을 들을 때 그는 눈길을 어디로 돌려야 할까요? 그는 사치스럽고 불필요한 잔치를 벌여 자기 영혼을 채우려 하며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가 자기 곳간에 쌓아 둔 것들은 도둑이 당장이라도 훔쳐 갈 수 있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가 그것들을 가난한 이들의 배에 쌓았더라면, 물론 이 세상에서 모두 소화되었겠지만, 하늘에서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재산은 사람 목숨을 보장해"(잠언 13,8)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엑카르트는 본 설교에서 탄생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요약한다. 우리의 첫 번째 탄생 경험은 우리가 창조된 것을 가리키고, 두 번째 탄생 경험은 우리가 하느님 안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의 탄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탄쟁이고, 다른 하나는 ••• 영적으로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탄생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보건대. 첫 번째 탄생은 첫째 오솔길과 상응하고, 두 번째 탄생은 셋째 오솔길과 상응한다.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이러한 새로 남 내지 두 번째 탄생의 의미를 심도 있게 검토한다. 이미 살펴본 대로, 두 번째 탄생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딸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의 주석에서 언급하기도 했거니와, 그가 이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견지하는 하나의 관점은 이 탄생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아들은 하느님 안에서 끊임없이 태어나고,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다. 하느님이 하는 낳음의 일은 결코 완료된 적이 없으며 끊임없이 왕성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영원한 진행형이다. 우리의 돌파와 탄생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돌파와 탄생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 탄생은 일 년에 한 번 내지 한 달에 한 번 혹은 하루에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늘 얼어난다 ... " 우리가 그러한 탄생과 새로 남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의 아들도 그렇게 한다. “이 탄생이 일어날 때마다 외아들이 태어난다." 이것이야말로 엑카르트가 다음과 같은 요한 복음의 진술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맨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언제나 ‘맨 처음’에 있다. 언제나 ‘맨 처음’에 있기에, 말씀은 늘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 신성 안에 있는 아들, 곧 ‘맨 처음’ 에 있는 말씀은 늘 태어나고 있는 중이거나 이미 태어난 상태다." 하느님은 마치 메아리처럼 우리에게서 아들을 부르고, 우리는 이 와중에 아들을 낳는다.(481)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1코린 6,1-11
교우끼리의 송사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하물며 일상의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상의 송사가 일어날 경우에도, 여러분은 교회에서 업신여기는 자들을 재판관으로 앉힌다는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형제들 사이에서 시비를 가려 줄 만큼 지혜로운 이가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도 우상 숭배자도 간음하는 자도 남창도 비역하는 자도,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 주정꾼도 중상꾼도 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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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대 태국에서 하얀 코끼리는 굉장히 신성한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태국의 왕은 이 신성한 하얀 코끼리를 누구에게 선물했을까요?
1) 충직한 신하 2) 큰 공을 세운 신하 3)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
당연히 1번이나 2번 같지만, 태국의 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이 신성한 하얀 코끼리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하얀 코끼리는 신성한 동물이기에 비싼 먹이를 먹여가며 귀하게 키워야 했습니다. 밭일에 활용하거나 이동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가 없었지요. 따라서 하얀 코끼리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쓸모는 없는데 관리 비용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처치 곤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태국의 왕은 막대한 먹이 비용과 관리 비용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가 파산하도록 하얀 코끼리를 선물한 것입니다. 더 잘해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또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면 당연히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를 하느님 뜻에 맞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얀 코끼리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오히려 장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춰 사랑의 완성을 위해 나의 재물과 시간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한가위는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며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느님과 우리가 있게끔 해 주신 조상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이 명절의 그 기쁨을 가족 및 이웃과 나누는 명절입니다. 결국 한가위의 정신은 ‘감사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감사의 대상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기가 아닙니다. ‘나’를 넘어 조상, 하느님, 그리고 우리 공동체로 향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거두었어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 능력과 소유로만 여깁니다. 그의 계획에 하느님도, 조상님도, 이웃도 없습니다. 오직 ‘내 곡식’, ‘내 재물’, ‘나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부자가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해서만 재물을 모으면서, 정작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가 기준에 서면, 하느님의 뜻은 자리하지 못합니다. 하얀 코끼리를 키우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이번 명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에게 감사하는 어리석음은 모두 버리고, 하느님과 조상님께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꽃은 옆에 있는 것과 경쟁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피어날 뿐이다(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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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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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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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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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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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김명겸 요한 신부님.
재산을 많이 모으는 것과
그 재산을 누리는 것은 다른 것임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재산을 모을 수는 있지만
그 재산을 누리는 것은 하느님의 허락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부유한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힘으로 불가능한 것
자기 뜻대로 자기 재산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함께 그의 어리석음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의 재산이 그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재산을 모았는데
그 노력이 이제 헛수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룰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그 모습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의 바탕에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노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이지
노력만 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즉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노력으로 인간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능력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내가 만들 수 있다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누구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똑같지 않고
모든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능력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 능력을 발휘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나 자신의 합작품입니다.
그 사실을 거부할 때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나의 노력으로 해야하며
결국 한계에 부딛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어리석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청하면
하느님을 인정하면
좀 더 쉽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삶이
즉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과 나 혼자 사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행복한 삶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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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6. 한가위.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15-21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농부들이 여름 내 흘린 노력과 수고의 땀방울이 풍성한 소출로 결실을 맺는 한가위입니다. 그 풍성함이 주는 기쁨과 만족이 너무도 커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외침이 절로 나올 정도이지요. 우리 조상들은 그런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와중에도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따사로운 햇볕과 비를 내려주시어 농작물이 잘 자라게 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 자신들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시어 이처럼 좋은 날을 보게 해 주신 조상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서로 도와가며 함께 함으로써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게 해 준 이웃에 대한 감사, 그런 감사의 마음을 서로 나누고 표현하는 정다운 시기가 바로 한가위였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에게서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원래 소유하고 있던 곳간으로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많은 소출을 거두었음에도, 그의 관심은 오직 그 많은 소출을 어떻게 저장하고 누릴지에만 머물러 있었지요. 그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존재도, 상부상조하며 농사라는 힘든 멍에를 함께 나눠졌던 이웃의 존재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오직 자기 힘과 능력으로 그 많은 소출을 거뒀다고 착각했기에, 자기 혼자 그 풍요와 기쁨을 누리는 걸 당연하다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소출은 자신이 모은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으신 것이고, 자기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들의 직, 간접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배를 불릴 생각만 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나누어야 하지요.
주님께서는 그 부자가 하느님 눈에 참으로 어리석게 보인다고 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당장 오늘 밤에라도 당신이 맡기신 목숨을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데, 삶이 자기가 모아둔 재산을 다 쓸 때까지 당연히 계속되리라 여기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 부자 뿐만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이 하는 착각입니다. 일단 돈을 많이 모으기만 하면 그것을 쓸 시간과 기회는 당연히 주어지리라는 착각... 하지만 잠시 스쳐지나갈 뿐인 이 세상 것들을 두손 가득 움켜쥐고 있다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가 소유한 재산이 아니라 그의 인생을 섭리하시는 하느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리석은 부자에게, 그리고 재물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재물은 ‘남 좋은 일’ 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남들에게 좋은 일이 되는 걸로 그 목적과 결론이 정해져있다면, 그것을 탐욕과 집착으로 움켜쥐고 있다가 억지로 빼앗겨 마음 속에 억울함과 분노만 남는 것보다는, 자비와 선의로 그리고 하느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결단으로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재물이 주는 참된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편이훨씬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요? 그것이 내 구원을 위한 보험을 하느님께 들어두는 일이며 그렇게 해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 즉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맘껏 누리는 복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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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68
10월6일 [한가위/연중 제2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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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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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조승현 베드로(가틀릭평화방송 .평화신문 주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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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거두어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추석을 맞아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신 형제들은 본가 방문을 떠나고, 이제 집도 절도 없는 형제들만 남아서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여유가 생겨 훼손된 산책로도 복구하고, 쌓인 쓰레기도 정리하고, 물때가 좋아 해루질도 나가고, 하루가 바쁩니다. 가을이 오니 게들 싸이즈가 커지고 힘이 좋아, 장갑을 두벌 씩 꼈는데도 양손이 상처투성이입니다.
몸이 편찮으셔도 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장거리를 마다하고 찾아뵙고 떠들썩하게 지냈는데, 이제 덩그러니 영정 사진만 바라보며 속절없이 빠른 세월만 한탄합니다. 그리고 자주 후회를 합니다. 살아 계실 때 좀 더 잘 해드렸어야 했었는데, 좀 더 살갑게 대해 드려야 했었는데...
또 다시 가장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오랜만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고, 친교를 나누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일년에 몇 번 안되는 좋은 기회입니다. 서로 고생많다고 위로해주고, 서로 격려하고 칭찬해주고, 좋은 덕담을 주고 받는 훈훈하고 따뜻한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온 몸으로 느낀 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계획과 하느님의 계획은 크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시계 바늘과 하느님의 시계바늘의 속도도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저 같은 경우 어린 시절 꿈이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 만나 알콩달콩 사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앞에 전개된 상황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꿈에도 생각지 못한 길로 몰고 가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대단한 것 바라지 않고 그저 평탄하고 소박한 인생 길을 원했는데, 지독한 가난과 혹독한 고통, 갖은 우여곡절의 인생길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닿을 때 마다 강조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꿈을 꾸고 희망하고 계획하지만, 거기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목표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기도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항상 하느님 손에 맡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유한 대지주도 큰 풍년을 맞아 아주 좋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런데 주님께서 아주 좋은 계획을 세운 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세상만사의 주인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거두어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난다긴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고개 한번 흔드시면 우리 인생 끝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겸손의 덕입니다.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두는 삶입니다. 너무 멀리 내다보니 말고, 그저 오늘 하루 기뻐하고 감사하며, 충만한 하루를 사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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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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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은 시험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풍성한 추석 명절을 맞아 주님께 감사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친지들과 음식을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는 이 풍요로운 시간은 우리 신앙인에게 하나의 '시험대'와 같습니다. 명절은 우리가 평소에 쌓아온 신앙과 삶의 태도를 점검하는 중요한 시험의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재물을 '나 자신만을 위한 소유'로 볼 것인가, 아니면 '관계와 나눔을 위한 도구'로 볼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복권에 당첨되어 엄청난 돈을 손에 쥐게 된다면, 그 돈을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캐나다에서 복권 1천만 달러에 당첨된 제럴드 뮤스왜건(Gerald Muswagon)은 당첨금을 받은 후 몇 년 만에 모두 탕진하고, 친구도 잃고, 결국 2005년 쓸쓸하게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돈은 그를 고독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명절이라는 시험 앞에서 우리는 평소의 나눔 연습이 부족했음을 깨닫고, 우리의 근본적인 선택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호히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여라. 모든 탐욕을 멀리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한 부자가 많은 소출을 거두자,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자신의 모든 소출과 재산을 거기에 저장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16-20)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러하다” (루카 12,21)라고 결론 내리십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결국 우리의 삶을,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20세기 미국의 사업가이자 재벌이었던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천재적인 재능과 엄청난 부를 가졌지만, 말년은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극심한 강박 장애와 편집증에 시달리며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1976년 4월 6일 그의 사망 기사에서 “휴즈 씨는 70세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는 오랜 기간 은둔자였고, 비밀과 기괴한 행동에 둘러싸인 그림자 같은 인물이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는 수십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의료 혜택조차 받지 못했으며, 주변에는 오직 그의 지시만을 따르는 소수의 직원들뿐이었습니다. 평소에 타인과의 관계를 연습하고 나누는 삶을 살지 않았기에, 명절은 물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악덕 여왕'으로 불렸던 미국의 부동산 재벌 레오나 헴슬리(Leona Helmsley)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극단적인 탐욕과 이기심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세금은 서민들만 내는 것"이라는 오만불손한 발언으로 유명했죠. 그녀의 부는 타인과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The New York Times는 2007년 8월 21일 그녀의 사망 기사에서 "그녀는 탐욕과 오만함으로 비난받았다...”라고 평했습니다.
그녀는 1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유산을 자신의 반려견에게 남기고, 손자들에게는 단 한 푼도 주지 않아 세상을 경악시켰습니다.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를 쌓지 않고 오직 돈에만 집착했던 그녀의 삶은 결국 비난과 조롱만을 남겼습니다. 하워드 휴즈와 레오나 헴슬리, 이들은 평소 관계의 덕을 쌓지 않았기에, 명절은 물론 삶의 마지막까지도 고독과 비난 속에서 끝맺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평소에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나눔을 연습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명절은 물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랑과 존경 속에 행복을 누립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당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지혜를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평생을 바친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보십시오. 의사이자 사제로서 자신의 모든 재능과 시간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바쳤습니다. 신부님의 이러한 관계 지향적인 삶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종교 교육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아들에게 "네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다"라고 가르치며 끊임없이 나눔과 배려를 연습하도록 하셨습니다. 톤즈에서 신부님은 의료봉사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음악을 선물하며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2010년 대장암으로 선종하기 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발 아이들 곁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 고 간청했습니다. 톤즈 주민들은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지금도 기억하고 사랑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평소 연습한 관계와 나눔의 힘으로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삶을 살다 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추석 명절은 우리가 어떤 '근본적인 선택'을 할 것인지 연습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들어오는 돈과 재물, 혹은 우리의 시간과 재능은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복권 당첨금'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귀한 '양식'을 '모기의 삶'처럼 오직 자신만을 위해 갈취하고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착한 사마리아인의 삶'처럼 이웃과의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이 작은 선택들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관계 지향적인 존재로, 혹은 소유 지향적인 존재로 점점 굳어져 갑니다. 명절은 바로 이 선택의 순간을 연습하는 귀한 '시험 무대'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나눔과 관계를 연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명절이라는 풍요로운 때에 시험을 쳐 보고, 만약 우리가 나눔에 인색했다면, 그것은 평소에 우리의 '덕'이 나눔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매일의 작은 선택이 습관이 되어야만, 그 습관이 우리의 본성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기와 같은 소유적 인간'에서 '예수님과 같은 관계 지향적 인간'으로 변화해 갈 수 있습니다.
여기, 평범한 삶 속에서 매일의 나눔을 실천하여 관계 지향적인 삶을 살아온 분의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경북 포항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는 김남수(76세) 씨는 15년 넘게 매일 붕어빵을 팔아 1만 원씩을 떼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해 온 분입니다. 2023년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2022년 말까지 총 3,650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힘들 때마다 붕어빵을 파는 것이 내 행복이다. 이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붕어빵으로 번 매일의 작은 수입, 그 1만 원이라는 돈이 김남수 씨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친교를 위한 귀한 도구였습니다. 그는 명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매일매일 나눔을 선택하고 연습하며, 그 나눔의 덕을 자신의 본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추석부터 우리에게 있는 것, 곧 돈, 시간, 재능 이 모든 것을 관계 지향적으로 사용하는 연습을 시작합시다. 추석 명절, 가족과 친지들에게 베푸는 작은 나눔, 이웃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는 작은 관심, 성당 공동체에 기여하는 작은 봉사들이 바로 그 시작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작은 재물들을 김남수 씨처럼 나눔과 친교를 위해 사용할 때, 이 작은 선택들이 반복되어 우리의 영혼을 관계 지향적인 존재로 굳건히 만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기와 같은 소유적 인간'이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과 같이 사랑받고, 워런 버핏과 같이 돈의 진정한 가치를 알며,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예수님과 같은 관계 지향적 인간'으로 변화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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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더 쉽게 다가오는 말은 ‘추석’입니다. 멀리 타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추석이면 ‘선물’을 준비해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심부름은 주로 제가 했습니다. 고모님 댁, 외 할머니 댁에 선물을 가져다드렸습니다. 이렇게 서로 나누는 것을 ‘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추석이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가정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정 미사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조상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고, 준비한 음식을 나누면서 추석의 밤은 깊어 갔습니다. 이젠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멀리 타향에 있으니,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추석을 지낼 수는 없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려고 합니다. 추석 ‘둥근달’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운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한가위나 설날에는 본당의 어르신에게 ‘덕담’을 청하곤 했습니다.
오늘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51살에 늦둥이 딸을 낳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던 중 어린 딸이 골프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멈추고 뉴질랜드로 갔습니다. 거기서 리디아 고를 가르치던 코치에게 딸의 골프 레슨을 부탁했습니다. 아버지는 9년 전에 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베드로인 아버지는 딸이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성당을 찾았습니다. 딸은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딸은 주니어 골프대회를 우승하면서 골프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딸을 도와 주기가 힘들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지난 7월에 뇌경색이 있었고,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딸은 골프를 중단하고 아버지의 병실을 지키면서 간병하였습니다.
밤에는 아르바이트하였습니다. 숙소는 아르바이트하는 식당 주인의 배려로 식당 한쪽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인데 딸은 씩씩하게 아르바이트하면서 아버지를 간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한국으로 가야 하는데 비용이 문제였습니다. 일반석을 탈 수는 없고, 간호사가 함께 가야 했습니다. 딸의 대모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Go fund me’를 개설했습니다. 아버지와 딸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아서 개설했습니다. 구역에서 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생활 성가대회에서 우승한 팀은 기꺼이 상금을 나누었습니다. 세상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정성이 모여서 목표액을 훌쩍 넘었습니다. 병상에 있는 아버지의 눈에는 아직도 딸이 어리고, 약해 보였지만 이제 딸은 아버지를 간병할 수 있고, 스스로 앞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리운 고향으로 갈 수 있었고, 딸은 이제 원하는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 주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은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 말씀을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경주의 ‘최부자집’입니다. 여섯 대에 걸쳐 부를 이어온 집안이었지만, 그 부의 비밀은 ‘나눔의 철학’에 있었습니다. “재산은 1만 석 이상 모으지 말라.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구든지 와서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가게 하라. 흉년이 들면 곳간을 열어 굶주린 이웃을 살려라. 며느리가 시집오면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그래야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이해한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된다.” 최부자집은 단순히 부를 쌓은 집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재물을 흩어 나누며 이웃을 살린 집이었습니다.
한가위의 달빛은 모두에게 차별 없이 비춥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밝게 비치는 둥근 달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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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땅의 결실에 대해서, 제2독서는 우리 삶의 결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복음에서는 삶의 결실은 재물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 한가위는 예로부터 한 해 동안 키우고 거둔 땅의 결실을 함께 나누던 날입니다. 산업화된 지금은 땅에서 얻은 수확물뿐만 아니라, 한 해 동안 저마다 얻은 삶의 열매를 나누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모여서 한 해가 시작된 뒤 그동안 이룬 것, 삶 속에서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막상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이면 이런 시간을 가지기보다는 서로 부딪치고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왔기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 세대는 명절 때 무리해서라도 음식을 준비합니다. 함께 나누어 먹고, 자녀에게 싸 주고 싶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산 자녀 세대는 이제 명절 음식 준비를 그만하라고 합니다. 음식 준비로 고생하기보다는 가족들과 함께 편히 쉬기를 바라서일 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왔고 저마다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로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한 말일 텐데 갈등을 빚게 되는 까닭은, 그 기준이 ‘나 중심’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대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다면, 저마다 그 다름을 존중받아야 합니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삶의 결실과 수확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더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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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1. 복음의 핵심
오늘 복음(루카 12,15-21)에서 예수님께서는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함을 강조하신다.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창고에 쌓으며 자기 생명을 안심시켰지만, 하느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 부르신다. 진정한 생명은 재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나눔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2. 교부들의 가르침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 넘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네 창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의 손안에 있는 것이다.”(De Nabuthe Jezraelita, 12) 재물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굶주린 이에게 주지 않은 빵은 그들의 것이다. 헐벗은 이에게 입히지 않은 옷은 그들의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지 않은 돈은 그들의 것이다.”(Homiliae in Lucam) 나눔 없는 재물은 사실상 도둑질과 다름없음을 강조한다.
3. 교회의 가르침
가톨릭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재물의 사용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그것을 사용해야 하며, 우선 가족의 필요를 충족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쓰여야 한다.”(2404항) 사목 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다. 따라서 재물의 사용은 언제나 공동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69항)
4. 묵상
한가위는 풍요에 대한 감사와 동시에 나눔의 절기이다. 조상들께서 하느님께서 주신 햇곡식을 봉헌하며 감사드렸듯이, 우리도 기도와 미사를 통해 지난 1년의 은총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감사에 머무르지 않고, 나눔으로 감사의 열매를 맺을 때 참된 신앙이 완성된다. 어리석은 부자가 창고만 확장했듯이, 오늘 우리도 소비와 소유의 문화에 매몰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위의 의미는 “함께 나눔으로써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5. 삶의 적용
조상과 선조들을 기억하는 기도: 하느님 안에서 모든 세대가 하나임을 고백하며, 돌아가신 이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하자.
감사 생활: 하루의 끝에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기도를 바침으로써 한가위의 의미를 연중 생활로 이어가자.
나눔 실천: 풍요의 상징인 추석에, 어려운 이웃에게 음식을 나누고 손길을 내미는 삶을 살자.
결론: 오늘의 한가위는 단순히 추수의 풍요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이웃과 나눔으로써 풍요의 기쁨을 완성하는 날이다.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처럼, 우리의 창고가 아니라 가난한 이의 손안에서 참된 부유가 드러날 수 있도록, 이번 한가위에 우리도 삶을 새롭게 결단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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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너 우리 한가위만 같기를>
루카 12,15-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나 너 우리 한가위만 같기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나 너 우리
높푸른 하늘이 되어
고운 벗님들
정성껏 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넉넉한 땅이 되어
고운 벗님들
고이 모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둥그런 보름달이 되어
고운 벗님들
부드럽게 감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소담한 송편이 되어
고운 벗님들
살맛 돋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도란도란 밥상이 되어
고운 벗님들
오붓하게 보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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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직 못 받은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1) 한가위 명절의 기본 정신은 ‘감사’ 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에 대해서만 감사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이가 많고, “나는 받은 것이 없으니 감사드릴 일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해서만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앞으로 받게 될 은혜’에 대해서도, 또 ‘받기를 원했지만 받지 못한 것’과 ‘원했던 것과 다른 것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려야 합니다.
신앙인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1테살 5,18) 그 점에서 욥기에 나오는 ‘욥’과 토빗기에 나오는 ‘사라’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
그리고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사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기도를 바치는데, 그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당신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토빗 3,11)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는 당연히 ‘감사기도’입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욥과 사라가 처한 상황은 도저히 감사드릴 수 없는 상황이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말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은, ‘모든 일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서 감사가 이루어지고, 찬미가 나오는 법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욥과 사라보다 훨씬 더 큰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남이 함부로 충고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당사자 자신이 스스로 믿고 깨닫고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에게 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해 주면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 그것이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이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2-24)
여기서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라는 말씀은, 믿음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께 청한 것을 받기 전이라도 감사기도를 먼저 바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감사기도를 먼저 바치면 자신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3) 신앙인은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자기가 청하는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그때에 곧바로 주셔야만 한다고 고집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그런데 우리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모르니까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언제나 감사기도와 찬미기도를 먼저 바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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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대 태국에서 하얀 코끼리는 굉장히 신성한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태국의 왕은 이 신성한 하얀 코끼리를 누구에게 선물했을까요?
1) 충직한 신하 2) 큰 공을 세운 신하 3)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
당연히 1번이나 2번 같지만, 태국의 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이 신성한 하얀 코끼리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하얀 코끼리는 신성한 동물이기에 비싼 먹이를 먹여가며 귀하게 키워야 했습니다. 밭일에 활용하거나 이동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가 없었지요. 따라서 하얀 코끼리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쓸모는 없는데 관리 비용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처치 곤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태국의 왕은 막대한 먹이 비용과 관리 비용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가 파산하도록 하얀 코끼리를 선물한 것입니다. 더 잘해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또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면 당연히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를 하느님 뜻에 맞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얀 코끼리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오히려 장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춰 사랑의 완성을 위해 나의 재물과 시간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한가위는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며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느님과 우리가 있게끔 해 주신 조상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이 명절의 그 기쁨을 가족 및 이웃과 나누는 명절입니다. 결국 한가위의 정신은 ‘감사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감사의 대상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기가 아닙니다. ‘나’를 넘어 조상, 하느님, 그리고 우리 공동체로 향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거두었어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 능력과 소유로만 여깁니다. 그의 계획에 하느님도, 조상님도, 이웃도 없습니다. 오직 ‘내 곡식’, ‘내 재물’, ‘나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부자가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해서만 재물을 모으면서, 정작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가 기준에 서면, 하느님의 뜻은 자리하지 못합니다. 하얀 코끼리를 키우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이번 명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에게 감사하는 어리석음은 모두 버리고, 하느님과 조상님께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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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삶은 여행>
예로니모 성인은 당신 어머니 장례미사 때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성인의 행동은 죽은 이들이 단순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지지 않으며,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온 정성을 쏟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우리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갈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허상을 좇지 말고 참된 것에 힘을 쏟으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새 신부 때 은퇴를 앞둔 70대 신부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한번은 식사 시간에 신부님께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더니, 신부님께서 “신 신부 시간은 30km로 가지만, 내 시간은 70km로 지나가.” 하셨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시간의 속도를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삶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영원을 생각할 때 삶은 잠시의 여행에 불과합니다. 하느님 품으로 먼저 가신 우리 가족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매일의 시간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임을 알고,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참 부모이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물을 들고 고향집으로 향해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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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20-21)
우리보다 먼저 가신 부모 형제자매들은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아름다운 사연도 남겼지만 슬픈 사연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행복도 남겼지만 고통도 남겼습니다. 떠나시기 전에 살면서 남기기도 했지만 떠나신 뒤에 남기신 것도 있습니다.
우리도 무엇인가 남기고 떠나게 됩니다. 보이는 것을 남기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남깁니다. 정신적인 것도 남기고 물질적인 것도 남깁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보이는 것을 남기려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남기려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남기려 애써야 합니다. 보이는 유산은 금방 사라지지만 보이지 않는 유산은 영원히 남게 됩니다.
현실에 마음을 빼앗기면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하늘나라에 마음을 두면 보이지 않는 것에 헌신합니다. 사라지는 땅에 창고를 짓기보다 하늘에 창고를 지어야 합니다. 땅에 창고를 지으면 땅에 썩어 묻히고 말지만, 하늘나라에 창고를 지으면 영원히 썩지 않고 불어납니다.
이 땅의 삶에 집착하면 땅에 보물을 쌓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그리워하면 하늘에 보물을 쌓습니다. 이 땅의 보물은 쉽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의 보물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잘 보이는 것들은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못 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두면 눈을 감아도 볼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 보이는 것들은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눈을 감은 후에 그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그냥 두고 눈을 감으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이 풍성한 이 땅의 한가위는 나누어야 하늘나라의 한가위가 됩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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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축복 가득 찬 한가위 되세요.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고 노래하고,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줍니다.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하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는 것,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는 그 베풂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여 은혜를 입고 이미 새 생명으로 태어난 구원된 존재라는 사실에 더 더욱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현존과 활동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의탁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것인 양 여겼고,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오만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곧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이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 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이 무엇인가를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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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직 저의 전부이신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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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님의 소유가 되는 일>
축복 가득 찬 한가위입니다.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도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이루신 그 사랑, 그 놀라운 일에 찬양과 감사를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어줄 수 있었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노래합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또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주며,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느님의 축복인 ‘생명과 재물’에 대해 말해줍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이 말씀은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지 않듯, ‘생명’ 또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 참조), 곧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루카복음 12장 33절에 나오는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 참조) 입니다. 그것은 먼저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재산)’임을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곧 자신이 누구의 재물인지를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당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전부’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소유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의 재물을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소유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소유가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소유가 되면, 우리 역시 그분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고, 전부를 가진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한가위, 전부를 가진 꽉 찬 보름달로 피어오르는 날 되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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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직, 저의 전부이신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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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롭고 행복한 삶>
“하늘에 보물을 쌓으십시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시편 67,1)
오늘 화답송 시편 첫구절이 참 좋습니다. 오늘 10월6일은 한가위 추석입니다. 새벽 아름다운 다음 초대송 후렴에 이은 찬미가로 한가위 하루가 활짝 열렸습니다.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창조주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 계절의 움직임에 조화이루어 어느새 곡식들이 무르익어서 추수한 첫열매를 봉헌하도다.”(찬미가 1절)
미사중 감사송 후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주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계신 조상들을 기리며 주님께 감사드리는 우리에게 평화의 주님은 한가위의 기쁨과 축복을 흠뻑 느끼게 하십니다.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 섭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니, 저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사람과 온갖 피조물과 함께 평화로이 조화를 이루며, 주님의 은총으로, 땀을 흘려 주님께 바칠 예물을 마련하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는 사랑과 기쁨에 넘쳐, 모든 천사와 성인과 온세상 만물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끝없이 찬송하나이다.”
새삼 한가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계신 생명과 사랑, 축복의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동시에 한가위가 얼마나 조상 대대로 이어온 우리 한민족의 뿌리와도 같은 최대의 명절이자 겨레의 날인지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서늘한 기후에, 풍성한 햇곡식과 햇과일로 술을 빚고 떡을 만들어, 토란국에 오색 과일로 제사상을 차려 먼저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마친 다음에 술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노래와 춤과 갖가지 놀이로 낮과 밤을 마음껏 흥겹게 보내는 민족의 명절이다.
또한 한가위는 중추절이라 하여 동양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 인도에서도 이날을 큰 명절로 즐기고 있다.’ 하니 명실공히 한가위 중추절은 동아시아 나라들의 최대 명절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저절로 떠오르는 질문에 저절로 나오는 답입니다. “지혜롭과 행복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을 살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답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우선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지 않으면 결코 무지와 허무의 심연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가위의 중심에 축복의 원천으로 자리하고 계신 하느님입니다. 요엘 예언자가 영적 시온의 자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른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참 아름답고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찬양과 감사의 삶이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둘째, 죽음의 심판과 구원을 늘 눈 앞에 환히 두고 사는 삶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가르침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한 주님의 계시 말씀이 이런 자각을 깊이 해줍니다. 요한에게 하늘에서 울려오는 다음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
바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사랑하고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죽음에 대한 최고의 처방은 주님께 대한 신망애, 향주삼덕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성령님의 화답입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은 기쁨으로 곡식을 거둘 것입니다. 한결같이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한 신망애의 사람들! 사필귀정 무조건 해피엔딩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셋째, 늘 탐욕을 경계하는 삶입니다.
모든 불행과 비극, 재앙의 근원은 끝없는 탐욕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한계를, 경계를 무너뜨리는 탐욕입니다. 탐욕에는 눈이 없습니다. 눈멀게 하는 무지의 탐욕이요, 반대로 무욕의 지혜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사람의 생명은 재산이 아닌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맑은 정신을 마비시키는 탐욕, 탐심, 탐식, 탐애, 탐닉 모두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고약한 것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무욕의 지혜로운 삶,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넷째,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가 참 좋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완전히 하늘의 하느님과 이웃의 사람들에 차단된 창문이 없는 고립단절의 자기감옥에 갇힌 수인의 삶입니다. 탐욕의 무지에 완전히 포로된 부자입니다. 땅에다 보물을 쌓는 일에 전념해온 업보입니다.
그래서 자기도취, 자기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우리에게 주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느님과 이웃과 더불어 섬김과 나눔의 삶이 하늘에 창문을 내는 일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구원의 길임을 까맣게 잊은, 탐욕에 눈먼 참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참 준엄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부단히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 하느님만으로 충만한, 텅빈 충만의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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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오늘 복음(루카 12,15-21)은 '탐욕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보름달처럼 풍성하고 넉넉한 한가위, 가정 안에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추석 명절이 되시길 빕니다.
한가위는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우리 주 하느님이 축복을 주심이로다."(시편 67,7-8 참조)를 노래하는 날입니다. 결실이라는 큰 축복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 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요엘 2,23ㄴ-24)
한가위는 우리보다 먼저 떠나가신 우리의 조상님들과 부모님과 가족 친지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의 수고와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기억하는 영혼들은 우리보다 먼저 죽음의 다리를 건너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죽음을 보여주신 분들이며, 탐욕의 허무함을 일깨워 주신 분들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한가위는 '사랑을 나누는 날'입니다. 떨어져 있었던 가족이 함께 모여, 음식과 대화로 사랑을 나누는 날입니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온 조상님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기억하며 본받기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만 끊임없이 재화를 모으는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고, 나누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된 한가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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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잠시 멈춰 추석 보름달을 바라보자. 세상이 바뀌어도 생명의 고향은 항시 존재한다. 추석 명절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삶의 의미는 생명의 기쁨이다. 생명의 기쁨은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한 생명의 기쁨들이다. 사람의 삶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생명 존중은 생명 중심이다. 생명이 있기에 행복과 여러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다. 다시 우리의 삶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깨닫는 시간이다.
생명의 기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쁨이다. 진정한 사람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기쁨이다.
고향을 고향으로 여길 줄 알며 생명을 생명으로 여길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자연이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상생하는 것이다. 욕망이 빚어내는 욕망의 결과물들은 참으로 우리를 아프게한다.
고향을 찾는 추석 명절이 참으로 큰 가슴속 울림이 되는 것은 우리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쁨은 마음을 만나는 기쁨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고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만나는 마음의 만남이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가 있다. 가장 소중한 사랑의 마음을 만나는 추석 명절이길 기도드린다. 우리의 그리움을 찾고 만나는 시간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리운 마음에 달려 있다. 그리움을 잃어가는 우리들 삶이다. 마음을 되찾아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운 이들을 그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는 마음의 고향 마음의 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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