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스님의 법성게 강설] 38. ‘법성게’ 제26구: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구하는 만큼 구해지고 구해지는 만큼 곧 만족되는 도리
집 의미는 일승의 집이니
성자가 의거해 머무는 곳
집은 곧 법계와 상응한다
집은 행자가 돌아간 본제
참된 근원, 본성 증득한 곳
자량은 보리를 돕는 덕목
'이세간품'의 2천가지 법
‘수행자의 방편’에 해당하는 끝 구절이 ‘법성게’ 제25구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이다. 행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 분수따라 자량을 얻는다”라는 이 구절에 대한 ‘일승법계도’의 풀이 가운데, 집으로 돌아간다는 ‘귀가(歸家)’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집으로 돌아간다[歸家]’란 본성(本性)을 증득한 까닭이다. ‘집(家)은 무슨 뜻인가? 그늘지게 덮는다[陰覆]는 뜻이며 머무르는 곳[住處]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성의 참된 공[法性真空]은 깨달은 이가 머무르는 곳이므로 ‘집(宅)’이라 이름하고, 대비(大悲)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써 중생을 그늘지게 덮어주는 것을 이름하여 ‘집(舍)’이라고 한다. 이 뜻은 삼승에 있으니, 일승이라야 비로소 구경이 된다.
무슨 까닭인가? 법계(法界)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계다라니의 집[法界陀羅尼家]과 인다라니의 집[因陀羅家]과 미세다라니의 집[微細家] 등이다. 이것이 성자가 의거하여 머무르는 곳이므로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일승법계도)
의상 스님은 집이라는 뜻을 가진 가(家), 사(舍), 택(宅)의 세 가지에 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일승의 행자가 돌아가는 집의 특별한 의미로 가(家)를 사용하고 있다. 택(宅)은 대비로 중생을 시원하게 덮는다는 뜻이고, 사(舍)는 깨달은 성자가 머무르는 곳이며. 가(家)는 일승의 집이니 성자가 의거하여 머무르는 곳으로서 법계와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은 법계다라니가이다. 그 법계는 인행의 연기다라니가이기도 하고, 그 연기는 미세한 존재들에게도 해당된다.
법융 스님은 이 집을 십현문(十玄門)으로 설명한다. 십현문은 남을 위하여 설하면 교분이고 자증(自證)을 기준으로 하면 증분이라고 한다. 연기분과 증분이 모두가 법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법계의 집에 돌아가는 것을 진기에서는 참된 근원[真源]으로 돌아간다고 하며, ‘법계도주’에서는 법성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살림살이는 본래 기특할 것이 없으니 다만 본지풍광(本地風光)으로써 본래의 한전지(閑田地)를 얻으면 그 집 살림살이로 충분하다고 한다.
본지풍광이란 본지는 본래의 마음자리[心地]이고 풍광은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지혜, 즉 심성의 참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것을 나타낸 말이다. 이 본지풍광은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공적영지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법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노는 땅이라는 한전지는 아무 일 없이 한가한 상태, 모든 것을 뛰어넘어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아무튼 법계(法界)와 상응하는 일승의 법성가에 돌아가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는 ‘수분득자량’을, 의상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분수를 따른다[隨分]’란 원만하지 않은 뜻[未滿義]이기 때문이다. ‘자량(資糧)’이란 보리를 돕는 덕목[助菩提分]이기 때문이다. 아래 경의 「이세간품」 가운데 2천 가지의 답 등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일승법계도)
이처럼 수행자가 분수따라 얻는 자량이 보리를 돕는 덕목이고, 그 예로 ‘화엄경’ 이세간품의 2천 가지 법문을 들고 있는 것이다.
보리를 돕는 덕목이란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조도법이다. 초기, 부파불교에서는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를 합한 37보리분법이 그 대표적 덕목이다.
이 보리분법은 제4지 보살의 구체적인 수행내용이기도 하다. ‘화엄경’에서는 또 보살이 바라밀을 구족하면 일체 보리분을 순간순간 구족하게 되며, 여래가 설하신 법이 다 보리분이라고 한다. 특히 ‘이세간품’의 2천 가지 답이 일승의 보리분으로 주목된다.(화엄오십요문답)
이천 가지 답이란 보광(普光) 법당에서 보현보살이 불화엄삼매(佛華嚴三昧)에 들었다가 일어나, 보혜(普慧) 보살의 이백 가지 질문을 받고 한 물음에 열 가지씩 모두 2천 가지로 대답한 내용이다. 그 가운데 한 문답을 예로 들어보자.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10가지 눈[十眼]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육안(肉眼)이니 일체 색을 보는 까닭이다. 천안(天眼)이니 일체중생이 여기서 죽고 저기서 태어남을 보는 까닭이다. 혜안(慧眼)이니 일체중생의 모든 근(根)을 보는 까닭이다. 법안(法眼)이니 일체 법의 진실상을 보는 까닭이다. 불안(佛眼)이니 여래의 십력을 보는 까닭이다. 지안(智眼)이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까닭이다. 명안(明眼)이니 일체 부처님 광명을 보는 까닭이다. 출생사안(出生死眼)이니 열반을 보는 까닭이다. 무애안(無礙眼)이니 일체 법의 무장애를 보는 까닭이다. 보안(普眼)이니 평등법문으로 법계를 보는 까닭이다.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눈이니,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 눈을 성취하면 일체 제불의 위없는 대지혜안(大智慧眼)을 얻는다.
보살이 이러한 십안을 얻으면 부처님의 대지혜안(大智慧眼)을 얻게 된다고 한다. 80권 ‘화엄경’에서는 그 명목과 설명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천안은 일체 중생심(一切眾生心)을 보는 까닭이라 하며, 명안은 광명안이고 보안은 일체지안(一切智眼)으로 명명되어 있다. 그리고 일체지안은 보문법계(普門法界)를 보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 십안은 부처님에게서는 그 전체가 그대로 일체지안(一切智眼)이고 대지혜안(大智慧眼)이다.
화엄수행계위로 볼 때 ‘이세간품’은 묘각(妙覺)에 해당하는 구경의 자리이다. 묘각에서 다시 중생계를 향하여 근기 따라 전체보살도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이러한 ‘이세간품’의 법문이 일승의 보리분으로서 자량(資糧)이 됨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삼대기에서도 ‘자량’이란 2천 가지 도의 품목(道品) 등이며, 자량을 얻음이 행자의 가행방편(加行方便)이라고 한다. 그리고 법성가(法性家)에 돌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다라니의 끈을 잘 잡아서 지니어 잃어버리지 말고 자량으로 삼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분수를 따라 자량을 갖춘다’란 인행이므로 ‘분수를 따라’라고 하고, 이러한 인행으로써 보리에 이르므로 ‘자량’이라 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여의주를 얻어 모든 생계 도구를 다 자재하게 얻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만약 모든 행자가 여의교를 얻으면 이미 보리의 자량을 갖추게 되고 과(果)의 처소에 이르러 모든 것이 자재하다.(원통기)
이처럼 균여 스님은 보리과에 이르는 인행이 자량이고, 행자가 여의의 가르침을 따르면 자량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설잠 스님 역시 자량은 삼십도품(三十道品)이고 자량을 얻는다는 것은 행자의 가행방편(加行方便)이라고 간주하면서도, 그 경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주리면 밥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추우면 불 쬐고 더우면 바람쏘이니, 무슨 소식이 있는가? 비록 그러하나 오이를 심어 오이를 얻고 과일을 심어 과일을 얻으니, 일승의 청정한 법계에 종자를 심어 어찌 현묘한 이야기가 없겠는가. 얼른 일러라.
길이 손님 보내는 도리로 인하여 [長因送客處],
집 떠나 있던 때를 추억하도다. [憶得別家時] (법계도주)
자량은 집에 돌아온 주인이 수용하고 있는 자재한 경계이면서, 또한 집밖에서 아직 돌아다니고 있는 나그네를 위한 양식이기도 하니, 득자량이 수행방편으로서 교화의 양식이 됨을 알 수 있다.
유문 스님은 삼승이나 오승(五乘)이 양껏 바닷물을 마셔서 각기 다 배부른 경계로 중생의 이익을 설명하고 있다. 애증(愛憎)이 없는 무연으로 여의를 잡고 자량을 얻는 것이 교화 받는 중생의 득이익을 거듭 말한 것이라 해석한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집은 법성의 집[法性家]이다. 이 집은 행자가 돌아간 본제이고 참된 근원이며 본성을 증득한 곳으로서 법계이다. 그 집은 또한 본지풍광의 한전지이면서 연기다라니의 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 분수따라 얻는 자량은 묘각에서 중생계로 크게 방향을 돌려 펼치는 2천 가지 도품이고, 보살이 구하여 실천하는 만큼 얻어서 수용하는 보살도의 공덕이기도 하다. 구하는 만큼 구해지고, 구해지는 만큼 곧 만족되는 도리가 ‘귀가수분득자량’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