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6)-3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의 통보로, 무쓰는 사건발생 전에 미우라의 “결의”를 알고 있었다는, 상상을 나는 버릴 수 없지만, 더욱이 미우라(三浦)의 “결의”를 알고도 무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이 거기에 따른다. 만일 무쓰가 미우라의 “계획”을 알고 중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면, 용이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방관하는 입장”을 계속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묵시인가, 묵인인가, 묵허(黙許)인가, 어느 것이든 민비가 암살된다는 것을 알면서, 방치하고 있었던 것에 다름 아니다. “3국 간섭”후, 일본의 세력은 급속히 후퇴하고, 러시아가 힘을 얻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무쓰는 어떤 심경으로 응시하고 있었던가. 그 중심이 민비라는 것도, 국왕 고종은 민비의 뜻대로 한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민비를 제거하는 것도, 국면타개의 한 가지 방법일 것>이라는 생각이, 병마에 시달리는 무쓰의 가슴을 스쳐가는 것은 아니었을까----.
무쓰와 같이 세계적인 시야를 가진 정치가가, 사건의 영향을 경시하고, 그것도 살인이라는 행위를 시인할 리가 없다고,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의 상상을 부정했다. 그런데도 다시 내가 이 상상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오츠사건(大津事件)」의 무쓰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오츠사건(大津事件)」이란, 1891년(명치24년) 5월, 일본을 방문 중인 러시아제국 니콜라이 황태자가, 순사 츠타 산조오(津田三蔵)에게 칼로 찔려서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본방문에 즈음하여, 세비치 주일 러시아 공사는, 「황태자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들에게, 엄벌로 다스린다는 것을 국민에게 포고하고, 범죄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일본의 법률에는 「천황, 삼후(三后/역자 주 : 태황태후·황태후·황후), 황태자에게 위해를 가하고, 또는 가하려고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제116조가 있었으나, 그것은 외국의 군주나 황족에 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공사는, 황태자가 일본에 올 때까지 법률을 개정할 것을 요망했다.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오(靑木 周蔵)는. 그런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러시아공사의 요망을 승낙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국내법적 조치는 취하지 않고, 공사와의 약속을 비밀로 했다.
거기에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는 이것이 일 러간의 큰 문제가 되는 것을 극도로 우려하고, 범인 츠타(津田)를 사형으로 하여 변명을 하려고 하였으나, 대심원원장 아지마 이켄(兒島惟謙)은 법에 따라서 「무기징역」을 주장했다.
타오카 료이치(田岡良一/大阪經濟法科大學敎授)는 그의 저서 『大津事件의 再評價(신판)』 중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비록에 따르면, 이토는 5월12일 오전 나가타 초(永田町)의 수상관저에서, 내각의 각원들과 사건의 선후책을 협의한 후, 쿄토에 갈 준비를 위해 제국호텔에 갔다. 이 수상관저 회의석상의 이토는 재판관들의 반대에 의하여 츠타(津田)를 사형으로 하는 것이 곤란하게 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는 설을 말하고, 무쓰(陸奧) 농상이나 고토(後藤) 체상은 이 자리에서 같이 이를 들었으나, 두 사람은 이토가 말한 바와 같이, 계엄령에 이름을 빌려주고 무리하게 억눌러 사법부에서 재판권을 빼앗아, 행정부가 재판을 하는 데는, 일말의 두려움을 느낀 듯 하다. (중략) 잠시 후에 (陸奧가) 고토後藤)와 같이 재차 내방하여 하는 말에 <재판이 곤란하다고 하면 한가지 계책이 있다. 자객을 써서 범인을 죽이고, 병사로 공포하는 것은 용이하다. 지금의 러시아에서는 때때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라고 했다. 이토(伊藤)는 이것을 나무라고 <국가주권이 있는 곳에서 그런 불법한 조치가 허용될 수 있는가.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하고 헤어져, 11시 기차로 쿄토를 향해 줄발했다. (중략)
한편 우리나라는, 황태자 조난에 관하여 러시아로부터 어떤 보상을 요구 받을지 헤아리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때 일∙러 간 협상의 중개를 하는 것은 주일 러시아공사라고 한다면 아오키靑木)가 그에게 한 약속을, 지금 찢어 없애고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츠다 산조오(津田三蔵)가 존재하는 한, 이것을 사형으로 하지 않고 끝낼 수는 없으며, 그리고 재판관이 반대하는 한 츠다를 사형에 처할 수 없다는 딜렘마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 딜렘마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츠다의 존재를 없애는 것이다」
오츠사건(大津事件)의 무쓰(陸奧)가 “살인”에 의해서 어려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기 때문에 민비 사건에서도---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오츠사건」은 「민비사건」의 4년 전이고, 이 두 사건은 전혀 성질이 다르며, 배경도 조건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살인에 의해서 일를 해결하려는 발상을 한번이라도 품은 인물과, 그런 경력이 전혀 없는 인물과는, 여전히 나의 상상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달라진다.
나는 무쓰가 1895년(명치28년) 6월4일의 각의에서, 일본의 대 조선 방침을 「내정불간섭」으로 결정한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일본인의 머리를 식혀야 한다고, 냉정한 판단 하에 이것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 무쓰가 민비 암살을 묵시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며, 또 이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의 입장에 대한 원통한 생각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역의 방향으로도 상상은 달려간다.
나구사 모리오(名草杜夫)는 그의 저서 『우익낭인 등장--- 岡本 柳之助의 빛과 그림자』에서 오카모토의 유족이 「陸奧부인이 오카모토의 아내를 대리고, 히로시마 옥중의 오카모토를 위문해 줬다」라고 했다고 썼다. 이것을 읽으면, 陸奧가 岡本에 대하여 <나에게 상담도 하지 않고 그런 바보짓을 했는가>라는 분노를 품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무쓰 무네미쓰(陸奧 宗光)가, 또 伊藤博文가 민비 암살을 계획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민비 암살과 일본정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는 나의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