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7)-1
에필로그 --- 일한병합의 경위
사건관계자의 그 후를 보면,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는 추밀원 고문관으로 만년(晩年)까지 정계에 지위를 유지하고, 호리구치 쿠마이치(堀口九万一) 는 브라질 등 공사를 역임하고, 아다치 켄조오(安達謙藏)는 몇개성 대신을 역임하고 정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무라사키 시로오(紫四郞)는 전후 7회 대의사에 당선되고, 코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 秀雄)은 九州일일신문 사장이 되고, 군인으로서는 사건당시에 중좌였던 쿠스노키유키히코(楠瀨幸彦)가 육군대신이 되었다. 민비사건과 관계된 일은, 그 후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고, 도리어 “관록”을 붙여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한 듯하다.
예외는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다. 그는 본래부터 “입신출세”의 화려한 인생길을 걷는 타입은 아닌 듯하였으나, 그렇더라도 만일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뒤를 봐주었더라면 무엇인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쓰(陸奧)는 오카모토(岡本)가 석방된 이듬해, 1897년(명치30년) 8월24일 만53세로 사거(死去)했다. 다케바시(竹橋)사건 후에 무쓰를 따라서 살아온 오카모토는 후견자를 잃었다. “조선낭인”에서 “대륙낭인”이 된 그는 1912년(명치45년) 샹하이(上海)에서 객사했다.
또 한 사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사건관계자의 그 후를 알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의 자료 중에, 능란한 조선어로 취조를 맡아, 옥중의 그에게 호의를 보인 경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사카이마스 타로오(堺益 太郞)--- 분명히 민비관계 자료에 있었던 이름이라고 생각해 조사해 보니, 암살 실행대에 가담했던 경찰관계자의 리스트에 있는 「오기와라(荻原)경부를 위시한 순사 7명」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무렵의 직함은 「경성영사관외무성 순사」였으나, 14년 후에는 「통감부경보국경시」가 되어 있다. 그도 “출세조”의 한 사람이었다.
안중근에게 비공개로 한 재판은 극히 바람직하지 않았으나, 여순 감옥에서 접한 일본인은 사카이마스 타로오(堺益太郞)를 비롯하여 모두 친절하여, 그때까지 만났던 일본인과는 인종이 다른가 하고 그를 어리둥절하게 할 정도였다. 안중근에게 『安應七(중근의 별명)의 역사』를 쓰게 한 것은 사카이(堺)였다고 한다. 사카이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죄과 15조의 제일 첫째로 민비 암살을 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는 자기가 암살 실행대의 한 사람이었던 것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처형장으로 가기 직전 안중근은, 일본인 간수 한 사람에게 그때까지의 친절에 사례하고, “동양에 평화가 이루어져, 한일 간의 우호가 되살아날 때, 다시 태어나 만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민비의 죽음에서 헤아려 3년 후에 대원군도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 되지 않아 고종도 죽고, 고종과 민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도 1926년에 사거한다. 그때까지 약 30년 시간의 흐름 속에 일한관계는 크게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