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7)-2
조선조 멸망과 왕실의 종언
1895년(명치28년)
10월26일, 태양력 채용 결정.
1896년(명치29년)
2월21일,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가, 고종과 왕태자를 정동 러 시아공관으로 옮김(아관파천)
2월20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 등 노상에서 군중 에게 살해됨.
2월28일, 러시아공관 내에서 정무를 보는 고종이, 의병해산조칙을 공포, 그러나 의 병운동은 점점 성행되고, 충주방면에서 일본군과 충돌.
7월7읻, 신임 일본공사 하라 다카시(原敬) 착임.
하라(原)는, 외무대신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 公望) 앞으로 8월19일자 보고서 「조 선의 현황 및 장래의 경향 상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관민 일반은 물론 재류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배일풍조 대단히 맹렬하고, 우리의 행위에는 그 일이 무엇이든지 불문하고, 전부 반대하는 정세임. 말씀 드릴 것도 없이 작금년의 내정간섭에 대한 반동과, 작년 10월8일 왕비살해사건에 원인이 있음」.
1897년(명치30년)
1월6일, 민비의 시호(諡號)를 명성(明成)으로 결정
2월20일, 고종,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慶運宮/역자주: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
10월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왕후 민씨를 황후, 왕태자를 황태자로 개칭.
11월22일, 명성황후 국장 거행
1898년(명치31년)
2월22일, 대원군 사거, 향년 만78세.
고종은 실부인 대원군의 장의에 불참했다고 전해짐. 이것도 한 예지만 민비암살 사건 관계자에 대한 고종의 증오심은 강하고, 일본에 망명한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역자 주:육종학자 우장춘박사의 실부)도 그 후에 조선에서 온 자객에 의 해 살해되다. 고종에게 민비 사후 엄비(嚴妃)도 있고, 그밖에 많은 여성을 가까이 했으나. 하나뿐인 반려로 溺愛(닉애)한 것은 민비 뿐이었을 것임.
1904년(명치37년)
2월10일, 일∙러전쟁 발발
2월23일, 일∙한의정서 조인. 한국은 일본군에 의한 한국 내의 전략요지 수용을 승인.
10월12일, 일본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 好道), 한국 주차사령관으로 입경
11월5일, 독립협회 회원 이승만(李承晩), 고종의 밀서 휴대, 도미를 위해 인천으로 출발
1905년(명치38년)
3월22일, 최익현(崔益鉉),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상소하고, 일본 헌병대에 체포됨.
3월25일, 황제(고종), 러시아에 일본견제를 호소하는 밀서를, 샹하이(上海)주재 러 시아군 소장 테시노에게 전달.
10월16일, 일∙러 평화조약(포츠머스조약)공포.
11월9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보호조약 강행을 위해 도한.
11월15일. 이토(伊藤) 고종에게 조약안 제시, 수락을 강요함.
11월17일, 제2차일한협약(한국보호조약/을사보호조약) 조인. 익18일, 군중, 대한문 앞에 쇄도하여 신 조약 파기 주장.
11월30일,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 자결.
12월20일, 일본,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 공포.
1906년(명치39년)
3월2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착임.
1907년(명치40년)
4월20일,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 의 참석을 위해 출국. 밀서의 내용은,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 실정을 세 계에 호소하는 내용.
6월29일, 헤이그밀사, 평화회의에 참석 신청하였으나 거부당함. 7월 이준 헤이그 에서 순국.
7월3일, 이토(伊藤)통감.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을 추궁.
7월18일,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전 각료, 고종의 양위 권고(제3회 어전회 의).대한자강회, 동우회, 그리스도교청년회 회원 2.000여명, 대안문(大安 門/역자 주:지금의 덕수궁 정문 대한문의 옛명칭)앞에서 양위반대시위,
7월19일, 고종 양위조칙을 내림.
7월24일, 일한 신 협약(정미7조약) 조인. 차관정치의 개시. 일본의 한국내정간섭권 확립
7월31일, 군대해산조칙 환발(渙發) (8월1일 훈련원에서 군대해산식 거행)
8월1일, 시위제1연대 제1대대장 박성환(朴星煥) 자결. 시위대 일부 서소문동 일대 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제3차 의병운동 개시)
8월7일, 영친왕(英親王) 은(垠/훗날 이방궁의 장녀 마사코(方子)와 결혼)을 황태자 로 책봉.
8월27일, 순종황제, 경운궁에서 즉위.
10월7일, 일본군 헌병대가 경찰권 장악(헌병경찰).
12월5일, 황태자 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도일, 도쿄(東京)유학.
1908년(명치41년)
12월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東拓) 설립. 이후 일본인 이민 한층 성행.
이 해 한국각지의 의병과 일본군 교전 1976건, 교전의병 수 82.676명
1909년(명치42년)
6월15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의 추밀원의장 취임.
7월6일, 일본 각의, 한국병합에 관한 건 결정, 천황 재가 받음.
10월26일, 안중근, 하얼빈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1910년(명치43년)
8월22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 正毅), 총리대신 이완용과 회견, 「한국황제 폐하는 한국전부에 관한 통치권을 완전히 또한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 게 양여한다」는 일한병합 조약 조인.
8월29일, 양여조서, 일한병합조약 공포,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 조선총독부 설 치.
10월1일, 초대 총독으로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 正毅) 임명.
1911년(명치44년)
4월17일, 토지수용령 공포, 시행
8월23일, 신민교육과 일본어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교육령 공포.
1919년(大正8년)
1월21일, 고종, 덕수궁에서 사거(향년 67세). 「사인은 독살」이라고 함. 고종의 제3 왕자 영친왕의 비였던 마사코(方子)는, 저서 『흐르는 그대로』에 다음과 같이 썼 다.
「편찮으시다고 전해진 1월21일의 전야, 이 태왕 전하는 기분 좋게 옛날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신 후, 밤이 깊어 일동이 물러난 다음, 차를 마시고 침소에 들어가신 후, 얼마 안 되어 갑자기 고통스러워하시고, 홀연히 절명하신 것입니다. 퇴위 후에도 남모르게 국력의 만회에 부심하신 이태왕(李太王) 전하는 파리로 밀사를 보내는 계획을 진행하고 계시는 것 같았고, 그것이 재차 일본 측에 발각된 데서부터, 총독부의 밀명을 받은 시의(侍醫)인 안상호(安商鎬)가 독약을 탄 것이 진상이라던가」
3월1일, 고종의 국장을 2일 후에 치르게 될 이날,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에 남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남.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서 울 파고다공원을 시작으로 독립요구시위가 계속되고 전국으로 파급. 총 참 가자 136만명, 사망자 6.670명, 부상자 14.600명, 투옥자 52.730명. 이를 “3.1만세운동”이라고도 함
9월2일, 강우규(姜宇奎), 신임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일행을 남대문 역두에 서 습격, 미수
* *
고종과 민비의 묘소는, 서울 중심가에서 동북으로 차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금 곡릉(金谷陵)이다. 자연공원과 같이 드넓은 부지 깊숙이, 한국의 독특한 주홍색을 칠한 화사한 색채의 묘당이, 지금은 고종과 민비 두 사람만이 사는 그들의 “왕 궁”이다. 여기에서는 왕태자(王太子)로 책봉된 영친완의 생모 엄비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고종과 민비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은, 휘어진 지붕의 아름다운 곡선 위 에, 똑바로 늘어서 마귀를 쫓는 작은 짐승 들 뿐이다.
1926년(대정15년)
4월26일, 순종, 창덕궁에서 사거. 향년52세
이 해 12월. 일본의 연호가 대정(大正)에서 소화(昭和)로 바뀌지만, “일한병합” 으로부터 16년이 지난 이때도, 조선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정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순종이 타계한 2일 후, 4월28일에 송학선(宋學先)은 창덕궁 금호문(金虎 門) 앞에서 총독 암살을 꾀했으나 실패. 일본인 4명이 자살(刺殺)됨, “금호문 사 건”임.
6월10일, 순종의 국장이 거행된 이날, “6.10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남. 청년과 학생 들이 인쇄물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 학생 106명 검거.
순종의 병환악화 소식을 받고, 남편 영친왕과 도쿄(東京)에서 서울로 달려 온 마사코(方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병합전 한국 최후의 국왕이셨던 시숙님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눈물과 함께 올리고, 외로우셨던 1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흥선 대원군과 함께, 이조 말기의 집정권을 다투셨던 민비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나셔서, 소년시절에는 눈앞에서 어머니가 일본인 장정들에게 참살되셨을 뿐 아니라, 그 2년 후에, 하마터면 부왕과 함께 측근들에 의하여 독살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가 빠지셨습니다. 병약하셨던 시숙님....언제나 드라마의 그늘에서 가엾은 역할 을 다해 오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견딜 수 없습니다.」
순종에게 후사(後嗣)가 없다. 민비의 직통 핏줄은 여기에서 끊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