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 점오, 돈수, 점수 논쟁에 대한 내 나름의 이해>
불교 공부 중에 헷갈리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돈오, 점오, 돈수, 점수에 관련된 논쟁입니다. 이 문제는 불교 공부하는 중에 대부분 한 번씩은 생각해보게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제 나름으로 정리해 본 것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1. 견성, 깨달음 등의 돈오, 점오와 그 후의 수행의 돈수, 점수에 대해,
주장이 여러 가지 있으나, (여기서 “견성, 깨달음 등” 이라고 표현한 것은 주장에 따라 견성과 깨달음이 같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임.)
(1) 일단 이러한 논쟁이, 결론 없이 1500년 이상 끌어온 논쟁이고, 말이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는 내용에 대해, 말과 글로써 논(論)하고 있는 것임을 참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2) 어록과 논서 등에서도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 주장되고 있고,
동일한 선사의 어록 내에서도 돈오점수, 돈오돈수 양면에 모두 해당되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보이며,
(3) 원효스님은 열반경종요에서 견성이 어느 단계(보살의 수행 단계 중에 몇 지)에서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여러 주장에 대해, 단계에 따라 부족한 점이 있는 것도 있지만, 여러 주장 모두가 일리가 있음을 회통하여 설명하기도 하며,
(4) 위파사나 수행에 대해서도, 위파사나만의 수행으로도 해탈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청정도론에서는 위파사나만에 의한 해탈은 선정이 부족한 마른 위파사나라고 하여 해탈 후에도 선정을 닦아야 함을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경우로 보이며,
2. 견성 혹은 해탈 등의 후에도 반드시 수행해야 됨에 대해,
(1) 해탈 후의 수행에 대해,
잡아함경의 불방일경(不放逸經)에서는,
아라한이 되어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였다면, 다시는 방일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며,
잡아함경의 대해경(大海經)에는
영원히 저 반열반(般涅槃)으로 나아가 다시는 방일(放逸)로 돌아오지 않다고 하여,
해탈 후에는 자연히 수행을 계속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2) 견성한 선인(先人)들이 끊임없는 수행 생활을 하였음을 나타내는 기록들이 매우 많이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또한 끊임없이 수행을 하였으며,
3. 견성 등의 후의 수행의 질적인 면에 대해,
(1) 소위 말하는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 닦음 없는 닦음)이든,
부족한 면을 보완하기 위한 염오수행(染汚修行)이든,
아니면 두 가지가 병행이 되 든 간에,
견성을 하든, 깨달았든 간에 그 후에도 끊임없는 수행을 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이며,
(2) 잡아함경 구지가경(瞿低迦經)에서,
고티카(瞿低迦)는 어느 바위굴에 있으면서 열심히 수행한 결과 몇 번인가
해탈의 심경을 체험할 수 있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때마다 원상으로 돌아가곤 하기를 여섯 번에 이르러 그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해탈한 후에도
후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보이는 예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3) 석가모니 부처님도 성도 후에도 악마(마음의 갈등)의 유혹을 이겨내는 내용이 숫타니파 타에는 여러 번 나옵니다.
(4) 경전에서, 열반을 또한 육체가 있는 유여열반과
육체까지 소멸된 무여열반으로 나누어 보는 것도
열반을 체득했다고 하더라도,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되며,
(5) 초기 불교가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현실적인 것이라면, 후대에 와서는 부처님의 사상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너무 관념적이고 이상화된 것으로 보이며,
부처님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분명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어떤 분으로 느껴지게 묘사되는 점들을 생각해 보면,
견성이나 깨달음 또한 너무 이상화 시켜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되며,
그 때문에 중간 과정의 중요성을 너무 경시하는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4. 이상의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돈오, 점오, 돈수, 점수, 또는 돈오점수, 돈오돈수 등의 문제에서,
견도, 견성, 화두 타파, 돈오, 점오 등은,
각 개인의 경지 또는 개인의 근기에 따라 초지, 칠지, 십지 등 어느 것이나 가능하게 보이고, 어느 하나만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견성 등의 후의 수행이,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냐 염오수행(染汚修行)이냐의 문제는 보살 몇 지에서의 견성이든 모두 같으냐 다르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그 후 계속되는 수행에 의해 보완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돈오돈수라는 주장도 이상적이고 좋은 것 같으나,
이상적인 경우에는 그럴 것이다 하는 의미 외에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이며,
물론 이 경우에도 계속적인 수행은 필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깨달음이라는 의미 안에는 지속적인 수행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유지 보수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으로 생각되고,
부족한 면이 있다면, 추후의 계속되는 수행의 과정에서 보완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저는 이런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였으며,
더 이상 이 문제로 시간 보내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수행을 더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제 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