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閔妃暗殺>(28)-1
책 末尾에
도야마 요시히코(稻山 嘉寬) 經團連 명예회장의 고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온 朴泰俊씨(한일경제협회 회장, 포항종합제철회장)의, 「쓸쓸한 방일」이라는 문장 (일본경제신문, 1987년10월28일자 조간 「交遊抄」」를 내가 읽은 것은, 이 책 『閔妃暗殺』 교정 중이었다.
박태준씨는 쓰고 있다. 「(전략) 1960년대 말. 세계은행이나 미국 수출입은행이 포항제철 사업에 대하여 회의적인 판단과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한국에서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자본이나 기술공여 등 주된 문제가 무엇 하나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을 때, 마지막 의지 처로서, 야와타제철(八幡製鐵)의 사장이었던 도야마(稻山)씨 등 일본제철연맹의 수뇌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의 稻山씨의 모습은 평생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인은 경제발전을 위해 거국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한국에 참된 발전의 토대가 되는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할 뿐 아니라, 일본이 수십 년에 걸친 한국지배를 통하여 한국 국민에게 준 손실을 보상하는 의미에서도, 이 사업에 협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역설하셨다. (후략)」
박태준씨는 稻山씨에 대해서 「포항제철이 오늘의 성공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다해주신 분이며, 잠시도 잊을 수 없는 은인」이라고 말한다.
나는, 일본 재계에 이런 분이 계셔서 정말로 좋았다고 생각하고, 고 稻山씨에게 예를 표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나 자신이 변화한 것도 깨달았다. 『민비암살』을 쓰기 전의 나였다면, 박태준씨의 글에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다만 그뿐으로 읽고 지나쳤을 것이다.
「민비」를 쓰기 위하여, 거의 3년간, 나는 일한관계의 역사---특히 근대사를 공부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대중의 한 사람으로 세계를 역사이야기 정도로 밖에 모르는, 내가 가진 지식은 뻔한 것이다. 그러나 미흡하나마 일한관계의 사실을 앎으로서, 나는 실감이 따르는 “유감의 염”을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 익숙해진 말로 하면, “죄송함”이 그 기반이 된 감정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의 발전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稻山씨의 말과 실천에, 강한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민비암살』을 읽어주시는 분들 중 한분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아무쪼록 이웃나라에 대한 “유감의 염”을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우호관계, 상호이해를 심화시켜 주시도록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다만 나는 이 책 중에서 나 개인이 바라는 바를 언급하지 않고, 한층 더 그것을 강권하는 것 같은 말은 쓰지 않았으며, 다만 사실을 되도록 틀리지 않게 쓰는데 전념했다. 그 다음은 그 역사를 읽으시는 분들의 판단이고, 필자인 내가 독자의 머릿속에까지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위에, 문자 그대로 “졸저”라는 것도 돌이켜보지 않고, 만일 이 책에 의해서 일한관계의 역사를 처음으로 알았다는 독자기 계신다면 반드시 “유감의 염”을 가져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동포에 대한 나의 신뢰이기도 하다.
나는 되도록 「틀림없는 사실」을 쓰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먼저 나는 「일본에 대한 치우침에서, 자국에 편리한 독선적인 역사를 써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자기에게 경고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역사상의 하나하나의 사실에 대하여, 일∙한 양국의 자료를 대조해 봐야 하지만. 나는 한국어를 읽을 수가 없다. 「엉어나 프랑스어라면 안다」와 같이 허풍은 떨지 않지만, 사전을 찾을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 문자가 나오면 그것조차 할 수 없다. 나는 몇 번이나 절망적인 기분에 빠졌다.
양국관계의 역사를 익히는 동안에 나는 몇 번이나, 「일본은 이런 가혹한 짓을 했던가」 하는 놀라움을 느꼈다. 이 놀라움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미안한 마음”에 눌려, 자신의 펜이 자학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것도 또한 내가 강하게 자계한 것의 하나다. 백지상태에서 역사를 들여다보자----라고 나는 생각해 왔으나, 그것이 어디까지 실현되었을까.
이 책을 다 쓸 때까지 나는 더섯 번 한국을 방문하였으나, 1984년(소화59년) 12월의 첫째만은, 취재여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무렵 이미 나는 민비를 쓰고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나, 내가 이것을 써도 좋을까, 하는 망설임이 있었다. 일한 양국의 대중이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민비를 쓰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인 내가 이것을 거론하는 것에, 한국 분들이 반감이나 불쾌감을 품는다면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울대학교의 몇 분인가의 교수를 비롯하여 지식층으로부터 호텔의 객실담당 종업원이나 상점 판매원 같은 나와 같은 서민층까지.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이 질문을 했다. 표현은 여러 가지 였으나, 누군가가 “써라”고 권고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것은, 아르바이트 대학생인 통역인이 대들었을 때였다. 나의 의도를 알게 된 그는, “정말입니까. 정말로 민비사건을 쓸 생각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고 흥분한 태세로 말했다.
「이전의 나는, 일본인은 왜 과거의 죄를 반성도 하지 않고 천연스럽게 있는가. 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차츰, 일본인은 양국관계의 역사를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비사건은 그 좋은 예입니다. 나는 때때로 일본 관광단 통역을 하고 있으므로, 짧게 이 사건을 화제로 해 보지만, 누구도 모르고, 그 중에는 <일본 공사가 지휘를 하여 이웃나라의 왕비를 죽이다니, 그런 바보스러운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지어낸 말을 하지 말아> 하고 화를 내는 사람조차 있습니다.
꼭 써 주세요. 한국인이 싫어하다니, 그런 일이 있을까요. 모두 좋아할 것입니다.」
이런 한국의 소리가 격려가 되어, 나는 민비에 관한 일에 몰두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일본에 있어서의 ‘부끄러움“이 계속 들어나 나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부끄러운“부분이 있을수록 우리 일본인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나는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1985년(소화60년) 5월에 두 번째로 방한했다.
서독 대통령 바쯔젯카의 연설이 보도된 것은 정확히 그 5월이었다. 그 중의 「우리들 전 독일국민에게 과거에 대한 책임이 지워져 있다..... 뒷날에 과거를 바꾼다든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이 멀게 된다.」라는 한 구절을 거듭해서 읽고 용기를 얻었던 날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치스시대”라는 과거를 가진 독일의 수뇌들은 그때까지도 몇 번이나 같은 주지의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중을 향하여, 이와 같은 주지의 호소를 한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지도층에게 「일본에는,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과거는 없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까, 또는 예건대 어떤 일이 있어도 “과거”는 물에 떠내려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국민성 탓이기도 한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책임자의 추궁도, 전후 책임을 지는 사람도 애매하고, 이런 것들은 좋아하지 않는 화제인 듯하다.
“애매”에는 미지근한 물을 쓰는 듯이 안락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탈출하여, 과거의 역사에 엄정하게 눈을 붙박고, 역사에 물어서, 그 교훈을 배운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일본의 고립은 점점 깊어지지 않을까. 한국과의 우호관계도 경제협력의 양이나 질만 문제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하여 고난의 길을 걷게 된 상대의 입장에 몸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민에 대해서도 같다.
자주 한국에 가는 나에게, 친구 한 사람이 “혼이 날 때도 많겠지요” 라고 했다. 나는 강하게 부정했다. 정말로 한 번도 불쾌한 생각을 한일이 없다. 내 말을 듣고 그 친구는 웃으면서 말했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푹 가슴을 찔리는 듯한 생각을 한 후가 아니라면, 당신의 한국에 대한 자세는 의심스럽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말에도 부정했다.
『민비암살』 다음 자품도 나는 한국을 쓸 생각이므로, 이제부터도 자주 취재를 다닐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불쾌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의 한국에 대한 친근감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한국과 맺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교류다. 일본을 비롯하여 어느 나라에도, 당연하지만 호의를 가질 수 있는 사람과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특히 여행지에서는 “싫은 사람”과 만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한국에서 “경의나 호의를 가질 수 있는 사람”과 만 만나고, 친한 친구를 가질 수 있을까. 이 우연은 “드문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만난 순으로 쓰면, 서울대학교의 박시인(朴時仁)교수, 김종현(金宗炫)교수 부처, 이원순(李元淳)교수, 게다가 이교수의 애제자인 김은숙(金恩淑)씨. 그녀의 열성적인 협력이 없었더라면, 나는 도저히 이 책을 다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김은숙씨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에 일본에 와서, 츠쿠바(筑波) 대학에서 8년간 유학을 한 고대사 전공의 재원(才媛)으로 지금은 서울의 단국대학교 강사로 있다. 금년(1987년) 봄, 그녀는 츠쿠바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논문 집필중의 가장 바쁜 시기에 자주 도쿄(東京)∙아오야마(靑山) 나의 집에 와서 한국어를 읽을 수 없는 나를 열심히 지도해 주었다. 그녀는 너무나 젊고 유연한 정신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사고방식에 전혀 편견이나 구애되는 마음이 없다. 지금은 나에게 연령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얻기 어려운 친구”이며 나의 가족들에게도 “친근하고 소중한 친구”이다.
금년 7월, 나는 서울 체재 중에 피로 때문에 쓸어져 호텔에 누워 있었다. 은숙씨는 한밤중까지 나를 돌보아 주었으며, 말할 기운도 없는 나의 몸을 계속해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이나 환자식을 날라 주셨다. 이런 친절을 일찍이 나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 받은 적이 있었던가.
한국 국제문화협회 문화국장인 김광수(金侊洙)씨, 또 퇴계학연구원 이사장인 이동준(李東俊)씨나 한국펜클럽 회장인 전숙희(田淑禧)여사, 도쿄의 한국연구원 원장 최서면(崔書勉)씨 등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갖가지 후의도 잊을 수 없다.
新潮社의 이토 오타카코(伊藤貴和子) 씨는 3년 전, 내가 「민비를 쓰고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그것은 꼭 써야 할 테마”라고 측석에서 찬성한 이래, 나와 같이 공부하는 태도로 최후까지 실로 잘 도와 주셨다.
신세를 끼친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987년 가을 저자 (‘22.2.22譯)
閔妃暗殺>(28)-2 大尾
飜譯 後感
『朝鮮王朝末期의 國母 閔妃暗殺』 번역의 大尾를 거둡니다.
‘22.2.22 갓밝이입니다. 1권의 책 飜譯을 마칠 때나 重量感 있는 長文의 創作을 끝낼 때는 새벽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沒頭했다는 意味가 되는 것입니다.
A4용지 240여 Page를 81회에 걸쳐 송고하였습니다.
譯者는 이 책 번역에 들어가기 전 目次와 프롤로그를 읽고 「譯者의 辨」에서 저자 角田 房子(Fusako Tsunod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피력한 바 있었습니다.
⦁取材와 인터뷰를 통해서 作家的인 誠實性을 보이고 있다는 점,
⦁Fact를 쓰려고 노력하였으며 率直 淡白性이 보인다는 점,
⦁韓∙日 兩國 간의 진정한 友好增進에 寄與하고자 한다는 점.
이 책 마지막 부분 「책 말미에」서 저자의 記述에 의하여 譯者의 觀察과 期待는 그대로 的中하였습니다.
閔妃와 大院君의 行蹟과 史實에 대해서 譯者는 솔직히 否定感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다툼으로 당시 국가 운영의 指標였던 儒敎秩序에 危害 를 끼쳤던 점(父子有親 등 孝道를 어떤 名分으로 강조할 것인가)
⦁權力鬪爭을 위한, 패 가름으로 많은 官僚(人材)를 犧牲시킨 점
⦁당시 世界秩序의 底邊에서 용틀임하고 있었던 Great Game(大陸勢力과 海洋勢 力의 爭鬪)에서 제대로 情勢把握을 못하고 大陸세력에 傾倒되어 있었던 점
이런 行蹟에 의하여 亡國의 여건을 스스로 助長하거나 앞당긴 것으로 역자는 斷定하고 있습니다.
저의 持論인 自覺的 未來史觀의 見地에서 130여 년 전 그때의 역사를 오늘의 現實에 投映해봄직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關心事입니다.
⦁새 시대를 전개할 倫理的 基盤과 價値 中心의 國民心性을 어떻게 先導할 것인가?
⦁海洋勢力과 大陸勢力의 葛藤은 그때와 매우 恰似한데 지난 역사에서 어떤 敎訓 을 받아 어떻게 對處할 것인가?
가 우리 국민의 주 안점이r 되어야 한다고 譯者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飜譯書를 읽는 분들이 지난 역사에 대한 再解釋과 그 敎訓을 現實에 어떻게 活用할 것인가에 대한 眼目을 높이고 意識을 深化 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010년에 95歲를 一期로 他界한 著者 角田 房子 女史 의 冥福을 빕니다.
2022년 2월 22일 갓밝이
譯者 筆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