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토론토 영건 3인방 칼럼에서 잠시 언급했었던 투수 팻 헨트겐. 이번 칼럼 시리즈의 컨셉이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사라져 가는 투수들임을 감안한다면, 아마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90년대 초반 최고 영건에서 사이영상까지 수상하면서 완숙미를 갖췄던 뛰어난 선수. 지금에서야 부상으로 이래저래 고생하면서 국내 팬들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지만, 확실히 이 선수의 커리어 초반만 해도 메이저리그 팬들은 그의 미래를 생각하며 가슴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지금에서 헨트겐을 기억하는 팬들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은데... 그도 그럴 것이 볼티모어로 온 뒤 타미 존 서저리를 받으면서 벌써 2년째 쉬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으니 기억에서 사라져 가는 것도 사실이고. 그나마 2000년 새인트 루이스 시절에 엄청난 RS를 받으며 15승 올린 그저 그런 투수라는 기억만이 남아 있을 것 같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헨트겐은 현재 전혀 활약을 보이지 못하는 선수고, 올 시즌이 끝나면 프리에이전트가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원하는 팀이 없어 은퇴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전히 그는 34살의 나이 밖에 되지는 않는데 말이다. 여타 선수들은 이 나이 때에 대다수 전성기를 보내지만 그는 팔꿈치 부상으로 언제 복귀할지 조차 의문스럽다. 항상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90년대 초반 토론토 전성시대에 혜성같이 등장한 슈퍼 영건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토론토의 시대가 지나간 다음에도 팀을 유일하게 지키면서 활약을 했던 투수 팻 헨트겐. 역시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팀은 토론토다. 지금에서야 많은 팬들의 머리 속에 남아있지 못하지만 한번 그에 대한 기억을 들춰본다.
1. 93' 최강 토론토에 등장한 슈퍼 영건.
시토 개스턴의 지휘아래서 최강의 90년대 초반 시절을 보내던 토론토. 92년에 21승의 잭 모리스와 언히터블 후안 구즈먼, 그리고 지미 키를 주축으로 한 강력한 선발진과 34홈런 119타점의 조 카터, 26홈런 108타점의 대이브 윈필드에 로베르토 알로마, 존 올러루드 두 영건들로 짜여진 타선. 말할 필요 없는 당시 최강이었다.
특히 연달아 영입된 용병 카터와 윈필드는 팀의 타선에 화력을 더해줬고, 에이스가 문제로 지적된 때에 들어온 잭 모리스의 역할 또한 상당했었다. 게다가 시즌 중반에는 닥터 K 대이빗 콘까지 영입하면서 우승에 더욱 박차를 가했었다.
92년 이런 멤버들을 이끌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들의 전성시대는 화려한 막을 올렸고, 더불어서 그들은 다음 해에 잭 모리스와 맞먹는 슈퍼 에이스 대이브 스튜어트마저 영입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모리스와 스튜어트가 합친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자면 케빈 브라운과 랜디 존슨이 합친 것이나 마찬가지 일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92년 토론토와 오클랜드가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만날 때 각 팀의 에이스로서 이 두 선수들이 대결을 펼쳤다는 점. 적과의 동침이라고 할까? 여하튼 당시 대이브 스튜어트의 토론토 행은 당시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자 즐거움을 선사했었다.
거기에 타선에는 은퇴한 대이브 윈필드의 뒤를 메우기 위해서 폴 몰리터가 영입된 상태. 더불어서 시즌 중반 오클랜드로부터 당대 최고 리드오프 릭키 헨더슨을 영입한 것은 거의 '대형 블록버스터'나 다름없었다. 결국 93년에도 이 멤버는 물샐 틈이 없었던 것이고, 예상대로 월드시리즈 6차전에 터진 조 카터의 기적 같은 홈런으로 월드시리즈 챔피언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팻 헨트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시 토론토에서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선발 투수진이었다. 대이브 스튜어트와 잭 모리스로 이어지는 막강 1,2 선발진. 게다가 91년을 통해 언히터블이라 불리게 될 만큼 무서운 슬라이더를 자랑했던 후안 구즈먼. 게다가 91년 15승을 올리며 구즈먼과 같이 슈퍼 영건 대열에 올랐었던 토드 스토틀마이어까지 있었으니.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 선발진은 모두 무너져버렸고, 여차하면 토론토의 마운드는 붕괴 직전까지 갈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세주처럼 등장한 투수가 바로 팻 헨트겐이다.
헨트겐은 당시 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젊은 투수들 후안 구즈먼이나 토드 스토틀마이어 만큼 유명하지도 않았었고, 또한 기대주로서 메이저리그에 올라 호시탐탐 선발 진입을 노리는 알 라이터처럼 기대를 받지도 못했었다. 그저 91년 22살이라는 비교적 빠른 나이에 메이저리그로 올라 92년 불펜에서 5.36의 그저 그런 방어율을 보인 젊은 선수 정도? 물론 나이가 어렸던 만큼 기대는 있었으나, 당시 구즈먼 - 스토틀마이어 - 라이터 같은 선수들에 대한 기대치에 비하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토론토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시즌 초반 대이브 스튜어트가 부상으로 로테이션에서 빠져 선발진에 구멍이 생겼던 것. 토론토는 원래 모리스 - 스튜어트 - 구즈먼 - 스토틀마이어 - 라이터로 짜여진 로테이션을 가졌으나, 스튜어트가 빠지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헨트겐을 로테이션에 투입시키게 된다. 이 상황에서 기대를 받았던 쪽은 알 라이터. 하지만 의외로 그는 선발로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당시 기대 이상의 큰 활약을 했던 쪽은 바로 팻 헨트겐이다.
4월달 방어율 2.25를 기록해 이미 심상치 않은 활약을 예견했던 그는, 급기야 6월달에는 6게임 선발등판에서 5승에 방어율 3.44를 기록하는 놀라운 활약을 보이면서 새로운 팀의 구세주로 떠오른다. 당시 상황에서 대이브 스튜어트가 곧 복귀했지만 잭 모리스와 더불어 둘 다 이름 값과는 다른 부진에 빠졌었고, 스토틀마이어마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며 사실상 토론토의 마운드는 헨트겐과 구즈먼이 이끌게 된다. 선발진에서는 부진을 보인 알 라이터가 밀렸다.
헨트겐은 32번의 선발에서 19승 9패 방어율 3.87을 기록하는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으며, 오히려 이 수치는 33번의 선발에서 14승 3패 방어율 3.99를 기록한 후안 구즈먼을 능가하는 수치였다. 부상에서 돌아온 대이브 스튜어트는 4.44의 방어율로 이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모리스의 경우에는 6.19라는 커리어 최악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나이를 속이지 못했다. 4.84의 스토틀마이어도 마찬가지. 그리고 평균적으로 치더라도 그는 사이영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빼어난 성적을 보였었다.
결국 정규시즌에서 그들이 플레이오프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타력 탓도 있겠지만 헨트겐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컸었다. 만약 그가 선발진에서 무너졌다면 구즈먼 혼자 버티기에는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그 해 플레이오프에서 헨트겐은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만난 시삭스에 호된 플레이오프 데뷔전을 치른다. 명장 시토 개스턴도 그 상황을 미리 파악했었는지, 1선발 구즈먼은 그대로 두되 2선발로 대이브 스튜어트를 투입시키게 된다. 3선발이 팻 헨트겐이었고 부진했던 토드 스토틀마이어는 4선발로 밀린다. 잭 모리스는 부상 상태.
당시 1,2차전에서 구즈먼과 스튜어트의 호투로 승리를 얻었었던 토론토. 3차전에 등판한 헨트겐이 3연승을 이어주길 바랬지만, 그는 3이닝 6실점으로 무너지면서 팀에 첫 패배를 안긴다. 다음 시합에서 스토틀마이어의 패배로 시리즈를 동률로 내주었던 토론토는, 5,6 차전에 나란히 등판한 구즈먼과 스튜어트가 승리를 얻어주면서 월드시리즈에 다시 나가게 된다.
헨트겐은 필라델피아와의 월드시리즈에서는 좋은 활약을 한다. 초반 1,2 선발이 무너지면서 1승 1패를 나눠가졌던 양 팀은, 3차전에 등판한 헨트겐이 6이닝 1실점의 호투로 팀에 승리를 안기면서 리드권을 잡게 된다. 그 다음은 모두가 아는 데로 6차전 조 카터의 9회말 끝내기 3점 홈런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하긴... 당시만 해도 팻 헨트겐이 그렇게 큰 주목은 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93년 토론토는 거의 타격으로 승부를 내는 팀이었고, 릭키 헨더슨 - 로베르토 알로마 - 존 올러루드 - 조 카터 - 폴 몰리터로 이어지는 타선은 거의 환상이었다. 또한 당시 적재적소에 선수를 집어넣어 성공을 거둔 명장 시토 개스턴의 인지도 또한 상당했었던 상황. (정진구 기자의 말에 따르면 스카이 돔에는 개스턴의 저지 넘버가 영구결번으로 되어 구장에 걸려있다고 한다.) 헨트겐은 그 활약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여전히 후안 구즈먼 - 대이브 스튜어트의 인지도에는 밀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93년을 통해 토론토가 기대치 못한 젊은 투수, 팻 헨트겐을 건졌다는 것. 그는 앞으로도 많은 신임을 얻게 된다.
2. 후안 구즈먼을 넘어서 사이영상을 수상하다!
94년도 토론토는 우승후보였다. 비록 잭 모리스가 나가게 되었지만 이미 자신의 기량을 보이지 못하는 노장 투수보다는 팻 헨트겐이 차라리 많은 기대를 해볼만한 상황이었고, 또 알 라이터에게도 이제 확실한 한 자리를 줄 때도 되었다는 소리 또한 있었다. 후안 구즈먼은 여전히 토론토의 센세이션이었고 대이브 스튜어트도 팀의 베터랑 에이스로서 듬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타선에서도 마찬가지. 비록 대이브 윈필드가 나갔지만 93년 타율 0.363에 24홈런 107타점을 쳐준 무서운 신예 존 올러루드가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조 카터 또한 여전했으며 폴 몰리터도 건재했다. 드본 화이트와 로베르토 알로마가 이루는 스피드와 수비도 리그 최강 수준. 그렇기에 토론토의 3연패는 당시 많은 전문가들이 점치는 상황이었다.
물론 94년에는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서 3연패가 물 건너간 것도 있었지만, 이미 그들의 페이스는 이전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55승 60패의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양키스에 무려 16게임차나 뒤진 채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실패한 것. 타선은 여전히 위력적이었지만 문제는 투수진이었다.
작년 이미 하락세를 보인 대이브 스튜어트는 방어율 5.87에 머물고 말고, 후안 구즈먼 또한 하락세를 이어가며 5.68까지 방어율을 급상승시키고 만다. 기대주 알 라이터도 5.08의 방어율. 결국 이 로테이션에서 제 역할을 해낸 것은 작년에 이어 또 다시 팻 헨트겐 하나였을 뿐이다.
비록 토론토가 성적하락 하면서 그 빛을 잃고는 말았지만, 그래도 당시 그의 활약은 뛰어났었다. 13승 8패 방어율 3.40. 94년 당시 기록으로 그는 팀의 거의 모든 투수기록에서 1위를 기록할 정도였으니... 93년 헨트겐의 반짝 활약에 '설마' 하고 지켜보던 메이저리그 팬들은, 94년에도 변함 없는, 오히려 이상 가는 활약이 나오게 되자 그에 대한 시선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후안 구즈먼의 위상은 대단했었다. 20대 초반의 선수가 91년 23게임 선발에서 10승 3패 방어율 2.99, 92년 28게임 선발에서 16승 5패 방어율 2.64를 기록했었으니... '언히터블'이라 지어진 그의 별명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특히 당시 구즈먼의 슬라이더는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수준으로 대단했었다. 아직까지도 슬라이더하면 구즈먼을 떠올릴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헨트겐이 위상면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구즈먼이 혜성같이 등장한 91년에는 그보다 앞선 선발이 탐 캔디오티와 지미 키 수준이었던 것에 반해, 헨트겐이 역시 깜짝 등장을 한 93년에는 팀의 상위 선발이 잭 모리스, 대이브 스튜어트, 후안 구즈먼이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있던 제프 위버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랑, 현재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뒤의 스포트라이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헨트겐도 구즈먼 정도의 성적을 올리기는 했다. 오히려 승수에서는 더 많았으니. 하지만 당시 배경 상, 상대적으로 팀의 투수진이 더 약할(?) 때 마운드로 올라온 후안 구즈먼이 더 조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헨트겐은 당시 구즈먼에 비해서 기대치나 위상이 조금 떨어졌었다.
하지만 94년을 계기로 약간 그런 평가에 대한 반론이 나타나게 된다. 차세대 에이스는 누구냐 하는 것. 이전 같으면 후안 구즈먼이 당연히 꼽히고 설마 하는 마음에서 스토틀마이어나 라이터를 꼽겠는데, 이제는 팻 헨트겐이 만만치 않은 지지도를 가지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94년은 그런 흐름이 나오게 한 시기였고, 결국 팬들의 관심은 95년에 쏠리게 된다. 헨트겐이냐 구즈먼이냐.... 하지만 결과는 황당했었다.
95년은 토론토 팬들에게 정말 실망스러운 시즌이었다. 94년의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도약을 노렸는데, 선수들이 모두 전반적인 성적하락을 보이면서 최악의 성적을 올리게 된 것이다. 56승 88패. 처참한 기록이었다. 90년대 초반의 흐름을 완전히 장악했고, 그다지 팀 개편도 하지 않은 탄탄했던 토론토가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95년 그들은 대이브 스튜어트가 나간 에이스 자리를 대이빗 콘을 영입해 채우게 된다. 그 다음은 구즈먼과 핸트겐 둘 중 하나가 무슨 일을 해주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계획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헨트겐은 10승 14패 방어율 5.11, 구즈먼은 4승 14패 방어율 6.32로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결국 마운드에서는 대이빗 콘 혼자서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알 라이터가 늘그막에 기대치를 어느 정도 해냈지만 이미 재건을 헨트겐이나 구즈먼에서 봤던 토론토로서는 큰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실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믿었던 존 올러루드가 고작 8홈런 54타점에 그치는 파워와 클러치 능력의 엄청난 저하를 가져왔고, 조 카터와 폴 몰리터도 나이 탓에 이제 예전만 못한 타격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도약을 노리던 그들에게 처참한 결과로 다가온 성적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시즌 중반에 대이빗 콘을 라이벌 양키스에 팔아버렸다는 것은 결국 시즌 포기를 선언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고, 더 길게 봐서 더 이상의 이 멤버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론토는 96년부터 대대적인 팀의 개혁에 착수한다.
알로마와 몰리터를 처분하고 그 자리에 토마스 페레즈와 카를로스 델가도를 집어넣어 개혁의 시작을 알렸고, 투수진에서도 이미 대이빗 콘을 내보낸 것을 비롯, 알 라이터마저 플로리다로 보내버린다. 그리고는 폴 퀀트릴, 마티 얀젠등을 올리면서 리빌딩을 시도한다. 선발진은 핸슨을 제외하고는 모두 20대였으니...
어느 정도는 성공적이었다. 팀의 성적은 74승 88패로 그래도 꽤 괜찮았다. 더불어 몬스터 시즌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한때나마 3루수 에드 스프라그가 36홈런 101타점을 기록해주면서 팀에 희망을 던져주었었다. 또한 새로 기용된 24살의 신예, 카를로스 델가도 또한 첫 풀타임으로서 괜찮은 성적을 보여줬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해 토론토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팻 헨트겐 - 후안 구즈먼 콤비가 다시 한번 살아난 것. 여전히 20대를 자랑하는 그들은 각각 20승 10패 방어율 3.22, 11승 8패 방어율 2.93을 기록하면서 팀의 기대에 부응하게 된다. 구즈먼이 부상을 겪으면서 헨트겐보다 8게임을 적게 나와서 그렇지, 수치상으로 본다면 막상막하였던 당시 상황이었다. 하지만 헨트겐이 구즈먼을 이때부터 앞서나가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생기니, 그것이 바로 사이영상의 수상이다.
20승 10패 방어율 3.22. 사이영상 수상자치고는 조금 모자란 수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그는 무려 265.2이닝을 소화하면서 10번의 완투와 3번의 완봉승을 거두는 모습을 보였다. 이 세 가지 수치는 모두 당시 리그 1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닝 이터로서의 모습이 당시 투표단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했었다.
게다가 그의 수상 경쟁자였던 양키스의 페팃은 비록 21승을 올렸으나 방어율이 3.87로 떨어지는 상황이었고, 더불어서 완투도 두 번에 불과했었다. 방어율이 4점대 후반이었던 무시나, 17승의 내이기는 조금씩 그에게 밀리는 상황. 오히려 후안 구즈먼의 수상 가능성이 있었으나, 그는 부상으로 8게임이나 적게 등장했었기에 이닝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수상 후보에도 들지 못했었다. 어떤 면에서는 헨트겐이 당시 로저 클레멘스 같은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행운을 가진 면도 있었다.
여전히 구즈먼이라는 존재의 벽은 있었다. 하지만 그가 92년 한번 올스타에 뽑힌 대에 반해, 헨트겐은 93년, 94년, 96년에 올스타로 뽑히면서 어느 정도 계속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96년의 사이영상 수상은 누가 토론토의 차세대 에이스인지를 말해주는 것과 같은 결과. 헨트겐이 '슬라이더의 제왕' 구즈먼을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3. 부활을 노린 토론토, 그러나 실망스러웠던 헨트겐...
구즈먼과 헨트겐이 96년을 기점으로 동시에 살아나고, 션 그린-카를로스 델가도-에드 스프라그 같은 젊은 선수들에서 많은 가능성을 발견한 토론토는, 아마 현 시점에서 거의 마지막 투자라고 할 수 있는 시장 활약을 보인다. 바로 역사적인 투수이자, 지금과는 다른 그때 엄청난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로켓' 로저 클레멘스를 보스턴으로부터 영입한 것. 토론토 팬들은 로켓의 영입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흥분했었다.
지금이야 로켓을 그저 '한때 잘한 늙은이' 정도로 기억하는 팬들이 대다수이지만, 그 당시 그의 위력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단 96년까지만 보더라도 그는 보스턴에서 86년 풀타임 선발을 차지한 뒤 그 후로 7년 연속 17승 이상을 기록했고, 그 기간동안 모두 200탈삼진을 넘게 기록했었다. 특히 87년 18완투승 7완봉승에 281.2이닝을 투구하는 인간 같지 않은 모습도 보였었고, 다음 해에도 또 열심히 뿌려대면서 14완투승 8완봉승 264.0이닝을 소화했었다. 특히 90년에는 21승 6패 방어율 1.93이라는 믿기 어려운 성적을 올리기도 했었다. (물론 27승을 올린 밥 웰치가 사이영상을 가져갔지만) 당시에는 로켓에 비교될 선수가 없을 만큼 대단했었다.
86년에는 시즌 MVP와 사이영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사건을 벌렸었고, 87년과 91년에도 사이영상을 수상했었다. 올스타야 원래 단골이었고 방어율 1위도 4번이나 차지했었던, 모든 기록에서 거의 독보적이다 할 정도로 놀라웠었다.
하긴, 그의 위상도 95년과 96년을 기점으로 잠시 떨어졌었다. 부상에 부진이 겹치면서 역시 혹사에 대한 조기 노화현상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으니. 당시 보스턴이 로켓을 잡지 않고 내보낸 것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토는 양키스와 영입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다가 거액을 투자해 그를 잡는 데 성공했다.
토론토 팬들에게 있어서 잭 모리스 - 대이브 스튜어트의 향수를 잇게 해주는 사건과 같았다. 그들의 영광은 로저 클레멘스 - 팻 헨트겐 - 후안 구즈먼으로 이어지는 노장과 신예의 조화 속에서 부활되리라 예견되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2년간 주춤했던 로저 클레멘스가 그의 신무기 스플리터를 장착하면서 21승 7패 방어율 2.05, 297탈삼진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면서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타선에서는 조 카터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면서 토론토의 부활은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96년 사이영상 수상자인 팻 헨트겐이 로켓이 비해서 뒤질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좋은 활약을 보였는데, 당시 그가 소화한 264이닝과 9완투 8완봉승은 모두 로켓과 같은 수치였다. 당시 로켓의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한다면, 당시 28살에 불과했던 헨트겐이 얼마나 좋은 활약을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5승 10패 방어율 3.68. 5월달에는 1.50의 방어율을 보이는 멋진 활약을 하기도 했다. 로저 클레멘스와 그가 이루어낸 막강 이닝 이터 1,2 선발의 위력은 당시 토론토 최고의 힘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76승 86패.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로켓과 클레멘스가 이룬 막강 선발진에 비해 타선의 위력이 떨어진 것이 그 이유였다. 기대를 모으고 영입되었던 타자 오르란도 메르세드는 실망감을 안기고 스프라그도 몬스터 시즌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보인다. 마이너 최고 유망주들이었던 호세 크루즈와 알렉스 곤잘레즈는 기대 이상으로 망가졌었다.
무엇보다 실망스러웠던 것은 후안 구즈먼. 헨트겐과 막강한 젊은 선발 라인을 꾸며주리라 기대 받았지만, 그는 데뷔이후 계속 하락이었다. 결국 인지도 면에서 헨트겐에 밀리게 되고, 97시즌은 헨트겐의 활약을 멀리서 지켜보며 부상 탓에 일찌감치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후안 구즈먼, 상당히 안타까운 존재였다. 슬라이더는 역시 그에게 타미 존 서저리라는 큰 악재를 안겨다줬고, 대투수로 성장하리라 기대를 모았던 것과는 달리 부상과 싸움을 하다가 그는 결국 96년 마지막 날개를 피고 야구 인생을 거의 접었다. 당시가 그의 나이 29살에 불과했으니 아쉬움은 더한다. 이후로 그는 저니맨으로 전락하다가 33살의 젊은 나이로 은퇴를 택하게 된다.
98년 토론토는 다시 클레멘스와 헨트겐을 주축으로 플레이오프를 노리고, 문제였던 타선에서 강타자 호세 칸세코를 영입하는 등 힘을 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런 대로 나타났다. 카를로스 델가도와 션 그린이 기대만큼의 성적을 올려주고 유망주 섀넌 스튜어트의 활약도 기대 이상이었다. 게다가 46홈런으로 팀 파워에 힘을 더해준 칸세코의 가세는 더욱 큰 힘이었다. 하지만 이런 타력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작년과 달리 투수진 탓에 다시 한번 좌절을 경험한다.
클레멘스야 여전히 20승 6패 방어율 2.65에 271탈삼진을 잡아내며 미친 듯이 날라 다녔지만, (당시 그는 다시 97년에 이어서 트리플 크라운과 사이영상을 동시에 차지하게 된다. 이건 현대 야구에서 이해하기 힘든 기록임에 틀림없다.) 믿었던 클레멘스에 이은 2선발 헨트겐이 방어율 5.17로 크게 망가진 것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토론토가 가장 믿었던 것이 바로 클레멘스 - 헨트겐 1,2 선발이었는데, 의외로 하락세를 보인 헨트겐은 팀에 실망감을 주게 된다. 후안 구즈먼 역시 4.41로 그저 그런 모습을 보인 뒤, 결국 볼티모어로 시즌 중반에 트레이드 되게 된다.
헨트겐으로서는 참 아쉬운 일이었다. 20대 젊은 나이에 에이스로서 힘들게 버텨오다가 로저 클레멘스라는 걸출한 우산을 얻었는데, 어이없게도 오히려 그때 더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었다. 헨트겐도 부상 때문에 계속 고전을 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 역시 강견적인 슬라이더를 자랑하는 투수였기에 부상의 위험이 항상 있었다. 더불어서 그는 플레이오프의 사활이 걸려있던 시즌 막판 계속 부진하면서 팬들의 비난도 들었었다.
99년도 마찬가지. 팀에서는 로켓을 양키스로 트레이드시키고, 플레이오프의 사나이인 대이빗 웰스를 데려와 큰 게임에 대비하지만, 투수진이 완벽한 붕괴를 겪으면서 무너지고 만다. 특히 타선에서는 토니 바티스타가 더해지고, 그린과 델가도가 모두 커리어 하이의 기록을 보여주면서 다시 98년과 같은 위력을 보여줬는데... 투수진이 망가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고, 헨트겐 또한 4.79의 또 한번 실망스러운 방어율을 보인 채 토론토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만다.
96년 27살의 나이로 사이영상을 거두며, 후안 구즈먼과 환상의 콤비를 이루면서 뭔가를 해주지 않을까 토론토팬들에게 상당한 기대를 모았었던 헨트겐은, 아쉽게도 98년을 기점으로 해서 계속해서 하락하고 만다.
5. 이적, 그리고 잊혀지고 마는...
2000년 그는 카디널스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팀의 에이스로서 영입된 헨트겐은 초반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토니 라루사 감독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 비록 시즌 막판 리그 적응을 하면서 어느 정도 기량을 보이지만 그것도 예전만은 못했고, 오히려 이 팀에서는 20승의 대럴 카일과 20살의 좌완 릭 앤키엘이 오히려 더 이름을 날리게 된다. 아마 국내 팬들도 2000년 카디널스에서 위의 두 선수는 기억해도 헨트겐은 거의 기억 못하리라 본다.
여하튼 명장 라루사 감독의 지휘아래 카디널스는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되고, 헨트겐은 어이없게도 선발 자리에서 밀렸다가 뉴욕 메츠와의 챔피언쉽 시리즈 5차전에 등판, 4회말 강판당하는 수모를 당하면서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은 위력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그 게임에서 완봉승을 거둔 햄튼의 조역 역할만 확실하게 해내게 된다.
카디널스로서도 이미 스테판슨, 앤키엘 등을 건진 상황에서 핸트겐에게 별 미련이 없었다. 그는 프리에이전트로서 볼티모어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그는 500만 달러도 안 되는 연봉을 받고 볼티모어와 계약한다. 예전 그의 명성에 비해볼 때 상당히 적은 액수였다. 물론 당시 책정가로 치자면 꽤나 받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이전 사이영상 수상자에 32살의 젊은 나이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가치가 얼마나 하락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볼티모어에서 초반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서 9게임 등판, 3.47의 방어율로 어느 정도 활약을 기대케 한다. 하지만 그의 팔꿈치 부상이 그때 제대로 발생하게 되고, 결국 그는 수술대에 오르면서 시즌을 접게 된다. 그리고는 아직까지 마운드에 서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그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기에 팬들과 언론은 여기저기서 그의 복귀를 부정확하게 흘리고 다니지만, 여러 소식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상태로는 이번 시즌 출장이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까지도 불투명. 결국 헨트겐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이미 부상으로 투구가 어려울 정도까지 몸이 망가진 것이다. 이유야... 이번 시리즈에서 나온 투수들과 마찬가지이다.
6. Pat Hentgen...
헨트겐은 6피트 2인치 200파운드라는, 투수로서는 상당히 이상적인 신체조건을 지닌 선수이다. 동시에 그는 상하체의 사용이 상당히 유연한 선수로도 기억된다. 특히 워낙 체력적으로 뛰어난 면을 보여서, 시즌 내내 꾸준한 활약을 보이고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있는 이닝 이터로서 이름을 날렸었다.
그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계속해서 두 자리 승수를 기록했었는데, 이 것은 그렉 매덕스, 탐 글래빈, 랜디 존슨, 마이크 무시나, 페드로 마르티네즈만이 기록했을 뿐이다. 여기서 거론되는 이름들을 본다면, 90년대 헨트겐이라는 존재가 어느 정도의 위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96년 사이영상 수상이라는 프리미어가 항상 붙어 다녔다.
헨트겐은 싱킹 패스트볼들을 상당히 잘 구사했었는데, 투심 패스트볼과 싱커는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할 정도이다. 92마일 정도에 이르는 투심은 상당한 움직임을 동반했었고, 특히 싱커는 구속이 90마일 가까이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속도를 자랑했었다. 아쉽게도 카디널스로 건너오는 때에는 이미 부상으로 싱커의 위력을 많이 잃었었으니... 지금 볼티모어로 가서 어떤 식으로 타자를 승부하는 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마 이런 싱킹 패스트볼들을 다시는 뿌리기 힘들 것이라 보인다.
또 헨트겐에서 유명한 구질이 슬라이더였다. 당시 그 구질이 스플리터라고도 거론이 되었었는데, 실제로 80마일 중반까지 다가갈 정도로 속도도 있고 각도 상당했었으니 스플리터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그의 승부구는 이 슬라이더였다. 하지만 역시 그도 신체의 이용을 많이 하는 투수로서 슬라이더의 각을 살리기 위해 팔꿈치를 무리하게 이용하다가 보니 부상을 입게 되었고, 그것은 타미 존 서저리로 연결이 되었다.
그가 32살 때까지 올린 승수가 120승이었다. 최소한 매년 10승 이상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대부분 전문가들의 생각이었는데, 따라서 헨트겐도 커리어 200승은 큰 무리 없이 달성할 수 있으리라 하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었다. 게다가 그는 단지 200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발전해 줄 것으로 생각되었으니... 아쉽게 부상이라는 장벽이 그를 가로막았기는 했지만 말이다.
98년부터 시름시름 앓아온 팔꿈치 부상. 슬라이더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은 헨트겐 야구 인생에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그 많은 타자들을 그 구질로 요리해 왔었는데... 그 동안 감각적으로 가져왔었던 커브의 사용이 이때부터 크게 늘어났었다. 하지만 그의 커브는 슬로 커브였기에 타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태였다.
토론토에서 당시 젊은 에이스를 맡으면서 엄청난 위력을 보였던 헨트겐. 데뷔 초반만 해도 메이저리그의 많은 기록을 갈아치울 태세로 달려들더니만, 이제는 34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상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선수로 변해버렸다. 팬들은 거의 기억을 못하고, 심지어 헨트겐이 토론토의 투수였다는 것도 모른다.
어쩌면 헨트겐이 토론토의 투수라고 기억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예전의 향수에 찌들어 있는 사람일수도. 이제 와서 명확히 평가해보면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기 힘든 투수가 맞는데... 아무리 그 당시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려고 해봤자, 내년 35살의 나이로 복귀한다고 해봤자 더 이상 슬라이더를 무리해서 쓰지 못하는 헨트겐에게 90년대 중반 같은 부활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한 때 많은 기대를 받았던 젊은 투수. 슬라이더와 혹사에 따른 부상으로 이제는 이렇게 까지 망가졌지만, 그래도 월드시리즈 반지를 두 번이나 껴보고, 사이영상까지 수상해봤으니 투수로서 할 수 있는 영광은 다 차지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퇴해도 별다른 여한은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내가 야구를 그만 보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헨트겐의 그 슬라이더와 싱커를 한번 더 보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