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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아더, '성경은 주의 재림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는 때와 야곱의 환난의 때와 연관된 두 단계로 기록한다... 교회는 환난 전에 휴거될 것'
감람산 설교를 살펴보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주님은 영광의 재림에 앞서 일어날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런데 재림이 있기 전 반드시 7년 환난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재림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성경은 재림을 두 단계로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휴거다.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해 오시고 성도들이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난다(살전 4:14-17). 두 번째 단계엔 예수님이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셔서(유 1:14) 원수들을 심판하신다. 다니엘이 예언한 70번째 이레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해 오실 날이 임박했음과 성도들과 함께 영광 중에 다시 오심을 알리는 징조들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 모두 만족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교회는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성경은 다니엘이 예언한 70번째 이레 동안 하나님의 초점은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환난의 기간은 로마서 11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알리는 전주곡이 될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휴거, 즉 교회가 옮겨지는 사건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왔음”(롬 11:25)을 알린다. 그리고 환난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다시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하는 고통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참조. 24절).
예레미야 30장 7절은 환난의 본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분명 환난은 교회가 아닌 민족적, 국가적 이스라엘에게 그 의미가 있다. 그 환난에 관한 성경의 어떤 기록도 교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실 사도 요한은 하늘나라를 묘사하며 이십사 장로들을 언급했다(계 4:4). 그들은 신약의 교회를 가리킨다. “장로들”(헬라어 원문에는 presbuteros를 사용)이란 교회의 지도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환난과 관련된 모든 사건은 장로들이 이미 하늘로 간 후인 6장에서야 등장한다.
마지막 때에는 믿는 자들이 극심한 핍박을 받게 됨을 성경 곳곳에서 예언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교회가 환난 전에 하늘로 들려 올려진다면 그 믿는 자들은 어디서 나타난단 말인가? 그들은 휴거 후에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이다.
휴거는 정말로 임박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그 두 번째 단계는 주님이 성도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오시는 것이다. 감람산 설교에 담긴 모든 징조와 경고는 두 번째 단계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왜 신약시대 사람들에게 이러한 징조들에 대하여 경고하셨을까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살아서 그런 끔찍한 징조들을 경험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았던가. 왜 이것을 복음서에 기록하여 모든 세대 모든 교회를 향해 경고하셨는가?
바벨론 유수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과 경고도 마찬가지다(사 39:6-7). 그의 예언은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에 성취되었다. 예언은 죄의 결과에 대해 경고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 예언은 끔찍한 심판을 당할 이들을 향한 경고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존 맥아더, <재림, 다시 오실 주님의 약속>(넥서스CROSS)에서
존 맥아더, "'그 날 환난 후에...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말씀은 환난 후 휴거가 아니라 환난 후 택하신 유대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
교회의 휴거, 환난 전인가 환난 후인가?
-<재림의 증거>(존 맥아더/넥서스 CROSS)
기독교를 종교로만 본다 해도 종교 본연의 기능에 속한 내세나 종말에 대한 강조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 기독교는 온통 현세 중심의 가르침과 가치관으로 만연한 듯싶다. 성경은 자주 종말을 제시하면서 “그러니 이렇게 살라”고 말한다. 미래의 소망이 지금 거룩한 삶의 동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만큼 교회가 현세적으로 세속화되었다는 증거다.
2016년에 1,000명의 미국 목회자를 대상으로 벌인 라이프웨이의 리서치를 인용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미국 개신교 목회자들의 36%가 교회의 환난 전 휴거를 믿고, 25%는 휴거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보며, 18%는 환난 후 휴거를 믿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휴거가 환난 중에 일어날 것으로 믿거나(4%), 휴거는 이미 이뤄졌다거나(1%), 지금은 하나님의 진노가 지상에 임하기 직전이라는 견해(4%)도 있었고, 이상의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믿는(8%) 이들도 있었다. 전체의 절반 정도는 적그리스도가 조만간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고 답했고, 장로교나 감리교 같은 주류 개신교 소속이 아닌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43%가 환난 전 휴거설을 지지했다.
개신교 내에서 종말론을 놓고 이렇게 다양한 견해로 나뉘는 이유는 뭘까? 크게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의 사건들을 상징으로 보느냐,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에서 차이가 난다. 이 차이가 지금 개신교 종말론을 주된 한 가지 이슈로 압축시킨다. 교회의 휴거가 환난 전인지 후인지, 곧 성경이 예수님의 재림을 놓고 지상 재림의 한 시점만 말하는지,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두 시점으로 나누는지다.
극단적 과거주의와 미래주의 종말론의 한계
이 책은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때의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을 ‘과거주의자’(무천년설자)라고 지칭하면서, 그 사건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실제로 종말의 때에 지상에 일어날 일이라고 보는 ‘미래주의자’(전천년설자)의 입장에서 성경에 기록된 재림 사건을 신학적으로 차근하게 조명해낸 책이다. 환난 전 휴거설을 전제로 재림 사건의 신학적 중요성과 임박성, 재림의 징조들과 구체적인 양상들, 재림에 깨어 준비해야 할 성도의 자세 등에 대해 집중분석했다. 탁월한 성경 해석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저자는 먼저 전천년설이 성경의 종말론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확언한다.
“성경에 담긴 계시의 말씀들을 다른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게 대해야 한다. 본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문자적 의미가 명확할 때에는 영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비유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본문 안에 확실하게 비유적 언어가 사용되었을 때에만 그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성경이 문자 그대로 말하고 있을 때는 굳이 다른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모든 주장을 검토해보면 전천년설만이 성경 해석상의 증거가 가장 확실하다. 무천년주의자들과 후천년주의자들은 성경 원문에 대한 상고보다 신학적 입장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p.25-27).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양극단, 곧 극단적 과거주의나 미래주의는 지양해야 한다는 일침으로 균형 잡힌 종말론 해석의 필요성 또한 강조한다. 우선 극단적 과거주의자들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 24:34)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바탕 위에 신학의 구조를 세웠다. 그들은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에 성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해석한다. 또한 실제로 그 예언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점령되고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는 혼란과 정치적 동요 속에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믿는다(p.7).
저자는 이렇게 모든 예언이 문자 그대로 현실에서 일어날 일들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만을 주로 담고 있다고 보는 극단적 과거주의자들의 대척점에 장래 일들에 대한 성경의 모든 기록을 선정적으로 포장하려는 극단적 미래주의자들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들은 성경에 비추어 현재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들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긴다(p.14).
이들은 특히 1948년에 성취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유대인들의 본토 귀환을 목격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재림 사건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이 엄금한, 재림의 ‘그 날’을 구체적으로 점찍는 해프닝으로 교회 안팎에 줄곧 큰 혼란을 일으켜왔다. “세상의 사건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지침이 될 수 없다. 끊임없이 최신 뉴스 기사에 맞추어 성경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그들의 목적에 따라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밀랍인형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순전함을 무시하는 행위이다”(p.18).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저자가 미래주의적 종말론이 갖는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종말의 사건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이유는 뭘까? 성경이 신자들에게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고(마 16:3) 늘 깨어 준비하라고 강조하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신학적 노선이나 성향 차이를 빌미로 많은 교회가 여전히 재림 사건에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어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미래주의적 관점으로 종말 사건들의 실제적인 역사성을 변호하면서 왜 모든 교회가 주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어느 때든 항상 깨어 준비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여기서는 저자가 환난 전 휴거설이 성경적이라고 보는 주된 세 가지 근거를 살펴보면서 이 책의 핵심 테마를 함께 체감해보고자 한다.
교회의 환난 전 휴거를 지지하는 세 가지 성경적 근거
첫째,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을 교회를 위한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두 단계로 기록한다.
첫 번째 단계는 휴거다.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해 오시고 성도들이 끌어 올려져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난다(살전 4:14-17).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예수님이 성도들과 함께 이땅에 오셔서(유 1:14) 원수들을 심판하신다. 다니엘이 예언한 70번째 이레(단 9:25-27), 곧 유대인에게 남은 7년 환난의 한 이레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일어나야 한다.
지상에 다시 오신 예수님은 심판만 행하시지 않는다. 땅에 거하는 악한 자들에게 그 날은 심판의 날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롬 11:6). “그 날 환난 후에”(마 24:29)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아”(마 24:31) 주님 앞에 세울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휴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장면이다.
둘째, 성경에서 마지막때의 환난은 교회가 아닌 민족적, 국가적 이스라엘에게 해당된다.
종말적인 환난에 관한 성경의 어떤 기록도 교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실 사도 요한은 하늘나라를 묘사하며 이십사 장로들을 언급했다(계 4:4). 그들은 신약의 교회를 가리킨다. ‘장로들’이란 교회의 지도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환난과 관련된 모든 사건은 장로들이 이미 하늘로 간 후인 6장에서부터 등장한다.
모든 교회는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이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성경은 다니엘이 예언한 70번째 이레 동안 하나님의 초점은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환난의 기간은 로마서 11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알리는 전주곡이 될 것이다. 휴거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왔음”(롬 11:25)을 알린다. 그리고 환난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다시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하는 고통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롬 11:24).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는 말씀처럼 마지막 때에는 믿는 자들이 극심한 핍박을 받게 된다는 성경의 예언은 모두 교회의 휴거 후에 믿음을 갖게 된 자들에게 해당된다.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일(마 24:14) 역시 이들과 인침을 받은 14만 4천 명의 유대인들(계 7:1-8)과 두 증인(계 11:3)을 통해 환난기 중에 성취될 것이다.
셋째, 교회를 위한 휴거의 징조는 따로 없어 휴거의 때를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구원과 만국의 심판을 위한 예수님의 지상 재림은 확실한 징조들이 선행되고, 양상도 휴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때(마 24:31)는 흔히들 오해하듯 1948년에 이스라엘이 회복된 때를 가리키지 않는다. 해산의 고통이 시작되는 걸 목격한 세대가 생명의 탄생, 곧 주의 지상 재림까지 목격하는 세대가 된다는 뜻이다. 환난의 시작을 목격한 세대는 예수님이 예언하신 모든 일이 성취되는 것도 보게 된다. 한 세대를 40년으로 잡고 1948년부터 한 세대가 지난 때인 1988년에 주님이 오신다는 식의 시한부적인 날짜 계산은 명백한 잘못이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의 날(살후 2:2)이 이르기 전에 배교와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말한 것은 휴거를 알리는 징조가 아니라 지상 재림에 대한 징조다. 예수님의 지상 재림은 이땅에서 모든 나라의 도시들을 무너뜨릴 만큼 큰 지진(계 16:19)과 아마겟돈 전쟁(계 16:16)이 진행중일 뿐만 아니라,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마 24:29, 계 6:12-14, 사 13:10, 34:4, 욜 2:30-31) 것과 같은 명백한 우주의 징조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비상한 때에 이뤄진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듯”(마 24:28) 예수님의 지상 재림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만국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지상 재림과 달리 세상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살전 5:3), 노아의 때처럼 사고팔고 맷돌질하고 밭을 일구는 평범한 일상생활이 평화롭게 진행되는 때(마 24:37-41), 신랑이 더디 오는 바람에 처녀들이 다 졸며 잘 때(마 25:5), 그렇게 갑자기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마 24:50) 일어날 교회의 휴거는 때와 양상이 지상 재림과는 확연히 다르다.
환난 전 휴거와 기독교 역사성 변증
일전에 참 특이한 꿈을 꾸었다. 꿈에 집의 거실에 앉아 있는데 8층 베란다 바깥에서부터 예수님이 걸어서 집 안으로 성큼 들어오셨다. 예수님인 줄 알아보자 마치 강력한 자석에 끌리듯 그분께로 쭉 다가가는 도중에 두 손이 저절로 모아지고 무릎이 꿇어졌다. 예수님의 얼굴을 가까이서 뵙자마자 곧바로 깨어났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는 이들에게 먼저 자신을 나타내시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 안에 주의 재림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의 비성경적인 시한부 종말론 소동에 따라 교회 안팎으로 큰 상처를 입은 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휴거’라는 말만 꺼내도 이상하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 자체가 불안을 조성하는 불온한 태도인 듯 금기시되기까지 한다.
전통적인 세대주의 신학의 주된 약점은 모든 세대의 구원의 통로가 믿음이라는 진리를 무시하고, 율법의 역할을 축소시키며, 미래에 초점을 두면서 현재 이땅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는 이원론적인 경향이다. 그럼에도 종말론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실체적으로 구분해낸 것은 그 신학의 괄목할 만한 성과다. 지금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과 구약 제사 복원 움직임은 순전히 유대교 복원의 일환이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제사가 끝난 기독교와는 상관없다. 다만 이 움직임이 큰 환난기에 활동할 적그리스도를 성전에 받아들이는 사건(살후 2:4)과 관련이 있어 유의미하게 예의주시하는 것이다. 아직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잘못 받아들인 것(요 5:43)을 깨닫고 회개한 후에야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올 것이다.
지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세상사는 모두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인류역사의 최후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세상사의 방향을 올바른 종말론적 관점으로 증언하는 일은 기독교 진리의 역사성을 중시하는 변증적 전도에도 설득력을 더해줄 수 있다. 일례로, 지금 짐승의 표(계 13:16-18)는 현금을 배제한 온라인 매매 시스템 같은 형태로 점점 더 익숙하게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 상징이 아닌 실체로 자리매김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얽매일 경우 큰 환난의 때에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으면 구원을 잃는다는 경고(계 14:9-12)를 성경의 본의와는 달리 상징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경직된 교리주의가 성경적인 종말론까지 왜곡할 수 있는 경우다.
물론 환난 전 휴거론도 기독교 종말론의 하나여서 절대화할 이유는 없다. 다만 두 개의 휴거론이 서로 백중세라면 환난 후 휴거론보다 목회적으로 더 안전하다. 신약성경에서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모두 318회나 언급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재림에 대해 설교하고 가르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런 현상이 도리어 주의 재림이 아주 가깝다는 뚜렷한 시대적 징조들 가운데 하나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7:8).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가 영적인 나태함에 빠져 주님의 재림에 무관심하다. 재림을 고대하던 초대교회의 정신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p.82).
-더 깊은 탐구를 위한 연관 질문
1. 환난 전 휴거론을 반대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교회를 위한 공중 강림과 심판을 위한 지상 재림으로 이분화된다는 데 대해 성경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 어떤 성경적 근거를 들어 반박할 수 있을까?
2. 비성경적인 시한부 종말론 소동으로 인해 ‘휴거’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는 데 공감하는가? 종말론에 대한 논의나 관심이 음성화되어 신천지 같은 이단들의 활동에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더 깊은 탐구를 위한 관련 도서
<왕이 오신다>(어윈 루처, 토기장이)
‘종말주의’에 젖어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미혹하지 않으면서도 종말 사건들의 진상에 대한 신구약 성경의 예언들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해석한 책. 재림의 때에 꼭 일어날 10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민감하면서도 실제적인 종말의 이슈들을 환난 전 휴거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에서 조리있게 잘 설명한다.
“히틀러를 적그리스도의 원형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증오심 때문이다. 히틀러보다 더 악할 적그리스도 역시 유대 민족을 절멸시키려고 시도할 것이다. 교회가 휴거되고 나서 세계가 종말론적인 경제 공황에 빠져 몸부림칠 때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이다. 예수님처럼 적그리스도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단 9:27), 성전에 나타나며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살후 2:4).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세상을 놀라게 한다”(p.96, 101).
<성경이 말하는 대환난의 진실>(윌리엄 R. 킴볼, 새물결플러스)
종말의 때에 대한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마 24:1-51)가 말하는 대환난은 재림 직전의 환난이 아니라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의 파괴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멸망의 환난을 상징적인 비유도 곁들여 묘사한 것일 뿐이라는 무천년설 종말론의 입장을 담은 책. 교회가 종말의 초점을 미래적 대환난에만 둘 경우 훨씬 더 음흉한 영적 위협은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고 도전한다.
“우리는 환난이나 재정적 위기, 물질적 수탈이 아닌 번영과 풍요와 윤택함의 시험에 대비하라는 당부를 받았다. 마지막 때의 일반적인 특성에 관하여 주님이 암시하셨던 바는 바로 이 시험이다. 내일의 불확실한 사건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오늘의 위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선 안 된다. 시절이 좋든지 나쁘든지 항상 예비해야 하며, 늘 변하는 국제적인 추세나 경제적인 동요, 또는 예언적 허구에 의해서 곁길로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p.265).
-안환균,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에서
교회는 언제 어떻게 휴거될 것인가?
휴거를 불안해한다면
종말이나 휴거, 환난에 대해 말하면 불안해지는 신앙은 주님과의 친밀함보다 종교적 타성에 젖은 불안정한 신앙이다. 종말주의가 아닌 건전한 종말신앙은 끊임없이 신앙이 바로 서 있는가를 점검케 해준다. 비현실적 신앙을 현실적 신앙으로 바로잡아준다. 종말에 마냥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현실도피를 조장하는 일이다.
휴거의 모형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노아는 한 번도 경험 못한 홍수를 대비한다며 방주를 만드느라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지금도 생소하기만 한 휴거를 대비하여 깨어 있자고 하면 조롱당한다. 휴거는 에녹과 엘리야, 예수님의 승천이 엄연한 모형인데도 지금은 신자들조차 무관심하다.
성경에서 사라진 휴거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7). 신앙이 지나치게 이성주의화되면 기적적인 휴거를 못 믿는다.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짐은 물리적 상승이 아니라 주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이고, 공중도 특정 위치로의 이동이라기보다 특정 상태에 놓일 때의 상징적 배경쯤으로 본다. 사람이 아니라 휴거가 사라졌다.
강림과 재림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창 11:5, 개역한글). 예수님의 재림은 한 번뿐이지만 공중강림은 다르다. 장차 초유의 큰 환난(마 24:21)이 닥치기 전에 산 순교의 삶을 살았던 성도들이 일제히 들림받게 될 때 공중에 강림하시는 건 엄밀히 보면 공식적인 재림은 아니다.
그 날 환난 후에
‘복음서의 묵시록’인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17장, 21장에는 예수님의 공중강림과 지상재림이 서로 뒤섞인 채로 묘사된다. 많은 신자들이 “그 날 환난 후에”(마 24:29)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재림하셔서 택하신 자들, 곧 유대인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신다는 내용을 교회의 휴거로 오인하고 있다.
생각지 않은 때에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는 말씀은 노아의 때처럼 평안하고 안전한 일상의 때, 생각지 않은 때에 도둑처럼 이르는 공중강림이 아닌 지상재림의 정황이다. 특정 교리주의의 전제는 종종 말씀과 상충한다.
강심장
교회의 휴거가 예수님이 예고하신 것처럼 창세 이래로 전무후무할 마지막때의 대환난(마 24:21) 후에 일어난다면 “깨어 있으라”(마 24:42)는 말이 무색하다. 평화로운 때가 아니라, 천체가 뒤흔들리고, 모든 도시가 무너지는 지진(계 16:19)과 기근과 전쟁과 전염병이 동시다발로 진행될 그 와중에 감히 잠들어 있을 강심장이 있을까.
교회와 성도
모든 시대에 동시에 존재할 일곱 교회의 유형과 함께 순차적으로 일곱 교회 시대 또한 예언된 요한계시록 2, 3장 이후 4장부터는 ‘교회’라는 말이 없고 대신 ‘성도’들만 등장한다. 교회의 휴거 이후 적그리스도 체제의 핍박 가운데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져 예배드릴 날이 올 텐데, 코로나 사태로 인한 비대면예배는 그 전조의 하나일 수도 있다.
판단의 기준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주신 무조건적 언약의 성취다.” 월터 카이저의 말이다. 개인적으로 세대주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는 대목들이 많지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교회의 환난 전 휴거에 대한 진리는 성경 자체에서 확인된다. 판단의 기준이 성경이라면 각 신학의 장점에서 유익을 취할 수 있다.
이방인의 수가 차면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다. 구원받는 이방인의 수가 차면(롬 11:25) ‘야곱의 환난의 때’(렘 30:7), 다니엘이 말한 남은 ‘한 이레’(단 9:24)가 시작되는 유대인의 때로 넘어간다. 이 흐름 또한 교회의 환난 전 휴거를 지지한다. 대체신학은 이스라엘이 표면적으로 사라진 후 회복될 기미가 전혀 없던 때에나 그럴싸했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사 26:19-20). 교회 시대 전후의 모든 죽은 성도의 부활과 환난 전 휴거가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밀실은 단순한 땅의 도피처일 수 없다. 일곱 교회 시대가 끝나면 교회를 포함한 24장로는 하늘에 있다(계 4:4).
공식적 휴거의 대상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계 7:14). 이 말씀은 환난 후 휴거를 지지하지 않는다. 교회의 공식적 휴거는 마지막때에 지상에 생존해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가 대상이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중에는 그들이 빠져 있다. 따라서 모든 시대의 교회는 먼저 환난 전에 휴거되었어야 한다.
상징이 아니다
피로 변한 물, 흑암 같은 요한계시록의 재앙들은 출애굽 당시에 세상을 상징하는 이집트에 일어난 재앙들과 흡사하다. 둘 다 상징이 아니다. 큰 환난기의 14만4천명(계 7:1-8)도 구원받은 자의 상징적인 총수가 아니라 열두 지파의 유대인 전도자들이며, 두 증인(계 11:3-4)도 ‘기름부음받은 자 둘’(슥 4:11-14)로 실제 사람들이다.
다섯 처녀 공동체
주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때일수록 한마음으로 주를 기다리는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이 중요하다. 열 처녀 비유에는 상반된 태도의 두 처녀 대신 다섯 처녀씩의 두 그룹이 등장한다(마 25:1-13). 주의 재림에 둔감한 공동체가 있고, 깨어 있는 공동체가 있다. 마지막때에 ‘가나안 성도’로 교회 바깥에서 머뭇거리지 말아야 할 이유다.
거룩한 긴장감
교회와 이스라엘을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구분해서 마지막때 이스라엘의 회복을 인정하게 되면 교회의 환난 전 휴거도 인정하게 된다. 이 사건에 깨어 준비하라고 하면 세상과 함께하지 못하고 거기서 탈출할 꿈만 꾼다며 경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요구하지만 동시에 주의 재림에 깨어 있는 거룩한 긴장감도 요구한다.
-안환균, <빛과소금>(두란노) 2020년 11월호 ‘키워드 단상 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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