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267
6월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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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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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72LmzvRz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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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는 사제!>
오늘 우리 교우들은 무척 바쁜 날입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저희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시는 날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죄악과 방황 때문에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聖心)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행해진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성장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사 결과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사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대답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사제들의 지속적인 회심과 쇄신, 성화 없이 교회의 쇄신과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는 답이 되풀이되어왔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착한 목자로 살아가시는 사제들도 부지기수인데, 그런 사제들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사제도 어쩔 수 없이 근본적인 한계와 결핍을 지닌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틈만 나면 대대적인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마음과는 달리 행동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멋진 모습의 착한 목자로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지만, 희망 사항과는 다른 초라한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도 많이 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따로인 모순된 삶을 살아가며 가슴을 치고 후회합니다. 한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나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신기루 같은 하느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예수성심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지정하고 사제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를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이 인간적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서 하느님께로 또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내공을 지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최우선적 선택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하느님께만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은 또 다른 한 가지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해주셔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바치는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인간 측에서 하느님께 청하며,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보다 하느님께 위로를 드리는 기도를 바쳐야 마땅합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함, 우리 인간의 죄악, 우리 인간의 배신으로 크게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께
송구한 마음으로 그분의 부서진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호 통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야 하고, 다시 또 되돌아가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이겠지요.
한쪽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에 불이 붙고, 밤잠도 제대로 잘 못 이루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도 그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짝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그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우리가 아무리 그분께 대들고 반역해도, 우리가 그렇게 배신을 때려도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불꽃을 태우고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 성심은 우리의 반역과 배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에서 우리 교회가 탄생되었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습니다. 그 부서진 예수 성심에서 7가지 성사가 흘러나왔으며, 그 성사는 큰 강이 되어 메마른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간절한 바람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 성심께로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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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D49AWW6x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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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마음이란 남편의 마음을 자녀가 느끼게 하려는 아내의 마음이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마음, 성심(聖心)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예수 성심을 ‘자비로운 마음’,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사랑의 마음’ 등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예수 성심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바로 “예수 성심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이 공유하게 하려는 마음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가정의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지혜롭고 사랑이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자신만 사랑하고 따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고, 아버지를 존경하며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기쁨은 온 가족이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 증거입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의 기쁨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외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6)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하자”고 청할까요? 혼자 기뻐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예수 성심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느끼는 기쁨은, 근본적으로 양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하늘이 기뻐하기에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동화 ‘라푼젤(Tangled)’에서 라푼젤은 본래 샐러드용 채소의 이름입니다. 라푼젤의 어머니는 임신했을 때 마녀의 정원에 자라는 '라푼젤'이라는 채소가 너무나도 먹고 싶어 병이 날 지경에 이릅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마녀의 정원에 들어가 이 채소를 훔쳐오고, 결국 태어날 아이를 마녀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채소를 얻게 됩니다. 마녀는 이렇게 얻은 아이에게 그 채소의 이름을 따 '라푼젤'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라푼젤을 향한 마녀의 사랑은 겉보기에 완벽합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엄마가 제일 잘 알지. 바깥세상은 무섭고 위험하단다. 엄마 품이 가장 안전해.” 그녀는 라푼젤의 진짜 부모에게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녀를 진실로부터 격리하고 ‘아버지 없는 고아’로 만드는 가장 이기적이고 무서운 사랑입니다.
성경에도 이 ‘고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그입니다.(루카 15,25-32 참조)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지만, 큰아들은 분노하며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너희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혀 다른 마음을 만나봅시다.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에 나오는 네 자매의 어머니, ‘마미(Marmee)’입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마미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편지를 딸들에게 읽어주며 그의 사랑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딸들이 선행을 베풀 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고 격려하며 모든 행동의 기준을 아버지의 마음에 둡니다. 그녀의 가장 큰 기쁨은 딸들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 ‘마미’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심의 모상입니다. 성경에서 이 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수많은 군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결코 그 영광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가리켰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군중을 보며 시기하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한다.”(요한 3,29-30) 그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느끼며,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다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다리’의 완성이십니다. 그분은 공생활 내내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으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찾기 때문이다.”(요한 5,30),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이 모든 말씀은 우리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끌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나의 봉사는 과연 ‘라푼젤’의 마녀를 닮았습니까, 아니면 ‘작은 아씨들’의 마미를 닮았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듯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의지하고 좋아하게 만들려는 이기적인 마음은 없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마미’와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마음을 주시고자 합니다. 내가 죽고 나보다 높은 이의 마음을 자녀들이 가지게 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본당의 냉담 교우 한 사람이 다시 성사 생활을 시작할 때, 죄의 길에서 방황하던 한 영혼이 고해소 문을 두드릴 때, 바로 그때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순간이며,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 할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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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특별히 이날은 저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25년 전, 저는 경기 북부 지역에 있는 ‘적성 성당’에서 본당 신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구장 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습니다. “사제 성화의 날 체험 발표를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처음엔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제게는 체험이라 할 만큼의 경륜도 없고, 사제들 앞에서 드러낼 만큼 영성이 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제안을 받고는, ‘그냥 내가 살아온 사제 생활을 나누는 거다’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발표 주제는 “사목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저의 나눔은 교구의 사목 국장 신부님이 알게 되었고, 저는 교구청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뒤로 교구 사목국에서 3년간 교육 담당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정리했던 사목에 관한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첫째, 사목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성아, 산보 갈래?’ 했더니, 진성이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따라나섭니다. 큰길을 건너고, 개울을 건너고, 시장까지 산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성이가 묻더군요. “그런데 신부님,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아마도 산보가 어딘가에 있는 장소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도 문득 하느님께 자주 되물었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당신 뜻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 주셨고, 이미 다 알려주셨는데 말입니다. 사목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면, 어떤 사목자가 되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둘째, 사목은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해인사 청동 대불 문제로 물의를 일으켰을 때, 한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비는 옳고 그름을 다툼으로써는 풀 수 없습니다. 시비를 함께 놓아버릴 때 끝이 납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원망은 원망으로 갚으면 해결되지 않고, 오직 참음으로써 해결된다.” 사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져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때론 품어야 하고, 용서해야 하고, 묵묵히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습니다. 사목은 결국 사랑이며, 보시(普施)이며, 용서(容恕)입니다.
셋째, 사목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지 주일이었습니다. 미사 후 사제관으로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건회와 진성이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는 겁니다. 성당 버스를 놓친 두 아이는 장현리에서부터 무려 3시간 반을 뛰어왔답니다. 그 길은 차로도 15분은 걸립니다. 그 아이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찡했습니다. 저 아이들이 오늘 제게 성지 주일의 진짜 의미를 알려주었습니다. 사목은 한 번의 만남, 한 번의 교리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모를 심는 일처럼, 끈기와 인내로 계속 관심 두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목입니다.
넷째, 사목은 습관입니다.
사람은 이성으로 문명을 만들고, 감성으로 예술을 꽃피우고, 오성으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직관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건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은 타고난 재능보다 중요합니다. 사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한 신학 지식, 특별한 능력만으로는 사제다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는 습관, 교우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습관, 감사 인사를 잊지 않는 습관 같은 것들이 사제를 사제답게 만듭니다.
1995년부터 한국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거룩한 삶을 다시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고, 교우 여러분이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심의 주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사제들도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를 비롯한 모든 사제가 하느님의 거룩한 마음,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더 좋은 사목자, 더 따뜻한 사제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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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참된 우정은 내가 잘나갈 때보다 실패하거나 곤경에 놓였을 때 더욱 드러나는 경향이 있고, 참된 신앙은 평온함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반석은 말과 기도가 아니라 당신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 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폭풍이 우리 삶을 덮칠 때까지는 누구도 자신을 참신앙인이라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반석 위에 굳건히 머무는 한, 그의 집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신심에 도취하지 않도록,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을 방패 삼지 않도록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때때로 진심과 행동이 없는 말들로 주님 앞에 나서지는 않는지요? 하느님과 우정의 친교를,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길은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아름답게 말하거나 성경을 잘 설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산상 설교의 결론은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우리 공동체는 기도와 실천, 찬양과 행동의 균형을 잘 지키고 있나요? 우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반석’은 무엇인가요? 삶에서 시련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 안에 진실하게 받아들여 그 말씀을 뜨겁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리하여 삶의 폭풍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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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3-7: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
의 뜨거운 사랑을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에제 34,16)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그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으며, 당신의 사랑을 인간적 현존을 통해, 인간적 마음을 통하여,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까지 열정적으로 사랑하신 착한 목자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은 이성적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랑이다. 이성적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하고 비판한다. 이성적으로는 옳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과 우정 관계, 형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과 그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들의 불의를 인정하고 공범자가 됨을 말한다.
이러한 이성적인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자기를 따르지 않고 무리를 이탈해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이 목자의 행동은 이성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양에 대한 큰 사랑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논리적으로는 이러한 행동이 비판의 여지가 있고, 또한 하느님께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을 잃어버린 목자처럼 행동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7절) 하느님은 자비로운 사랑으로, 이성적으로는 따질 수 없는 사랑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도 구원하러 가시는 분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사랑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이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마음 역시 계산하시지도 따지지도 않으신다. 이성적인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팔을 벌리실 뿐이다. 우리의 이성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비이성적인 사랑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아무 죄 없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에 내맡기는 것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보통 죄인들은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 그들을 너그럽게 보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바오로 사도는 주장한다. 이성적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그가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누구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사람은 죽음이 불가피할 때 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가 없으니까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성적인 관점이 아닌, 지나치게 넘쳐흐르는 사랑으로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 대한 자애의 관점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8) 예수님은 성체성사에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주신다.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정신 나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축일은 바로 그 사랑을 충만한 믿음과 감사의 정으로 받아들이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바오로 사도는 이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10) 그 지나친 사랑 때문에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도 이성적이 아닌 열정적이고 어리석은 충만한 사랑으로 우리도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사랑을 살려고 결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이성적이 아닌, 정신 나간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면 우리의 사랑도 그분의 사랑을 닮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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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사제>
루카 15,3-7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사제>
사제는
하늘빛을 땅에 드리우도록
땅기운을 하늘에 들어 높이도록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곱게 잇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여린 마음과 작은 몸으로
하느님께서 정성껏 빚으신
온 누리 보듬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워도
하느님 사랑 가득 담은
함께 사는 세상 가꾸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저 홀로 머물 울타리 허물어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 가득한
여리고 찢긴 거친 세상 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홀로 거룩함의 꿈에서 깨어나
더러운 것 깨끗하게 하고자
온 삶 아낌없이 던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손길 닿은 세상 모시되
세상에 짓눌리고 세상이 버린
하느님의 작은 이 품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살기 위해 벗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벗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사람이기에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과 마음에
핏빛 사랑의 상처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순간부터 끝 모를 마지막까지
앞서 가시고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용기 내어 또 한 걸음 내딛는 이
바로 주님의 사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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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의 미어지는 마음>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가끔씩 제가 상대방 자리에 앉아서 저 자신이 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어떤 때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좋은 쪽으로 대화나 행동을 이끌어주기에 어떤 때는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저 자신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선명하게 제 자신을 보았던 경우도 꽤 있습니다. 상대방의 귀와 눈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적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적인 행동을 할라치면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제 자신과 상대방의 자리에 앉아서 주체인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객체로서의 제 자신이 충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이러한 체험을 자주 못합니다.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이러한 체험들이 일상적인 것이 된다면, 형제자매들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서 오는 차이들을 극복하고 더욱 진솔하게 만날 수 있을 텐데,
알게 모르게 뱉어내는 권위적인 말이나 행동들을 자제하고 정말 흉허물 없는 만남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서 제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복음 묵상을 하다보면 이러한 경우들이 가끔씩 생기지요. 그 내용이야 어쨌든 값진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저만 말하고, 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인간적인 한계이겠지만,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예수님께 드리는 제 말과 행동을 듣고 보는 체험은 이러한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해줍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렇게 힘없이 죽어 가신 예수님께 뭐라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어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을 봅니다.
겉으로는 분명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려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 축 쳐진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손이 찢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두 팔이 힘을 줄 수밖에 없는 상태, 심장을 누르는 압박 때문에 마지막 숨 한번 고르게 내쉴 수 없는 상태에서 저만치 아래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보다는 예수님의 찢어지고 미어지는 마음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저만의 불온한 느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느끼는 예수님의 이 찢어지고 미어지는 마음, 저를 향해 한숨을 내쉬시며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제 안에 담고 싶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저와 예수님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며, 저에게 더 간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의 이 마음이 저를 움직여 제가 다른 이를 향해 쉼 없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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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철이 들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4-7)
1)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 ‘사랑’입니다. 인간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고, 집 나간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입니다.(루카 15,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비유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은 곧 ‘사랑’입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잘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나를(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십자가와 성체성사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신앙인은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먹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되찾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잃은 양’은 목자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그 길을 알지 못해서 헤매는 양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것은, 내버려두면 그 양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양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양이 스스로 목자를 떠난 것이라면, 그 양은 ‘잃은 양’이 아니라 ‘떨어져 나간 양’입니다. ‘스스로 떨어져 나간 양’은 결국 ‘버림받은 양’이 됩니다. 목자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버림받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처음에는 ‘잃은 양’이었고, 나중에는 ‘되찾은 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잃은 양’이었을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찾아 나서지 않고 집에서 기다렸습니다. 작은아들은 집으로 오는 길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아는 길이니 그 길로 되돌아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와 선교활동은, 구원의 길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을 알려 주는 일입니다.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길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에게는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큰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는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아들을 찾아 나섰는데, 그것은 큰아들이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잃은 양’이고,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것처럼 아버지도 그 아들을 찾아 나설 필요가 있었습니다.
3) 냉담자 중에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언급하면서, 사목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또는 찾아오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냉담 중이라는 것이 무슨 ‘벼슬’도 아니고, 그런 오만한 태도는 회개와는 거리가 먼 위선입니다. ‘잃은 양’은 회개하고 있거나 회개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회개는 목자에게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겸손’을 바탕으로 한 일입니다.
4) 구원이 완성되었을 때, 가장 크게 기뻐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크게 기뻐하는 것을 보시면서 당신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고,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기쁨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구원받으려고, 내가 살고 싶어서, 내가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을 주님에게나 사람들에게 생색낼 이유도 없고 자랑할 이유도 없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일은 다 ‘나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가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 자신이 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면서 “이게 다 너를 위한 말이다.”라고 훈계할 때가 많은데 그 말은 확실히 진리입니다. 철이 든 자식은 그 말을 알아듣고 순종하지만, 철이 안 든 자식은 그냥 ‘쓸데없는 잔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철이 든 신앙인은,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철이 안 든 사람은 하느님과 예수님께 뭔가를 바치면 바친 만큼 복을 받는다는 생각만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큰아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그렇게 철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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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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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선한 목자>
참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떠나는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5년 전 자원해서 칠레로 선교사의 길을 떠난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모처럼 귀국해서 휴가를 보내던 중 주교님의 명으로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떠나기 전날 대장암이라는 건강검진 결과를 통고받습니다. 출국을 취소하고 치료를 위해 수술과 항암 치료를 하고 있지만 동창 신부의 걱정은 자신의 몸보다 선교지에서 친교를 이룬 주민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무서운 병마로 선교지에 가지 못할까 걱정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도사리고 있지만 이미 하느님의 도구가 된 사제의 열정 앞에 그 치명적인 독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제의 발길을 병마로 막아선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성심으로 무장한 그 열정은 더욱 커져갑니다. 다시 선교사로 보낼 수 없는 신부님을 대신해서 이제 막 군종 신부로 전역한 동창 신부가 그 길을 떠났습니다. 이 신부님이 실패하면 또 누군가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사제들이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사제들도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착한 목자로 기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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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구 나기정 다니엘 신부님]
<예수 성심 대축일에 대해서>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마음은 알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자연의 어떤 사물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쉽게 헤아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속내를 잘 모르기에 서로 오해도 하고, 단순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여 편협한 생각을 갖기도 한다. 이처럼 누구의 마음을 알고 헤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배워 닮을 수 있다면, 주님과 더 가까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이들은 자기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도 특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는 봉사자, 곧 사제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 가르침과 당신의 삶을 배우고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온유와 겸손, 소외되고 작은 이들에 대한 봉사, 자기를 희생하는 생활, 잃어버린 양을 되찾으려는 깊은 사랑의 마음을 배우고 그렇게 사는 이들이다.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하는 사제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에게서 배우기에,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였다. 이날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에 감사드리고 예수님의 상처받으신 마음을 묵상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의미를 되살려 사제들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채우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 닮으며, 복음 선포의 직무를 되새기고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도록 하려고 여러 행사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 성심 대축일은 어떻게 지내게 되었을까?
중세 때 일찍부터 예수님의 성체께 대한 신심은 널리 퍼졌지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성심)에 대한 공경은 늦은 13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17세기에 와서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이 보편화된다. 결정적으로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 수녀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축일 미사를 이때부터 봉헌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에 와서는 성령강림 다음 셋째 주 금요일로 축일이 지정되었으며, 20세기에 와서 오늘처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로 고정하였다. 또 1995년부터 이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이날에 말해주는 예수 성심의 신심은, 첫째 한없이 풍요로우신 성심께 감사드리는 일이다. "가장 작은 나에게 사도의 은총을 주셔서 이방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에페 3,9 참조)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 그대로이다.
둘째는 우리의 잘못으로 상처받은 성심을 통회의 마음으로 묵상하는 일이다.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골고타로 올라가 처형되신 것"(요한 19,17-18 참조)을 통회의 심정으로 묵상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래서 복음도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잘 설명해 준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에, 고통 받는 이들을 모두 멍에를 가볍게 해주시는 당신께 초대하시는 말씀(가해, 마태 11장), 아울러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심장이 창에 찔리어 거기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믿는 이들(교회)이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는 말씀(나해, 요한 19장), 잃었다가 되찾은 양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 목자의 사랑 깊으신 마음을 일깨워주는 말씀(다해, 루가 15장)을 들려준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인간의 속죄를 기억하고(본기도),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와 성사와 구원이 나온 것을 선포한다.(감사송)
이날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는 축일이다. 그 거룩한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백 분의 일이라도 헤아린다면 효자 소리를 듣게 되듯이, 미약하지만 주님의 깊으신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헤아리도록 노력해 보자.
사랑의 마음에 대해 감사드리고, 충실하게 기억하고 넉넉하게 보답해 드리지 못하여 불편을 끼친 것을 기억해 보자.
또한 사제 성화의 날이므로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덕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마음으로 돕도록 하자. 그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오늘 이 시간에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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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생각의 전환이 세상을 바꿉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생각의 전환입니다.
1935년 이전까지 배영 100미터의 벽은 ‘1분’이었습니다. 누구도 이 벽을 깨지 못하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935년 8월, 마침내 그 기록이 깨졌습니다. 그것도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가 아니라 미국의 어느 고등학교 수영대회에서였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돌프 키퍼(Adolph Kiefer)는 ‘플립 턴(flip turn)’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적용해 종전 세계 기록보다 무려 10초 가까이 빠른 기록으로 터치패드를 짚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반환점에 도달하면 손으로 벽을 짚고 회전했는데, 그는 반환점에서 거의 1미터 전에 앞쪽으로 반 정도 돈 다음에 벽을 두 다리로 힘차게 밀어 다시 반대편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선수가 플립 턴을 선택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이전 육상의 높이 뛰기는 앞으로 넘는 ‘가위뛰기’ 일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인선수 딕 포스베리가 누워가 넘는 ‘배면뛰기’를 처음 시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건 이후, 모든 높이뛰기 선수는 배면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없으면 발전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닫힌 마음을 가지고서는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냥 예전과 같은 삶, 전혀 발전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활동은 끊임없이 변화됩니다. 그 시대에 딱 맞게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변화에 맞춰서 우리도 변화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이 시대에 딱 맞게 사랑을 주시듯이, 우리 역시 사랑에 집중하면서 활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냥 예전의 모습만을 따라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뜻에 발맞출 수 없고, 우리의 변화도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그 마음이 오늘 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 한 마리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실 100마리 중 1마리라는 숫자는 인간적으로는 포기할 수도 있는 비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한 생명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의 뜻인 이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변화도 가능하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 사랑이 넘쳐나게 될 것이며, 살기 힘든 곳이 아닌 살고 싶은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보다 주님의 관점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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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되찾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한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당시 유대 민족은 주로 유목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땅은 목초지가 별로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평지가 아닌 가파른 벼랑과 사막으로 둘러싸인 고원 지대였습니다.
문제는 이 양이 시력이 지나치게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양의 시력은 –0.7에서 -1.0 정도로 추정 되는데, 즉 양들은 전방 1미터 앞의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청각을 사용해 떼를 지어 움직이는데, 목자가 지팡이에 종을 매달고 양들을 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양이 풀에 정신이 팔려 대열을 이탈하면, 평지와 벼랑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절벽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기 쉽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을 잃어버리게 되면 목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양의 발자국을 추적함으로써, 방황하는 양을 언덕과 계곡을 넘어서라도 기어이 찾아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양이 죽었다면 양털을 가져다가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죽음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반면, 어디선가 살아있는 양을 발견하면 그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길을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시며 우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시는 분, 당황한 우리들을 달래시며 당신의 길로 이끌고자 애쓰시는 분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다시금 주님을 찾게 되거든 두 팔을 크게 벌려 환영해 주시는 분, 기쁨의 잔치를 열만큼 행복해 하시는 분입니다.
반면 우리의 모습은 양떼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우리들은 일상 생활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게 구분할 수 없고, 사소한 죄와 실수들 안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들이 청각을 사용하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음성에 의지해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금방 대열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에게 오늘 제1독서의 하느님의 말씀은 커다란 힘을 줍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주겠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늘의 제 2독서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인간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음을 천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종종 하느님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합니다. “십자가의 수난으로 인해 너무 고생했어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인류를 구원했습니다”라고 자랑할 법도 하지만, 실제로는 오늘의 복음에서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한 목자의 말을 그대로 하느님께 했을 것 같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오늘의 이 복음을 기억하며 혹시 지금의 나 자신은 번번이 길 잃은 양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더불어 지금도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목자이신 주님의 사랑을 모쪼록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의 18장 14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이러한 마음을 더욱 깊이 전달해 줍니다.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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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의 여정>
-예수성심의 사랑이 답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오늘은 6월 예수성심성월의 절정인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로 참 아름다운 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가이없는 사랑이 예수성심의 사랑을 통해 환히 계시됨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방금 부른 예수성심 성가 200장은 물론 모든 성심 성가들은 위로와 힘을 줍니다.
“열절하신 주의 사랑, 내 맘을 사르네. 거룩하신 주의 성심 찬미 찬송하세.영원한 무궁세에 그 마음 받들어, 창검에 찔린 상처 그 크신 사랑을 온천하 만백성아 찬미할 지어다.”
오늘은 사제성화의 날일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성화의 날이기도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의 여정’이요, “성화되십시오,” 덕담의 인사를 주고 받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날로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가는 성화의 여정이라면, 또 그냥 무의미하게 세월과 함께 ‘늙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익어가는 여정’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향기롭겠는지요! 바로 믿는 이들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예수성심의 사랑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에 있음을 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한마디로 예수님 사랑의 마음이요, 예수성심상은 예수님의 심장에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표현됩니다.
옛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창에 찔린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를, ‘천상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으로 생각했으며,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사랑을 묵상했습니다. 특히 교부들은 예수성심을 사랑과 모든 초자연적 은총의 샘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성심 신심은 중세기 이전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었고, 12세기 무렵 성 안셀모, 성 베르나르도, 성 보나벤투라가 중심이 되어 예수성심을 공경했고,
13-14세기 신비가들이 예수성심 신심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예수성심을 교회가 공인하고 적극적으로 보급하게 된 획기적인 계기는 프랑스의 방문회 수녀였던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 성녀의 예수님 발현 체험에서 시작됩니다. 1675년까지 2년간 70회나 발현한 예수님은 성녀에게 다음과 같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내 거룩한 마음은 인간 모두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성심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홍수를 퍼부어 성덕과 구원 은총으로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멸망의 구렁에서 건져내려 한다.”
“나는 성체성혈 대축일후 금요일을 내 성심을 공경하는 날로 정하기를 원한다. 그날 영성체하는 영혼들은 내 성심에서 사랑의 은총을 홍수처럼 풍부하게 얻게 될 것이다.”
바로 오늘 대축일의 근거는 여기서 유래됩니다.
이후 역대 교황들, 클레멘스 교황, 비오 9세 교황, 레오13세 교황은 공식문서를 통해 예수성심 신심을 승인하고 널리 보급할 것을 권장합니다. 특히 예수성심의 교황으로 불리는 비오12세 교황은 1956년 회칙 <물을 길으리라>에서, “예수성심 신심은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이며, 인류를 구원의 샘으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적절한 응답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신앙을 잃고, 길과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오늘날 신자들에게 참 적절하고 필요하다 싶은 건전하고 건강한 예수성심 신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와 복음에서 예수성심 사랑의 근거와 전조가 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이제 내 양 때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비단 교회의 착한목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위정자들이 예수성심의 착한목자들로 살았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은 마침내 오늘 복음의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환히 계시되는 착한목자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다음 양 백마리중 잃은 양 하나를 끝까지 찾아낸 착한목자 예수님의 기쁨의 환호는 그대로 예수 성심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은 은총의 샘이자 평생 사랑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또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예수성심의 사랑에서 샘솟는 선교열정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성심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으니 그대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과 하나되어 성공적 성화여정을, 선교여정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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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심에 물들고 닮아가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심이라는 말입니다. 더 풀어 얘기하면 이 성심의 사랑은 죄인의 죄에 의해 상처받았음에도 그 상처를 상처로 되돌리지 않고 용서로 되레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심은 상처 입는 것을 피하거나 마다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준 상처를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그의 악하고 독한 마음을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큰 사랑으로 마음이 넓어지면 악독한 마음에서 독을 뿜어낼 수밖에 없는 그의 고통과 불행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절대로 악독할 수 없고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악독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수없이 상처받아 불행한 사람이고, 그에게서는 악과 독 밖에는 나올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독이란 오랜 불행으로 악이 생겨나고 숙성된 결과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그의 악과 독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큰 사랑이 필요한데 우리 인간에게 그만한 사랑은 있을 수 없고 성심의 사랑만이 녹여낼 수 있지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성심의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고,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도 성심에서 그 사랑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성심을 닮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성심에 우리 마음이 물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성심과 같아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닮고,
어떻게 물들고,
어떻게 같아질까요?
거듭 마음먹고,
자꾸 결심하는 겁니다.
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처를 피하지 않기로
거듭 마음먹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단련되고 자라게 하고 마침내 방독하지 않고 해독하는 겁니다.
이는 조개가 진주를 생성하기 위해 상처를 주는 이물질을 품는 것과 같고, 상처받으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진주층(Nacre)을 분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또한 민수기에서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매달아 달고 매일 쳐다보면서 이겨낸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사랑은 상처받으면서 성심의 사랑으로 자라고, 독을 끊임없이 해독하면서 독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과 사랑이 성심의 사랑에 물들고 닮게 되어
우리가 독에 대해서 독해지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마음이 성심으로 물들고 닮도록 끊임없이 성심께 달려가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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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15,6)
<예수 성심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7,21-29)은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회개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이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2022년 3월 14일부터 신.구약성경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세 번째 필사 중인데, 성경 필사를 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어머님의 유품인 필사 노트를 보면서 그 빈 공간을 나의 필사로 채워드려야겠다는 마음과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 때문에 성경필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감사♡
성경필사를 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성경필사도 중독에 가깝다고 합니다. 말씀에 중독되는 것이니 좋은 중독이네요. 저는 주로 이른 아침에 성경필사를 합니다. 매일 꾸준하게 필사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필사하다 보면 부족한 저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저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마음)를 봅니다. 그래서 기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부활의 힘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면서,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2025년 2월 7일 기준 '사제인명록'에 기록된 한국 천주교회 사제의 수가 7,107명이라고 합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예수 성심을 더 닮은 사제들이 많아지도록.
예수 성심의 결정체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사랑 안에 깊이 머물러 봅시다! 그래서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나도 너에게 예수 성심이 되어 너를 주님께로 돌아오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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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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