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7.mp3 4.36MB 찬미 예수님!
2024년 5월 7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6,22-34 그 무렵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잘 되던 인터넷이 갑자기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급한 대로 전원을 끄고 다시 켜보았지만 그래도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그럴 때면 연결하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을 컴퓨터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인터넷은 회사에 연락해서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염불이든 참선이든, 밀교든 현교든, 간화선이든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을 얻게 해 주면 그 수행은 정법(正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로 걸어서 서울로 갈 때 목적지인 서울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나중에 서울에 도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불교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내가 체득한 경지가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나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됩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뜻입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고성제, 그런 고통의 원인은 내 마음 속의 탐욕, 분노, 우치(愚癡)와 같은 번뇌라는 집성제, 이들 번뇌를 모두 제거하여 고통이 사라지는 열반의 멸성제, 그리고 이렇게 번뇌를 제거하는 팔정도의 수행인 도성제입니다. 즉, 불교수행의 길에서 최종 목표는 번뇌가 소멸한 열반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듯이, 그 어떤 수행법을 선택했어도 나에게 열반을 증득하게 해 주면 그 수행법은 정법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그 부처마저도 버려야 한다.’ 임제 스님의 유명한 살불살조(殺佛殺祖)입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나를 얽어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셔버리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관념, 조사나 아라한이라는 이름에 속박되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종교적 권위로 만들어진 우상을 부셔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안 되는 인터넷을 가지고 씨름했으면 인터넷 연결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행히 스마트폰 연결이라는 방법을 알았기에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라는 공간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고,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차원을 ‘협조자.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옥이 흔들리고, 부서졌을 때, 바오로 사도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감옥은 더 이상 굴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불행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은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욕망은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은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욕망을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욕망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출처 : 우리들의 묵상/체험 ▶ 글쓴이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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