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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제로(Ze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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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2009-1-3 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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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0’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로 꼽힌다.‘제로(Zero, 영, 零)’로 불리는 ‘0’은 값이 없는 수(數)다.하지만 이만한 팔방미인도 없을 듯하다.‘0’은 단순히 겹쳐 쓰는 것만으로 수를 무한대로 늘릴 수 있는 불가사의한 기호다.더 나아가 ‘무(無)’, ‘공(空)’ 등 철학적 의미로 확장된다.‘0’은 이렇게 오랜 세월 수학과 철학을 넘나들고 있다.
▼인류가 ‘0’을 발견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7세기께 인도인들이 ‘0’을 처음 고안해 사용했다고 한다(요시다 요이치의 ‘0의 발견’).이 숫자는 그 후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상륙했다.서구 근대문명의 불쏘시개가 된 ‘0’은 마침내 세계사를 바꿔놓았다.가깝게는 세상 만물(정보)을 ‘0’과 ‘1’로 표현하는 이진법이 컴퓨터를 탄생시켜 디지털 문명 세계를 열었다.오늘날 ‘0’은 그 어느 시대보다 각광받는 숫자가 됐다.‘0’ 그 자신도 이처럼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낼 줄 몰랐을 것이다.그야말로 ‘0’의 위력이 실감나는 때다.
▼‘제로베이스(Zero Base)’ 이론이 있다.기존의 틀을 깨고 백지상태 (‘0’)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이다.1970년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츠는 ‘제로베이스 예산’이란 첨단 개념을 도입했다.모든 항목에서 과거의 실적,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원점에서 재설계하는 예산편성 방식이다.이 논리 틀이 이제는 사회 각 분야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실상 익숙해 있던 전례와 전통에서 뛰쳐나오기란 쉽지는 않다.현실의 벽을 깨고 난관을 헤쳐나가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새해가 떠올랐다.그러나 침체의 중병(重病)에서 언제 깨어날지 몰라 혼란스러운 경제 때문에 마음은 여전히 어둡다.발등의 불을 끄려고 각계에서 갖가지 해법을 내놓고 있다.하지만 어느 처방이 명약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이 시점 어쩌면 재출발이 지름길일 수도 있다.특히 붕괴 직전의 기반을 튼튼히 받쳐 줄 초석(礎石)이 필요한 시기다.‘0’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숫자가 더해질 때 드러난다.위기는 곧 기회다.다시 주춧돌을 놓듯, 이 바닥 위에 하나씩 희망을 쌓아가자.조광래논설실장·krcho@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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