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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4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마태오 17,22-27
성전세를 대신 내주는 물고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녀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셔야만 부활하실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냐고 세금을 걷는 이들이 다가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는 내신다고 대답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겨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성전이 곧 아버지의 집임을 일깨우십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 집의 주인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도 베드로의 것까지 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여기서 왜 굳이 물고기를 잡아 그 동전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물고기가 당신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베드로의 것까지 내주시기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 덕분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실까요?
분명 하늘 나라에 사실 자격이 있으시지만, 아버지와 백성들로부터 더 큰 대접을 받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개는 가만히만 있으면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개는 훌륭하다’에 보면 집에 들어오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인까지 무는 개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한 번은 그런 개를 강 훈련사가 훈련하다가 손을 물렸습니다.
그러자 강 훈련사가 목줄을 잡고 단번에 제압합니다.
이때 가족들은 물린 강 훈련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개가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개와 살면 지옥입니다.
나중에는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어서 안락사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EBS 다큐 중 유튜브에 ‘귀여운 섬마을 강아지가 해녀 엄마 출근 시켜놓고 11년 동안 몰래한 행동?’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욕지도라는 섬에 오월이란 열한 살 강아지가 있습니다.
그 강아지는 선착장에 서 있다가 관광객이 내리면 관광객들을 이리저리 안내합니다.
여행하러 온 사람들은 강아지의 안내를 따라
구경하고 강아지를 안고 사진도 찍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개가 욕지도에 버려진 개이고
먹을 것을 얻으려 이런 행동을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오월이는 욕지도의 유명인입니다. 이미 TV에도 여러 번 출연하였습니다.
그리고 엄마도 있습니다. 엄마는 해녀인데, 엄마가 외로울까 봐 육지에 나간 딸이 5월에 선물해 준 강아지가 오월이입니다.
엄마는 아침에 배를 타고 나가 저녁에 돌아옵니다.
엄마를 배웅하고 오월이는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관광객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11년 동안 보니까 관광객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알아서 그 일을 하고는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선착장에 꼭 나가 있곤 하였습니다.
오월이 덕분으로 욕지도도 조금 더 유명해질 수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오월이가 지나가면 먹을 것을 줍니다.
덕분에 오월이 엄마도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오월이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엄마에게 사랑받습니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욕지도를 소개하며 엄마와 마을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습니다.
이를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하는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개와 비교해서 죄송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사랑받는 분이시지만,
당신 나라를 자랑스럽게 하고 사람들에게 그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심으로써 더욱 사랑받으십니다.
우리도 아버지께 사랑받고 이미 하늘 나라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 더 사랑받으려면 그 하늘 나라를 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늘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욕지도에 개가 오월이 혼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월이는 욕지도에 엄마도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고 더군다나 섬도 아름답기에 욕지도를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마음이 그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할 힘이 된 것입니다.
욕지도에 들어오는 관광객을 보고 짖고 하는 개가 있다면 그 개는 결국 욕지도에 머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를 자랑스러워하고 그 나라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어떻게 내가 하늘 나라를 소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십자가의 열매는 결국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4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마태오 17,22-27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의 순교자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성모님의 종’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1894~1941)이십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헌신했던 사목터는 큰 본당이나 학교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양들은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이 아니라 지하 감방 속에서 신음하던
동료 수감자들이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인 동시에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 창립자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한 동료 수감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한때 저는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이다.
그렇게 훌륭한 수도자이자 탁월한 대 영성가였던 콜베 신부님께서 단 한명의 동료 수감자를 위해 돌아가시다니!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순교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라도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으셨다면 나중에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 내 지척에서 울부짖는 동료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인권이며 신앙이 철저히 유린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계곡 안에도,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생생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의 순교는 1941년 8월 14일 단 한 번에, 혹은 순식간에 또는 엉겁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성모님의 종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순교를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죽음은 그가 매일 매일 살아온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그가 순교하신 후 한참 뒤에 그의 어머니께서 동료 수도자들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년 콜베 앞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는데, 그분의 손에는 두 개의 관이 들려있었습니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붉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다정한 음성으로 그에게 어느 것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소년은 즉시 둘 다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사라지셨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흰색의 관은 순결을 의미하고 붉은색 관은 순교를 뜻합니다.
결국 그는 평생토록 한 송이 백합처럼 순결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아사 감방에서 그토록 원하던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콜베 신부님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증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인해 가장 병약한 수감자 중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늘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답니다.
자신에게 배당된 말라비틀어진 작은 빵 한 조각도 허기로 고생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양보해주었습니다.
매일 배당되는 강제노역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을 먼저 선택했답니다.
간수들의 번득이는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동료 수감자들에게 사목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지옥의 도가니 속에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었으며 또한 자살 충동을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갔습니다.
폭력과 증오심을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그의 영웅적 덕행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동료들 한 명 한 명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평온한 얼굴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갔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2023. 8. 14. 월)(마태 17,22-27)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성전 세>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마태 17,22-23).”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왜 슬퍼한 것일까?
당시에는 제자들에게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되살아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은 흘려듣고, 또는 안 듣고,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만 듣고서 슬퍼한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은 듣지 않거나, 들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수준에서 알아듣는 말씀만 듣고서,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경청하고 새겨듣고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4-27)”
성전 세에 관한 규정은 탈출기에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이는 누구나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 한 세켈은 스무 게라이다.
그 반 세켈은 주님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
이것이 주님 앞에서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의 기념이 될 것이다(탈출 30,13-16).”
<성경 부록에 있는 도량형 표대로 계산하면 스타테르 한 닢은 8명의 몫이 되는데, 세켈 한 닢과 스타테르 한 닢을 동일한 가치로 계산하는 방식도 있고, 그 방식대로 계산하면 스타테르 한 닢은 두 사람 몫이 됩니다.>
율법 규정에 있는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똑같이’ 내야 한다는 뜻인데, 부자라고 더 내면서 생색내는 것도 안 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면제하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 세를 면제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없는데, 그런데도 성전 세를 내신 것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으로서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사람’으로서 당하신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십자가 수난에도 연결됩니다.>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계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14장에 있는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이(마태 14,33) 옳은 고백이었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말씀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정당한 직무 수행을 하고 있으니 그들이 하는 일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이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우리말 번역은 별로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으라고 시키신 것은 베드로 사도가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물고기 자체에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다른 사도에게 시키셨다면,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작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것은,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에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1,13).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성전 세를 내셨을까?
이미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렸다면, 성전 세를 내는 것을 거부하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의 범죄이고, 성전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 말씀도 하셨습니다.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마태 23,21)”
성전 세는 성전을 관리하는 사제들에게 내는 돈이
아니라, 성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돈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