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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 5. 사람에게 보이고자 - 마 23: 7. 문안 받는 것
마 23: 5. 사람에게 보이고자 -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
신명기 6: 8에 율법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찼다.
경문(經文)은 이마와 팔과 허리에 차는, 성경 구절들이 기록된 가는 양피지 띠를 가리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참 종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질이며, 외모로 함이 아니고 진심으로 함이다.
1]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 마 6: 1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허영적인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여기서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위 전체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임을 선언한다. 그들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일종의 가증한 연극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과 찬사와 인정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
* 요 12: 43 -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결국 이러한 비판은 사람이 가진 잠재적 심리를 정확히 찌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에 빠지기 쉽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숨겨져 있는 잠재적인 욕망까지 모두 제거하는 근본적 인간 변화를 암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2]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신약에서 경문(phylactery)이라는 단어는 여기서만 나타난다.
헬라어로 '퓔랖테리온'(*)이라고 하는 이 '경문'은 본래 '보호물', '호신패'(護身牌), '부적' 등의 뜻으로서 '표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타포트'(*)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신명기 6: 8에 율법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찼다.
* 신 6: 8 -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예수 당시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기도의 끈'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테필로트'(*) 또는 '테필린'(*)으로 불리게 되었다. '퓔랖테리온'은 '테필로트'의 번역이다.
경문은 이마와 팔과 허리에 차는, 성경 구절들이 기록 된 가는 양피지 띠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기 이후부터 이것을 차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율법을 기억하고 경건에 힘쓸 목적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함으로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자기 경건을 과시하거나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 이교도들의 부적 같은 것으로 믿고 착용하게 되었다.
이 경문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서에서 취한 네 부분들을 기록한 한 조각의 고급 피지(皮紙)를 담은 사각형의 상자로 묶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가죽이나 양피지로 덮혀 있었다.
* 출 13: 2-10 - 무교절 : 2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4 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으니 5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6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7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 8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9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 출 13: 11-16 - 초태생 : 11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12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14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15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16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
* 신 6: 4-9 – 기호와 표 –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 신 11: 13-20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 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유대인들은 출 13: 9, 16. 신 6: 8. 11: 18을 여자적(如字的)이고 미신적으로 해석하여 왼팔 안쪽 부위에나 앞 이마에 가죽 끈으로 부착하였다.
이 두 부분은 심장과 가까운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처음 이것을 부착하기 시작했던 때는 아침 '쉐마'(신 6: 4-5) 기도 때뿐이었으나 점차 하루 종일 차는 것이 관행(慣行)으로 되었고 심지어는 취침 때에도 부착했다고 전한다.
'경문'의 크기는 랍비들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극단의 경건주의자들(사실은 외식주의자들)은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크고 눈에 잘 띄는 경문을 만들었으며 그와 더불어 묶은 끈을 푸는 법과 매는 법에 대한 세세한 규정까지 만들었다.
3] 옷술을 길게 하고
'옷술'이란 민 15: 38. 신 22: 12등에 명한대로 '심라'(*)라는 겉옷의 네 귀에 단 '술'(tassel)을 가리킨다. (9: 20).
* 민 15: 38-39 –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 신 22: 12 -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 마 9: 20 -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 '술'은 석류 문양의 장식으로 된 것이며, 주로 단청색실로 짰다고 한다. 청색은 하늘의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영원성 및 순결성을 상징한다.
유대인들은 이 청색의 '술'을 달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자기의 거룩성을 자랑하는 데 힘썼다.
그들은 이 옷 술을 크고 길게 하여 될 수 있는 한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참 종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질이며, 외모로 함이 아니고 진심으로 함이다.
* 신 6: 5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잠 4: 23 -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딤후 3: 5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자신의 의복에 '술'을 다는 예를 취하셨다.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의 탈(mask)로서 착용하신 것은 아니었다.
* 마 14: 36 -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마 23: 6. 상석과 상좌 -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
막 12: 39에서는 어순이 바뀌어 나온다.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로 어순이 짜여 있다.
강조점을 우선하여 표현하는 것이 상식이라면 마가복음은 회당에 강조점을, 마태복음은 잔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잔치의 윗자리와
'잔치'(*, 테이프나)란 많은 손님을 초대하며 밤이 맞도록 즐기는 저녁 식사(supper)를 가리킨다.
이 잔치 자리의 '윗자리'(上席)는 상을 중심으로 바닥에 기댄 채 식사하는 유대 또는 헬라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출입구에서 제일 안쪽에는 잔치의 주역이, 그 오른쪽 끝에는 가장 귀한 손님이 앉는다.
우측 상단 끝이 바로 '윗자리'로서 이곳에서는 몸을 틀거나 고개를 좌우로 하지 않아도 식탁 전면을 바라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 상석을 원했기 때문에 연회마다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소한 시비(是非)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같은 윗자리 차지는 결국 세상의 명예와 영광에 심취해 있는 바리새인들의 타락한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 눅 14: 7 -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회당의 높은 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배치된 회당 내부 중 사람들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회당 관리자 옆, 곧 궤 앞의 우측 상단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존경받는 자들 및 회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앉아 지혜를 설파하곤 했다. (Lenski).
* 약 2: 2-4 –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바리새인들은 예배보다는 높은 자리 차지에 혈안이 되어 그들의 추악한 종교적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그들은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허영적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적 즐거움(잔치)과 신앙적 희열(회당)을 놓쳐버린 채 메마르고 배타적(排他的)인 삶에 찌들어 있었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것은 명예심이요 교만이다. 겸손한 인격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마 23: 7. 문안 받는 것 -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그들이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은 교만이며 명예심이다.
겸손한 인격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불못에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1]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시장 역시 공공장소이다.
공공장소에서 인사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월성을 인정받는 것이 된다.
2]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랍비(*)는 히브리어(*, 랍비)를 음역한 말로서 '나의 주', '나의 선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용어는 존경의 표시이지만 때로는 자기 과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랍비 학교에서는 이 용어를 반복(랍비여, 랍비여)하여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예수보다 한 시대 이전 시대인 힐렐(Hillel, 당시 유대교 율법 주석가 중 한 사람, A. D. 10년경 사망) 때부터 사용되었다. 이 말이 공식적 직책으로 사용된 시기는 A. 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 추정된다.
이 말은 존경의 표현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인데 예수에게도 사용된 바 있다.
* 마 26: 25, 49 –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 요 1: 38 -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 요 3: 26 –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물론 이 용어는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떤 특수한 신분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탈무드 시대(Talmudic times, A. D. 3-5C)에는 랍비의 지위가 상당하여 랍비의 제자는 그의 명령에 어떤 이의(異議)도 제기할 수 없는 절대 복종만이 가능했다.
그의 앞이나 옆에서 걸어갈 수도 없었고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 (Moses, Aberbach).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랍비의 지위가 그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3] 하나님의 법
주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수차례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만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기엔 너무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어긋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해석해 주고 재판을 하는 등 교회의 최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교묘히 이용하여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매우 위선적인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자들에겐 책망과 진노밖에 내려질 것이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자의 모습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기독교의 참된 교훈을 말씀해 주셨다.
(1)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이정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것이지 결코 괴로움이나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도 법이 있다. 세상의 법을 보더라도 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식적인 규칙이요 약속이다.
우리는 그 공식적인 규칙과 약속대로 행하여 지킬 의무와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율법은 신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과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고 지키라(3절)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은 기독교의 참된 교훈이요, 그 교훈을 행하고 지키는 데서 그 가치가 있다.
(2) 주님의 책망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를 향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은 듣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 찬 이기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입술로는 진리를 말하나 그 행위는 약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셨다.
① 타락한 양심
지키기 어려운 규례 규칙들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율법을 부담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자신들은 전혀 행하지 않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타락한 양심이다.
타락한 양심 속에는 그 어떤 사실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더구나 자신의 내면에서 외치는 소리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한 양심은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는 보나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그러한 자들과 같다.
* 마 7: 3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렇게 타락한 양심은 결국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밖에는 나올 수 없는 것으로서 진리를 수용할 수 없게 되고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② 타락한 행위
신자들이 멀리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은 일종의 허영심에서 비롯된 겉치레일 뿐이다.
경문(출 13: 11-16. 신 6: 4-9. 11: 13-21)과 겉옷에 다는 술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하는 겉치레는 허영심에 들뜬 타락한 행위다.
사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충성된 자들로 인정받기 위해 위선적인 행위를 통해서라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원했다.
사람과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위선적인 행위는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외모만으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③ 높아진 교만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자리는 당연히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한다.
그러나 교만은 나 자신을 하나님보다 앞 세워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히고 모든 이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이 모두가 타락한 양심과 행위에서 비롯된 교만이다. 교만함은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나 자신을 한없이 드높이는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3) 회복되어야 할 행위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고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어긋난 것들을 바로 잡기에 충분하다. 타락한 자들이 돌이키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을 회복시키고, 또한 자유하게 하신다.
그 자유는 바로 진리 안에서의 자유다.
타락한 양심과 행동, 그리고 교만함 속에는 결코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회복되고 자유하게 될 때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바로 신앙의 열매를 맺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며 그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통하여 삶의 부요를 더해 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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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배보다는 높은 자리 차지에 혈안이 되어 그들의 추악한 종교적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별일 없이 사는게 큰 행복입니다.
오늘도 순탄한 하루 되시고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바리새인들은 예배보다는 높은 자리 차지에 혈안이 되어 그들의 추악한 종교적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설교 감사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배보다는 높은 자리 차지에 혈안이 되어 그들의 추악한 종교적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