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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08.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 회개, 동정심 없는 나부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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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0.08 03:28
- 회개, 동정심 없는 나부터
오늘 요나는 화를 냅니다.
첫째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니 화를 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자기 말대로 회개하였는데도 화를 내고,
그것도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화를 내니 말입니다.
간댕이가 부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화낼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압니다.
니네베의 회개가 자기가 원한 것이었으면
화내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오히려 기뻐했을 겁니다.
니네베의 회개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지 요나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요나는 니네베가 회개치 않아 천벌 곧 하느님의 벌을 받길 원했지요.
참 무섭습니다.
미워하면 그가 회개하길 원하지 않고 천벌을 받길 원합니다.
미워하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지옥 가게 되길 원하지요.
그러므로 누구의 회개를 원한다면 나는 그를 참으로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사실 누가 잘못하면 저는 그를 미워하고 분노하기만 했지
그가 회개하길 바라며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영혼을 불쌍하게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쌍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뿐이지 오늘 요나서의 주님 같으려면,
다시 말해서 미움이나 분노의 불순물이 전혀 없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그런 완전한 사랑의 동정심이 있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을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데 이런 주님께 대해 요나는 이렇게 불평하고 화를 냅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그러우시고 분노에 더디신 것이 자기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라면 고맙겠는데
니네베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은 불만이고,
그래서 이런 하느님 자비에 대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회개해야 할 것은 요나와 저입니다.
동정심 없는 곧 무정한 저를 회개해야 하고,
내게 그늘을 주던 아주까리 잎 때문에 행복하고,
그것이 말라 죽으니 화나고 행복하지 않은 저를 회개해야 합니다.
나만 용서받고,
나만 구원받고,
동정심 없이 나만 행복하려는 내가
같이 용서받고 같이 행복한 내가 되기로 결심하며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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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회개와 배움의 여정”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참 어둡고 혼탁한 세상이요 구원의 빛을 찾는 인간들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살기 위해, 영혼이 살기 위해, 참으로 진짜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아니곤 답이 없습니다.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라는 말마디에서 예수님께 기도는 일상이었을 깨닫습니다. ‘기도의 일상화’라 할 만합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가르침도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조급하고 허망한 말을 피해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엄정한 말과 평안한 마음이 어우러질 때 덕은 완성된다.”
“대개 겉과 속을 함께 닦아야 그 덕이 외롭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해서는 안된다.”<다산;심경밀험>
바티칸 교황청의 홈페이지 레오 교황의 말씀도 어둔 세상을 비추는 빛처럼 반갑고 고맙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성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레오 교황이요 참으로 기도하도록 우리 마음을 일깨웁니다.
“하느님은 결코 지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람들은 인내와 신뢰를 배우도록 불림받았다:‘하느님의 시간은 언제나 완전하다(God’time is always perfect).’”
“참 신자의 증거는 겸손함과 자유로움이다.”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느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했으나, 그분은 우리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충실과 신뢰, 그리고 감사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믿는 이들을 부르신다.”
레오 교황의 11월27-12,2일까지 튀르기에와 레바논 제1차 해외 사목여행을 앞둔 교황청 관계자의 언급도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그분의 방문이 평화의 숨결이 되고 우리 모두의 쇄신의 계기가 되기를 참으로 희망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존엄을 위한 정의와 존경, 대화를 통한 평화보다 인간에게 다른 길이 없음을 인정한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가 답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단순한 삶이 그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어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기도입니다. 평생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오늘로 짧은 요나서는 끝납니다. 전 요나서는 “요나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다-요나가 회개하고 살아나다-요나가 니네베로 가다”에 이어 오늘 주제인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자애를 깨우쳐주시다.”로 끝납니다. 요나의 전삶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따라 전개됨을 봅니다. 분명 우리의 삶도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 같은 불림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나서가 흡사 하느님과 요나의 끝없는 줄다리기 싸움같습니다. 요나가 도망가도 끝내 잡아내고 맙니다. 하느님 수중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요나입니다. 요나를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이기적 편협한 마음을 넓혀가면서 하느님의 자애를 깨닫도록 일깨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일뿐 아니라 모든 죄많은 이민족들의 하느님이심을 일깨웁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했지만 내심 이들의 심판과 멸망을 바랬든데 이것이 이뤄지지 않자,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심통을 부리는 요나가 너무 인간적입니다. 이런 부정적 믿음의 특권의식은 원죄처럼 우리 믿는 이들의 보편적 정서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아주까리 예화를 통해 요나를 깨우쳐 주는 하느님의 유머스런 교육이 참 멋지고 재미있어 저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요나서의 결론같은 요나를 향한 마지막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 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는 물론이고 이 말씀을 접하는 모든 이들을 회개로 각성케 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부단히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평생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이를 위해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필요해서, 아쉬워서, 참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공부하는 마음으로 바치고 실천해야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신원을, 정체성을 날로 깊이 자각케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추상적 종교나 철학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의 아버지입니다.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평등한 자녀가 되고, 서로간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가족의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이런 삶의 중심인 아버지를 향할 때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도록 기도함과 더불어 우리의 협조의 응답이 필수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또 하느님의 나라가 임재하시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회개와 더불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함과 더불어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에 앞서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과 더불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결코 우리의 일방적 무책임한 청원이 아니라 우리의 적극적 협력을 통해 완성되는 주님의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와 각오로 바쳐야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실존 상황을 거울처럼 환히 비춰주는 성서의 요약과 같은 주님의 기도요, 주님을 날로 닮아가면서 참나를,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기도>가 현실화 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시편8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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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기도의 원형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처음 시작부터가 충격입니다. 하느님을 “압바”라는 친밀함으로 부르시며,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원과 지위로 들어 올리십니다. 저희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하시어,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충격은 그냥 “압바”가 아니라, “우리 압바”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한 형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우리’라는 말에는 시제가 없습니다. 곧 과거의 선조들과 예언자들을 포함하여 미래의 하느님의 자녀들까지를 포함하여 “우리”라는 형제 가족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서의 삶의 원리가 이 기도로 주어집니다. 곧 자녀로서의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름 아닌 ‘자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로지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아들, 딸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열쇠말은 “아빠” 입니다. 기도는 “아빠”를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기도는 “아빠, 아버지"이신 그분의 현존 앞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분을 대면하고 있는 면전에서 벌어집니다.
이로써,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동시에, 그에 따른 우리의 소명도 부여받았습니다. 곧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로서 걸 맞는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게 하는 일이요,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는 일이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는 일이요, 당신의 아드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용서”하는 일을 하는 것이요,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과 악”에서도 아버지를 신뢰하며 아버지께 의탁하는 일이요, 그러기에, “유혹과 악”에 빠지지 않게 구해달라고 아버지께 청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아들, 딸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녀의 길’을 걸어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주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자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제 마음을 드리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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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오래전에 신협 협동조합 정신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83년이니까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한 문장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이것이 바로 신용 협동조합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정신을 어머니의 ‘계(契)’ 모임에서도 보았습니다. 동네 분들이 함께 계를 조직해 앞번호를 받는 사람은 급히 돈을 쓰고, 뒷번호를 받는 사람은 매달 곗돈을 내다가 마지막에 목돈을 받습니다. 당장 급한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가 먼저 도와주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끝에서 받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계를 통해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신학교에도 신용협동조합이 있었습니다.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대출받고, 사제가 된 뒤에 갚곤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담보가 아니라 ‘신용’이었습니다.
사실 신용 협동조합 정신은 교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오셨습니다. 바로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조건을 이야기하며 따르지 못하면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이들아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리도, 창녀도, 나병환자도 예수님을 따르며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한 가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고, 큰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곧 신용이며, 이 믿음이 공동체를 살아 있게 만듭니다. 우리 본당에서도 이런 믿음의 실천을 자주 봅니다. 안경 휠체어가 필요하던 형제님을 위해, 뇌경색 치료로 급히 한국에 가야 하던 형제님을 위해, 많은 교우들이 정성을 모아주셨습니다. 바로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영적인 갈증을 채웠고, 오늘까지도 이 기도는 신앙인들의 삶을 이끄는 원형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만 빛내려 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바라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만 바라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고 남을 양식을 쌓으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아직도 누구에겐가 앙심을 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지을 기회를 애써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무심코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때로는 얼마나 삶과 동떨어질 수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문이며, 모든 기도의 원형입니다. 그러니 습관처럼 외우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새기며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곱씹으면서, 그 기도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합시다. 그러할 때 우리의 공동체는 더 신용 있고, 더 믿음 있는, 참된 교회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길을 오늘도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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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돈과 영혼!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7일 화요일- 마흔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축적의 삶에서 풍요로움의 삶으로
돈에 대한 관심과 영혼의 부름 사이에는 종종 줄다리기가 벌어집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는 우리가 각자가 돈과의 '영혼이 깃든' 관계, 즉 더 의미 있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명료하게 말합니다.
저는 돈과 영혼이 깊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진리는 오랜 지혜 전통(wisdom traditions) 속에서 이미 존재해왔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불교, 기독교, 유대교, 토착 신앙 등 다양한 영적 전통 속에는 돈을 단순한 거래 수단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신성한 교류의 일부로 보는 관점이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표면의 강만 보고 돈을 물질적 가치로만 인식하지만, 그 아래에는 영혼과 연결된 더 깊은 흐름(un río mas profundo)이 존재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흐름은 늘 돈의 다양한 형태였고, 그 시작은 물건을 교환하고 거래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더 깊은 흐름은 더 깊은 흐름은 이러한 교류가 우리 삶에 가져야 할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돈과 영혼은 우리 무의식 안에서 절대 분리되었던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인간 서로간의 교류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하느님과의 교류에 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 관점에서 보면, 돈과 영혼이 분리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본래 삶의 모든 영역에 영적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돈을 영혼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온전한 비전이 없다면 종교는 스스로를 팔아버리는 셈이 되는 셈입니다. 즉, 돈과 영혼을 분리하면, 종교는 돈의 세계에 대한 통찰과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종교는 "영혼 없는 돈의 문화"에 굴복하게 되고, 경외(awe)와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종교의 핵심 기반인 "놀라운 은총"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1]
영혼의 돈 연구소(the Soul of Money Institute) 창립자인 린 트위스트(Lynn Twist)는 우리 문화가 돈을 분리된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초래된 영향을 깊이 이해하며 이를 설명해 줍니다:
우리 대부분은 돈과의 깊은 내적 갈등의 관계 속에 있으며, 돈과 관련된 우리의 행동은 종종 우리가 가장 깊이 간직한 가치, 헌신, 이상—즉 제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과 충돌합니다. ... 저는 결국 모든 겉껍질을 벗겨내고, 우리가 믿으라고 배워온 것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면,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 즉 가장 보편적이고 영혼 깊은 헌신과 핵심 가치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안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고문과 복수, 보복이 정부와 지도력의 도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결국 모두를 위한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사랑이 넘치고, 풍요로운 삶을 원합니다....
우리는 모두 평생 동안 돈에 대한 관심과 영혼의 부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영혼의 영역에 있을 때, 우리는 진실하게 행동합니다. 사려 깊고 관대하며, 받아들이고 용감하며 헌신적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우정의 가치를 인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돈의 지배를 받을 때, 영혼의 아름다운 자질들은 덜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작아지고, 즉 우리 존재의 깊이와 품위가 축소되고... 종종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옹졸하며,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통제하려는 성향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승자나 패자, 강자나 무력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데, 그런 낙인들이 실제와는 다른 방식, 즉 정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깊이 규정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돈에 휘둘릴 때 우리는 두려움과 결핍의 심리에 빠지고, 자신과 타인을 경쟁과 우열의 틀로 바라보며,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왜곡된 기준으로 정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
돈이 중심이 된 듯한 세상에서, 우리는 영혼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하고 그것을 돈과의 관계에 반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돈 문화는 영혼에 의해 균형 잡히고 풍요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 중심의 사회에서 영혼의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게 할 때 돈은 단지 거래 수단이 아니라 사랑, 나눔, 공동체의 도구로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최근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족을 방문했을 때, 저는 판단, 좌절, 분노, 실망이라는 감정들과 씨름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상황이 제가 원했던 시간,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었던 거죠. 그러던 중 “감정을 환영하되 집착하지 않기” (Welcoming but Not Clinging) 라는 명상 글을 읽게 되었고, 그 내용을 통해 감정을 배우고, 놓아주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대신,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 덕분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 동안 어떤 감정이 올라오든 그 순간을 함께할 수 있었고, 결국 우리는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이었는지를 느끼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Christine A.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What Do We Do with Money?, unpublished notes, 2020.
[2] Lynne Twist with Teresa Barker, The Soul of Money: Reclaiming the Wealth of Our Inner Resources (W. W. Norton, 2017), 11–12, 17–18, 19–2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arón Blanco Tejedor, untitled (detail), 2017, photo, Finland,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사과를 내미는 열린 손은 탐욕에 대한 조용한 비판이 되며, 풍요를 쌓아두지 않고 나누는 ‘충분함’의 지혜와 영성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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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기도는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 즉 [우리 아버지 기도]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 것보다 짧고 간결한 루카 복음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를 시작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그냥 "아버지"라고 하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런 표현을 20번이나 사용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한 번도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유다인이었던 마태오 복음 저자와 이방인이었던 루카 복음 저자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추측컨대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단순히 "아버지"라고 하셨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하느님을 연상하게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마태오 복음 저자는 우리 육신의 아버지와 하느님 아버지를 구분하기 위해 이 "하늘에 계신"이라는 수식어를 집어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루카 복음의 단순한 "아버지"가 더 정감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저만의 느낌은 아니겠지요?
사실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를 초월해 계신 절대자요, 형이상적(形而上的: meta-physical)인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여(이사 7,14)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선언하듯이(마태 1,23),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는 분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단순한 의식이나 무언가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성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기도]는 가족적인 친밀함과 사랑에 기반한 기도이지, 어떤 권위자나 심판관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는 청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 아버지 기도]는 자녀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과 정을 지닌 어버이에게 자녀가 어버이의 그 본능적인 정과 사랑을 확신하며 자신의 마음을 나누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관점에서 당신 제자들인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것, 즉 기쁨, 슬픔, 걱정, 감사, 사랑, 정 등 이 모든 것을 하느님과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쩌면 이 기도는 어떤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정의 나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과 정의 나눔을 통해 그 관계성이 더더욱 친밀해지게 되는 것이고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말할 때, 그들은 대개 머리로 계산하거나 형식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속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말과 몸짓으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느님께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여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로 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을 권위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는 아버지로 소개하시지 않습니까?! 이는 기도가 두려움이 아닌 신뢰와 사랑에 기반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어쩌면 어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온전한 신뢰심의 마음으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이신 하느님 앞에 그저 현존하는(머무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내'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시는 하느님 앞에 우리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에는 우리의 신뢰가 근본적인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어버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실수하고 죄를 저질렀어도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여기시며 보살펴 주시고 죄의 비참함에서 우리를 꺼내주시려 온마음을 쓰시는(misericordia)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의 [사랑의 계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손바닥에 개암나무 열매보다 작은 무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는데, 하느님께로부터 '그것은 피조물이다.' 하고 대답하시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것은 너무 작아서 한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그것을 만드셨고 사랑하고 계시고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이렇게 큰 신뢰심을 드리는데도 이를 물리치신다면, 그는 하느님이 아닐 겁니다! 참 하느님은 한없는 사랑의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한없는~~~"
이런 신뢰심을 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자신에게 친밀한 사랑과 정으로 다가오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만 믿고 살면 더 제멋대로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로 하느님의 사랑에 신뢰심을 둔 것이 아닐 겁니다!"라고요.
왜냐하면 하느님께 신뢰심을 두기 시작한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미 하느님 사랑이 실현될 가능성의 힘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그들에게 못된 짓을 저지른 니네베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 아니십니까?! 하느님의 사랑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해 주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이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절대) 잊지 않는다."(이사 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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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2)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낸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
본성에 따라 만유의 하느님이신 분이 모든 거룩한 이들 가운데 가장 거룩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확고히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지고한 위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경외하며 바르고 흠 없는 삶을 꾸려 나가게 되며, 이로써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 거룩하신 하느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그런즉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라는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거룩히 드러내시며’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하고 기도할 때, 그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도록 다른 무엇을 어떻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이보다 더 쓸모 었고 가치 있는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엑카르트는 이 인용문을 바탕으로 하여 본 설교에서 몇 차례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요한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우리가 신비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진리의 온전한 의미를 아직은 모른다. 그는 요한 1서 3장과 4장의 외에 따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리는 표지가 무엇인지를 규명한다. 이 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열매로 그틀을 알아보시오’(마태 7.20).
그는 우리의 낳음과 열매가 참된 것인지를 가르는 기준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자리에서 지적한 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몇 가지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 22에서 그는 하나의 표지를 제시했다. 그는 본 설교에서 네 개의 표지를 더 제시한다.
이 표지 가운데 첫째 것은 안에 있음이다. 엑카르트는 그리스도론적인 만유내재신론의 진술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이 지혜 안에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빛이 공기 속에 잠겨 있고, 조명을 받은 빛이 조명 자체가 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잠져 있다. 우리는 아들이 지닌 것과 동일한 본질올 지님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483)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하나의 거대하고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역사적인 과정, 다시 말해 큰 형식의 혁명에 대하여 어떤 개별적인 인물이,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만큼 그렇게 대단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드물었다” (J. Lortz).
이 종교개혁가 이전에 이미 한번이라도 생각되었거나 이야기된 적이 없는 사상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새로웠고 또 동시대인물에게 새로운 것으로 느껴질 수 있을 만큼, 그는 모든 것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종교개혁은 완전히 그의 독특한 고유의 작품이었다. 그가 이 운동 전체를 일부러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는 당시의 종교적 • 정신적 • 정치적 • 사회적인 모든 불안이 총괄되어 있던, 너무나 가득차 있던 화약통에 불똥을 던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다음 그는 이 불에다 자신의 인격의 무게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관철력을 부여하였다.
가톨릭적 루터상:
루터의 가톨릭적인 모습은 테니플레의 저술(1904∼ 1909)과 그리사르의 저술(1921∼1930)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불쾌한 논쟁은 이 종교개혁가를 그의 시대와 그의 의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에 굴복하였다. 우리는 중세 후기 교회의 불쾌한 상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던 그가 지녔던 관심사의 정당성과 함께 그의 개혁 의도의 순수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신도 사실은 교회 안에서 현저하게 시작한 개혁 의지의 하나의 대표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원기왕성하게 출현한 그가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를 거슬러 종교개혁가가 된 것 바로 그것이 비극이다.
루터가 1517년에 테첼의 대사 거래를 반대하였을 때, 그는 교회의 순수한 가르침의 대변자로서 거룩한 것들을 정말로 부끄러운 방법으로 거래하고 있는 남용을 반대하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미니코회원과의 대결은 신학적 학설의 대립으로 빛을 잃어버렸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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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2년 12월 거의 몇 시간 차이로, 차례로 세상을 떠나신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갑내기인 이 부부는 2022년 7월에 100세 생일, 그리고 결혼 8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들은 미국 오하이오주 해밀턴에 사는 허버트와 준 말리코트 부부입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8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다고 고백하십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그 비결을 묻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잠들기 전 매일 반드시 키스합니다.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잠시 떨어져 시간을 갖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대화했습니다.”
키스하면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이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싸울 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노부부의 고백을 통해 ‘친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친밀감을 잃지 않도록 삶 안에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친밀감이 계속 대화를 나눌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하지요. 이 관계는 친밀감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만 그럴까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친밀감이 있어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평생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연중행사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마지못해서 주일 미사 참석하는 사람이 과연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을까요?
제자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루카 11,1). 당시 유다교에서는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고유한 기도를 가르쳐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제자 공동체로 남들에게 보이길 바랐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라고 시작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여기서 핵심이 ‘아버지’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 때문에 감히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르는 표현을 쓰십니다. 기도의 가장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친밀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하느님과의 신뢰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날 수 있으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의 생존(양식), 관계(용서), 그리고 영적 성장(유혹에서의 보호)에 필요한 은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친밀감’을 형성하는 노력보다, 먼 곳에서 우리를 보시는 분 아니면 자기 부탁을 다 들어주는 분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사랑은 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다(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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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 27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 - 우리들의 묵상. 김종업로마노.
인간의 역사는 전쟁(戰爭), 하느님의 역사는 용서(容恕).
인간의 역사는 전쟁(戰爭), 하느님의 역사는 용서(容恕). 독서(요나4,10-11)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원수)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예쁜 화초(花草)보다, 애완견(愛玩犬)보다 나는 가족(家族)을 얼마나 소중(所重)히 여겼는가? 화초에 물을 주면서, 애완견에게 먹이를 주면서, 나는 이웃에게 얼마나 관심(觀心)을 주었는가? 그리스도인으로 가족, 이웃을 살리려 생명의 양식, 물인 하느님과 말씀을 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말씀을 주었더니 듣기 싫어해서, 관계가 서먹해 질까봐 말을 꺼리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육(肉)의 양식, 물질을 나누며 그것으로 만족(滿足)해 하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그 모두가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지 못한 우리의 이기적(利己的)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祈禱)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의 노력,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기도로 성령을 청(請)하고 그 보호자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로마8,15-16)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證言)해 주십니다. = 성령께서 가족과 이웃의 마음에, 영애개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해 주시길 청(請)해야한다. 복음(루카11,1-4) 1ㄱ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 어떤 곳, 어떤 사람?- 현세(現世)의 ‘나’, ‘우리’가 되라는 것이다. 1ㄴ“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한 대목, 한 대목씩 풀어보자. *“아버지” - 우주 만물을 완벽하게 창조하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그리고 그렇게 나(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다.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 육(肉)의 창조에서 영(靈)의 자녀로 재창조로 하시는 아버지시다. 진리(眞理)의 말씀으로 곧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약속으로, 그분의 십자가(十字架)로 재창조하시는 아버지다. (히브12,10-11) 10 육신의 아버지들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잠깐 훈육하였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이다. *“아버지의 이름(뜻)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 아버지의 이름(뜻)이, 거룩하심을 먼저 아버지께서 드러내 주셔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聖靈)께서 알려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신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洞察)하십니다. =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곳이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나라는 통치(統治)의 개념이다. 통치는 그 나라의 법으로 이루어진다. 곧 아버지의 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법이기에 그 말씀에 순종(順從)해야 한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하고 기도 했으니(세례 받았으니) 그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아버지의 말씀을 사는 것이 아닌, 내 말(뜻)을 위해 사는 아버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으로 아버지의 이름(뜻), 나라를 완성하신 것이다. (1베드2,9-10) 9 그래서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0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로마5,8-11)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 나(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생명)의 양식으로 매일 되새겨야(먹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죽음)으로 재빨리 돌아간다. 그래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다. - 매일, 날마다 주시는 독서(牘書)와 복음(福音)을 육의 뜻, 만족을 위해서가 아닌, 영의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묵상(黙想)하고 먹어야 한다. 내 이름, 뜻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 뜻을 위한 말씀으로, 곧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고, 그 성령께서 해 주셔야한다고 앞서 묵상하는 것이다.(1코린2,10참조) 그렇게 용서로 재 창조가 이루어진다. (요한5,24)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1요한2,12) 12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인생은, 이 역사는 그리스도로 받는 용서의 역사(歷史)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새 계약인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十字架)로 너와 나의 모든 죄의 용서가 다 깨끗이 씻겼음을 믿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받는 용서(容恕)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인 용서가 완성된다. (1요한1,9-10)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인정)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 율법(제사와 윤리)은 절대 용서를 줄 수 없다. 세상의 계명, 의(義)도 용서를 줄 수 없다. 재물(財物)이 하늘의 용서를 둘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참 같아 보이기에, 그 모든 유혹(誘惑), 악(惡)에 빠지지 않게 기도(祈禱)해야 한다.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가능하다. (요한16,8)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2코린3,3) “여러분은 분명히 우리의 봉사직으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추천서입니다. ” = 추천서(推薦書)- 이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계시(啓示)입니다. 얼마나 멋진 성소(聖召)입니까? 우리 안에 새겨진 성경의 주님의 계시를 그 누구나 읽을 수 있다면,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안에 살아 움직이는 확신에 찬,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또 우리 각자가 주님 사랑의 태양으로 빛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써 놓으신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는 기쁨과 환희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이 내 안에서 지금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요. 나의 행동을 인도하는 것이 주님의 성령(聖靈) 맞습니까? 기도; 나의 예수님, 당신을 닮게 하소서. 이웃을 위해서도 축복하시어 그들도 당신을 닮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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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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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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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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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그것으로 기도는
하느님과 아버지-자녀 관계를 맺는 대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아버지는
단순히 육체적인 부모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유다 사회에서 아이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속했습니다.
남자 아이같은 경우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그렇게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여자 아이의 경우 결혼으로 그녀를 보호할 의무가
그녀의 아버지에서 그녀의 남편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것은 힘 없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잃은 과부나 부모를 잃은 고아는
공동체가 보호해야 했습니다.
이렇듯 유다 사회에서 아버지는
자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자녀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의존했습니다.
즉 자녀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줄 의무가
그의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의무를 하느님께서 기꺼이 짊어지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도 포함합니다.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은
우리가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서
내 자존감이 낮아지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너는 이렇게 못난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인식합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면서
인간적인 부족함에도 우리는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기쁨 속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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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8.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1,1-4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라 할 수 있는 ‘비나이다 비나이다’ 정신 때문인지, 나름 신앙생활을 오래 하셨다는 분들도 ‘기도’라고 하면 하느님께 정성을 다하여 꾸준히 청함으로써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를 이루는 행위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인식은 예수님 시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지요. 제자들은 자기들이 소위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분을 지근(至近)에서 모시는 이들이니, 예수님만 사용하시는 특별한 기도 방법을 전수받기만 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남들보다 더 잘 이룰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청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향하시고 바라시는 참된 기도는 하느님의 능력과 힘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바치는 ‘청탁의 기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내 기준과 고집,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나 또한 진심으로 바라기 위해, 사랑과 신뢰에서 우러나오는 순명으로 하느님과 더 깊이 일치되기 위해 바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총의 선물들을, 우리의 참된 행복과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며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가득히 받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며 참된 기쁨과 영광을 누리실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며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 중요한 원칙과 지향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미사 중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가 되면 사제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삼가다’라는 말은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라는 뜻이지요. 즉 주님의 기도는 아무 느낌 없이, 습관적으로, 자신이 사적으로 바라는 다른 지향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바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섬기는 자녀로서 겸손한 자세로 바쳐야 합니다. 혹시 그분 뜻을 거스르거나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는 않을까 조심하며 바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바를 ‘들어주셔도 그만 안들어주셔도 그만’이라는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그분께서 언제나 내 청을 귀기울여 들어주신다는 엄숙한 자세로 바쳐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그렇게 바칠 때, 우리는 그 기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바람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바람이 모두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서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놀라운 신비를 생각하며 단 한 번을 바치더라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 안에 깊이 머무르려는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어여삐 보시고, 부족한 우리로 하여금 당신 구원과 사랑의 신비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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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70
10월8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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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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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회 박민웅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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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하느님, 결코 두렵거나 어려운 분이 아닙니다!>
요즘 계속 첫 번째 독서로 봉독되고 있는 요나 예언서, 참으로 재미있고 심오한 성경입니다. 요나 예언자 역시 참 재미있고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이 부러운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스스럼없이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과 나눈 대화를 보면, 마치 불만 많은 아들이 인자한 아버지에게 따지고 투덜거리고, 참 편안하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하느님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두려운 존재로 여기고, 감히 일대일로 만나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적합한 멀고 먼 당신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요나 예언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할말 안할말 다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때로 따지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하고, 마치 친 아버지 대하듯 합니다. 그만큼 그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이 왠지 멋져 보이고 통쾌해보이고 그럴 듯 해보이지만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마냥 승승장구하는 삶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백성들에게 전해야할 메시지의 핵심이 칭찬과 보상이 아니라 저지른 죄에 대한 고발과 멸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백성들 앞에 반대 받는 표적이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처음 부르심을 받고 보인 첫 번째 반응은 강한 저항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저는 아직 어려서, 저는 부양가족이 있어서,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등등.
요나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해야할 예언의 리스트를 훑어보니 도저히 백성들에게 전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 부터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게 말이나 되는 행동입니까? 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기를 쓰고 도망친다고 도망쳐봤지만 요나는 고작 하느님 손바닥 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거부의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 사흘간이나 머무는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참 하느님께서도 참 재미있으십니다. 거부에 대한 벌로 육체적 질병을 겪게 한다든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게 하셔도 될 텐데, 요나를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물고기가 사람 뱃속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사람이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아마도 커다란 고래뱃속이었겠지만. 고래뱃속 깊은 곳, 캄캄한 곳에서 사흘을 버티는 동안 요나의 인생은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절박한 상황 앞에 놓인 요나는 간절히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는 존재론적인 심오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결국 요나 역시 사흘간의 진한 바닥체험을 통해 참 예언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의 회심 여정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친근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역시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그가 좋은 신앙인이었지만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노력한다고 노력했지만 아직 두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때로 옹졸했고, 때로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사흘간의 죽음체험을 통해 요나는 온전한 주님의 참 예언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드디어 그는 일말의 두려움 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백성들 앞으로 다가섭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때로 거침없이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하는 주님 말씀의 선포는 왜 이리 설득력과 호소력이 떨어지는 것일까요? 말씀 선포자인 우리들이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표시입니다. 보다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회심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주님 앞에 성의를 보일 순간입니다. 그들의 요나 예언자의 강력한 경고 앞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임금으로부터 시작해서 하인들까지 회개의 표시로 비단옷을 벗고 자루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니네베 왕은 범국민적인 단식을 선포했고, 큰 뉘우침의 표시로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신 주님의 마음이 드디어 눈 녹듯이 녹아내렸습니다. 단단히 징벌하려던 주님께서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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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나침반이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이 말은 스승마다 기도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바치는 것이 스승과 하나 되는 어쩌면 유일한 길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승이 주는 기도는 그 스승을 향할 수 있게 만드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기도가 나침반이 되는 이유는 기도 안에는 청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청하느냐가 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만을 원한다면 개일 가능성이 큽니다. 썩은 고기만 원한다면 그것은 하이에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피만 원한다면 그것은 모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듯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가 장차 무엇이 되는지 알려주는 척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 자녀의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기도 안에서 청하는 것을 나도 청하면 내 존재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에 전해준 십계명과 같습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 하느님의 계명이 다 들어있고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청하면 하느님의 자녀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자아를 따라 사탄이 되게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합니다.
만약 이 기도를 모르고 무조건 잘 살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리를 잃은 사람처럼 되어 완전한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갈 때 나침반을 가져가야 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 때 주님의 기도를 가져가야 길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일본 어느 영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남편의 제자가 남편을 보겠다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비가 너무 와서 길이 침수되어 남편에게 그날은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자도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그 집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둘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자 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남편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내는 아침에 가방을 싸고 있었습니다.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떠나 친정집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는 이유를 묻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용서했어요. 그런데 잠잘 때 내 살이 닿자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괴로워했어요. 당신은 나를 용서하느라 너무 고통을 받고 있어요. 그 고통을 덜어주려면 내가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정말 아내를 용서한 것일까요? 용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에는 어떤 청원이 나옵니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남편은 자신은 죄인이라 여기지 않는 상태에서 아내를 용서하려 하니 잘 안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오십보백보입니다. 크나 작으나 다 죄인입니다. 남편이 주님의 기도를 알고 꾸준히 바칠 수 있었다면, 아내만 그렇게 죄인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우리의 방향을 명확히 잡아줄 나침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영화 ‘사도’(2015)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만 잘못하고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무덤에 오랫동안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의 탓도 있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면 모든 인간이 주님께서 악에서 구해주어야 하는 상태임을 알고 더 자비로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파라오는 우리를 지배하는 하나의 욕구를 대변합니다. 파라오는 우리가 그 욕구를 채워줄 때마다 웃어줍니다. 그러나 그다음 날이면 다시 그 욕구를 채우라고 채찍을 듭니다.
자아의 지배하에 사는 사람은 모두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 나침반을 가져오셨습니다. 이 나침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십계명과 같습니다. 십계명을 따르면 파라오의 욕구를 따라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두 법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주신 계명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따르면 예수님에게로 향할 수 있고 결국 아버지께로 향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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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오래전에 신협 협동조합 정신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83년이니까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한 문장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이것이 바로 신용 협동조합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정신을 어머니의 ‘계(契)’ 모임에서도 보았습니다. 동네 분들이 함께 계를 조직해 앞 번호를 받는 사람은 급히 돈을 쓰고, 뒷 번호를 받는 사람은 매달 곗돈을 내다가 마지막에 목돈을 받습니다. 당장 급한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가 먼저 도와주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끝에서 받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계를 통해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신학교에도 신용협동조합이 있었습니다.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대출받고, 사제가 된 뒤에 갚곤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담보가 아니라 ‘신용’이었습니다.
사실 신용 협동조합 정신은 교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오셨습니다. 바로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조건을 이야기하며 따르지 못하면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이들아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리도, 창녀도, 나병환자도 예수님을 따르며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한 가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고, 큰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곧 신용이며, 이 믿음이 공동체를 살아 있게 만듭니다. 우리 본당에서도 이런 믿음의 실천을 자주 봅니다. 안경과 휠체어가 필요하던 형제님을 위해, 뇌경색 치료로 급히 한국에 가야 하던 형제님을 위해, 많은 교우들이 정성을 모아주셨습니다. 바로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영적인 갈증을 채웠고, 오늘까지도 이 기도는 신앙인들의 삶을 이끄는 원형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만 빛내려 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바라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만 바라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고 남을 양식을 쌓으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아직도 누구에겐가 앙심을 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지을 기회를 애써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무심코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때로는 얼마나 삶과 동떨어질 수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문이며, 모든 기도의 원형입니다. 그러니 습관처럼 외우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새기며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곱씹으면서, 그 기도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합시다. 그러할 때 우리의 공동체는 더 신용 있고, 더 믿음 있는, 참된 교회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길을 오늘도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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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두 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는 독서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입니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요나 4,2-3) 요나는 하느님께 투정 부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죽는 것이 낫다고 한탄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왜 제자들은 주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가지신 것이 없으셨지만 모든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셨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목숨까지 내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백 데나리온의 돈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고, 그것도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이 없으신 가운데에서도 나눔으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시면서도 부유하시고, 머리 둘 곳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면서도 늘 유쾌하시고 다른 이에게 온유하신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어느 때라도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청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요나의 기도’와 ‘주님의 기도’, 이 둘은 ‘기도’라는 말에서는 같지만, 기도의 지향점은 다릅니다. 요나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주님의 기도는 주님을 향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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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1-4: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1절)라고 청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는 가장 완전한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매일 드리는 주님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요약한 복음의 핵심이다. 테르툴리아노는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며, 우리 신앙의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De oratione,1)고 하였다.
첫째, “아버지”라는 부름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세워 주신 은총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과 같은 친자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신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나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둘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는 청원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바라며, 우리 삶이 그 뜻을 증거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간구이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는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 때 가능하다.”(De dominica oratione,12)고 했다.
셋째,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청원은 단순히 물질적 필요를 위한 기도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살리는 성체성사, 곧 생명의 빵을 가리킨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넷째,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도 용서합니다.” 이 부분은 주님의 기도 중심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받은 용서를 다른 이들에게도 흘려보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너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기도는 너희 입술의 심판이 될 것이다.”(Sermo 58,9)라고 강하게 경고하였다.
마지막으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단순히 시험을 피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과 맞설 때 성령의 힘으로 굳건히 서게 해 달라는 간구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유혹과 시련이 늘 함께 하지만, 그 속에서 주님과의 일치가 더욱 깊어진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그리고 날마다 이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그 기도가 습관적 반복이 되지 않도록, 매 구절을 내 삶에 비추어 드려야 한다. 주님의 기도는 단순히 입술의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드려야 할 기도이다. 이 기도를 묵상하며 드린다면, 그 기도는 참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은총의 기도가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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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하니 그리하여 기도하며>
루카 11,1-4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니 그리하여 기도하며>
기도하니
당신의 눈길이 느껴지고
당신께서 바라보시는 내가 느껴지고
당신께서 바라보시는 벗이 느껴집니다
기도하며
당신의 눈길이 느껴지니
당신께서 바라보시듯 나를 바라보고
당신께서 바라보시듯 벗을 바라보렵니다
기도하니
당신의 품이 느껴지고
당신께서 품으시는 내가 느껴지고
당신께서 품으시는 벗이 느껴집니다
기도하며
당신의 품이 느껴지니
당신께서 품으시듯 나를 품고
당신께서 품으시듯 벗을 품으렵니다
기도하니
당신의 살림이 느껴지고
당신께서 살리시는 내가 느껴지고
당신께서 살리시는 벗이 느껴집니다
기도하며
당신의 살림이 느껴지니
당신께서 살리시듯 나를 살리고
당신께서 살리시듯 벗을 살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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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신앙인이 지켜야 하는 ‘생활 지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1-4)
1) 여기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말은, 표현만 보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으로 보이는데, 뜻으로는 기도문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바치는 기도문과는 다른, 자기들만의 기도문을 갖고 싶어 했던 것 같고,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문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2) ‘주님의 기도’는, 우리 교회의 대표 기도이고,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전반부는 신앙생활의 목적을 나타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기를 청하는 기도와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청하는 기도는, 하느님의 구원사업과 하느님 나라가 하루 빨리 완성되기를 바라는 기도이고, 동시에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잘 나타내는 말이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우리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나 빌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만을 희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원하고, 그런 것들만 얻으려고 기도하는 것은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그냥 미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나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이고, 하느님 나라는 그 생명을 얻어 누리면서 영원히 사는 곳입니다.>
3) ‘주님의 기도’ 후반부는 신앙생활 지침, 또는 신앙인들이 지켜야 할 ‘삶의 지침’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오늘’을 살아가게 해 주는 양식입니다. ‘내일의 일’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일의 일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내일’은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 먹을 양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구약성경 탈출기에 있는 ‘만나’ 이야기와(탈출 16장)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8.10)
4) ‘주님의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 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모두를 위한 나라, 우리가 함께 들어가야 할 나라이고,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모든 사람이) 함께 먹어야 할 양식입니다. <남이야 굶든지 말든지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5)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아주 많이, 그리고 자주
강조하셨는데, 주님의 기도에서도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서로 용서하여라.”이지만,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는 “용서는 내가 먼저 한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인의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에서 용서가 나오고, 용서에서 일치와 평화가 생깁니다. 그 일치와 평화에서 일용할 양식의 나눔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 사랑, 용서, 일치, 평화가 완성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6)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마귀의 유혹이든지, 내적 욕망이나 세속에서 오는 유혹이든지 간에 ‘기도’는 유혹을 물리치는 대단히 강력한 무기이고, 유일한 무기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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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생활의 반석>
주님의 기도는 너무 자주, 흔하게 바치는 기도이기에 고루하고 낡은 기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성경말씀을 덧붙여 길게 늘어놓아야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저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이니, 입술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생활의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시선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의 말은 미신에서 하는 주문처럼 소용없는 말들이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주신 분에게 향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깨닫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모두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잊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친밀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후반부는 우리 서로간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이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챙겨주게 될 때 주님의 기도는 완성됩니다. 그때 하늘 아버지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이 아버지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참된 기도는 하느님을 친숙하게 대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앵무새처럼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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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에서 ‘기도’를 주제로 다루는 첫 번째 본문입니다.(11,5-13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소개하는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보다(6,9-13 참조) 간결합니다. 5개의 명령문으로 이루어진 기도문은 두 가지 기원(2인칭 단수)과 세 가지 청원(1인칭 복수)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찬양하고 그분의 다스림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고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에, 세 가지 청원이 이어지는데, 먼저 필요한 양식을 주시기를 청하며, 이어서 죄의 용서와 유혹에서 보호하여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추가로 주목할 것은 제자들의 요구에 앞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1,1 참조)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면서(10,21 참조), 예수님께서 먼저 기도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의존하시면서 한결같고 견고한 믿음 안에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기도’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 그리고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를 바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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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주님의 기도가 지닌 독특한 점은 예수님 시대 즈음에 유다교 회당에서 바치던 열여덟 청원 기도문(쉐모네 에스레)이나 고대 근동의 아카드인들이 바치던 양팔 기도문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납니다.
이 두 기도문에는 무엇보다도 신적 존재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게 열거되어 나옵니다. 마치 여러 호칭을 계속 반복하지 않으면 그 신적 존재가 그 기도를 듣지 않을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는 배경에는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임금에게 무엇인가를 청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문들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전에서 멀리 떨어져 무릎을 꿇게 되는데, 이때에도 고위 신하가 눈짓으로 허락을 해야 겨우 자기가 청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에게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는 이렇게 엄숙하고 격조 높은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한 번만 부르는데, 이마저도 가족 안에서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의 기도는 가족과 나누는 친밀하고 편안한 대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보통 가족끼리는 에두르거나 거창한 말로 꾸미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편안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며 그분을 붙잡고 마음 편히 우리의 바람을 아뢸 수 있는 응석받이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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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영동 치릴로 신부님]
<주님의 기도>
오늘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는 우리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서에 실려있는 모든 기도문들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그 안에서 여러분이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다 른 어떤 기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바쳐야할 모든 기도가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순서대로 청합니다.
이 기도는 청해야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즉, 어떤 것을 기도해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기도해야 하는지가 주님의 기도에 다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좋은 모범인 주님의 기도가 있는데도, 우리는, 너무 자주 바치고 또 외우고 있다는 것 때문에 주님의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기도를 바치기가 일쑤입니다. 실상 많은 기도를 바친다고 하는 우리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순서대로 그 내용 그대로를 바친다면 우리도 기도를 제대로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모범에 따르면 우리는 기도할 때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는 기도를 먼저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 중에 우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잘 못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나 그분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열망하는 것이 기도의 기본이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을 좇았던 예수님의 열망이 떠오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둘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합니다. 피조물이며 죄인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청원을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고,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지켜주시기를 청합니다.
이 청원도 나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모두를 위한 청원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이웃에까지 관심을 가지며, 형제를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청하며 악과 대항하여 깨어있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필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와 명성을 청하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매여 세상 것을 너무 자주 청하는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모범을 따라 의미를 새기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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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2년 12월 거의 몇 시간 차이로, 차례로 세상을 떠나신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갑내기인 이 부부는 2022년 7월에 100세 생일, 그리고 결혼 8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들은 미국 오하이오주 해밀턴에 사는 허버트와 준 말리코트 부부입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8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다고 고백하십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그 비결을 묻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잠들기 전 매일 반드시 키스합니다.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잠시 떨어져 시간을 갖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대화했습니다.”
키스하면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이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싸울 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노부부의 고백을 통해 ‘친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친밀감을 잃지 않도록 삶 안에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친밀감이 계속 대화를 나눌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하지요. 이 관계는 친밀감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만 그럴까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친밀감이 있어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평생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연중행사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마지못해서 주일 미사 참석하는 사람이 과연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을까요?
제자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루카 11,1). 당시 유다교에서는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고유한 기도를 가르쳐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제자 공동체로 남들에게 보이길 바랐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라고 시작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여기서 핵심이 ‘아버지’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 때문에 감히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르는 표현을 쓰십니다. 기도의 가장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친밀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하느님과의 신뢰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날 수 있으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의 생존(양식), 관계(용서), 그리고 영적 성장(유혹에서의 보호)에 필요한 은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친밀감’을 형성하는 노력보다, 먼 곳에서 우리를 보시는 분 아니면 자기 부탁을 다 들어주는 분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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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기도의 원형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처음 시작부터가 충격입니다. 하느님을 “압바”라는 친밀함으로 부르시며,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원과 지위로 들어 올리십니다. 저희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하시어,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충격은 그냥 “압바”가 아니라, “우리 압바”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한 형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우리’라는 말에는 시제가 없습니다. 곧 과거의 선조들과 예언자들을 포함하여 미래의 하느님의 자녀들까지를 포함하여 “우리”라는 형제 가족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서의 삶의 원리가 이 기도로 주어집니다. 곧 자녀로서의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름 아닌 ‘자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로지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아들, 딸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열쇠말은 “아빠” 입니다. 기도는 “아빠”를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기도는 “아빠, 아버지"이신 그분의 현존 앞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분을 대면하고 있는 면전에서 벌어집니다.
이로써,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동시에, 그에 따른 우리의 소명도 부여받았습니다. 곧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로서 걸 맞는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게 하는 일이요,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는 일이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는 일이요, 당신의 아드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용서”하는 일을 하는 것이요,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과 악”에서도 아버지를 신뢰하며 아버지께 의탁하는 일이요, 그러기에, “유혹과 악”에 빠지지 않게 구해달라고 아버지께 청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아들, 딸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녀의 길’을 걸어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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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주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자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제 마음을 드리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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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회개와 배움의 여정”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 86,4)
참 어둡고 혼탁한 세상이요 구원의 빛을 찾는 인간들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살기 위해, 영혼이 살기 위해, 참으로 진짜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아니곤 답이 없습니다.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라는 말마디에서 예수님께 기도는 일상이었을 깨닫습니다. ‘기도의 일상화’라 할 만합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가르침도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조급하고 허망한 말을 피해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엄정한 말과 평안한 마음이 어우러질 때 덕은 완성된다.”
“대개 겉과 속을 함께 닦아야 그 덕이 외롭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해서는 안된다.”<다산;심경밀험>
바티칸 교황청의 홈페이지 레오 교황의 말씀도 어둔 세상을 비추는 빛처럼 반갑고 고맙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성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레오 교황이요 참으로 기도하도록 우리 마음을 일깨웁니다.
“하느님은 결코 지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람들은 인내와 신뢰를 배우도록 불림받았다: ‘하느님의 시간은 언제나 완전하다(God’time is always perfect).’”
“참 신자의 증거는 겸손함과 자유로움이다.”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느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했으나, 그분은 우리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충실과 신뢰, 그리고 감사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믿는 이들을 부르신다.”
레오 교황의 11월27-12,2일까지 튀르기에와 레바논 제1차 해외 사목여행을 앞둔 교황청 관계자의 언급도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그분의 방문이 평화의 숨결이 되고 우리 모두의 쇄신의 계기가 되기를 참으로 희망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존엄을 위한 정의와 존경, 대화를 통한 평화보다 인간에게 다른 길이 없음을 인정한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가 답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단순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 그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어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기도입니다. 평생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오늘로 짧은 요나서는 끝납니다. 전 요나서는 “요나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다-요나가 회개하고 살아나다- 요나가 니네베로 가다”에 이어 오늘 주제인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자애를 깨우쳐주시다.”로 끝납니다. 요나의 전삶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따라 전개됨을 봅니다. 분명 우리의 삶도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 같은 불림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나서가 흡사 하느님과 요나의 끝없는 줄다리기 싸움같습니다. 요나가 도망가도 끝내 잡아내고 맙니다. 하느님 수중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요나입니다. 요나를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이기적 편협한 마음을 넓혀가면서 하느님의 자애를 깨닫도록 일깨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일뿐 아니라 모든 죄많은 이민족들의 하느님이심을 일깨웁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했지만 내심 이들의 심판과 멸망을 바랬든데 이것이 이뤄지지 않자,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심통을 부리는 요나가 너무 인간적입니다. 이런 부정적 믿음의 특권의식은 원죄처럼 우리 믿는 이들의 보편적 정서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아주까리 예화를 통해 요나를 깨우쳐 주는 하느님의 유머스런 교육이 참 멋지고 재미있어 저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요나서의 결론같은 요나를 향한 마지막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 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는 물론이고 이 말씀을 접하는 모든 이들을 회개로 각성케 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부단히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평생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이를 위해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필요해서, 아쉬워서, 참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공부하는 마음으로 바치고 실천해야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신원을, 정체성을 날로 깊이 자각케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추상적 종교나 철학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의 아버지입니다.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평등한 자녀가 되고, 서로간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가족의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이런 삶의 중심인 아버지를 향할 때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도록 기도함과 더불어 우리의 협조의 응답이 필수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또 하느님의 나라가 임재하시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회개와 더불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함과 더불어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에 앞서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과 더불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결코 우리의 일방적 무책임한 청원이 아니라 우리의 적극적 협력을 통해 완성되는 주님의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와 각오로 바쳐야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실존 상황을 거울처럼 환히 비춰주는 성서의 요약과 같은 주님의 기도요, 주님을 날로 닮아가면서 참나를,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기도>가 현실화 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시편 8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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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회개, 동정심 없는 나부터>
오늘 요나는 화를 냅니다. 첫째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니 화를 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자기 말대로 회개하였는데도 화를 내고, 그것도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화를 내니 말입니다.
간댕이가 부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화낼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압니다. 니네베의 회개가 자기가 원한 것이었으면 화내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오히려 기뻐했을 겁니다.
니네베의 회개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지 요나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요나는 니네베가 회개치 않아 천벌 곧 하느님의 벌을 받길 원했지요.
참 무섭습니다. 미워하면 그가 회개하길 원하지 않고 천벌을 받길 원합니다. 미워하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지옥 가게 되길 원하지요.
그러므로 누구의 회개를 원한다면 나는 그를 참으로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사실 누가 잘못하면 저는 그를 미워하고 분노하기만 했지 그가 회개하길 바라며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영혼을 불쌍하게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쌍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뿐이지 오늘 요나서의 주님 같으려면, 다시 말해서 미움이나 분노의 불순물이 전혀 없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그런 완전한 사랑의 동정심이 있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을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데 이런 주님께 대해 요나는 이렇게 불평하고 화를 냅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그러우시고 분노에 더디신 것이 자기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라면 고맙겠는데 니네베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은 불만이고, 그래서 이런 하느님 자비에 대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회개해야 할 것은 요나와 저입니다. 동정심 없는 곧 무정한 저를 회개해야 하고, 내게 그늘을 주던 아주까리 잎 때문에 행복하고, 그것이 말라 죽으니 화나고 행복하지 않은 저를 회개해야 합니다.
나만 용서받고, 나만 구원받고, 동정심 없이 나만 행복하려는 내가 같이 용서받고 같이 행복한 내가 되기로 결심하며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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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하느님의 모습이요 본질인 자비(자애)!>
오늘 복음(루카 11,1-4)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2-4)
오늘 복음과 독서를 묵상하면서, '참으로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납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애를 묵상하게 합니다.
기도할 줄도 모르는 제자들에게 유일하고도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자애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요나 4,1-11)는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신 모습을 보고, 언짢아 하며 화를 내는 요나에게 '하느님의 자애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자비(자애)'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인간을 향해 드러나 있는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죽지 않고 살아가는 본질이며,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난 완전한 사랑, 극진한 사랑 앞에서, 내가 어떻게 바리사이처럼 기도할 수 있을까? '세리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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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 1)
물들어가는
단풍도
물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어제 오늘
계속하여
비가 옵니다.
기도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며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기도하는 삶이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됩니다.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겸허한 자세로
배우게 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도
기도하셨음을
보게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만납니다.
주님의 기도로
의식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란
기도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처럼
기도의 생활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기도로
살아갈 힘을
얻는 기도의
자녀들입니다.
기도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먹고 자라납니다.
마음은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믿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어린 마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나하나
이 모든 것이
기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삶과 죽음도
기도이며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진심어린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이렇듯
아름다운 것은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모여
꽃이 되고
열매가 됩니다.
영혼의 밑거름이
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기도로 실천하는
우리들이 됩니다.
기도의 주인공이
되게하십니다.
가장 좋은
기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기도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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