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 년 만에 처음 듣는 아내의 사과
강철수
김장하지 않는 지가 꽤 오래되었다. 아내가 칠십 줄에 들어서면서 손을 놓았으니 어언 십수 년이 흘렀다. 하지만 김치 걱정을 한 적은 없다. 시골 인척이 김치를 보내왔고, 며느리들이 ‘어머님께 배운 대로 했어요.’라며 들이미는 걸로 충분했다. 그 패턴이 무너진 건 아마 이삼 년 전쯤일 것이다. 시골 인척은 나이 들어 손을 뗀 모양이고, 며느리들도 회갑 나이가 되면서 김치를 담그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김장김치는 계속 먹을 수 있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어디서든 우리 부부가 먹을 만큼의 김치가 들어오곤 했다. 한데, 올해는 생각지도 않게 김치가 너무 많이 들어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뜬금없이 아내의 성당 대녀(代女)들이 김치를 두 통씩이나 보내온 데다, 올봄에 세례받은 옆집 마리아씨가 또 묵직한 김치통을 들이밀었으니 말이다. 사실 노령인 우리 부부가 먹는 김치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잦은 외식에다 둘째네가 철 맞춰 갖고 오는 겉절이, 깍두기, 오이소박이 등을 먹다 보면 김장김치는 쉬 줄어들지 않았다.
너무 많은 김치를 어쩌면 좋을까. 미적거리다가 때를 놓치면 시어빠져 못 쓰게 될 터, 그러기 전에 얼른 누구에게든 나눠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주말에 셋째네가 왔다. 김치 얘기를 꺼냈더니 마트에서 사다 먹는다고 했다. 대녀들이 보내준 김치통 하나를 꺼냈다. 며느리가 맛을 보더니 만면희색이었다. 기막히게 맛이 좋은 모양이었다. 가져다 먹으라고 했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다음 주에는 막내네가 왔다. 이번에는 마리아씨의 김치통을 꺼냈다. 그걸 받아 든 며느리가 이게 웬 떡이냐는 표정으로 자기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아내의 입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마리아가 나 먹으라고 갖고 온 걸 왜 당신이 마음대로 해?”
붉으락푸르락 성이 난 아내가 나를 향해 내지르는 소리에 무안해진 며느리가 김치통을 얼른 냉장고에 도로 넣었다. 무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창피했다. 아들과 며느리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이냐 싶었다.
내게 부엌살림을 통째로 맡긴 지 삼년 하고도 육 개월, 새까맣게 냄비를 태워 먹어도, 쨍그랑쨍그랑 연거푸 접시를 깨뜨려도 못 본 척하지 않았나. 식기세척기 물이 새고 세탁기 탈수기능에 문제가 있어 끌탕을 할 때도 오불관언이지 않았는가. 이제 와 새삼스레 김치 갖고 발끈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혹여 내게 넘긴 부엌 권력(?)을 되찾고 싶은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자신의 건강 상태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 뭣 때문에? 김치를 주되 당신 손으로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 그렇다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아내가 직접 김치통을 건넬 수 있게 했어야 옳았다.
근년 들어 아내와 나 사이는 춘삼월 봄이었다. 노후에 찾아온 평화, 오순도순 서로를 안아 들이는 삶이었다. 내가 사려 깊지 못해서 봄날 같은 우리 삶에 흠결이 날지도 모른다 싶어 몸이 달았다. 결자해지, 원인 제공자인 내가 매듭을 풀어야 하는데 방법을 몰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튿날인 월요일, 평화방송의 아침 미사를 보기 위해 아내와 나란히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미사를 들여왔다. ‘삼종경’으로 시작한 미사가 삼십여 분이 지나면서 서서히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평화를 빕니다,”
먼저 화면 속의 사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다음 아내에게 인사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순간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아내의 젖은 목소리, 나를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육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처음 듣는 아내의 사과였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내 손을 잡고 흑흑거리기만 했다. 따사로운 봄날은 하루 만에 원상회복되었다. 얼마 후 마리아씨의 김치통은 아내 손에 들려 막내며느리에게로 건네졌다.
첫댓글 따사로운 봄날은 하루 만에 원상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