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권부를 장악한 세력이 구정권을 격하하는 것은 오랜 관습이다. 궁예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왕건부터 왕 씨들을 대신해 왕위에 오른 이성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정부를 모두 실패자로 규정한 김대중 정부까지 그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재밌는 사실은 때로 이런 정책적 격하는 스스로에 대한 반증을 내포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광해군을 연산군보다도 못한 인물로 매도한 인조반정 주체세력이 보여주듯 지나친 비하는 지난 정권의 공적이 만만치 않았음을 암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제일의 폭군으로 기록된 진시황제의 경우는 어떨까. 그는 불로초 탐색이라는 희극의 주인공이자 분서갱유를 자행한 난군, 아방궁으로 대표되는 무리한 토목공사로 제국의 수명을 단축시킨 암군으로 알려져있다. 자신의 생부 여불위마저 숙청한 극악무도한 인물이라는 사실까지 덧붙여 생각해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결점으로 가득 찬 인간이 어떻게 춘추전국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오늘 날 중국의 원형이 되는 중앙집권적 통일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냐는 것이다.
일본어로도 출간된 '진시황제'의 저자 김성한 씨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 의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진나라의 뒤를 잇는 통일제국 한을 세운 유방은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 황제가 된 이후에도 백성들 앞에 권위가 서지 않았다. 백성들은 여전히 신왕조의 시조인 자신보다 시황제를 더 추앙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한나라의 권력자들은 혁명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고히하기 위해 구체제의 상징이던 시황제를 매도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유가가 중국인이 추구해야할 이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법가를 지향하던 시황제의 명예는 확인사살 되고말았다. 저자는 이러한 전제하에 만신창이가 된 진시황제의 원형을 복원하려 노력한다.
복원의 시작점은 시황제의 생부라는 설이 있는 여불위부터다. 권세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왕자에게 바치고, 그 아이(곧 시황제)를 왕손인 것 마냥 속여 왕위에 올리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알려진 그는, 고대 중국 통일의 주역으로 재조명된다. 소설 내의 여불위는 전국을 돌며 장사를 하는 동안 천하통일이라는 이상을 품게 되고, 금력을 이용해 진나라 왕손 영자초를 왕으로 만든 뒤 권력을 손에 넣는다. 자신의 첩인 주희(시황제의 어머니)를 요구하는 영자초에게 순응한 것은 권력자에 대한 아부가 아닌 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린 고통스런 결단으로 묘사되며 시황제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것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소문으로 그려진다. 진시황제가 13세에 즉위해 성년식을 치룰 때까지 여불위가 재상으로 지내며 확충한 국고와 길러낸 인재는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출생에 대한 의혹을 떨치고 진왕조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확보한 진시황제는 소설의 중반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다. '(시황제는) 어려운 때에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잘될 때에는 태도를 표변하여 마구 짓밟아 버리는 인간이었다'라는 사기의 기록은 자신의 결단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솔직히 인정하고 신하들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아는 대범함으로 재해석된다. 불로초 탐색은 장수에 대한 혼군의 병적인 집착이 불러온 희극이 아닌 통일 제국의 지도자가 천하만민의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추진한 야심찬 사업으로, 분서갱유는 법치와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진시황제와 유가의 이상론을 부르짖는 유학자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차이가 불러온 비극으로 그려진다. 비록 통일을 이룬 뒤 확실한 목표의 부재와 절대 권력의 획득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여전히 공이 많은 인물이 시황제라는 게 작가의 평이다.
이러한 통념 파괴 속에서도 이 책은 역사소설로서의 재미를 잃지 않는다. 그 원인은 우선 절묘한 호흡조절이다. 서점에 나와있는 역사소설을 보면 한 인물이나 사건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한 나머지 독자를 지치게 만드는 책들이 여럿이다. 이 '진시황제'의 경우 시황제의 아버지인 영자초와 여불위의 만남부터 진나라가 멸망하고 시황제의 무덤이 약탈당하는 순간까지 10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절묘한 완급 조절로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으니 노작가의 역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불필요한 설명을 생략한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만들어내는 빠른 사건 전개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분의 눈을 잡아둘 것이다.
둘째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 묘사다. 국어사전만한 책 여러 권으로 이루어져있으면서도 주변 인물은 커녕 주인공의 개성마저도 제대로 못 살리는 소설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책의 장점은 확연히 들어난다. 누구의 키는 몇이며 머리색은 뭐더라는 식의 장황함과는 거리가 먼 간결한 문장이 표현해내는 고집 센 절대군주 소양왕과 우직한 군인 백기, 냉철한 지식인 이사와 정치와는 거리가 먼 학자 한비자, 속물 노애와 세상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찬 환관 조고, 비장한 각오로 시황제 암살을 위해 떠나는 형가 등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소설을 다 읽은 뒤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진시황제에 대한 통념 파괴라는 그늘 아래 가려져있는 이 소설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법치의 중요성이다. 능률적인 행정체계와 공명정대한 법률집행을 바탕으로 힘을 길러온 진나라는 이를 계승한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영광의 정점에 이르지만 시황제 사후 환관 조고가 권력을 장악한 뒤 법을 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2차대전에서의 패전 후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을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집필하기 시작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역사소설가는 사서 속 인물의 생애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는 한다. '지도자가 대중에 영합, 불법을 눈 감아 주면 머지않아 세상은 무법 천지가 된다'는 구절이 담긴 이 소설이 김대중 정부 시절 출간됐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왕조 시대에 역사를 쓰는 것은 승자에게만 부여된 특권이었다. 이긴 자가 일방적으로 편찬한 사서 속에서 패자는 진실에 대한 은폐나 조작 혹은 과장을 통해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격하되고는 했다. 진시황제는 일생 동안 승자의 자리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는 그 어떤 패자보다도 가혹한 비난을 면하지 못했으니 한고조 측과 유학자들이 실시한 정책적 매도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쓰인 이 역사책 아닌 역사책의 가치가 돋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