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비밀의 봉인은 고해 사제의 의로움으로부터
사제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자비 고해 비밀 지키는 것으로 완성
죄 덮어주고 완전히 잊음으로써 사제의 의로움도 실현될 수 있어
시몬 체허비즈 ‘성 요한 네포무크의 순교’. 고해 사제의 의로움은 자신이 들은 고해를 절대 발설하지 않고 덮어주려는 노력에서 실현된다.
체코 프라하의 가장 유명한 명물 중 하나는 ‘카를교’라는 다리일 것입니다. 카를교 한 편에 어떤 사제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장면의 청동 부조물이 있습니다. 사제 부조물을 하도 만져서 다른 부분은 어두운데 그 부분만 금색으로 더 밝게 빛납니다. 이렇게 부조상의 한 사제의 모습을 닳도록 만지는 이유는, 그것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입니다.
그 부조에 새겨진 신부의 이름은 ‘성 요한 네포무크’입니다. 1393년 당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왕비는 왕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어떤 장군과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곧 죄를 뉘우치고 자신의 고해 신부인 네포무크에게 죄를 고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왕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왕비의 시녀가 왕에게 모든 것을 일러바쳤던 것입니다. 왕비의 비밀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비가 네포무크 사제를 찾아와 고해성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네포무크에게 고해 내용을 밝히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네포무크는 고해성사 비밀을 끝까지 지켜야 했습니다.
왕은 네포무크 사제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합니다. 그래도 끝내 입을 열지 않자, 두 손을 뒤로 결박하고 몸을 구부려 발을 머리에 잡아매어 카를교 다리 위로 싣고 가서 강물에 던져버립니다. 이로써 네포무크는 고해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순교자이자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카를교 난간에 십자가 표식을 새겨 넣었고, 1683년 그 자리에 네포무크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 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네포무크 동상 앞에서 소원을 빈 사람들의 소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네포무크는 다리에서 떨어질 당시 “내 마지막 소원을 이 다리에 바치노니 이 다리에 선 자는 모두 소원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고해성사의 집전자는 그리스도의 뜻과 사랑에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1466) 그래서 “신자가 합리적으로 이 성사를 요청할 때마다 언제나 기꺼이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1464) “사제는 죄인에 대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도구입니다.”(1465)
고해 사제를 통한 하느님의 자비는 고해 비밀을 잊어주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따라서 “고백을 듣는 모든 사제는 고백자에게서 들은 죄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킬 의무가”(1467) 있습니다. 또한 “고해를 통하여 고백자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인용해서도 안 됩니다.”(1467) 누가 그러한 고해를 했는지 다른 신자들이 알게 하는 어떠한 말과 행동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도 고해성사의 비밀이 조금씩 노출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암묵적으로 만약 우리가 죽어서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용서는 해 주셨지만, 모든 천사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그 죄를 굳이 밝히신다면 우리는 무척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용서라고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자비에 완전히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완전한 용서는 완전히 잊는 것입니다. “사제는 죄인에 대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도구”(1465)여야 하는데, 성사로 봉인된 고해 비밀을 지키는 것은 이 표징의 완성이 됩니다.
사제 또한 그렇게 죄를 덮어주고 잊어줌으로써 자신의 ‘의로움’도 지키게 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함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잠든 아버지의 모습을 형제들에게 말해 아버지의 잘못을 덮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방주를 만들지 않고 자신을 태워주지 않았다면 자기는 지금 죽은 목숨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잘못을 들추어냈으니 이는 의로운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이렇듯 누구도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덮어주지 않았다면 우리 누구도 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해 사제의 의로움도 자신이 들은 고해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절대 발설하지 않고 덮어주려는 노력에서 실현됩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