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장미희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나, 내 이름 부르시던 목소리, 지금도 내 귓가에 울리는데 아무도 기억 못하나 보다. 사진 속 우리 바라보니, 그때는 아주 평범했구나! 생각만 해도 내 맘 이렇게 아픈데, 아무도 기억 못하나 보다.” 이 노래는 B1A4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 중 산들이라는 가수가 어릴 적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라며 작은 딸이 폰에 저장해 주었다. 지난 겨울 차안에서 이 노래를 들으니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자꾸만 떠올랐다. 노래 가사가 따뜻한 온기가 되어 싸늘한 차안을 외할머니와의 추억으로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어린 시절 외갓집과 우리 집은 같은 동네에 거주했고 마을의 제일 위쪽에서 서로 30m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았다. 나는 다른 지역에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갓집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들었다. 부모님은 친할아버지와 함께 사셨는데 친할아버지는 큰아버지께 대부분의 재산을 주셨고 부모님이 분가해서 나오실 때는 거의 다 쓰러져가는 집을 사 주셔서 화가 나신 아버지께서 그 집을 팔고 외갓집 동네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친정엄마는 2남4녀의 어깨가 무거운 가난한 집 장녀이셨고, 외할머니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3남1녀의 우리들을 늘 챙겨 주셨다.
고향 하동의 봄은 매화꽃으로 시작해 야생녹차를 수확하며 절정을 맞았다. 아이들은 바구니를 들고 산으로 진달래꽃을 따기에 바빴다. 어른들이 술을 담근다고 진달래꽃을 따오면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진달래꽃을 한 아름 꺾어다가 교탁이랑 선생님 책상에 놓아두면 선생님께서 무척 좋아하셨다. 5월 중순경이 되면 우리 집 앞마당과 뒷마당에는 물앵두가 빨갛게 익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앵두나무에 올라가 조롱조롱 이슬 맞은 새콤달콤한 앵두를 따 먹었다. 빨갛게 잘 익은 앵두를 입안에 가득 넣고 오물거리다가 씨를 뱉어냈다. 오빠와 누가 씨를 멀리 뱉는지 내기도 했다. 아침은 앵두로 배불리고 잘 익은 앵두나무 가지를 몇 개 꺾어서 선생님께 드리면 교무실에서는 물앵두 이야기로 웃음이 가득했다.
더운 여름, 학교 갔다 집으로 가는 길은 그늘이 없어 무척이나 더웠다. 비포장 길을 한 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하면 온 몸이 먼지를 뒤집어썼고, 땀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집에는 선풍기 한 대도 없어서 가방을 던져놓고 바위와 나무그늘이 함께 있는 외갓집 근처로 뛰어가면 외할머니께서 부채로 시원하게 부쳐주시고,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복주머니에서 꼬깃꼬깃 돈을 꺼내셔서 하드(얼음과자)를 사오라고 하셨다. 꼭대기 집에서 점방(가게)까지 뛰어 갔다 오면 팥이 들어간 하드는 녹아서 흘러내렸다. 우리 형제는 네 명인데 얼음과자는 두 개뿐이라 항상 아쉬웠다. 뜨겁게 성을 내던 여름이 조금씩 물러가면 태풍이랑 친구가 폭우와 손잡고 어김없이 두세 번은 찾아왔다. 태풍은 밤사이 창호지로 바른 문을 두드리며 심하게 흔들어댔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마루는 흠뻑 젖어있고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이 밤사이 있었던 일들을 보여 주었다. 축담으로 내려서면 검정고무신, 하얀 고무신 모두 물이 고여 있고, 마루아래에서 밤새 태풍을 견딘 흰둥이와 노랑이가 낑낑거리며 나에게 몸을 비벼댔다. 이맘때가 되면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와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외할머니의 치마폭에는 태풍에 떨어진 자두와 복숭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산과 들이 단풍으로 물들었을 때는 돌배와 단감을 담아 오셨고, 고드름이 조랑조랑 열린 겨울 처마 밑 가마솥에는 빼때기와 팥을 넣고 달달하게 끓인 고구마 빼때기 죽이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이렇게 우리를 아껴주시고 챙겨주시던 인정 많은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돌아가셨다. 늘 여러 가지 걱정을 안고 사셨던 외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계속 아프시다며 이마에 손을 얹고 계셨다. 그리고 병원을 가신다고 한 것 같은데 살아서 돌아오시지 못했다. 어릴 적 기억에 뇌종양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가 꽃상여를 타고 떠나시던 날 나는 마루 밑에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동네 사람들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이가 너무 좋아서 외할아버지가 데려가셨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년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동네를 빙빙 돌며 방황하는 시간들을 보낸 것 같다.
요즈음은 가족형태가 핵가족이고, 부모는 대부분 맞벌이를 한다. 어린 아기들이 우윳병도 떼기 전에 어린이집으로 보내진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바라지만 부모는 늘 일 때문에 바쁘기만 하다. 정서적인 안정을 찾지 못한 아이들은 청소년 문제를 일으키고, 그것은 곧 우리의 사회문제와 연결된다. 중고등학교 상담교사인 지인들의 말을 들으면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 아이는 없다’고 한다. 모든 문제는 부모에게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만약 조부모가 함께 생활을 한다면 부모의 빈자리가 채워질 수도 있겠지만 각자 살기 바쁜 현대사회에서는 어려운 현실이다
나는 두통을 자주 앓는다. 걱정 많고 소심한 성격의 작은 그릇인데 나에게 주어진 세 아이의 엄마, 아내, 장남 며느리, 외동딸의 무게가 내게 버거운 짐들이기 때문이리라. 고등학교를 들어가며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며 사는 게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삶이 힘들 때면 외할머니의 인정이 넘치는 사랑이 그리웠다. 3월, 올해도 어김없이 섬진강변과 지리산 자락에는 매화꽃이 소식을 전해왔다. 외할머니 산소에도 매화꽃이 하얀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